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성 공림(공자 묘)-1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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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홀로의 제1차 태산/곡부 행사(2012년 2월)시 찾은 공림 입구 전경 |
산동 취푸에 있는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을 삼공(三孔)이라하며, 1994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공묘(孔廟)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공자가 죽고 1년 후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세운 것이다.
공림(孔林)의 원래 이름은 '지성림(至聖林)'으로, 공자와 그 가족의 무덤이며,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길며,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종족 무덤 및 인조임원(人造林園)이다. 공부(孔府)는 '성부(聖府)'라고도 하며, 공묘(孔廟) 오른쪽에 바로 이웃해 있다. 이는 공자의 직계 장자와 장손이 살던 사유토지이며, 중국 역사상 가장 유구하고 보존이 완전한 귀족 저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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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묘/공부를 돌아보고 지정된 셔틀 차량 타고 공림 입구 도착 |
▲ 공림 초입의 좌우로 비각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공자(孔子) 또는 공부자(孔夫子 : 기원전 551년 9월 28일~479년 4월 11일)는 유가 철학과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 · 사상가 · 교육자이고, 주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유교의 시조이며,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정치적으로는 요순우 삼황 오제의 이상향과 조카를 성실하게 보필한 주나라 주공의 정치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천하주유를 하였으나 받아주는 제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감한다. 춘추시대 말기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魯)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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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대에 지어진 ‘만고장춘’(萬古長春)이라고 새겨진 패방을 지납니다. |
"공자(孔子)" 또는 "공부자(孔夫子)"로 부르는데, "공자(孔子)"의 "자(子)"는 경칭으로 "선생"이라는 뜻이다. 그뒤 여러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大聖至聖文宣王)에 추봉되었고, 원래의 이름인 공구(孔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경칭으로 "공자"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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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방을 지나면 고목으로 이루어진 꽤 긴 가로수 길이 이어집니다. |
▶ 생애 초반 - 출생과 가계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는 결혼하지 않은 관계로, 그는 서자였다. 그러나 후대의 유학자들은 이를 정면으로 언급하기를 꺼리거나, 완곡한 표현으로 덮었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또한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70대였고 안징재는 13세의 소녀였다는 전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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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림(지성림) 입구 전경. 이 곳에서 매표를 하고 들어갑니다. |
공림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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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조상은 전왕조인 은의 자손이 봉함을 받은 송나라의 공족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아버지는 시골의 무사였다. 아버지 숙량흘과 숙량흘의 본부인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 아홉을 두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 몸이 불편했던 이복 형 맹피(孟皮)는 딸 하나를 남기고 일찍 사망했다.
그의 자(字)가 중니(仲尼)가 된 것 역시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되는 공자의 가계는 보통 그의 아버지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숙까지 언급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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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표소를 지나면 입구에서 셔틀 차량을 타도 되고 걸어서 공자 묘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
- 소년 시절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약288센티미터)으로 '장인'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기원전 549년 3세에 아버지 숙량흘이 사망하였다. 공자는 어머니 안징재를 따라 궐리로 이사하였다. 기원전 536년 결혼, 기원전 535년 어머니 안징재가 사망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3년상을 마친 뒤 아버지 숙량흘의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아버지 숙량흘의 재산은 이복 누나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고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또한 어머니 안징재는 곧 장님이 되어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마을의 늙은 선생 밑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어릴 때부터 제사 흉내를 내며 놀았다고 하며 고실, 즉 예로부터의 종교의례·제도·관습에 밝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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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림의 이림문(二林門)인 지성림문(1494년 중건)을 들어서면 공림 내부로 들어서게 됩니다. |
이윽고 17세 때부터 말단 관리가 되어 일을 보면서 노나라의 대학에서 《시경》과 《서경》 등을 배웠고, 또 여러 가지 의식을 맡아보는 관리에게서 예법도 배웠으며, 음악도 배웠다. 공자는 《시경》과 《서경》의 저자인 주공 단을 청년 시절부터 사모하였고, 평생 동안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는 자신보다 박식하여 더 잘 아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을 청했다. 기원전 533년 19세에 송(宋)나라의 견관(幵官)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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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성림문을 지나면 주변 숲 속에 비석과 봉분으로 가득합니다. 거대한 공동묘지에 온 느낌입니다. |
- 관료 생활
회계 출납직인 위사(委吏)를 거쳐 목장 경영직인 사직(司直) 등으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공자는 30세쯤 되어 관리로서의 지위도 얻고,학문에서도 많은 진전을 보였다. 공자의 정치론은 법치보다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세상사 모든 일에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주창하였다.
주공이 다스리던 시대처럼 올바르고 평화로운 세상의 건설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본국인 주나라(周)의 낙읍(洛邑)을 방문하여 문물을 견학하고 귀국하시어 명망이 높아지면서 많은 제자가 모였다. 그의 재주를 알아본 소공(昭公)은 그를 가까이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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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묘 우측 방향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
- 주유 천하
36세 때 소공(昭公) 25년 노나라에 삼환(三桓,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 등 당시 노나라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나라의 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갔다. 공자도 그 뒤를 따라 피난, 기원전 517년에 제나라(齊)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진리를 가르쳤다. 거기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적(正名主義的)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공자를 흠모한 경공은 그를 고문으로 용하여 이를 실시하려 했으나, 예절의 번잡함과 비현실적임을 지적하여 반대하는 대부(大夫) 안영(晏嬰)의 진언으로 좌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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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는 좌우로 무덤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
이에 실망하여 2년 만에 귀국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무렵 노나라 왕의 측근 배신(陪臣)인 양호(楊虎)가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었다. 46세 때 중도재(中道宰)가 되었다. 공자는 52세가 되었을 무렵 대사구(大司寇)로 지위가 올랐다.
그 이듬해에는 노나라의 정공을 따라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도록 하였으며, 난신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이는데 참여하였다(기원전 496년. 실제로는 그러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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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묘 입구 우측 편에 도착합니다. |
이때 제나라에서는 사람을 몰래 숨어들어가게 하여 노나라를 위협하려고 하였으나 공자는 그것을 꿰뚫어보고 회의 장소에 들어가려고 하는 남자를 잡아서 화를 미리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를 맺었다.
삼환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계환자가 주위 나라의 계략에 속아 쾌락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직을 사직한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태 등 여러 나라를 주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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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나루는 측면이 아닌 공자 묘 입구에 세워진 수수교부터 다시 들어 갔습니다. |
- 정치활동
공자의 인망은 갑자기 높아져서 기원전 499년에는 최고 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또한 외교관도 겸하게 되었다. 공자는 순장당할 뻔한 아이를 구하고, 제나라 경공과의 회동에서 입심으로 노나라가 잃은 땅 찾고, 삼환이 거느린 세가지 성, 삼성을 허무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계손사의 책략에 도중에 중단된다. 계손사는 노나라 삼환 계손, 맹손, 숙손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이 무렵, 공산불뉴는 삼환과 계손사의 전횡에 맞써 반란을 일으켰다. 영화에서는 부정적으로 인물로 그려지나, 실제 공자도 삼환도 전횡에 불만이 있어 공산불뉴가 초청했을 때 갈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나라 제자였던 맹의자, 남궁도등의 만류 때문에 가지 않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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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수교(洙水橋)를 건넙니다. |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계손사를 타도하려고 여러 가지로 계책을 꾸몄으나 일이 막 성사되려는 단계에 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계손사의 미움을 받아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대여섯 명의 제자와 함께 자기를 등용해 줄 왕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10년이나 걸린 이 방랑 생활은 공자에겐 가장 괴로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공자를 오래 등용하지 않았다. 왕들은 올바른 길보다도 효과가 빠른 부국강병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이 지금 당장 실현되지 않을 것을 알자 미래에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공자의 정치가로서의 생활은 끝나고, 교육가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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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수교에서 바라 본 개천과 주변 묘지 모습 |
▶ 생애 후반 - 교육 활동
뜻을 펴려고 전국을 천하주유를 하였으나 받아주는 제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공자는 중국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서들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안회, 자하, 자로 등이 유명하다. 또 원래 노나라에 있던 연대기를 《춘추》라는 책으로 다시 편찬했다고 한다.
공자는 두 번 결혼하였으나 본부인 견씨(幵氏)는 일찍 죽고, 두 번째 부인은 식사 문제로 그가 내쳤다. 두 번째 부인을 내보낸 뒤에 두 번째 부인을 제사지내려는 아들 공리를 꾸중하며 내 집에서 나갔으니 네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후 그의 고사를 따르게 되었다. 그뒤 주자가 가모, 서모, 유모의 개념을 도입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이혼한 생모는 어머니로 대접하지 않는 전통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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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수교를 지나면 삼문이 나타납니다. |
공자는 만년을 불행하게 지내다가(아들인 백어가 50세로 죽고, 그 후에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잇달아 죽었다. 공자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어졌다"고 하며 슬퍼하였다.) 애제자인 안자, 자로 등을 잃고 상심에 빠지기도 했다. 아들 백어가 사망하자 그는 며느리를 개가시켰고, 어린 손자를 양육하였다. 그의 손자 자사는 뒤에 공자의 애제자의 한사람인 증자를 스승으로 받들고 문하생이 되어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이어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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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문을 지나면 전방에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으며, 우측에는 공림풍물전(孔林風物展)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
- 제자들
그의 생전에 수많은 제자들 중 안회(顔回)를 수제자이자 계승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안회는 그보다 일찍 사망하여 그는 심하게 애통했다고 하며, 그의 학통을 후대에 전한 인물은 증자와 자궁(子弓)이었다.
덕행(德行)으로는 안회(顔回), 민손(閔損), 재백우(再伯牛), 중궁(仲弓)이며, 언행은 재예(宰豫), 자공(子貢)이며, 정사(政事)에는 재구(再求, 자유(子有)의 본명), 중전(仲田, 자로(子路)의 본명)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이다. 그 외에도 증자(曾子), 자장(子張), 자궁(子弓), 유자(有子) 등이 있다. 이 중 증자는 그의 유일한 손자 자사(子思)를 가르쳤고, 자사를 통해 맹자 학파가 나왔다. 자궁의 손제자들 중에 한 분파는 순자와 한비자로 이어졌고 이는 법가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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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전까지 들어가는 길목 좌우로 화표와 석수 두 쌍이 조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석수는 표범을 닮은 문표(文豹) |
- 만년
아들과 애제자들을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만년에 공자는 스스로를 자평하기를 30대에 이미 일가견(一家見)을 갖고, 40대에 흔들림이 없었으며, 70대에 오셔서는 마음에 꿈은 바가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다.
72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어록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 내려와 천 수백 년에 걸쳐 중원과 동북아 사회의 정치, 윤리 도덕의 규범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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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석수인 외뿔이 괴수 녹단(甪端)를 지나면 향전 앞에 석인상이 한 쌍 서 있습니다. |
▶ 사후
노성화 곡부 주상(魯城化 曲阜 洙上, 현재의 산동성 곡비현 북쪽)에 장사지냈다. 그의 제자들은 증자를 상주로 하고, 부모의 장례처럼 예대로 상복을 입고 그의 묘소 앞에서 3년상을 마친 뒤, 각자 고향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후 증자의 문인들과 증자의 제자이자 친손자인 자사의 문인들, 자사학파에서 갈려나온 맹자의 학파, 자궁의 학파, 자궁의 학파에서 분파된 순자의 학파가 크게 번성하였다. 이후 유교 사상은 인간의 본질이 선하다는 성선설과 인간의 본질은 악하며 예와 법으로서 훈육해야 된다는 성악설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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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전(享殿) 앞에 서 있는 석인상 모습 |
738년 당나라 현종은 공자를 왕으로 추봉하여 '문선왕'(文宣王)의 시호를 내렸다. 1008년 송나라 진종은 시호 지성(至聖)을 추시하여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 되었다. 원나라에 와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되었다.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다른 별칭도 수여되었다.
1645년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 시대에 악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공자묘는 파괴되고 비석 역시 파손되었으며 공자와 유교 관련 서적과 유물 다수가 불에 소각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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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향전 주변 모습 |
▶ 사상
공자의 사상은 제자들과의 언행록격인 논어에 부분적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을 간추린다면 모든 행동의 근본은 인(仁)에 있다고 한다.
공자 생전 스스로 이를 단적으로 밝히신 바 없으나 대체로 지덕(至德), 지선(至善)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인도주의(人道主義)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必也正名乎), 질서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君君臣臣)의 본분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盡己), 남을 부축하며(推己),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악(强惡)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을 비롯한 제덕(諸德)으로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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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전 안을 통해서 뒷편으로 들어가면 드디어 공자 묘역에 들어서게 됩니다. |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하기 싫은 것, 자신이 할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조하는 것을 강악(强惡)이라 하여 악으로 간주했는데, 예 역시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 하였다.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자 악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악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행한다.
또한 그는 군자가 보편적이고 비상대적인데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고 비보편적이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 설파하셨다. 인간은 성인과 군자 외에도 인간적으로 범인과 소인, 악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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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사후 6년간 묘지를 지킨 자공이 심었던 나무는 죽었다고... |
▲ 공자 묘역 입구 우측의 정자는 황제들이 참배시 쉬었다는... |
그러나 인(仁)은 성인만이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마저도 인(仁)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외경(畏敬)할 만큼 어려운 것임을 암시하였다. 그 자신은 예(禮)에 엄격하여 절도가 계셨으며, 엄숙·온화·원만한 성격을 강조하였다. 사상이 현실적, 현세적이고 상식적이었으며 제자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각인(各人)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서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계발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음으로서 제자들을 보다 쉽게 가르칠 수 있었다. |
2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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