永芬公派(영분공파) 派祖(파조)인 金鳴鍾(김명종)은 敬順王(경순왕)이
나라를 빼앗긴 後(후) 高麗(고려)에서 慶州君(경주군)에 封(봉)해졌으며,그의 8世孫(
세손)金義珍(김의진)은 儒學(유학)의 宗主(종주)로 平章事(평장사)를
歷任(역임)했고, 12世孫(세손) 金仁鏡(김인경)은 文武(문무)를 兼備(겸비)한 高麗(고려)의 名臣(명신)으로 中書侍郞平章事(중서시랑평장사)에
올라 詩(시)와 글씨로 名聲(명성)을 떨쳤다. 金鳴鍾(김명종)의 6世孫(세손) 金禮謙(김예겸)이 高麗(고려)때
三韓壁上功臣(삼한벽상공신)으로 內中令(내중령)을 지냈고, 金禮謙(김예겸)의 孫子(손자) 金義珍(김의진)은 高麗(고려)私學(사학)
12公徒(공도)의 하나인 良愼公徒(양
신공도)를 育成(육성)하였으며 文宗(문종) 때에는 參知政事(참지정사)로
知貢擧(지공거)를 兼(겸)하여 人才登用(인재등용)에 貢獻(공헌)하고 平章事(평장사)를 歷任(역임)했다. 金義珍(김의진)의 曾孫子(증손자) 金永固(김영고)는 武臣(무신)의
亂(란)을 일으킨 鄭仲夫(정중부)와 李義方(이의방)을 除去(제거)하려 했던 人物(인물)이며
金永固(김영고)의 아들 金仁鏡(김인경)은 文武(문무)를 兼(겸)한
名臣(명신)으로 高宗(고종) 때 趙沖(조충)과 함께 江東城(강동성)에서 契丹軍(거란군) 平征(평정)에 功(공)을 세우고 벼슬이
中書侍郞平章事(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詩文(시문)과 隸書(예서)로 名望(명망)이 높았다.
大安君派(대안군파)派祖(파조)인 金殷說(김은열)은 工部侍郞(공부시랑)을
거쳐 大安君(대안군)에 封君(봉군)되고 그의 後孫(후손)들이 여러 本貫(본관)으로 分貫(분관)되었다. 金殷說(김은열)의 8世孫(세손) 金鳳毛(김봉모)는 外國語(외국어)에
能(능)하여 使臣(사신)이 오면 館伴使[관반사 : 外國 使臣을 接待(접대)하기 爲(위)하여 臨時(임시)로 任命(임명)한 正3品(정3품)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 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金鳳毛(김봉모)의 아들 金台瑞(김태서)는 高宗(고종) 때
翰林學士(한림학사)를 거쳐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고, 特(특)히 그의 아들 金若先(김약선 : 工部侍郞), 金起孫(김기손 :
平章事),金慶孫(김경손 :樞密院 副事) 3兄弟(형제)가 有名(유명)했다.
版圖判書公派(판도판서공파) 派祖(파조) 金將有(김장유)는
高麗末(고려말)에 政局(정국)이 混亂(혼란)하자 忠淸道(충청도) 報恩(보은)땅에 隱遯(은둔)하여 그곳에서 一生(일생)을
마쳤다. 金將有(김장유)의
後孫(후손)에서는 正郞(정랑)金孝貞(김효정)의 아들인 朝鮮(조선) 中宗(중종)때의 名臣(명신) 金淨(김정)이 뛰어났다.그는 趙光祖(조광조)와
더불어 中宗(중종) 때에 至治主義(지치주의)의 實現(실현)을 爲(위)하여 革新政治(혁신정치)를 試圖(시도)하다가 己卯士禍(기묘사화)가 일어나
서른 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世上(세상)을 떠났다. 그에 對(대)한 逸話(일화)가 "黨籍譜(당적보)"에 다음과 같이 傳(전)한다. 그가 增廣文科(증광문과)에
壯元(장원)으로 及第(급제)하고 正言(정언)等(등)을 거쳐 淳昌郡守(순창군수)로나가 있을때
그의 옛 글벗인 承政院承旨(승정원 승지) 李沆(이항)이
請託便紙(청탁편지)를 부쳐왔다.그 便紙(편지)는 職銜(직함)을 갖추어 쓰고 圖章(도장)을 찍었으며 友情(우정)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서 下命(하명)하는 듯한 글투였다. 이에 金淨(김정)은 拒絶(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詩(시)를 써
넣었다."書堂(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玉堂(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南(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病(병)든 이 한 몸이라 天上(천상)에서 華麗(화려)한
職銜(직함)인
丞旨(승지) 李氏(이씨)여 便紙(편지) 쓸 즈음에 옛 벗 生覺(생각)을
했했는가.
"이 詩(시)에 怏心(앙심)을 품은 李沆(이항)은 後(후)에
己卯士禍(기묘사화)가 일어나자 金淨(김정)의 罪(죄)를 追論(추론)하는데 앞장섰다. 그外(외)에도 그가 濟州島(제주도)로 歸養(귀양)가다가
海南(해남)바닷가 老松(노송)아래서 懷抱(회포)를 달래며 소나무껍질을 벗기고 적은 詩(시)가 傳(전)하며,36歲(세)로 賜藥(사약)을 받을 때
남긴 絶命詞(절명사)가 有名(유명)하다.
太師公派(태사공파) 派祖(파조) 金仁琯(김인관)은
高麗(고려)睿宗(예종) 때 朝散大夫(조산대부)로 衛尉寺卿(위위시경)을 지내고
檢校太子太師(검교태자태사
)에
올랐다. 金仁琯(김인관)의
9世孫(세손)金自粹(김자수)는 高麗(고려) 恭愍王(공민왕)때
文科(문과)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여 벼슬이 刑曹判書(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高麗(고려)가 亡(망)하자 亡國(망국)의 恨(한)을 안고 安東(안동)에 隱遁(은둔)하였다. 그가 賜死(사사)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金世弼(김세필)이
己卯士禍(기묘사화
)때
獄中(옥중)에서 입던 피묻은 옷을 가지고 나와서 痛哭(통곡)하며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禍(화)를 當(당)하여도 오히려 위에 聖君(성군)이
계셨기 때문에 多幸(다행)히 살게 되었지만, 只今(지금) 임금께서는 나이가 겨우 十餘(십여
)살이고 奸臣(간신)들이 꼭 너를
죽이려 하니, 네가 어찌 죽음을 免(면)할 것이냐"하였다. 한편 金自粹(김자수)의 9世孫(세손) 金弘翼(김홍익)은
丙子胡亂(병자호란) 때 義兵(의병)을 일으켜 戰爭(전쟁)에서 殉節(순절)하였고, 아우 金弘郁(김홍욱)은 孝宗(효종) 때 黃海道觀察使(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앞서 仁祖(인조)때
賜死(사사)된 閔嬉嬪(민희빈)姜氏(강씨)와 其女(그녀)의 어린아들의
抑鬱(억울
)함을 上疏(상소)하다가 孝宗(효종)의 노여움을 사
親鞠(친국)中(중)에 杖死(장사) 되었다. 金弘郁(김홍욱)의 孫子(손자)金興慶(김흥경)은 英祖(영조)때의
相臣(상신)이었고, 金興慶(김흥경)의 아들 金漢藎(김한신)은 英祖(영조)때의 駙馬[부마 : 英祖(영조)의 딸 和順翁主(화순옹주)와
婚姻(혼인)]이면서도 겨우 두칸 집에 살면서 緋緞(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駕馬(가마)를 타는 法(법)도 없이
淸貧(청빈)하게 살다가 아들이 없어 兄(형)의 아들인 이주를 養子(양자)로 삼았다. 參贊(참찬)이주의 孫子(손자)인 秋史(추사) 金正喜(김정희)는
學文(학문)에 있어서 實事求是(실사구시)를 主張(주장)하였고, 書藝(서예)에서는 獨特(독특)한
秋史體(추사체)를 大成(대성)시켜 특히 隸書(예서)와 行書(행서)에
새로운 境地(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밖의
人物(인물)로는 戶長(호장) 魏英(위영)의 曾孫(증손) 金富弼(김부필), 金富佾[김부일 : 守太尉(수태위)를
歷任(역임)],金富軾(김부식),金富儀[김부의
:知樞密院事(지추밀원사)를 歷任(역임)]가
有名(유명)했다. 高麗(고려)
文宗(문종)과 毅宗代(의종대)에 걸쳐 文武(문무)를 兼(겸)한 名臣(명신)으로 有名(유명)한 金富軾(김부식)은 仁宗(인종)이 卽位(즉위)하자
王室外戚(왕싱외척)임을 憑藉(빙자)하여 權勢(권세)를 쥐고 君臣(군신)의 禮(예)의에 벗어나는 行動(행동)을 일삼던 李資謙(이자겸)의
放恣(방자)함을 衷告(충고
)하여 이를 是正(시정)하게
하였고,42年間(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業積(업적)을 많이 남겼다. 1145年(高麗 仁宗 23年) 王命(왕명)을 받들어
우리나라
最初(최초)의 正史(정사)인 "三國史記(삼국사기)" 50卷(권)을
完成(완성)하여 바치는 等(등)이름난 文章家(문장가)로 宋(송)나라에까지 名聲(명성)을
떨쳤다
大將軍派(대장군파) 派祖(파조) 金順雄(김순웅)은 高麗(고려)
初(초)에 上將軍(상장군)을 거쳐 大將軍(대장군)을 歷任(역임)하였다.
兵判公派(병판공파) 派祖(파조)金德載(김덕재)는 金殷說(김은열)의
12世孫(세손)으로 朝鮮(조선)創業(창업)에 功(공)을 세워 補佐功臣(보좌공신)에 冊錄(책록)되고 兵曹判書(병조판서)를 歷任(역임)한 後(후)
咸鏡道(함경도)定平(정평)에서 隱遁(은둔)하였다.
將仕郞公派(장사랑공파)派祖(파조) 金存一(김존일)은 金殷說(김은열)의
16世孫(세손)으로 高麗末(고려말)에 將仕郞(장사랑)에 올랐다.
이렇게 歷史(역사)를 수놓은 慶州金氏(경주김씨)는 韓末(한말)에 와서도
그 家統(가통)을 이어 훌륭한 人才(인재)가 많이 輩出(배출)되었다. 高宗(고종) 때 開城府留守(개성부 유수)를 지낸 金永爵(김영작)의 아들
金弘集(김홍집)은 韓末(한말) 外勢(외세)와 開化(개화)의 틈에서 悽慘(처참)하게 犧牲當(희생당)한
人物(인물)이다. 禮曹判書(예조판서)金鼎集(김정집)의 아들 金昌熙(김창희)는
兩館大提學(양관대제학)을 거쳐 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金喆熙(김철희)는 黃州牧使(황주 목사)로 在職中(재직중) 1885年(高宗
22年) 黃海道(황해도)兎山(토산
)에서 일어난 民亂(민란)을 鎭壓(진압)하여 承寧府從長(승녕부종장)을
지낸 金春熙(김춘희)와 自産(자산)으로 圖書館(도서관)을 設立(설립)한 金仁貞(김인정
),中國(중국) 袁世凱[원세개:中華民國(중화민국)의 初代(초대)
大統領(대통령)
]의
玉璽(옥새)를 새겼던 書藝顧問(서예고문) 金台錫(김태석), 雅樂部員養成所(아악부원양성소)를 開設(개설)한 金寧濟(김영제), 淸聲曲(청성곡)의
名手(명수) 金桂善(김계선) 等(등)과 함께 名門(명문)의 傳統(전통)을 이었으며, 金庸源(김용원)과 金道泰(김도태)는 祖國(조국)의
自由守護(자유수호)와 光復(광복)을 爲(위)하여 몸바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