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성 공림(공자 묘)-2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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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의 손자이며, '중용'의 저자인 자사(子思)의 묘역입니다. 자사의 본명이 공급(孔伋)입니다. |
▶ 정치관
공자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교육에 임할 때 목표로 삼은 것은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 군자란 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지위에 어울리는 도덕적 인격 · 정치적 능력 · 인문적 교양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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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의 손자인 공급의 묘역 앞에 세워진 석인상 모습 |
공자는 군자의 양성이라는 교육 목표를 위한 텍스트 또는 경전으로 춘추시대 이전의 여러 나라의 민요나 주나라의 조정에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가요 등을 편집한 《시경(詩經)》과 주나라가 천명(天命)을 받아 왕조를 창시할 시기의 왕조의 기록류를 정리한 《서경(書經)》 등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텍스트들을 사용하였다.
한편 공자는 주나라의 권위가 쇠퇴하여 이윽고 땅에 떨어지는 춘추시대에 속한 노나라의 연대기적 역사서인 《춘추(春秋)》를 편술(編述)했다는 말이 있듯이 영고성쇠가 거듭되는 난세(亂世)를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군자의 양성을 목표로 한 공자의 교육은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텍스트와 난세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현실을 응시하고 통찰하는 눈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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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면에서 바라 본 공급 묘역 |
▶ 인의예지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의예지'였다. 공자의 사상의 핵심은 '인'으로서 스스로 이를 명백하게 규정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박애,도(道),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휴머니즘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남을 부축하며,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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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바라 본 공급 묘역과 묘비 |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이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공자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어려운 것임을 시사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 도,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인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德治主義)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직관(直觀)이 있다. 그는 처음에 위정자 특히 최고 책임의 소재자(所在者)인 군주에 기대를 걸어 각국을 역방하면서 자기 주장을 설명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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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급 묘 안내판 |
▲ 봉분 가까이 바라 본 공급 묘 |
뛰어난 덕(德)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덕을 높여 그 결과 도덕이 고루 퍼져 세상이 저절로 평화가 된다는 바로 그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亂世)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를 교육하고 제자들에게 '인'의 학습을 시킴으로써 고전(古典)의 지식이나 정치기술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치의 요로에 참여케 함으로써 난세를, 유혈이 따르는 강권주의가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사상이 현실적이어서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서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그의 사상은 살아 있을 때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 자사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 무제 이후 중국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한국·일본 등 중국의 주변 국가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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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급 묘역 우측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전방에 공급의 아버지며, 공자의 아들인 공리 묘역이 보입니다. |
▶ 철학
백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미적 부분을 존중하는 것은 유교가 공자 사상의 장점이다. 반면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을 들면 유가의 삼년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는 부모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사람의 도에 맞다고 여겼는데, 묵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비판자들은 삼년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며, 그와 같은 관념이 백성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자, 사상과 묵자 이론은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 이상의 차이라기 보다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공자, 묵자의 사상을 서양 철학으로 분류하면 유심론에 가깝기 때문에 공유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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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묘역 바로 오른쪽에는 공자의 아들인 공리(孔鯉) 묘가 있습니다. 사진 좌측으로 살짝 보이는 봉분이 공자 묘입니다. |
아이러니는 법가와 교리화된 성리학의 외형적 형질이 동일한 요소가 있다. 따라서 공자의 인의지예(仁義禮智)의 도을 교리화한 성리학은 법가주의적 틀을 이식하였다고 판단 할 수 있다. 성리학은 유교에 뿌리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법가에 더 가까운 사상이다. 공자 사후에 변형된 맹자, 순자의 유교 이론, 성리학은 공자와는 무관하다. 추종자들은 자신의 좋아하는 요소를 확장하였고, 성리학은 더욱 심하게 변형된 이론이다.
성리학의 경직성 때문에 공자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존재 하는데, 성리학의 문제까지 공자가 떠넘기는 것은 유교 변형의 역사를 보면 적절하지는 않다는 시각도 있다. 공자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曾子)·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의 무제(武帝) 이후 중국의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또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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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 묘역 |
▶ 가정의 불행
공자는 3세에 아버지를 잃고 생모 안징재와 살았으나 안징재 역시 소년기에 사망했다. 만년에 그의 재취한 아내는 제사상에 육포(肉脯)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처하였다. 그러나 외아들인 백어 마저 공자 자신보다 일찍 사망했다.
백어의 두 부인 역시 이름과 성씨, 친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백어의 가정생활 역시 순탄치 못하여 첫 며느리를 출처하였고, 그 뒤에 얻은 며느리에게서 손자 공급을 본다. 그러나 백어가 사망하면서 새 며느리 역시 어린 손자를 그에게 남겨두고 서씨(庶氏) 집안으로 재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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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리 묘비와 공리 묘역 안내판 |
▶ 기타
- 공자의 문하에서 성선설(맹자)과 성악설(순자)이 탄생하였다.
- 보통 유교는 제자 중 증자-자사로 이어지는 학파를 유교의 적통 학파로 간주한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이자 증자의 제자였던 자사의 손제자(제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을 스승으로 하여 학맥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학파가 형성되었다.
- 공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인 자궁(子弓)의 제자로 이어지는 학파에서 순자가 나왔다. 유교의 한 학파를 형성하였으나 자궁과 순자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에서는 전국시대에 이사, 상앙 등의 법가로 발전했다.
- 곡부 공씨는 공자 이전에도 선조가 있었으나, 가문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공자를 시조로 간주한다.
- 한국의 공씨는 원나라 때 고려로 건너온 공자의 후손 공소(孔紹)를 시조로 한다. 원나라 순제의 조정에서 한림원학사를 지낸 공소는 원나라의 멸망의 조짐이 보이자 고려로 건너왔고 한국 공씨들의 선조가 되었다.
- 당나라 현종때 문선왕으로 추존된 이후 공자를 모신 사당은 문묘(文廟)로 부른다. 신라시대에 한국으로 문묘가 전래되었으며, 이후 고려, 조선에 가서는 성균관에 공자의 사당을 모시므로 문묘는 한국에서는 성균관의 다른 별명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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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측에서 바라 본 공리 묘역 |
▶ 공자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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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리 묘역 좌측에 바로 공자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거의 쌍분처럼 가까이 있습니다. |
▶ 가계와 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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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묘역 전경 |
공림(중국어 : 孔林, 병음 : Kŏnglín)는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취푸 시 북부 일대에 위치한 공자와 그 일족의 묘소로 노목이 펼쳐진 묘역에 10만이 넘는 공자의 자손들의 묘비가 숲처럼 산재해 있으며, 단일 가문의 묘지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1994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공부, 공묘과 함께 삼공으로 등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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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의 묘비는 원나라 성종이 1307년에 내린 시호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새겨져 있습니다. |
취푸의 현성 북문에서 공림의 정문까지는 1,266m 길이의 ‘임도로’(林道路) 불리는 울창한 가로수가 있는 직선로 길이 있다. 현성 출구에는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안회의 묘인 안묘가 있고, 가로수길 중간에는 명대에 지어진 ‘만고장춘’(萬古長春)이라고 새겨진 문과 같은 석방이 길을 또 잇고 있다.
공림의 정문인 이림문(二林門)을 빠져 나가면 성벽에 둘러싸인 광대한 묘역, 공림으로 들어가고, 향전(享殿)이라고 하는 황색 기와의 궁전풍의 배전에 도착한다. 공자의 무덤은 이곳 뒤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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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묘 안내판 |
▲ 좌측에서 공자 묘역 봉분을 바라 본 모습. 우측 봉분은 아들 묘 |
공자의 능묘는 원나라 대에 사수하안(泗水河岸)에 설치되어 예물을 봉납하기 위한 벽돌의 기단이 존재했다. 현재의 공자의 무덤은 반구형의 언덕이며, 전에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고 조각된 묘비가 서 있었다. 문화대혁명 시대에 홍위병이 파괴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때 홍위병은 공자의 능묘에도 침입했지만, 내부에 인골 등의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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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측에서 바라 본 공지 묘역 내 봉분 모습. 앞의 묘비 바로 뒤에도 작은 묘비가 하나 더 있습니다. |
공자의 사후, 공자의 자손들의 무덤이나 공자의 비석 등이 주위에 추가되었다. 공자의 자손은 ‘연성공’(衍聖公)의 칭호가 수여되었고 건륭제의 딸 등 황족 공주를 아내로서 맞이했기 때문에, 무덤의 상당수는 고위 고관의 권위의 상징이 되어 있다. 묘비는 한대 이후, 송, 원, 명, 청 시대를 거치며 3,600개의 묘비가 남아 있다. 1333년(지순 4년)에는 공림 주변 성벽 및 문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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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묘와 아들 공리 묘를 한 화면에 담아 본 모습입니다. |
이후 공림에 13회에 걸친 복구와 확장공사가 대해 진행되었다. 18세기 말기에는 높이 4m, 성벽 길이는 5km 이상에 이르러며, 약 2㎢의 범위를 둘러싸게 되었다. 이 범위에는 2000년의 긴 세월에 걸쳐 묻힌 10만명 이상의 공자의 자손들의 무덤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주대에서부터 가장 새로운 것은 제 76대와 제 78대 자손의 것이다. 1만개 이상의 묘와 묘비들이 오래된 고송들과 어울리며 묘소 전체가 숲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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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묘역 왼쪽에는 공자 사후 6년간 시묘살이를 했다는 제자 자공(子貢)을 기리는 집이 있습니다. |
공자 유적지 항공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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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진 하단의 공묘/공부는 인접해 있으며, 상단의 공림은 공묘/공부에서 약 2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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