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조선시대) 57名(명)의 文科及第者(문과급제자)를
輩出(배출)하였다. 高麗(고려)때 禮部尙書(예부상서)를 지낸 鄭文(정문)을
비롯하여 朝鮮時代(조선시대)에 右參贊(우참찬)의
官職(관직)에 오른 鄭曄(정엽),右贊成(우찬성)鄭
宗榮(정종영), 漢城府左尹(한성부좌윤) 鄭基廣(정기광),
大提學(대제학) 鄭歚(정선)等(등)을 그 代表的(대표적)
人物(인물)로 꼽는다.右參贊(우참찬)
鄭華(
정화)는 1583年 別試文科(별시문과)에 丙科(병과)로
及第(급제)하여 承文院(
승문원)에 登用(등용)되고 1587年監察(감찰),
刑曺左郞(형조좌랑)을 거쳐 1593年 廣州判官(광주판관)으로서 倭軍(왜군)을 擊退(격퇴)한 功(공)으로
中
和府使(중화부사)가 되었다.
그後(후)大司諫(대사간),工曺參判等(공조참판등)을 歷任(역임)한 뒤 1617年 廢母論(폐모론)이 일어나자 自願(자원)하여
襄陽
府使(양양부사)로 나갔다가 1年만에 辭退(사퇴)하였으며
1623年 仁祖反正(인조반정)後(후)大司成(대사성)兼(겸)同知經筵(동지경연)이 되었고 大司憲(대사헌),右參贊(우참찬) 等(등)을
지냈다.
代表的(대표적)人物(인물)은
吏曺參判(이조참판)鄭蘊(정온)이다.그는 性品(성품)이 곧고 節介(절개)가 높기로 有名(유명)하여 廣海君(광해군) 6年에 江華島
(강화도)에 歸養(귀양)가있던 永昌大君(영창대군)이
죽음을 當(당)하자 그 下手人(하수인)江華府使(강화부사) 鄭沆(정항)의 處刑(처형)을
主張(주장),光海君(광해군)의 脾胃(비위)를 거슬려 10年동안이나 濟州島(제주도)에서
歸養(귀양)살이를 겪었다.歸養生活(귀양생활) 中(중)에 지은"望北斗詩(망북두시)",
"望白雲歌(망백운가)"等(등)은 그의
愛君憂國(애군우국)의 뜻을 吐露(토로)한 것이었다. 그 뒤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慶尙道觀察使(경상도관찰사), 副提學(부제학)等(등)을
歷任(역임)하고 吏曺參判(이조참판)에 이르러 丙子胡亂(병자호란)이
일어나자 金尙憲(김상헌)等(등)과 함께 斥和(척화)를 主張(주장)했으나 마침내 和議(화의)가 成立(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德裕山(덕유산)에
들어가 隱遁生活(은둔생활)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