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고려)恭讓王(공양왕) 때 諫官(간관)을 지낸 金畝(김무 : 始祖
南得의 아들)의 아들 4兄弟(4형제)가 뛰어났다.맏아들 金士行(김사행)은 朝鮮(조선)世宗(세종)때
礪山(여산),洪山(홍산) 等地(등지)의 府使(부사)를 歷任(역임)하고 善政(선정)을 베풀어 頌德碑(송덕비)가 세워졌으며
司僕寺正(사복시정)에
올랐고,次男(차남)
金士文(김사문)은 司憲府執義(사헌부집의)를,金士忠(김사
충)은 承旨(승지)를, 막내 金士信(김사신)은 陜川郡守(합천군수)를
지냈다.金士行(김사행)의 아들
5兄弟(형제) 中(중) 맏아들 金子肅(김자숙)은 世宗(세종
)때
學行(학행)으로 形曹參議(형조참의)에 薦擧(천거)되었으며, 金子行(김자행)의 長男(장남) 金荊生(김형생)은 成宗(성종)때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監察(감찰)을 歷任(역임)하여, 河陽郡守(하양군수)를 거쳐 兵曹參判(병조참판)에 오른 次男(차남)金莊生(김장생)과함께 이름을
떨쳤다. 1510年(中宗5年)에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한 金銖(김수)는 固城郡守(고성군수),晋州牧使(진주목사),順天府使(순천부사)等(등)을
歷任(역임)한 後(후)
正3品(정3품)堂上官職(당상관직)인 折衝將軍(절충장군)으로
兵曹參判(병조참판)에 올랐으며, 아우 金鉤(김구)는 文科(문과)에 壯元(장원)하여 河東(하동), 順天(순천), 水原(수원)等地(등지)의
府使(부사)와 兵曹參判(병조참판)을 지냈다.明宗(명종)때 濟州牧使(제주목사)로 倭寇(왜구)를 大破(대파)하여
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에 特進(특진)한 金陽村(김양촌)은 1559年(明宗14年)平安道(평안도) 兵馬節都使(병마절도사)가 되어 數次(수차)에 걸친
오랑케의 侵略(침략)을 擊退(격퇴)하다가 戰死(전사)하여 뒤에 淸白吏(청백리)에 祿選(녹선)되었다. 그리고 慶源府使(경원부사) 金世文(김세문)의
아들 文節公(문절공)金沔(김면)은 李滉(이황)의 門下(문하)에서 性理學(성리학)을 硏磨(연마)하고 많은 後進(후진)을 養成(양성)했으며, 뒤에
孝廉(효렴)으로 벼슬에 任命(임명)되었으나 모두 辭退(사퇴)하였고, 1592年(宣祖25年)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居昌(거창),高靈(고령)
等地(등지)에서 義兵(의병)을 糾合(규합),晋州牧使(진주목사)金時敏(김시민)과 함께 擊退(격퇴)시켜 그 功(공)으로 陜川郡守(합천군수)가
되었다.그外(외)人物(인물)로는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 김천장(金千章), 縣監(현감) 金忠立(김충립),同知中樞府使(동지중추부사)
金春明(김춘명),監察(감찰)金應洙(김응수)等(등)이
有名(
유명)했고,顯宗(현종)때 兎山縣監(토산현감)을 지낸 金楚重(김초중)은
御營別將(어영별장) 金子(김자), 漆谷郡守(칠곡군수)金翰周(김한주)와 함께 武臣(무신)으로 家門(가문)을
빛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