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왕희지(王羲之)-난정서(蘭亭序),

장안봉(微山) 2014. 10. 31. 14:22

 

 <느낌이 있는 여행>

 

왕희지(王羲之) 321~379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최고의 서예가(書藝家)로,
자는 일소(逸少)이고 낭야(瑯邪)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사람이다.
아버지 왕광(王曠)은 동진(東晉)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동생이 된다.
왕희지(王羲之)는 비서랑(秘書郞:(궁중의 서적을 관장하던 하급관리)을 시작으로
회계왕우(會稽王友)·임천대수(臨川大守)·강주자사(江州刺史)·호군장군(護軍將軍) 등을 역임했다.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을 얻지 못해, 351년(永和 7)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으로 부임한다.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그는 한(漢)나라 때 시작 된 해서(楷)·행서(行)·초서(草)의 실용적인 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킨 인물이다.
당(唐)나라 때 서예에 뛰어났던 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하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희지는 우리나이로 59세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고문서에 실려있는데.

아주 오래전 일이고 문서마다 활동 연대가 조금씩 달라 정확하진 않은 것 같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도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히 여겨졌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을 비롯한 한국과 일본에서 왕희지의 글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특히 서예가들에게서는 성인(聖人)으로까지 추앙 받는 인물이 왕희지(王羲之)이다.

 

(소흥의 난정못)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품격 첫머리가 서예(書藝)로,

군자(君子)의 첫걸음이 바로 서예에서 시작하여 서예에서 그 끝은 맺는다고 옛 선비들은 말했다.
오늘날에는 왕희지의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으나

난정서(蘭亭序)모본 십칠첩(十七帖)과 집왕성교서(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며,
이중에 가장 이름 높은 서첩은 당연 "난정서(蘭亭序)"로, 여기에는 353년

계제사(契祭祀)가 열리는 기간에
 41명의 문사(文士)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으로 내려온다.
행서로 씌어진 왕희지의 비문(碑文)은 독특한 서체인 행서의 본보기로 일명 행서(行書)의 교과서로 불린다.

 

(난정서 일부분, 당(唐) 풍승소 모본을 다시 신룡본이 모본한 것으로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품)


난정서(蘭亭序)는

후대 특히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명대(明代)(1368~1644)에는 그림의 주제로도 많이 채택 되 곤 했었다.
왕희지(王羲之)의 후손들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서예가는 그의 막내아들인 왕헌지(王獻之)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난정서(蘭亭序)를 중심으로만 이야기를 싣고자 하며.
왕희지(王羲之)에 관한 생애와 필법및 취향과 작품활동 그리고 사회에 끼친 영향등 개인에 관한 내용은
그 양이 방대하여 나중에 따로 지면을 할애 해 올리고자 한다.

 

(몇 년 전 절강성 소흥에 갔을때 산 부채로 난정서문이 써있다.

원본은 현재 북경 고궁박물원에 전시중이라는데.

당나라 때 쓴 모본을 다시 신룡본이 모본한 것이다.

현존하는 왕희지의 모본 중 가장 오래된 모본으로 이 모본마저도 가격을 매길 수 없다고 한다.)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동진(東晉)의 다섯 번째 임금 목제(穆帝)가 즉위한지 9년이 되던 해인 영화(永和) 9년(서기 353) 음력 3월 3일,
당시 회계내사(會稽內史)이자 우군장군(右軍將軍)이던 왕희지(王羲之)는
자신의 아들 7명을 포함한 당시 사족(士族)들과 명사(名士)등 41명의 동진(東晉)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회계현(會稽縣)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난정(蘭亭)에 초청해 대규모 연회를 연다.

이러한 연회는 배타적인 동진(東晉)시대 귀족문화의 특성상 사족(士族)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음으로
여러가지 형식을 통해 자주 열리곤 했는데
삼월 삼짓날 계사(契事)의 형식을 빌린 모임이었다.

이날의 모임은, 술잔을 물에 떠내려 보내는 동안 시(詩)를 짓지 못하면 벌주(罰酒)로 술 서(3)말을 마시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였으며,
당시 참석한 사람 중 유명 인사였던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손작(孫綽)등 26명은 시(詩)를 지었고,
나머지 15명은 시(詩)를 짓지 못해 벌주(罰酒)를 마셨다.

이날 지은 시(詩)를 모아 철(綴)을 하고,
그 서문(序文)을 왕희지(王羲之)가 썼고, 당시 참여한 인사 중 가장 문명(文名)이 높았던 손작(孫綽)이
그 집회를 마무리하는 후서(後序)를 썼다.
이중 왕희지(王羲之)가 쓴 서문(序文)이 바로 그 유명한 "난정서(蘭亭序)"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예)


당(唐)나라 때 하연지(何延之)가 기술한 "난정기(蘭亭記)"를 보면,
당시 왕희지(王羲之)는 거나하게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잠견지(蠶繭紙)에
서수필(鼠須筆)로 28행, 324자를 써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글 중 특히 갈지(之)字가 가장 많아 24자가 들어갔으나 자획에 변화가 일어 한 글자도 똑같이 쓴 글자가 없었다.
술이 깬 후 수 십 번을 다시 써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스스로도 "神의 도움을 받았다"라고 감탄 하였고,
왕희지 자신도 "난정서(蘭亭書) 서문(序文)"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난정서. 모본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도서(낙관)들이 찍혀 존귀함을 느끼게 한다. )


문헌에 내려오는 난정서(蘭亭序)의 행방에 관한 내용은 몇 가지가 내려오고 있지만,

그 중 난정서의 행방에 관하여 비교적 정통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왕희지는 난정서를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꼽았고, 집안의 가보로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주었다.
그의 7대 손인 수나라 때의 왕법극(王法極)에게까지 이어졌다.
왕법극은 불교에 흥미를 느껴 불가에 귀의하여 중이 된 후 법명을 "지영(智永)"이라고 했다.
그후 절강성 오흥현 회계산에 있는 영흔사(永欣寺)에서 승려로 30년을 살았다.

후손이 없는 지영스님은 난정서를 제자인 변재(辨才)승에게 중요성과 함께 일러주고는 입적했다.
이무렵
당 태종 이세민은 왕희지의 글을 매우 흠모하여 수집에 열을 올렸는데,
그 중 "난정서"를 특히 좋아하여 백방으로 사람을 풀어 글을 찾았다.
엄청난 돈까지 상으로 걸고 난정서 진본(眞本)을 구했으나 결국 얻지 못했다.

어느날 관리 진적으로부터 강남 회계땅에 승려로 사는 변재화상 수중에 난정서 진본이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태종은 변재를 황궁으로 불러 친히 독대하며 난정서를 넘겨달라고 간절하게 부탁을 하였으나,
변재는 짐짓 멍청한 바보처럼 행세하며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속상해 하는 황제의 심리를 잘 헤아린

상서 방현령이 결국 아이디어를 냈고, 감찰어사 소익을 변재에게 은밀히 보내 난정서를 훔쳐오게 한다.

 

(원나라 때 조맹부가 쓴 모본)

 

소익은 황제로부터 왕희지의 서첩 진본 몇 개를 싸들고 가난한 서생처럼 꾸며 그가 머무는 회계산 영흔사로 가.
변재에게 접근 친하게 지내며 서서히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날
소익이 변재와 서법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몇 건의 왕희지의 서첩을 가지고 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다"
라고 하면서 변재화상에게 감정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변재는 소익이 자기를 속이려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그에게 "그 서법들은 확실히 왕씨의 진품은 맞으나 그의 글 중에서 아주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라고 얘기하면서.
무의식중에 그가 "난정서"의 진본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그만 밝히고 만다.
소익은 못믿겠다며 난정서의 진본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라고 하자,
변재는 자기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가 난정서를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천정의 서까래속에 감춰 둔 난정서 진본을 꺼내 소익에게 보여준다.
소익은 속으론 크게 놀래면서도 걷으로 침착한 척 하며 살펴 본 후 "이것은 가짜 같다"라고 말하며 변재를 미혹시킨다.
그 일이 있은 후 소익은 변재를 더욱 가까이 하며
난정서를 비장하고 있는 서까래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 두었다.
어느날 변재가 절을 잠시 비운 사이 난정서를 훔쳐 장안으로 달아나 황제에게 바친다.
얼마 후 변재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는데,
태종의 친서로 "난정서는 짐이 가져왔다. 황실의 보물로 소중히 보관할 것이니 양해하라"는 내용이었다.

변재는 난정서를 결국 소익에게 도둑 맞은 것을 알고는 크게 화가 일어 병이 돼 몸져 누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병으로 피를 토하고 죽고 만다.

 

위 내용이 당 태종이 야비한 계교를 써서 난정서를 얻은 내용으로
문헌에 실려 내려오는 이야기다.

 

 (당대(唐代) 신룡본 모본)

 

태종은 손에 넣은 왕희지의 난정서를 평생 곁에 두고 애지중지 하였는데,
자신이 운명(殞命)할 때 난정서(蘭亭序)를 자신과 함께 순장(殉葬)할 것을 유언으로 명하니,
난정서(蘭亭序)는 당 태종 능(陵)인 소릉(昭陵)에 같이 묻혀버렸다.
이때부터 난정서(蘭亭序)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고 역사서들은 기술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는 돈으로는 도저히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하여,
무가지보(無價之寶)라 부르면서 국가적인 보물로 여기지만
정작 그 원작(原作)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전설 속 작품이 된 것이 바로 난정서(蘭亭序)이다.

원본을 베껴 쓴 유명한 임본(臨本)및 모본(摹本)만도 500여 종이 넘고,

임본(臨本)및 필사본들의 글자가 조금씩 서로 제 각각인지라
진본(眞本)의 글자가 어떠했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작품이 되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난정원)


영원히 사라지고 없은 글... 난정서(蘭亭序)

지금도 북경 고궁박물원에는 몇 종의 난정서 필사본들을 전시하고 있다.
당 풍승소 모본을 다시 신룡본이 모본한 것.

또 원나라 때 조맹부가 쓴 모본.
송나라 구양순의 임사 정무본(定武本)등이 현존하는 대표작으로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 돼 있다.
그외에도
송나라 때 인종 조정 모본.
탁본으론 수나라 개황이 쓴 모본.
청나라 강희 황제가 쓴 모본, 청나라 강판교 모본등도 마찬가지로 박물관 소장품이다. 

그 외에도 개인이 소장한 수 많은 모본들이 진본을 가장한 체 대를이어 내려오는것 또한 많을 것이라 믿는다.

 

난정(蘭亭)

 

- 주(註) -

왕희지(王羲之)가 태어나고 활동한 "동진(東晉)"이란 나라와 "소흥(紹興)"이란 도시에 대하여 

내 나름의 주석(註釋)달고자 한다.

아울러 절강성 소흥 즉 샤오싱을 대표하는 이름 난 몇가지를 덧대 소개하여 추후 방문하는 자가 혹여 있다면,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이 글을 쓰는 바이다.

따라서 중국을 대표하는 소흥의 명주(名酒)인 "황주(黃酒)"와 "회계산"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샤오싱이 고향인 소설가 "노신(魯迅)"까지 소흥을 중심으로한 짤막한 부연 설명을 달았다.

이미 아는 분들도 있고, 또 처음 접하는 분들도 분명 있으리라 믿어,

난해한 난정서 서문의 이해를 돕고자, 몇 가지 단어와 함께

 미천한 소견을 달았으니 부족한 점 널리 이해를 구하는 바이다.

 

먼저 동진(東晉)은: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에서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그의 손자 즉 조상(曹爽)대에 와서,
전휭을 참지 못한 장군 사마 의의 반란으로 멸망하는데...

그 사마 의 아들 사마 염이 위나라에 세운 나라가 "서진(西晉)"이고,

서진이 부패로 망할 무렵 강남으로 도망 간 일족 중에 사마 예가 건강(建康) (지금의 南京)에 진나라을 또 세웠다.
훗날 역사가들은 편리를 위해 수도의 위치에 따라 앞선 낙양을 수도로 했던,

 최초 왕조 진(晉)나라를 "서진(西晉)"이라 칭 하고,
후에 강남땅 옛 월나라의 수도였던 건강에 세운 왕조를 "동진(東晉)"으로 나누어 부른 것이다.

 

난정(蘭亭)


절강성 소흥(紹興): 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 왕 합려와 그 아들 부차 사이에 물고 물리는 전쟁에서 탄생한
유명한 고사 와신상담, 오월동주, 토사구팽이 탄생한 오 월국 전쟁지역으로 월나라의 수도이
기도 했다.
샤오싱(紹興)은 항저우(抗州) 남쪽에 있는 역사성 깊은 중급의 수향도시(水鄕都市)이다.
강남지역이 대부분 그렇듯 이곳 소흥도 운하가 매우 발달한 물의 도시로

옛부터 유명한 명주(名酒)인 "황주(黃酒)" 즉 샤오싱酒의 고향이다.
지금도 중국에서 알아주는 대중적 명주로는 누룩과 찰수수를 연잎을 덮어 발효한 "황주"를 최고술로 손 꼽는다.

술 색깔이 검게 보이나 사실은 진노랑색이다.

색이 짙어 검은색으로 보일 뿐 손가락으로 찍어 보면 진노랑색이 선명하다.
황주(黃酒)의 역사는 춘추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가 매우 긴 대중적인 술이며 중국인들의 애호주다.

 

(소흥은 지금도 수로가 도로역활을 하는곳이 많다.

따라서 작은 나룻배로 오고 가는 풍경을 보는 건  흔한 일상이다.)

 

난정(蘭亭)의 유래: 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이 난을 심고 기르면서 풍류를 즐긴 정자였다고 전해온다.

소흥은 중국 춘난(春蘭)의 고향으로도 불린다.

옛부터 이름 난 춘난들이 소흥에서 많이 나왔다.

중국춘란(中國春蘭)중 4대천왕(四大天王)이라 일컬어 송매, 노십원, 만자, 용자,를 꼽는다.

그 중 절반이 절강성 소흥이 원산지로 중국춘란 산지하면 절강성 소흥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한국 춘난 명산지로 영광 함평 장성을 꼽듯이,

이름 난 수 십 종의 중국 춘난 중 1/3 가량이 소흥이 원산지이다.

 

(왕희지(王羲之)일가 특히 막내아들 왕헌지(王獻之)의 일화가 깃든

태비(太碑)라고 불리는 난정(蘭亭)의 유명한 비석)

 

태비석(太碑石): 태(太)"字만 크게 달랑 써 있는 이 비석의 글씨는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의 합작품.

왕희지의 막내아들 왕헌지가 어린시절 큰대(大)자를 써가지고 아버지에게 자랑을 하러 가지고 갔더니,

아버지는 말도 없이 글자 밑에 점 하나만 달랑 찍어주곤 돌려보냈다.

이 글을 다시 어머니에게 가지고 가서 자신이 쓴 태(太)자라고 자랑을 하며 보여주자,

어머니 왈(曰)"글자 중에 잘 쓴 것은 오로지 대자 밑에 점 하나 뿐이로구나" 하고 평을 했다고 한다.

왕헌지(王獻之)는 크게 부끄러움을 느껴 더욱 서예에 매진하여 대성(大成) 했다는 일화가 내려오는 유명한 태비석(太碑石)이다.

왕희지 부인까지도 서예에 대단한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난정의 관광객들)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오늘날 절강성 "샤오싱" 즉 "소흥(紹興)"을 말한다.

계제사(契祭祀): 3월 삼짇날 물가로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액운을 막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말하며, 진(晉)시대에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연중 행사였다.

잠견지(蠶繭紙): 누에고치로 만든 종이로 지질이 좋기로 유명하며 매우 귀해 일반 서민은 구경도 어려웠다.

서수필(鼠須筆): 쥐 수염을 사용하여 만든 붓을 말한다.

작은 봇 한자루를 만들려면 큰 쥐 3백마리 이상이 필요했다고 하는데,

옛부터 붓 중에 최고의 붓으로 꼽히며

오늘날에도 서예가들이 갖고 싶어하는 꿈의 붓으로 불린다.

 하연지(何延之): 당 현종 때 문인으로 그의 작품 "난정기蘭亭記"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왕희지의 글씨를

짐작할 수 있어 왕희지 필법 연구에 참고 문헌으로 활용하는 귀한 책이다.

 

(샤오싱 난정의 유상곡수 터)


유상곡수(流觴曲水): 경주에 있는 포석정의 원류가 바로 여기 "난정"의 "유상곡수(流觴曲水)"를 패러디한 것이며.
지금도 술잔을 띄우고 詩를 지어 읊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고,

관광객을 상대로 시연회도 자주 열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샤오싱의 명소 중 한곳이다.

 

(경주의 포석정)

 

 (중국 현대문학의 대부 루쉰(魯迅))

 

소흥(紹興)이 배출한 중국 근, 현대문학의 창을 연 소설가 "루쉰(魯迅)".

소흥은 현대 중국문학의 터전으로 불리며 자부심이 큰 문학의 도시이기도 하다.
노신(魯迅)은 중국에서 육군학교 부설 노광학당을 나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8년에 걸친 일본 유학파로 동경의 독일협회학교에서 독일어를,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과 독일어를 공부했으나
귀국 후 소설가로,수필가로, 번역가로, 교사로, 대학교수로, 저항운동가로 짧은 생(56세)을

거침없이 살다 간 인물이다.

 

(노신(魯迅)은 이런 가난하고 못 배우고 소외된 계급의

매듭진 내면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풀어낸 최초의 중국 작가 였다.)


그의 작품 중 "아Q정전"(1921년에 지은 중편소설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모르고 잘난 체하는 아Q가 신해혁명 때

들뜬 기분에 날뛰다가 폭도로 잡혀 혼자 총살 당한다는 내용)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중편소설이다.
그 외에도 가난한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공을기" "광인일기" "고향"등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신해혁명"(1911년 청 왕조를 무너뜨린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쑨원이 임시 총통에 취임하여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이듬해 1월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한다.) 
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외 되고 모순 된 사화상을 그려, 당시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내용들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온 근대문학의 대부로 불리는 인물이 바로 "루쉰"이다.
상해의 홍구공원이 그의 이름을 따서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정도로 중국 현대 지식인들의
폭 넓은 존경을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루쉰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으나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하고자 한다.

 

(유상곡수는 선녀로 분장한 아가씨들이 술잔을 띄워서 관광객에게 나눠주곤 한다.)

 

다시 왕희지의 글로 돌아가

난정서에 나오는 "회계(會稽)"는 소흥 근교의 명산(名山) 지역으로,
회계산(會稽山)은 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 왕 부차에게 포로로 잡혀 상담(嘗膽)의 치욕을 겪은
월국(越國)의 한이 맺힌 산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난정서의 단어들과 소흥을 중심으로한 짧은 주석(註釋)에 가름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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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곡수 풍경)

 

蘭亭序(난정서) 序文(서문)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契事也
영화 구년 계축년 늦은 봄 초승(3월 3일)에 회계산 북쪽 난정에 모였는데 계제사를 지내기 위함이다.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峻嶺 茂林脩竹
많은 현인들과 젊은이 나이든이 등 모두가 모였다.
이곳은 높은 산과 험준한 봉우리와 무성한 숲 그리고 대숲이 있다.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또 맑은 시냇물과 여울이 정자의 좌우를 띠처럼 서로 비치며 둘러싸고 있기도 하며,
시냇물을 끌어들여 술잔을 띠울 굽이 흐르는 물골을 만들고 차례로 줄지어 둘러앉았다.

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비록 거문고나 피리같은 음악이 있는 성대한 연회는 아닐지라도 술 한잔 마시고 시 한 수 읊으며
그윽한 감정을 나누기에 흡족하도다.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 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이날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았으며 은혜로운 바람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우주의 광대함을 우러러보고 고개 숙여 만물의 무성함을 살펴 본다.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자유롭게 눈을 들어 마음 가는 대로 생각을 풀어놓으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즐거움이 참으로 흥에 겨운 일이로다.

夫人之相與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무릇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보며 한 평생을 살아감에 있어,
어떤이는 회포를 풀며 벗들과 한방에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雖趣 舍萬殊 靜躁不同
또 어떤이는 자기 내면 사상들을 끌어내어 육체 밖에서 마음대로 놀닐게 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비록 취향이 만가지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서로 같지 않으니...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得
저마다 자신의 취흥이 기쁠 때는 자기 뜻을 주장하며 스스로 득의하여

曾不知老之將至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 係之矣
장차 노년이 다가오리라는 것 조차 잊고 즐긴다.
그러다 그가 즐기는 일에 권태를 느낄 때도 있고,
감정이 옮겨가면서 변케 되기도 하느니라.

向之所欣仰之間 以爲陣迹
이전에 즐거웠던 일이 어느 짧은 순간에 낡은 과거사의 자취로 바뀌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尤不能不以之興懷 況脩短 隨化 終期於盡
특히 그런 것 때문에 감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로다.
허나 목숨이 길 건 짧 건 모두 자연의 조화를 따라 마침내는 모두가 끝에 이르게 되는 것이거늘.

古人 云死生 亦大矣 豈不痛哉
옛 사람이 말하 길 "죽고 사는 것은 매우 큰 일이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每攬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나는 옛사람들이 감회를 일으켰던 까닭을 알게 될 적 마다
마치 두 개의 부절을 하나로 맞춘 듯 내 생각과 똑같은 것을 깨닫는다.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固知一死生爲虛誕
그러니 옛 사람들의 문장을 대할 때 마다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어
마음을 달래려고 해도 쉬 달래지지 않는다.
죽고 사는 일이 서로 같은 일이라는 말은 허황된 말이다.

齊彭爲妄作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悲夫
팽조처럼 오래 사는 일과 일찍 죽는 일이 서로 같다고 하는 말 역시
함부로 지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을 볼 때도 또한 우리가 옛사람들을 보는 것과 같을 지니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순서 대로 적고 그들의 시들을 여기에 수록하였다.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도 변하겠지만 감회를 일으키게 되는 이치는 서로가 같을 것이다.
후세에 이 글을 읽는 사람도 이 문장에 대하여 감회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로다.

- 끝 -

 

 난정원(蘭亭遠)

 

천하의 왕희지 글이라지만 얼마나 그 필체가 수려했기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고 평하는 당 태종까지도,

"난정서(蘭亭序)"에 그토록 애간장을 태웠는지 궁굼하지 않을 수 없다.

 

거위를 보며 필법(筆法)을 연구했다는 왕희지...

천하명필(天下名筆)이란 말도 부족하여

신의 경지에 이른 서성(書聖)으로까지 추앙 받는 이유는, 남 모르는 엄청난 노력의 결정체는 아니었을까~?.

천 년 전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없는 글이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정신적 지주로 남아서,

천하제일국보(天下第一國寶)로 추앙 받는 난정서(蘭亭序)를

이 시간 다시금 생각해 본다!

 

출처 : 학 마 을
글쓴이 : 천마리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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