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 관산기(둔촌,천곡,이당,제비)

장안봉(微山) 2014. 5. 30. 22:41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 관산기(둔촌,천곡,이당,제비)


2007년 7월 29일 대구한의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최고지도자과정에서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 羅峴마을에 자리한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인 이당李唐 선생 음택지 觀山이 있었습니다..  이 터는 조선팔대명당朝鮮八代明堂으로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곳이죠. 도유지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툭 터진 공간에 자리한 마을이 나타나는데 야트막한 산들이 마치 둥글게 병풍을 친 듯 무척이나 아득한 터입니다.. 바로 이 곳이 고개 너머에 비단을 펼친 듯 터가 펼쳐져 있다는 나현羅峴마을이죠..   마을 초입 우측편에 나현회관이 보이고 멀리 258봉우리 아래자락에 마치 거대한 초록 치마 한 폭을 펼쳐놓은 듯 잘 관리되어 있는 왕릉같은 대규모 묘역이 나타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의 봉분이 보이다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좀 더 걸음품을 팔면 그 뒤로 또 하나의 봉분이 나타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앞쪽의 묘소가 광주이씨 시조인 이당선생의 묘소이며, 바로 뒤쪽에 자리한 묘소는 천곡 최원도 선생의 어머니되시는 영천이씨의 묘소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읽고 지나가야겠습니다.. 둔촌 이집선생과 천곡 최원도선생의 이야기인데 실은 저도 이 이야기가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사실을 몇 일전 저의 큰딸 민선이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휴가지 텐트에서 가족들과 풍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둔촌선생과 천곡선생이야기가 나오자 큰 딸이 ‘아빠 그 이야기 우리 도덕교과서에 나오는데요... 친구간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로 말예요’ 하더라구요...


대구한의대 풍수지리학과 류재백교수님은 이당의 묘소에 대한 자신의 논문에서 둔촌과 천곡의 이야기 부분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광주이씨 대종회 사이트에는 둔촌선생과 천곡선생과의 관계, 시조 묘를 이곳에 조성하게 된 경위를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이를 요약 정리하면 후술과 같다.


고려 말에 신돈이 정권을 잡자 천곡 최원도선생은 司諫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 북안의 나현마을에 내려와 살고 있던 중 과거 동년생이며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둔촌선생이 신돈의 악정을 비판했다가 일가 멸문의 포살령이 내리자 개성에서 영천까지 노부를 등에 업고 몇 달 만에 겨우 천곡선생의 집에 도착하게 된다. 두 부자가 도착한 그날이 마침 천곡선생의 생신날이라 많은 인근의 주민들이 모여 주연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두 부자는 바깥 툇마루에 앉아 천곡선생을 찾으니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천곡선생은 이들을 반기기는커녕 대노하여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가져오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 당장 이집에서 나가라’면서 쫒아버렸다고 한다.

둔촌선생은 절친한 친구라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왔으나 천곡선생이 냉대를 하며 쫒아내어 할 수없이 다시 노부를 등에 업고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두 부자가 떠나자 천곡선생은 역적이 앉았다 간 자리를 태워야 된다며 그들이 앉았던 툇마루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천곡선생의 본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천곡선생은 하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두 부자를 맞이하면 언젠가는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 두 집안 모두 멸문지화를 면할 수 없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둔촌선생 부자를 박대했던 것이다. 또 둔촌선생이 노부를 등에 업고 지친 몸으로 멀리 가지는 못할 것이니 하객들이 다 돌아간 밤에 찾아 숨겨주면 집안 식구조차도 알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둔촌선생 역시도 천곡선생이 진심으로 내쫓는 것이 아니라 포살령이 내린 자신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이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생일 하객이 모두 떠나면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믿고 멀리가지도 않고 마을 주변의 덤불 밑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하객들이 다 돌아가고 날이 어둡자 천곡선생은 두 부자를 찾아 나섰고 덤불 밑에 숨어있던 둔촌선생 부자를 발견하고 밤이 깊은 후에야 내려와 가족도 모르게 선생의 방 다락에 숨겨주었다. 이렇게 하여 천곡선생은 두 부자를 집안 식구들조차 아무도 모르게 피신시켰지만 이들에게 먹일 세끼 식사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한 꾀를 내어 자신이 걸신들렸으니 밥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게 하고 반찬도 많이 담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고봉으로 담은 밥을 다 비우는 주인의 식욕을 이상하게 여긴 열아홉 살의 제비라는 계집종이 문구멍으로 들여다보고 말았는데, 세 사람이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제비는 안방마님에게 말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안방마님과 계집종도 주인께서 둔촌선생 부자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천곡선생은 제비를 심하게 꾸짖고 함구령을 내렸지만 행여 제비가 누설할까봐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의 상심이 자신이 문구멍으로 훔쳐본 때문이라고 여긴 제비는 불안해하는 주인을 안심시키고자 자결하였다고 하는데, 두 가문의 의리를 위해 희생한 제비를 천곡선생의 어머니 묘와 가까운 곳1)에 후히 장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영천에 둔촌선생을 포살하려는 수색이 시작되어 천곡선생 집에도 들이닥쳤지만 당초 두 부자가 찾아왔을 때 쫓아버린 사정과 그 상황을 목격한 하객들의 증언으로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는 아주 큰 일이 터졌는데 둔촌선생이 업고 피신 온 부친이 돌아가시게 된다. 장례에 대한 아무 준비도 없었고 장례도 남들이 모르게 비밀리에 치러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천곡선생은 자신이 입으려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壽衣를 내어주고 또한 자신의 신후지지로 잡아 놓은 모친의 분묘 아래에 장사지내게 해서 子坐午向으로 모실 수 있었다고

한다. 광주이씨 대종회 사이트(http://www.gwanglee.or.kr/)>>

 

음....  뒤 쪽에 보이는 봉분이 천곡 최원도 선생의 어머니 되시는 숙부인 영천이씨묘이고 앞 쪽의 봉분이 둔촌선생의 아버지 되시는 이당선생의 봉분입니다..  광주 이씨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현재 이당선생의 묘소로 자리잡은 이 터의 원 주인은 영천 최씨인 천곡 최원도 선생의 아버지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마련해 두었던 곳이 됩니다.. 이 자리에 그만 광주 이씨 이당선생이 대신 눕게 된 것이지요...


둔촌과 천곡선생 두 분의 우정에다 계집종 제비의 의리가 합해져서 낳은 결과물이 됩니다만 이후 광주이씨가문과 영천최씨가문의 영욕을 살피다보면 세속의 속설없는 생각으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이당선생이 이 곳 나현골의 영천 최씨의 묘자리에 대신 묻힌 이후 아들 둔촌 이집선생 이하 자손들은 번창에 번창을 거듭하여 당시 임금이였던 성종은 "아들을 낳으려면 마땅히 광주이씨 같은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살고 있었던 현재의 서울 신문로1가와 2가 사이를 五子登科五子封君의 집으로 ‘五君골’이라 불렸다네요..


참고로..


이당선생이 나현골에 묻힌 이후 이당선생의 많은 玄孫들이 대과에 급제하고 조정을 출입하게 되면서 아마도 광주이씨문중에서는 명당발복설을 깊이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께서 묻힌 영릉의 경우는 세종대왕이 눕기 이전에 이미 어떤 이가 먼저 묻혀있던  묘소로 이 묘소는 연을 날려 잡은 연명당이였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이 영릉자리에 세종대왕보다 먼저 자리잡고 묻힌 이 역시 광주 이씨 이인손으로 이당선생의 증손자가 되죠..


믿거나 말거나지만 여하튼 전후사정을 따져보면 조상 묏자리 잘 얻어 가문이 일어선 셈이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광주이씨 시조인 이당선생 묘비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당선생의 아들이 곧 둔촌 이집 선생이 되고,, 그 옛날 이 묘역일대의 주인이였던 천곡 최원도 선생이 바로 이 둔촌 선생의 친구가 되시는 거죠..  사진 속 영천이씨 묘는 바로 천곡 최원도 선생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풍수에서 묘를 등지고 앞쪽을 바라보았을때 가까이 보이는 산을 안산案山이라하죠.. 그리고 안산주변부와 뒤쪽으로 보여지는 산들을 합쳐 안대라고 부르는데..  안산은 묘소에 서서 바라볼 때 안산의 높이가 눈높이 정도가 되면 가장 길하다고 본답니다.. 그리고 그 모양에 따라 또 다른 해석들이 많이 있긴 합니다만...


이 곳 광주이씨 시조묘의 안산은... 그림같은 형국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내백호자락이 앞쪽을 길게 감싸 안으면서 일자문성의 아름답고 반듯한 옥대사玉帶砂(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만들고 그 옥대사 너머에 명당격국에 걸맞는 안산이 놓여 있거든요..(안산은 사진속 ‘옥대’라는 글자 바로 아래에 보이는 봉우리)


시조묘 앞에 이렇듯.. 잘생긴 옥대가 놓여 있으니 후손들이 대과에 급제하고 조정을 출입하여 한때 廣州李氏 8명이 조정을 욺직인다하여 8극조정이라 했었나봅니다..


<<인손의 5남 중 장자 克培는 領議政에 올라 廣陵府院君, 2자 克堪은 刑曹判書로 廣城君, 3자 克增은 大司成判中樞府事로 廣川君, 4자 克墩은 議政府左贊成으로 廣原君, 5자 克均은 左議政으로 廣南君에 勳封되고, 종형제인 克圭는 兵曹參議, 克基는 吏,禮,工曹參判, 克堅은 左通禮에 기용되었다. 당시 이들 8李克을 八克朝廷이라 하였다고 하고,>> 광주이씨 대종회 싸이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묘소 바로 뒤 258주산(主山)에서 묘소로 내려오는 마지막 용맥입니다..  소나무들이 잘 관리되고 있으며 맑고 깨끗한 生氣를 품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천곡 최원도선생의 어머니 영천이씨묘소 곁에 있는 또 다른 묘소입니다..  영천이씨 묘와 함께 최근까지만해도 이 곳 이당선생 묘 역시 봉분의 규모가 사진 속 묘소처럼 작았다고 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좌청룡 자락...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잘 생긴 문필봉을 거느린 우백호자락..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속 붉은 단청이 칠해진 기와 2층건물이 마을회관인 나현회관이고 나현회관 너머에 둔촌선생유허비와 함께 소나무 숲 아래에 의리의 계집종 제비의 묘소가 있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부친의 身後之地를 친구 둔촌선생의 아버지 묘로 내어준  천곡 최원도 선생의 영천최씨재실이 보입니다.. 마을 분들에게 여쭈어 보아도 천곡 최원도선생의 묘소위치를 아시는 분들이 없다네요.. 망실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찌 나현골에서조차 모르고 계실까??  명당에 눕고 또는 눕지 않음의 결과가 이렇듯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다니...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열심히 야외 강의에 집중하고 계시는 우리 교수님과 제자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소나무 그늘에서 우리 총무님께서 둔촌선생과 천곡선생의 이야기를 읽고 계시는데...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둔촌선생 유허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좌청룡자락 맨 끝지점에 몇 그루의 소나무를 벗삼아 누워 있는 제비의 묘소입니다.. 고려말 신돈의 개혁정치가 한창일때 죽었으니 줄잡아도 600여년이 넘었다는 것인데...

동행하신 교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3년 전만해도 제비의 봉분 가운데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박혀있는 등.. 묘소가 잘 관리되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의리가 있었다... 또한 그녀는 예뻤다.. 제비처럼 ....


그러나 웬지 슬펐다.. 아니 서글펐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뒤돌아보니.... 저 멀리에.. 그 옛날 자신의 주인이셨던 영천이씨 안방마님이 누워있고,, 그 아래에는 어쩌면  제비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볼 수 있을 광주이씨 이당선생이 누워계시는데..


‘살아서도 그들의 계집종으로... 죽을 때도 그들의 충실한 계집종답게(????????)죽었건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주인도 죽고 종도 죽고...  600여년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지금도 주인이 누워있는 이 마을의 동구밖 입구 산자락에 묻혀 사계절 비바람 진눈깨비 맞아가며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친구간의 우정으로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는 저 멀리 두 묘소의 문중은 묘역을 두고 최근 큰 송사가 있었고.. 벌초 때도 묘제 때도 서로 다른 행보로 조상의 큰 뜻을 져버렸다지만... 


두 가문이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계집종 제비입니다...


6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묘제 때면 잊지 않고 두 집안에서 제비묘에 묘사를 올리고 있다네요..


살아생전에 자신이 주인으로 섬겼던 두 문중으로부터 죽은 뒤에는 오히려 제사밥을 얻어 먹고 있는 셈인데..


처녀의 신분으로 자식도 없이 의리를 지키다(????) 죽은 계집종 제비가 이렇듯 양 집안으로부터 제사밥을 얻어 먹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았습니다..


그렇다...


“한때 적막할지언정... 만고처량함은 취하지 말찌어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는 그렇게 살 작정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올 봄 시지 천을산의 아산장씨 묘소에서 만난 제비꽃 군락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난 제비꽃을 좋아한다... 봄이면 산소주변에 수줍은 듯 보랏빛 곱게 피어 있는 제비꽃.. 계집종 제비의 서글픈 恨이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봄이되면 어김없이 산소주변에서 제비꽃으로 변해 피어나는 것일까?


내년 봄엔 더 많은  제비꽃을 만나보아야지..


좋은 인연 지으시고..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풍경 송은석...



출처 : 마의태자의 풍경산방
글쓴이 : 풍경 송은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