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관혼상제

제례의식(祭禮儀式)의 변천(變遷) 과정

장안봉(微山) 2014. 12. 3. 06:06

다. 우리나라 제례의식(祭禮儀式)의 변천(變遷) 과정

 효의 대상인 부모님 및 선조님들이 돌아가신 뒤에 봉행하는 각종의 제례의식(祭禮儀式)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통(通)하는 곳이요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만남의 마당이다. 이 제례의식은 역사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적 이념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 발전되어 왔다.

 유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한국의 전통 제례는 부모님과 선조님들이 살아 계실 때에 행하던 효행의 연속적 개념으로 행해 왔다. 즉 부모님을 생전에 봉양한 것처럼 돌아가신 뒤에도 제사로써 정성을 다하여 모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의식(儀式)은 봉행을 통하여 효를 행한다는 형식적 측면 외에도 가족, 친족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측면도 매우 크다.

 제사에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 거행하는 기제사(忌祭祀), 명절날 거행하는 차례(茶禮), 먼 선조들에게 1년에 한 번 거행하는 시향(時享), 한식 때의 성묘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런 제례의식은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고려시대 이후부터 그 구체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연구서인 <기제사(忌祭祀)와 묘제(墓祭)>(김경숙 저. 역사 비평사. 조선시대 생활사2 별쇄. 2002. 9)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겠다.

 고려시대의 제사는 국교인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사찰에서 올리는 재(齋)의 형태로 행해지거나, 조상의 초상화를 절의 영당(影堂)에 보관하고 주기적으로 재를 올리는 방식으로 봉행하였다. 이때는 친족개념보다는 혈족개념이 우세하여 친족뿐 아니라 시집간 딸과 사위, 외손들도 함께 모여 제례를 모셨으며 재산도 남녀, 장 차남의 구분 없이 동등하게 분배하였다.

 조선조에서는 고려 말에 일어난 주자의 성리학을 도입하고 유교 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급 ․ 권장하였고, 모든 제례의식도 유교 형식으로 바꾸었다. 그 영향으로 조선 초에는 가묘제(家廟制-가정집의 祠堂)가 크게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숭유배불 정책의 근본적인 실현이라는 정치적 목적 아래 시행된 것으로서 고려시대의 불교 의식을 없애고 유교 의식을 크게 일으키려는 의도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성종때에는 가묘를 마련하지 않는 관직자들을 규찰(糾察)하기까지도 했으며 사족(士族)들에게도 <주자가례>의 제사 규정을 철저하게 보급해 나갔다. 여기서 <주자가례>에서 제시한 제사의 종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사시제(四時祭) : 사계절의 중간달(2,5,8,11)에 가묘(家廟)에서 고조 이      하의 조상에게 올리는 합동 제사

 2.시조제(始祖祭) : 동짓날 시조에게 올리는 제사

 3.선조제(先祖祭) : 입춘일 시조부터 고조까지에게 올리는 제사

 4.이제(禰祭) :  매년 장자가 9월에 부모에게 올리는 제사

 5.기일제(忌日祭) : 조상이 돌아가신 날 올리는 제사

 6.묘제(墓祭) : 3월 상순에 조상의 묘소에서 올리는 제사

 그런데 조선 초기의 <주자가례>에 따른 이 유교식 제사는 실제 보급과정에서 이전의 전통식과 조화를 이루는 특이한 형태로 변형되었다. 즉 기일제의 중시(重視)와 3대 봉사(奉祀), 윤회(輪回)봉사, 외손봉사 등의 제사형식이 나타난 것이다. 공자 때에는 기일제란 것이 없었는데 2천년이 지난 송나라 때 성리학자들에 의해 처음 기일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주자가례>에서 가장 중요시 했던 것은 기일제(忌日祭) 보다는 사시제(四時祭)였던 것이다.

 조선조에서는 중국과 달리 사시제보다 기일제를 중요시 했고 제수도 풍성하게 마련하였으며 사시제도 설, 한식, 단오, 추석 등의 절일제(節日祭)와 겸하거나 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전염병이 돌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면 기일제는 장소를 바꾸어 반드시 지냈지만 그 외는 대체로 생략하였다.

 기제사에서의 봉사(奉祀) 범위도 많이 변하였다. <주자가례>에서는 4대 봉사를 규정하고 있고 오늘날에도 많은 한국인들은 4대 봉사를 전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조금 다르다. 성종 때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규정된 원칙은 차등봉사(差等奉祀)이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의 봉사조(奉祀條)를 보면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서인(庶人)은 부모만을 제사하도록 되어 있다. 이 차등봉사는 중국의 <예기>(禮記)에서 그 근거를 찾은 것이다. 그 후 4대 봉사는 16세기 중반, 이황의 문인들(金富弼, 柳雲龍, 金誠一)이 ‘중국 송나라 유학자들이 4대 봉사를 허용한 예’를 들어 크게 강조하고 본격적으로 실시하면서부터 관직 고하에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넓게 확장되어 나갔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제사에서 특이한 것은 윤회봉사(輪回奉祀)로 장자, 차자, 딸 등이 서로 돌아가면서 한 차례씩 제사 지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재산 상속도 장자, 차자, 딸 구분 없이 균분상속 되었다. 또한 외손봉사도 성행하였는데 율곡이 외가인 신씨의 제사를 받들었다는 것은 당시 윤회봉사가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17, 18세기인 숙종조 이후 영 ․ 정조 시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때엔 성리학의 질서가 정착되고 부계(父系) 중심의 종법(宗法) 질서가 확고해졌으며 혼인 풍습도 처가살이보단 시집살이가 보편화되었고, 모든 것이 남성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또한 양자 입양, 족계(族稧) 결성, 종산(宗山) 형성, 유교식 제사방식 등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전수되어 온 전통 제례 문화의 원형이 바로 이때 갖추어졌다. 4대봉사가 일반화 되고 부계 중심의 가족질서가 자리 잡으면서 장자 중심의 기제사가 일반화 되었고 딸들의 봉제사는 서서히 배제되면서 재산 상속도 아들 중심으로 차별화 되었다.

 묘제(墓祭)는 <주자가례>에서 별로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크게 중시하였다. <주자가례>에서는 삼월 상순에 택일하여 기제사로 모시는 조상과 먼 조상 모두에게 1년에 한 번 묘제를 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기제사를 모시는 조상에 대해서만 설, 한식, 단오, 추석 등 한 해에 4차례 묘제를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대수(代數)가 다하여 기제사를 지내지 않는 먼 조상에 대해서는 1년에 한 번 묘에서 세일제(歲一祭)를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위의 효와 관련한 제례의식은 많이 변화하였다. 전통 제례의 대표인 기제사(忌祭祀)와 시제(時祭-종전의 歲一祭) 봉행은 전통 방식 그대로의 실시가 매우 어려워졌다. 광복 이후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도시의 산업사회로의 급격한 변화를 맞으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즉, 기제사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 자시(子時, 밤 11시-1시)에 모시던 것으로부터 돌아가신 날 초저녁으로, 4대(고조부모)봉사에서 2대(조부모) 봉사로, 격식에 따른 많은 제수 진설에서 간소한 음식으로, 또 부분적으로는 고인께서 좋아했거나 현대인도 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복잡한 의식절차에서 간략한 방법 등으로 점차 변해 가는 현상에 있다. 그리고 사시제였던 설, 한식, 단오, 추석의 묘제는 설과 추석만 차례(茶禮)의 형식으로 남았고 한식은 성묘하는 날 정도로 약화 되었으며 단오 묘제(墓祭)는 거의 없어졌다. 가을 추수 후 일정한 날을 정해 묘소에서 봉행하던 5대조 이상의 세일제도 일요일을 택해 집이나 사당에서 합제(合祭)를 올리고 성묘를 다녀오는 방식으로 많이 변화되어 가고 있다.

 

 씨족을 기초로 형성된 우리의 전통적인 사회 체계는 자연스럽게 종친끼리의 모임 단체인 종중, 또는 문중회를 조직하여 효사상과 아울러 경로효친, 숭조목족, 상부상조의 미풍양속과 제례의식 등을 잘 유지 발전시켜 오는데 크게 노력해 왔다. 또한 각 문중회에서는 이 제례의식을 성실하게 봉행하기 위하여 사당, 서원, 재실 등을 건축하고 각종의 제례규정을 만들어 이를 제도화 ․ 전통화 시켰다. 그리고 이 제례와 관련한 유․무형의 전통 유물들은 각 문중의 권위와 자존심의 표상이 되기도 했고 많은 유물들은 국가 또는 지방 문화재로 지정 되었으며, 종묘(宗廟)는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적인 자랑이요 관광 자원으로도 널리 활용 되며 문화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있기도 하다.

  고려시대 이후 최근까지 나타난 우리의 제례의식 관련 문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려시대

  1)<상정고금예문(祥定古今禮文)> : 고려 고종 21년(1234년). 금속활자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간행되기 약 100년 전인 인종때에 최윤의 등 17명이 왕명에 따라 고금의 예절을 수집해 집대성한 것. 오늘날 부전되고 있음.    2)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 : 상정고금예문(祥定古今禮文)을 기초로 만든 것. 이 예지는 오례(五禮)로 이루어 진 것으로 조선조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대본이 됨.


2. 고려 말-조선 후기

  1)<주자가례>의 전파.

  2)<제례규정(祭禮規定)> : 1390년(고려 공양왕2) 포은 정몽주선생이 지어 임금에게 바친 규정이다

  3)<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 권근(權近.1352-1409) 저. <주자가례>를 주축으로 하면서 거기에 누락된 변례(變禮)를 논증한 26권 11책.

  4)<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1474(조선 성종5)에 신숙주 등이 왕명으로 국가의전을 완성한 것. 가정의례에 대한 것도 별도로 정했다.

  5)<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 정구(鄭逑.1543-1620) 저. 중국    송대의 학자 정호, 정이, 사마광, 장재, 주희 등의 예설을 분류 편찬한 것.  20권 7책.

  6)<격몽요결(擊蒙要訣)> : 1577년(선조10)에 율곡 이이선생이 지은 아동용 道學 入門書로서 그 말미에 제의초(祭儀鈔)를 붙였다.

  7)<전례문답(典禮問答) 2권>, <가례집람(家禮輯覽) 8권>(예학 이론서), <상례비요(喪禮備要) 5권>(신의경의 초본을 교정 증보하여 완성한 우리나라 민간 예서의 효시본),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 : 김장생(1548-1631) 저술 예절서

  8)<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 : 김집(金集.1574-1656. 김장생의 아들) 저, 예절서.

  9)<가례원류(家禮源流)> : 유계(兪棨.1607-1664. 김장생의 제자) 주자가례의 근원을 밝힌 14권 11책.

  10)<사례편람(四禮便覽)> : 이재(李縡.1680-1746) 저. 이때까지의 모든 예설을 참작해 실행에 편리하도록 정리한 서적.

  11)<가례증해(家禮增解)> : 18세기 말 정조때의 학자 경호(鏡湖) 이맹종(李孟宗)이 저술한 것을 그 아들 이의조(李宜朝)가 1824년에 간행한 것이다. 우리나라 가정의례의 변례(變禮) 부분을 거의 망라해 놓은 것이다.



4. 현대 

  1)<가정의례에 관한 법률>(법률 2079호) : 1969년 1. 16. 정부에서 예절의 허례허식을 규제하기 위해 입안하여 제정한 것.

 2)<가정의례준칙(家庭儀禮準則)> : 1973년 확정된 상기 법률의 실천지침이다.

  3)<우리의 전통예절> : 1988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김득중(金得中)저.  사례편람 이후의 정통예서

  4)<우리의 생활예절> : 1992년. 성균관. 김득중 저술을 수용하여 전례연구위원회편으로 간행. 성균관 최초의 간행서. 정부에서도 이 도서를 건전가정의례의 자료 근거로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 국민예절서.

   5)<혼상제례초(婚喪祭禮抄)> : 안동김씨 대종회. 1988년 간.

   6)<가례편람(家禮便覽)> : 충북유도회. 1989년 간.

   7)<실천예절 개론> : 1997년 교문사 간. 한국전례연구원장 김득중 저. 성균관 예절교육의 기본서.

   8)<인성과 예절>비디오 : 성균관 유도회 교육원 기획. 4개(초등편, 중학생편, 고등학생 편, 대학생 및 성인 편)로 구성.

   

 *예절 연구소

   1)<한국전례연구원(韓國典禮硏究院)> : 1977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예절 연구 민간기관.

   2)<사단법인 한국 전례원(社團法人 韓國 典禮院)> : 1996년, 위의 <한국전례연구원>에서 배출된 학자들이 창립한 최초의 예절관계 공익법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