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214호 구형왕릉은 가야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며,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마지막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돌무덤은 그 형식에 있어 일반 분묘들과 달리 각 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방형으로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리는 경사면에 잡석으로 축조하였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의 높이 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석렬은 전면에서조차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도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으며 그 앞에 상석(床石)과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수(石獸)가 각각 1쌍씩 있으나 이 석물들은 최근의 시설물들로 돌무덤과는 시대적인 차이가 많다.
전면 중앙에서의 높이는 7.15m이고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4단의 동쪽에 폭 0.4m, 높이 0.4m, 깊이 0.68m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돌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설이 제기 되어 왔다. 먼저 이것을 석탑이라고 보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의 유구가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되어 있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근처에 있는 왕산사(王山寺)에 전해져 오고 있는 『산사기권(山寺記卷)』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산청현읍지(山淸縣邑誌)』에 의하면 정조 22 년(1798)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홍의영의 『왕산심릉기』도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왕산사는 없어지고, 다만 이 무덤을 위한 재실(齋室)이 있어 여기에 있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목궤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옷, 그리고 활과 칼 등의 유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구형왕의 후손들이 1793년 덕양전(德讓殿)을 세워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김유신장군이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 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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