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 (서상동), 사적 73호인 수로왕릉은 가락국(금관가야) 시조인 수로왕의 무덤으로 김해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죽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 묘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언제 무덤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몇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이라고 부른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가 전한다. 서기 42년 당시 아직도 나라가 없던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하늘의 명을 받아 족장들인 9간과 주민들이 구지봉에 올랐다. 그 곳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춤추고 노래하자 하늘에서 황금상자가 내려왔고, 그 안에는 태양처럼 둥근 황금알이 여섯 개 있었다. 알에서는 차례로 남자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온 아기가 수로였다. 수로는 10여일 만에 장성하여 가락국의 왕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왕은 배를 타고 온 아유타국의 왕녀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157년을 재위하다 죽었다. 이것은 신화로 사실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고대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시조신화로 유이민집단이 낙동강 유역의 토착 선주민과 결합하여 초기국가를 형성해나간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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