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蓄 望越庵公과隱池(은못이 隱池洞)
망월암공(望越庵公)은 성은 이씨(李氏)이고 諱는 축(蓄)이며 자는 윤보(潤甫)이고호는 망월암( 望越庵) 또는 배견와(排鵑窩)이니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고려조의 문효공 가정선생 이곡(文孝公 稼亭先生 李穀)(1298~1351)과 문정공 목은선생 이색(1298~1351)과 제학 인재선생 이종학(1361~1392)은 공에게 고조,증조,조부,의 삼대가 된다.
아버지의 諱는 叔野 이니 麟齋公의 遺戒로 科擧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조정에서 고려조의 대가댁 자손중에 재능과 행실이 있는 자를 뽑아서 등용할때에 뽑히어 대성에서 두루 활약 하였으며 문보(文譜)에 적을 두지않고 광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어머니는 숙부인 강화봉씨이니 개성판윤을 지낸 봉유인의 딸이다. 건문임오(建文壬午)1402년9월 무자에 서울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이 칠팔세때 부터 대범하고 진중하였는데 장성하여서는 문학에 더욱 성취되어 나이겨우 열여섯에 처음으로 개성전 직장 에 임영 되었다. 누차 승진하여사선주부에 이르렀고외직으로 광주판관이 되였으여 경직(京職)으로 들어와 사헌부감찰에 임영 되었다. 호조좌랑 으로 옮겨 정랑으로 승진 하였으여 전농소윤(典農少尹) 으로 발탁되고 다시 외직으로 전라도경력 (全羅道經歷) 이 되었다. 사헌부 장령으로 옮겨 가고 지사간원사 로 바뀌었다. 판선공감 봉상지사를 역임(歷任)하고 첨지중추로 승진되어 지병조사를 겸직하고 이조참의로 옮겼다. 계유 1453年에 가선대부에 승진하여 황해도관찰사 (黃海道觀察使)에 임영되었는데 단종 이 즉위하자 조정에 어려움이 많아 국사가 의심스럽고 근심스러우나 공이 벼슬에 나아갈 생각을 끊고 물러나 고양(高陽)의 농막에서 생활하였다.
이 해 閏六月에 수양대군이 자기 수하의 산하들과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이하 여러 종친(宗親), 궁인(宮人) 및 신하 ( 臣下) 들을 모두 죄인으로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 (端宗) 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효 옮겨갔다.
이 후 1456年 6月에 상왕복위 사건 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이개 등 집현전 출신과 성삼문,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했으며 이듬해 단종(端宗)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寧越)에 유배되었다.이때 공은 하늘을 우러러 이를 길게 탄식하여마지 않더니 처소인 농막에 망월(望越)이라 편액하고 매일 영월을 향하여 망배하였고 조그만 못을 파서 은지(隱池)라 하고 뒷산을 궐산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이 다시 서인(庶人) 으로 강봉되었고 한달 뒤인 10월 24일에 17세의 나아로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공은 북망통곡(北望痛哭))하고 다시 농막에 배견와(排鵑窩)라 편액하였다. 이때 중 을지(乙旨)라는 자가 영월(寧越)에서 어포한벌을 받들고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공주 동학사 에 도착하였다.
공이 이에 정재조상치(靜齋曹尙治), 어계조여(漁溪趙旅), 인재성희(仁齋成熺), 포옹정지산(圃翁鄭之産) 등 과 서로 모여서 사육신의 재단위에 다시 재단 하나를 설치하여 어포(御袍)를 받들고 슬픔을 다하여 곡(哭)하고 예를 다하여 제(祭)를 지내니 공의 충의는 이에서 끊어 졌다.
성화계사(成化癸巳): 1473년 11월 갑진에 공이 농막에서 별세하니 향년 72세이다.(이때 공의 아드님 훈(塤)은 1471년 신묘(辛卯)에 순성좌리공신(順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한성군(漢城君)에 봉군(封君) 되었고 1472년 임진(壬辰)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종2품))로승진되어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하고 있었다.)
부음(父音)을 아룀이 상(上)이 관리를 파견하여 제를 올리고 부의(賻儀)를 내리셨다. 다음해,정월모갑(正月某甲)에 점산(站山)의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공의 유언에 따른것이다.
아아! 공의 충효는 마음에 근본하여 빛나기가 해와 별과 같다. 정종대왕(正宗大王)이 일찌기 경연(經筵)에서 하교하기를 "단종조(端宗朝)의 절의(節義)를 지킨 신하로는 마땅히 이모(李某)를 먼저 꼽아야 한다 "하였고 우암송문정공(尤庵宋文正公)이 말하기를 "공의 우뚝한 절개는 사육신에게 양보할 수 없다" 하였으며 그 고을의 선비들이 공의 충의를 사모하여 옛터에 사당을 세워 망월사(望越祠)라 하였고,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原)이 망월사향사절차(望越祠享祠節次) 한통을 지었다. 고종갑진(高宗甲辰):1904년에 公州 東鶴寺 옆에 초혼각(招魂閣)을 고쳐 숙모전(肅慕殿)이라 하고 사육신과 칠절신(七節臣)을 배향(配享)하니 그중 한분이시다.
부인은 정부인 이천서씨(貞夫人 利川徐氏)이니 형조판서(刑曹判書) 선(選)의 딸이다.일남일녀를 낳으니 아들은 이름이 훈(塤)이고 좌리공신(左理功臣)으로서 한성군(漢城君)에 봉해졌고 諡號는 안소(安昭)이다.
딸은 현감(縣監)을 지낸 최승유(崔承流)와 결혼했다. 한성군(漢城君)이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딸인 비인현주(庇仁縣主)를 아내로 맞이하여 이남삼녀를 낳으니 장남은 유청(惟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左議政)까지 지냈고 녹훈(錄勳)되어 한원군(韓原君)에 봉해졌고 시호(諡號)는 공희(恭僖)이다.
차남은 유증(惟澄)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냈다.장녀는 낭성군한보(琅城君韓堡)와 결혼했고 차녀는 군수를 지낸 남변(南변)과 결혼했고,삼녀는 진사 송여익(進士 宋汝翼)과 결혼했다. 이하략(以下略)
각설(却說), 1457년6월 정축(丁丑) 상왕을 노산군(魯山君)으로 하여 영월(寧越)에 유배하자 공이 못을파서 은지(隱池)라 이름한 것은 "天下有道則見(천하유도즉견)하고 無道則隱(무도즉은)이니라"(논어태백편) 하신 공자님의 가르침과 가정조(稼亭祖)의 충효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고 충성할자리를 골라 충성해야 한다는 교훈까지도 아울러 생각한 숨은뜻(陰志)이 있음을 우리 자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조(稼亭祖)께서는 일찌기 충과 효의 상관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절대적인 가치와 충의 상대적인 가치에 대하여 효우위론(孝優位論)을 폄으로써 인성중심의 사회윤리를 중시한점 등 충의 명분이 척도까지도 제시한 탁견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정조(稼亭祖)의 유훈(遺訓) "아지자손 백대지친(我之子孫 百代旨親)"과 목은조(穆隱祖) 께서 남기신 정훈(庭訓) "시예전가 충효입신"(詩禮傳家 忠孝立身)이란 인생로의 대 지침 실천의 긴요성은 "수인사이대천명"(修人事而待天命)이란 또하나의 가르침을 몸소 체득한 가정선조(稼亭先祖)의 사상에서 우러나온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그후 9회갑(1회갑은 60년X9)의 세월이 흐르는동안 그 어느때부터인가 망월암공(望越庵公)이 파놓은 못 "隱池名(은지명)"은 이 고을의 동리명(洞里名)으로 바뀌어 "은못이"(隱池洞)로 불리우게 되었고 隱池(은지) 는 1936년 (乙亥)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난해부터 일회갑년동안 일시(一時)수도지화(水稻地化)되었던 것을 망월암공(望越庵公) 이십대 주손(胄孫) 세준(世濬)이 540년만에 隱池(은지)로 개칭 복원하게됨을 다행으로 여기며 뜻 있다 하겠다.
-광목공파종회 발간 선조약보에서-
망월암공 諱 蓄之墓
정부인 이천서씨 지묘
망월암공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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