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백거이(白居易)-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장안봉(微山) 2014. 10. 31. 14:20

 

<느낌이 있는 여행>

 

 

 

양귀비(楊貴妃)와 당(唐)현종(玄宗)

장한가(長恨歌)는

 

당(唐)나라 6대 왕 현종(玄宗:AD685--762)과 양귀비의 사랑을 소재로 한 120행 840자로 된 장시(長詩)이며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을 읊은 백거이(白居易)의 대표적 서사시(敍事詩)이기도 하다.
황제가 양귀비(楊貴妃)의 교태에 넋이 나가 나랏일을 팽개치고 주독에 빠졌으니...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고 크고 작은 반란(叛亂)이 일어난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안록산(安祿山)의 난(亂)"

(절도사로 있던 안녹산(安祿山)과 그의 부하 사사명(史思明)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난 이라고 하여 "안사의 난" 이라고도 한다.)으로

현종은 궁궐로 쳐들어 오는 반란군을 피해 촉나라로 피난을 가던 중
안록산 일파에 겁을 먹은 황제의 근위병들이 양국충(楊國忠: 양귀비의 4촌오라버니,

일설에는 6촌오라버니라는 설도 있으나 틀린 말이다)을 죽이고 이어 양귀비 마저
처단할 것을 황제에게 강력히 요구하자,
현종은 어쩔 수 없이 눈물로 이를 허락하고 만다.

양귀비의 4촌오라버니 양국충(楊國忠)은 양귀비가 현종(玄宗)의 엄청난 총애를 받음에 따라

그의 후광으로 감찰어사(監察御史)및 시어사(侍御史)라는 직책으로 황제를 가까이서 보필하는 고위 관직을 얻었으며

"國忠"이라는 이름은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이름이다.

이와 더불어 15개의 주요 관직및 직책을 겸직해 그 권세가 나라 안팎을 뒤흔들었다고 문헌은 적고 있다.

아무튼
사랑하는 양귀비가 눈앞에서 근위병들에게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현종은 통한의 눈물을 쏟아낸다.
이때 현종의 나이는 71세 였고 양귀비는 38세 였다.

 

<양귀비>


원래 양귀비(楊貴妃)는 현종의 열여덟 번째 아들 수(壽)의 비(妃)였다.
그녀는 수와 5년 동안 아무 탈 없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며 살았다.
그런데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병으로 죽자.
맘에 드는 美女를 찾다가 그만 아들의 비(妃)인 양귀비가 목욕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고 선
아름다운 자태에 첫눈에 반해버렸으니... 이런 염병할~~

결국은 며느리를 빼앗아 자신의 비(妃)로 만들었고 곧바로 그녀의 두 자매까지도 비(妃)로 맞아들였다.

이때 현종의 나이는 60세 였다.

이리하여 10여 년 동안 꿈같은 몽롱한 시절을 보낸다.
한편 이무렵 양귀비는 현종을 설득해

돌궐족 출신의 젊은 장수 안록산(安祿山)을 양자로 맞아들여 아들로 삼았으나

실재로는 양귀비와 은밀한 연인사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어쨋거나 양귀비의 든든한 후광을 등에 업은 안록산은 곧바로 절도사에 임명되었고

천하에 두려울게 없는 권세와 호사를 누렸으며 20만의 병력을 이끄는 병권까지 거머쥐게 된다.

 

황제의 정치가 이 모양이니

나라 꼬라지가 어찌 되갔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 아닌겠는가~
여기 저기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고 뜻 있는 선비들의 상소문이 빗발치자,

그러잖아도 시기와 질투로 항상 눈에 가시로 여겼던 안록산은

양국충(楊國忠)을 제거 할 절호의 호기로 보고,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 잡는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을 총애하던 양귀비와 현종을 배반하고

그의 측근인 사상명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이 이른바 "안록산의 난"이다.

 안록산이 이끄는 반란군이 파죽지세로 황궁을 점령하며 밀려오자

현종은 양귀비의 고향인 산중 오지 사천땅(옛 촉나라)으로 황급히 피난을 떠난다.

 

<양귀비>

 

양귀비는 사천성(四川城) 출신으로 본명(本名)은 양옥환(楊玉環)이다.

귀비(貴妃)란 황제의 삼천명에 달했다는 많은 비(妃)중에 한명인,

개개인을 지칭하는 왕비명(王妃名)이며 양옥환의 비명(妃名)이 양귀비(楊貴妃)인 것이다.

그녀는 고관대작의 딸로 부유한 집안 출신이며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가무에도 능하며 애교와 교태가 타고났고,
살결이 백옥같이 흰 절세미인이었다고도 전한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 할까? 아니면 또 다른 매력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겨드랑이에서 야릇한 냄새가 풍겼다고 한다.
그래서 현종이 더더욱 환장을 했는지는 몰라도
다른 여러 왕비들 보다 유달리 목욕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양귀비는 요즘으로 치자면 부잣집 맏며느리감으로 여겨지던
볼륨께나 있는 약간 뚱뚱하고 풍만한 글래머형의 체형으로

당시의 미인기준으로 볼 때 따를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여러 글에서도 양귀비를 資質豊艶(풍만하고 요염하다)
라고 표현한 걸 보면

그녀의 자태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양귀비에 관해선 후대로 내려오며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사실보다 과장 된 부분이 많지않나 싶다.

 

위인(爲人)이든 미인(美人)이든 시대를 잘 타고나야 출세를 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연꽃 휘장 속에서 보낸 뜨거운 밤, 봄밤이 너무나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라는 싯구에서 보여지 듯
두 사람이 얼마나 질펀하게 사랑놀이에 정신이 팔려 놀았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으며.
현종은 양귀비가 죽고나서도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눈물로 그리워하며
6년을 더 살다가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화청지의 양귀비 석상>

 

백거이(白居易)는 자기가 몸 담은 당(唐)의 황제(皇帝)를 차마 대놓고 詩에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漢)나라의 황제를 빌어다가 빗대어 이 詩를 썼던 것이다.

 

 <화청지의 여름>

 

- 주(註) -
장한가(長恨歌)는

비파행(毘琶行)보다도 더 널리 알려진 詩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봐야할 것은
지금의 시각으로 이 詩를 읽어보면 그리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좀 유치하지 않느냐는 생각마저 드는 점도 있다.
그런데 불후의 명작이니... 최고의 걸작이니 하는 말들은 도되체 무슨말인가~?

 

당시의 글과 시는...

당(唐)나라 중엽부터 고급관리들을 중심으로 시문학(詩文學)이 크게 번성하였고
詩라는 개념이 체계화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요즘이야 백과사전이니 국어사전이니 하는 단어와 숙어집이 넘쳐나는 새상이지만
당시는 詩니 文學이니 하는 말조차 불모지였던 시절에

단어나 고사성어를 만들고 애용한 건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 된 학문 깊은 관리들과 시인(詩人)및 문장가들로,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한 역사서와 전기및 전설을 읽고 들으면서 만들어 낸

고사성어와 단어들이 시와 문장을 대부분 장식했었다.

표현의 언어들이 극도로 빈약하던 시절이고 보면 이해가 된다.

후세 문인들은 당(唐) 송(宋)의 명망 높은 詩人들의 詩와 글을 빌어 와 인용 하는 걸 당연시 했고 또 자랑으로 여겼다.
당(唐) 송대(宋代)의 유명 시문들이 중국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에 와서는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유림(儒林)을 중심으로한 학자층에서 원시(原詩)를 읽으며 주석서까지 배껴서

읊고 똑같이 흉내를 내며 글과 시를 썼었다.
이백 두보 도연명 백거이등의 시를 특히 줄겨 읽다보니 인용 또한 많았었다,
따라서 당시 唐 宋시절의 시의 형식이나 은유및 기법들은 불변의 틀로 여겼으며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글줄께나 공부하는 유생(儒生)들은 밤새워 외우고 쓰면서 감탄을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오언(五言)이니 칠언(七言)이니 하는 틀과 은유적 기법들은 한시(漢詩)의 변치않은 주요 요소들이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당시의 유명 詩들이 名詩로 추앙받았던 이유들이며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봐도 큰 오차는 없지않나 싶다.

 

<화청지 표지석>


나는 한글보다 한문(漢文)을 일찍 익혔다.
체계적으로 배운 건 없고 형들이 공부하는 어께 너머로 천자문(千字文)과 기초 문장들을 홀로 익히다 보니.
두서 없는 글이 됐고 짜집기같은 누더기 잡식이 된 것이다.
그나마도 오래도록 사용을 않다보니 잊은 글 또한 태반이다.
그 와중에 듬성듬성 낯익은 글들이 보이는 건 유년의 추억 어린 짧은 학습으로 인한 앙금이며
이렇게나마 두서 없는 번역을 한 점 스스로이 대견케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파행에서도 밝혔듯이 부족하고 미약한 점들은 넓은 아량으로 너그러이 용서를 구할 뿐이외다.

 

<드라마에서 양귀비역의 중국 여배우>

 

長恨歌(장한가): 긴 탄식의 노래


漢皇重色思傾國(한황중색사경국)   한(漢)황제는 색을 즐겨 절세미인을 찾았으나
御宇多年求不得(어우다년구부득)   몇 년이 지나도록 얻지를 못하였네
楊家有女初長成(양가유녀초장성)   양씨 가문에 갓 성숙한 딸이 있어
養在深閨人未識(양재심규인미식)  
집안 깊숙이 길러 누구도 알지 못했다네.


天生麗質難自棄(천생려질난자기)   타고난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일조선재군왕측)   하루아침에 뽑혀 와 황제 곁에 있게 됐었구나
回眸一笑百媚生(회모일소백미생)   돌아보며 방긋 웃으면 싱싱한 미태 넘쳐나고
六宮粉黛無顔色(육궁분대무안색)  
단장한 육궁의 미녀들 무색케 되었도다.


春寒賜浴華淸池(춘한사욕화청지)   싸늘한 봄 화청지서 목욕 하니
溫泉水滑洗凝脂(온천수골세응지)   온천물 부드럽게 기름진 살결 씻어내리네
侍兒扶起嬌無力(시아부기교무력)   시녀들 어여쁜 그녀 부축해 일으키자
始是新承恩澤時(시시신승은택시)  
그때부터 성은을 입기 시작했도다.


花顔金步搖(운빈화안금보요)   구름 머리 꽃같은 얼굴 한들거리는 금장식
芙蓉帳暖度春宵(부용장난도춘소)   봄이면 밤마다 연꽃휘장 속에서 노닐다 보니
春宵苦短日高起(춘소고단일고기)   봄 밤이 너무나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從此君王不早朝(종차군왕부조조)   황제는 이때부터 조회 참석을 안했다네.


升歡侍宴無閑暇(승환시연무한가)   밤 낮 없는 잔치로 환락에 사로잡혀
春從春游夜專夜(춘종춘유야전야)   봄에는 봄놀이로 밤에는 잠자리서 놀아나니
後宮佳麗三千人(후궁가려삼천인)   빼어난 후궁들 미녀만 삼천 명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삼천총애재일신)  
삼천 명에 내릴 성은 혼자서만 받는구나.


金屋粧成嬌侍夜(금옥장성교시야)   황금방에 단장하고 밤마다 교태가 흐르니
玉樓宴罷醉和春(옥루연파취화춘)   옥누각 잔치 끝나면 봄기운에 취하도다.
姉妹弟兄皆列士(자매제형개열사)   그녀의 형제 자매 모두에 영지를 내려주니
可憐光彩生門戶(가련광채생문호)  
이윽고 그 가문에 광채가 빛나는구나.


遂令天下父母心(수령천하부모심)   이러하니 세상의 모든 부모들 마음은
不重生男重生女(부중생남중생녀)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게 되었고

驪宮高處入靑雲(여궁고처입청운)   궁은 높이 솟아 구름 속에 잠겼으며
仙樂風飄處處聞(선낙풍표처처문)  
선풍따라 풍악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네.


緩歌慢舞凝絲竹(완가만무응사죽)   느린 가락 나른한 춤 질펀한 음악에
盡日君王看不足(진일군왕간부족)  
황제는 하루종일 넋을 잃고 바라보네

 

<양귀비 전용 독탕>


漁陽비鼓動地來(어양비고동지내)   이때 어양땅에서 울려오는 전쟁의 북소리
驚破霓裳羽衣曲(경파예상우의곡)  
하도 놀라 흥겨운 노랫가락 깨지 듯 멋었구나.
九重城闕煙塵生(구중성궐연진생)   구중궁궐엔 연기 먼지 솟아 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천승만기서남행)  
수천 수만 수레 말 서남으로 달아나네


翠華搖搖行復止(취화요요행복지)   천자의 피난 깃발 가다 서길 반복하며
西出都門百餘里(서출도문백여리)  
도성문 서쪽 백여리 마외파에 당도하자

六軍不發無奈何(육군부발무나하)   양귀비 처결하라 군사들이 멈춰서니
宛轉蛾眉馬前死(완전아미마전사)  
양귀비는 몸 뒤틀며 군마 앞에서 죽었다네


花鈿委地無人收(화전위지무인수)   땅에 떨군 꽃비녀도 주워 가는 사람 없고
翠翹金雀玉搔頭(취교금작옥소두)  
취교 금작 옥소두등 장신구들 나뒹구네.

君王掩面救不得(군왕엄면구부득)   황제는 얼굴 가린 채 살리지도 못하고
回看血淚相和流(회간혈루상화류)  
고개 돌린 두 눈엔 피눈물이 흐르는구나.


黃埃散漫風蕭索(황애산만풍소삭)  
누런 흙 먼지 날리고 바람은 황량한데

雲棧縈紆登劍閣(운잔영우등검각)   구름 걸린 굽은 잔도길 검각산을 올라가네.
峨嵋山下少人行(아미산하소인항)   아미산 아래에는 오가는 이도 드물어
旌旗無光日色薄(정기무광일색박)  
천자 깃발 빛을 잃고 햇빛마저 어둡구나.


蜀江水碧蜀山靑(촉강수벽촉산청)   촉강은 보석 같고 촉산은 푸르건만
聖主朝朝暮暮情(성주조조모모정)  
황제는 아침 저녁 양귀비 생각에 슬퍼지니

行宮見月傷心色(행궁견월상심색)   행궁에 뜬 달 마음 절로 상하도다.

 

<황제와 양귀비가 함께 목욕을 즐겼던 온천탕>

 

夜雨聞鈴腸斷聲(야우문령장단성)   밤비 속 들려오는 단성의 말방울 소리
天旋地轉回龍馭(천선지전회룡어)   난세가 안정되어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
到此躊躇不能去(도차주저부능거)  
마외파에 이르자 차마 그냥 지나 칠 수가 없구나.


馬嵬坡下泥土中(마외파하니토중)   마외역 언덕 아래 진흙 땅 속에도
不見玉顔空死處(부견옥안공사처)   옥 같은 얼굴 간 곳 없고 숨진 이곳 처량쿠나
君臣相顧盡沾衣(군신상고진첨의)   황제 신하 서로들 돌아보니 눈물이 옷 적시고
東望都門信馬歸(동망도문신마귀)   
동쪽 궐문 바라보며 말 가는 대로 돌아간다.


歸來池苑皆依舊(귀내지원개의구)   돌아와 보니 연못과 동산은 옛날과 같고
太液芙蓉未央柳(태액부용미앙류)   태액지의 연꽃들도 미양궁의 버들가지도 그대로다.
芙蓉如面柳如眉(부용여면류여미)   연꽃은 양귀비 얼굴 같고 버들잎은 눈썹 같으니
對此如何不淚垂(대차여하불루수)  
이것들 바라보니 엇지 눈물 짓지 않을손가


春風桃李花開日(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 살구꽃 만발하고
秋雨梧桐葉落時(추우오동엽낙시)   가을비에 젖은 오동잎 떨어져도
西宮南內多秋草(서궁남내다추초)   서궁 남쪽 뜰 가을 풀 무성하고
落葉滿階紅不掃(낙섭만계홍부소)  
낙엽이 돌계단을 덮어도 쓸어 낼 사람 없구나.


梨園子弟白發新(이원자제백발신)   이원의 자제들도 이미 백발이 성성하고
椒房阿監靑娥老(초방아감청아노)   양귀비 시중 들던 궁녀들도 모두가 늙었구나.
夕殿螢飛思梢然(석전형비사초연)   저녁 궁궐에 반딧불 나니 양귀비 생각 처량하고
孤燈挑盡未成眠(고등도진미성면)  
등불 심지 다 타도록 외로이 잠 못 드네.


遲遲鍾鼓初長夜(지지종고초장야)   느린 종과 북소리에 밤이 길게 느껴지고
耿耿星河欲曙天(경경성하욕서천)   밝은 별 은하수에 하늘만이 밝구나.
鴛鴦瓦冷霜華重(원앙와냉상화중)   원앙새 장식한 기와에 차가운 서리꽃은 더욱 짙고
翡翠衾寒誰與共(비취금한수여공)   
비취빛 찬 이불 누구와 함께 덮을꺼나


悠悠生死別經年(유유생사별경년)   생사를 달리한지 아득하니 몇 년 짼가?
魂魄不曾來入夢(혼백부증내입몽)   꿈에서도 혼백마저 만나 볼 수 없구나.
臨邛道士鴻都客(임공도사홍도객)   임공의 도사가 도성에 머문다 하는데
能以精誠致魂魄(능이정성치혼백)  
정성으로 혼백을 불러올 수 있다고 하는구나

 

<양귀비꽃>


爲感君王輾轉思(위감군왕전전사)   잠 못 드는 황제를 위하여
遂敎方士殷勤覓(수교방사은근멱)  
백방으로 양귀비 혼백 찾아 다닌다 하는데
排空馭氣奔如電(배공어기분여전)  
허공을 가르고 번개처럼 내달아
昇天入地求之遍(승천입지구지편)  
하늘 끝에서 땅 속까지 두루 찾으며


上窮碧落下黃泉(상궁벽낙하황천)   위로는 벽락까지 아래로는 황천까지
兩處茫茫皆不見(양처망망개부견)   두 곳 모두 망망할 뿐 찾을 길이 없었는데
忽聞海上有仙山(홀문해상유선산)   홀연 들리는 소문 바다 위에 신선산이 있다고.

山在虛無縹渺間(산재허무표묘간)   그 산은 아득한 머나먼 곳에 있어


樓閣玲瓏五雲起(누각영롱오운기)   영롱한 누각에 오색 구름 피어나고
其中綽約多仙子(기중작약다선자)   아름다운 선녀들이 사는 곳이라 하는구나.
中有一人字玉眞(중유일인자옥진)   그 중에 옥진이라고 하는 선녀 하나가 있는데
雪膚花貌參差是(설부화모삼차시)  
흰 살결 고운 얼굴이 양귀비 같다 하네


金闕西廂叩玉扃(금궐서상고옥경)   황금 대궐 서쪽 방 옥문을 두드리고
轉敎小玉報雙成(전교소옥보쌍성)   소옥을 시켜 쌍성에게 알리라고 전하니
聞道漢家天子使(문도한가천자사)   한 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말 전해 듣고
九華帳里夢魂驚(구화장리몽혼경)  
꿈에서 깨어 놀라는 구중장막 혼백이라


攬衣推枕起徘徊(남의추침기배회)   옷을 들고 베개 밀고 일어나 서성이더니
珠箔銀屏迤邐開(주박은병이이개)   구슬발과 은병풍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냈구나
雲鬢半偏新睡覺(운빈반편신수교)   구름 머리 반 드리우고 방금 잠에서 깬 듯
花冠不整下堂來(화관부정하당내)  
머리장식 안 고친 채 당에서 내려왔네


風吹仙袂飄飄擧(풍취선메표표거)   바람 부는 대로 소맷자락 나부끼니
猶似霓裳羽衣舞(유사예상우의무)   예상우의곡에 춤 추던 그 모습인 듯
玉容寂寞淚闌乾(옥용적막누난간)   옥 같은 얼굴 수심 젖어 눈물이 방울지니
梨花一枝春帶雨(이화일지춘대우)  
활짝 핀 배꽃 가지 봄 비에 젖은 듯 하도다.


含情凝睇謝君王(함정응제사군왕)   정 그득한 눈길 돌려 황제에게 고하기를
一別音容兩渺茫(일별음용량묘망)  
어진 뒤로 목소리 용안 듣고 뵙지 못하고
昭陽殿里恩愛絶(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받았던 은총도 끊어지고
蓬萊宮中日月長(봉래궁중일월장)  
봉래궁에서 보낸 세월 아득할 뿐이라 하는구나


回頭下望人寰處(회두하망인환처)   머리 돌려 저 아래 인간세상 바라봐도
不見長安見塵霧(부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 먼지 뿐이었다오
惟將舊物表深情(유장구물표심정)   오래 지닌 물건으로나마 깊은 정 표하려 하니
鈿合金釵寄將去(전합금채기장거)  
자개상자와 금비녀라도 가지고 가라 하네.

 

釵留一股合一扇(채류일고합일선)   비녀는 반 쪽 씩 상자는 한 쪽 씩
釵擘黃金合分鈿(채벽황금합분전)   황금비녀 토막 내고 자개상자 나눴으니
但敎心似金鈿堅(단교심사금전견)   두 마음 이처럼 굳고 변치 않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천상인간회상견)  
천상에든 세상에든 다시 볼 날 있으리라.


臨別殷勤重寄詞(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금 이르는 말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양심지)   우리 둘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석날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인적 없는 깊은 밤에 속삭이던 그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자 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 나무로 자라면 연리지가 되자고 맹세 했었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천지가 영원하다고 하여도 끝이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은 끊어질 날 없으리라.

- 끝 -

 

화청지(華淸池)... (섬서성(陝西省)의 성도인 서안(西安) 즉 옛 장안(長安)에 있다.)

 

화청지 온천의 역사는 매우 깊다.
일찌기 서주(西周)시기에 주유왕(周幽王)이 이곳에 려궁(驪宮)을 지었으며,
후에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도 여기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다.
특히 당 현종이 건설한 궁전누각이 가장 화려하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을 즐기던 전용 목욕탕과 문물 진열실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한다고 한다.

 

 

 

 

 

백거이(白居易)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로 쓰며 시호는 문(文)이다.
그는 당(唐)나라 중기 하남성(河南省) 신정현(新鄭縣) 사람이다.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어찌보면 그로서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과거제도가 널리 활성화되어 실력이 있는 일반 양민들도 응시할 기회가 주어지던 시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백거이는 서기 800년 그의 나이 29세 때 진사에 급제하였고
급제 후 탄탄대로의 출세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좌습유(左拾遺)등 좋은 직위에 발탁되는 행운도 따랐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늦깍이 결혼을 한다.
그래서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백낙천의 사랑이 잘 반영되있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811년 돌아가신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3년 후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별 볼 일 없는 한직의 벼슬자리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의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했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는 불운을 맞는다.
사마(司馬)라는 직책은 별로 할 일도 없고 그저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있으나마나한
명분뿐인 직책으로 요즘으로 치면 대기발령과 같이 취급되던 녹봉만 축내는 직책에 불과했다.

그 사건은 백거이가 관리에 입명된 이래 처음으로 겪은 뼈저린 좌절이었고

매우 큰 심적 고통이었다.
그로인해 그의 시심(詩心)은 유유자적하고 감상(感傷)으로 향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바로 이 고난의 시기에 백거이 최고의 서정시로 일컬어지는 불후의 명작 비파행(琵琶行)의 詩가 세상에 나온다.

 

 

서기 820년 자신을 좌천시켰던 헌종(憲宗)이 죽고 뒤이어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중앙으로 복귀 해 낭중(郎中)란 직책을 얻어

조칙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며 국가의 이념을 적립하는데 매진하게 된다.
그 후 쉰살이 넘은 나이에 조정에서 당쟁이 일자 회호리를 피하고자 자진하여

강남으로 내려가 항주자사와 소주자시를 지내기도 했으며 많은 벼슬자리를 옴겨다니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늘 詩와 함께 살았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 정도라고 하는데,
문학을 하는 작가와 작품 수가 크게 번성한 중당시대(中唐時代)란 걸 감안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詩文)에는 정이 물씬 배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원진(元稹)및 유우석(劉禹錫) 사이에 오고 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 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 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백거이 문학의 우정적 결실이라고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생활 자체가 청념했으며 매사에 당당했었다고 전해진다.
 
백낙천(白樂天)의 시문들이 쉽다보니 문인들 사이에 속되다는 비판을 종종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반 서민들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은 배려와
애민적 식견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는 한 편의 시가 완성될 때 마다 집안에서 일하는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평이한 문체와 글자를 애용했으며 꼼꼼한 퇴고(推敲)또한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들의 작품에는

송대(宋代) 이래 많은 주석서가 나왔는데 반해
백거이 문집인 백씨문집(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런 주석서가 필요치 않았던 까닭이다.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자신을 총애하던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적 입신을 향하던 정관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자연과 인생의 내면을 그려내는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계기가 된다.
평생 지은 그의 문집은 합계 75권으로 방대한 양을 자랑하며

 말년에 정리한 그의 문집 백씨문집(白氏文集)은 여러 절에 분산 봉안 했다.

그리하여 그의 수 많은 시들이 오늘날까지 내려올 수가 있었다.
백거이는 당시로서는 꽤나 장수한 75세의 나이로 낙양에서 생을 마감할때까지

늘 시와 함께 살았던 진정한 시인 중에 詩人이었다.

 

 

 - 주(註) -

중국의 한시(漢詩)를 우리말로 풀어서 옴기기란 쉽잖은 어려움이 있다.

일일이 글자의 뜻을 풀어서 옴기자니 중복되는게 많고 문장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는 단점이 있다.

또 앞 뒤의 문맥이 서로 연결 되지 않는 게 태반이다.

그리고...

아무리 백거이의 시가 평이하다고 하나

당시의 지명과 정치 문화를 어느정도 이해를 하고 있어야

표현하고자 하는 시 본래의 뜻이 온전히 전해질텐데...

그런한 점이 현실에 맞게 우리글로 풀어 옴기기가 특히 어려웠던 부분이다.

  한시들은 오언(五言)이나 칠언(七言)으로 정형화 된 글자의 조합을 통해 이루어지다보니

작가가 틀을 맞추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글자를 집어넣었거나

남아서 생략한 글자들이 많아 우리말로 매끄럽게 옴긴다는게 현실적으로 난감한 점이 있다.

따라서 본 비파행도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들은

내 임의로 과감하게 더하고 혹은 일정부분을 생략한 점도 있다는 걸 밝혀두고자 하며

미약한 풀이로 인해 본래의 뜻이 왜곡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되는게 사실이다.

백거이의 비파행이란 시는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고 때론 줄겨 읽는

名詩라서 큰 부담은 없으리라 자위하며 미천하고 두서 없는 식견으로 옮겨 봤으니...

모쪼록 블로그에 들러 읽고 가는 분이 계시다면 너그러이 용서를 구할 뿐이외다.

 

 

琵琶行(비파행): 비파에 대하여

          潯陽江頭夜送客(심양강두야송객) : 심양강가에서 밤 늦게 나그네를 전송하려니

 楓葉荻花秋瑟瑟(풍엽적화추슬슬) : 단풍잎 갈대꽃에 가을이 쓸쓸하구나.

            主人下馬客在船(주인하마객재선) : 주인은 말에서 내리고 객손도 배 안에 오르고

                         擧酒欲飮無管絃(거주욕음무관현) : 술잔을 들어 마지막 잔을 나누고자 하나 음악이 없구나.

       酒不成歡慘將別(주불성환참장별) : 술은 취하지 않았는데 서글피 이별하려니

        別時茫茫江浸月(별시망망강침월) : 이시간 망망한 강물에 달빛만이 젖는구나.

           忽聞水上琵琶聲(홀문수상비파성) : 그때 어디선가 강물 위로 전해오는 비파소리

              主人忘歸客不發(주인망귀객불발) : 주인은 돌아갈 생각 잊고 객도 떠나질 못 하네.

             

 

  尋聲暗問彈者誰(심성암문탄자수) : 음악 소릴 찾아와 정중히 물었으나

  琵琶聲停欲語遲(비파성정욕어지) : 비파 소린 멎었는데 대답이 없구나

        移船相近邀相見(이선상근요상견) : 배를 옮겨 타고 다가가 서로이 마주보며

        添酒回燈重開宴(첨주회등중개연) : 술을 더하려고 불을 밝혀 자리 마련하고

      千呼萬喚始出來(천호만환시출래) : 몇 번을 고하고 청하자 비로소 나온다.

   猶抱琵琶半遮面(유포비파반차면) : 비파를 안고 반쯤 얼굴을 가린 그녀

    轉軸撥絃三兩聲(전축발현삼량성) : 줄을 고르고 두 세 번 튕기는 소리에

               未成曲調先有情(미성곡조선유정) : 곡조도 타지 않았는데 벌써 정감이 이는구나.

      絃絃掩抑聲聲思(현현엄억성성사) : 현을 타는 솜씨 소리마다 마음이 서려

      似訴平生不得志(사소평생부득지) : 평생 이루지 못한 한을 하소연하는 듯

         低眉信手續續彈(저미신수속속탄) : 머리 숙이고 손 뼏혀 애절하게 튕겨가니

     

      

       說盡心中無限事(설진심중무한사) : 마음에 서린 끝 없는 한을 토해내는구나

輕攏慢撚撥不挑(경롱만연발부도) : 살짝 눌렀다가 다시 지그시 튕기며

                初爲霓裳後六絃(초위예상후육현) : 먼저 곡은 슬픈노래요 나중 곡은 밝은 노래로고

   大絃嘈嘈如急雨(대현조조여급우) : 큰 줄을 튕기니 소나기처럼 요란하고

      小絃切切如私語(소현절절여사어) : 작은 줄은 잔잔하니 속삭이듯 애절하다

嘈嘈切切錯雜彈(조조절절착잡탄) : 급하고 혹은 간절하게 타는 가락은

             大珠小珠落玉盤(대주소주락옥반) : 큰 구슬 작은 구슬이 옥쟁반에 떨어지는 소리

      閑關鶯語花底滑(한관앵어화저활) : 다정한 꾀꼬리 노래는 꽃속에서 노닐고

       幽咽泉流水下灘(유열천류수하탄) : 흐느끼듯 샘물이 흘러 여울로 떨어진다.

          水星冷澁絃凝絶(수성냉삽현응절) : 고인 샘이 차갑게 얼 듯 거문고 줄 엉키 듯

              凝絶不通聲暫歇(응절불통성잠헐) : 엉키고 흐르지 않자 소리도 잠시 들리질 않네

               別有幽愁暗恨生(별유유수암한생) : 따로이 깊은 슬픔이 일어 수심찬 한이 흐른다.

                   此時無聲勝有聲(차시무성승유성) : 이 때는 소리 없는 것이 소리 있는 것보다 좋구나

 

 

         銀甁乍破水漿迸(은병사파수장병) : 어느새 은병이 깨어지며 물 쏟아지고   

                    鐵騎突出刀鎗鳴(철기돌출도쟁명) : 철기가 돌출하여 칼과 창이 부딪는 소리가 나 듯

                        曲終抽撥當心畫(곡종추발당심화) : 격한 곡이 끝나자 발을 빼고 다시 가슴에 안고 타니

                           四絃一聲如裂帛(사현일성여열백) : 네 줄에서 울리는 소리 마치 비단을 찢는 듯 하는구나

                           東船西舫悄無言(동선서방초무언) : 동쪽 서쪽 배에서는 사람들 서글퍼져 할 말 모두 잊고

       唯見江心秋月白(유견강심추월백) : 강물에 뜬 가을달만 처량히 바라보네.

        沈吟收撥揷絃中(침음수발삽현중) : 격정의 곡을 끝내며 발 사이에 줄 끼고

              整頓衣裳起劍容(정돈의상기검용) : 옷을 여미고 일어나 얼굴을 가다듬는 그녀.

 

 

                自言本是京城女(자언본시경성녀) :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본래 장안 여자인데

                       家在蝦蟇陵下住(가재하마릉하주) : 집은 하마릉 아래에 있어 그곳에서 살았다 하네

        十三學得琵琶成(십삼학득비파성) : 열 세 살에 비파를 배워 익혔고      

               名屬敎坊第一部(명속교방제일부) : 이름이 교방의 제1부에 속해 있었답니다.

                      曲罷常敎善才服(곡파상교선재복) : 곡이 끝나면 항상 명사들도 모두가 감탄하였고

                       粧成每被秋娘妬(장성매피추낭투) : 몸단장을 끝내면 늘 주위의 질투도 받았습니다.

                     五陵年少爭纏頭(오릉년소쟁전두) : 오릉의 소년들이 앞다투어 선물을 갔다주었고

                      一曲紅綃不知數(일곡홍초부지수) : 한 곡이 끝나면 받은 비단 헤아릴 수 없었지요.

       鈿頭銀蓖擊節粹(전두은비격절수) : 머리에 꽂은 은비녀로 장단 맞추고

                     血色羅裙飜酒汚(혈색나군번주오) : 붉은 색 비단 치마도 술에 얼룩져 있었답니다.

                                今年觀笑復明年(금년관소부명년) : 금년도 기뻐 웃으며 다시 내년에도 이럴거라 믿었지요

                          秋月春風等閒度(추월춘풍등한도) : 가을 달과 봄바람에 언제나 여유롭게 지냈습니다.

 

 

                                 弟走從軍阿姨死(제주종군아이사) : 세월 가니 동생은 군대에 가고 양 엄마마저 죽고 없고

                            暮去朝來顔色故(모거조래안색고) : 저녁이 가고 아침도 가니 얼굴빛도 늙어가더이다.

              門前冷落鞍馬稀(문전냉락안마희) : 문 앞은 말타고 찾는 이 뜸해 쓸쓸하고

                     老大嫁作商人婦(노대가작상인부) : 늙어가자 결국 장사꾼의 아내로 팔려갔지요.

                               商人重利輕別離(상인중리경별리) : 그는 잇속에만 밝고 이별은 가볍게 여기는 자였는데

                    前月浮梁買茶去(전월부량매다거) : 지난 달에 부량으로 차를 사러 떠났습니다.

                    去來江口守空船(거래강구수공선) : 강 어구를 오가며 빈 배를 지키고 있노라면

                         遶船明月江水寒(요선명월강수한) : 뱃전에 달은 밝고 강물은 차갑게만 느껴집니다.

           夜深忽夢少年事(야심홀몽소년사) : 깊은 밤에 문득 젊은 시절 생각 나서

                                  夢啼粧淚紅闌干(몽제장루홍난간) : 꿈속에서 한바탕 울고 나면 화장얼굴 눈물만 흘렀지요

 

 

                    我聞琵琶已歎息(아문비파이탄식) : 내 그대 비파 소릴 듣고 이미 탄식하였는데

           又聞此語重喞喞(우문차어중즐즐) : 또 이 말 들으니 더욱 슬퍼지는구려

                          同是天涯淪落人(동시천애륜락인) : 그대와 나는 똑같이 하늘에서 떨어진 외로운 몸

                             相逢何必曾相識(상봉하필증상식) : 이렇게 만나는 상봉이 어찌 아는 사이만의 일이랴

       我從去年辭帝京(아종거년사제경) : 나도 지난 해에 장안을 떠나와서

           謫居臥病瀋陽城(적거와병심양성) : 귀양 와 심양에 살고 있는 몸이로다

    瀋陽地僻無音樂(심양지벽무음악) : 심양은 궁벽해서 풍류도 없어

                           終歲不聞絲竹聲(종세불문사죽성) : 일 년이 다 가도록 음악소리 한 번 듣지 못했소.

                 住近湓江地低濕(주근분강지저습) : 사는 곳이 분강땅이라 땅이 낮고 습하여

                        黃蘆苦竹遶宅生(황로고죽요택생) : 갈대와 대나무만 집 둘레에 우거져 있소이다.

                     其間旦暮聞何物(기간단모문하물) : 이 속에서 아침 저녁으로 무엇을 듣겠는가.

                                  杜鵑啼血猿哀鳴(두견제혈원애명) : 두견새 울음 피를 토하고 원숭이 구슬프게 울어댈 뿐

               春江花朝秋月夜(춘강화조추월야) : 봄날 강가 꽃피는 아침 가을 달밤에

                 往往取酒還獨傾(왕왕취주환독경) : 때때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지낸다오

                           豈無山歌與村笛(기무산가여촌적) : 어찌 산 노래와 목동의 피리소리 없겠는가마는

                     嘔啞啁嘶難爲聽(구아조시난위청) : 가락이 조잡하여 들어줄 수가 없었소이다.

         今夜聞君琵琶語(금야문군비파어) : 오늘 밤 그대의 비파소리 들으니

                           如聽仙樂耳暫明(여청선악이잠명) : 신선의 가락을 듣는 듯 잠시 내 귀가 맑아졌소.

                     莫辭更坐彈一曲(막사갱좌탄일곡) : 사양 말고 다시 않아 한 곡조 더 타준다면

                          爲君飜作琵琶行(위군번작비파행) : 내 그댈 위해 비파에 대하여 시를 짓겠소이다.

 

 

 

              感我此語良久立(감아차어양구립) : 내 말에 감복되어 한참을 서 있더니

                              却坐促絃絃轉急(각좌촉현현전급) : 문득 자리앉아 줄 고르고 급히 비파를 타는구나.

              凄凄不似向前聲(처처불사향전성) : 처철함이 전 번 소리와 확연이 달라

                                   滿座聞之皆掩泣(만좌문지개엄읍) :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다 눈을 감고 흐느껴 우는구나

                      就中泣下誰最多(취중읍하수최다) : 그 중에 가장 많이 울고 눈물을 흘린 자는

               江州司馬靑衫濕(강주사마청삼습) : 청삼을 흠뻑 적신 강주사마였노라. 

            -끝-

 

 

   

백거이(白居易)는...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구석이 있으면서도 음악엔 매우 조예가 깊은 시인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한밤의 애끓는 비파음에 귀가 번쩍 트였고
좌천 된 자신의 신세나 팔려 온 늙은 기생의 처지나 서로의 안타까운 상련에 눈물을 한없이 쏟았던 그다.

음악의 대가와 시문학의 천재가 우연히 강배애서 만나 비파성를 통해 녹여내는 동병상련(同病相憐) 정감은

한쌍의 늙은 학을 보는 듯 애잔하기까지 하다.
격조 높은 음악과 품격 높은 시를 통해 토해내는 서정적 회한은 그 자체가 인생무상을 대변하

뜨겁게 가슴을 적시며 스며든다.

따라서 비파행은...

1,200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애틋한 명시(名詩)로 기억되는

불후의 명작이라고 보는 이유다.

 

출처 : 학 마 을
글쓴이 : 천마리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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