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십도의 내용]
[성학십도의 내용]
★ 십도(十圖)란 1) 태극도(太極圖) 2)서명도(西銘圖)
3)소학도(小學圖)
4) 대학도(大學圖)
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7) 인설도(仁說圖)
8) 심학도(心學圖)
9) 경재잠도(敬齋箴圖)
10)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
10가지이다. 1681년(숙종 7) 오도일(吳道一)이 간행하였으며, 1741년(영조 17) 중간되었다.
"천하 국가도 고르게 다스릴 수 있으며, 높은 벼슬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은 행할 수 없다." <출처 : 영남지리답사 松河님 자료 가져옴>
★ 첨부자료 영주시 소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성학십도(聖學十圖) 성학 一도 성학 二도 태극도(太極圖) 서명도(西銘圖)
성학 三도 성학 四도 소학도(小學圖) 대학도(大學圖)
성학 五도 성학 六도 백록동규도(白?洞規圖)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성학 七도 성학 八도 인설도(仁說圖) 심학도(心學圖)
성학 九도 성학 十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 <요석님 사진자료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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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성리학의 두 흐름
성리학은 송나라의 주자朱子에 의해 체계화된 유학사상으로 ‘이理?기氣’의 개념을 통해 우주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고자 한 유교철학으로 대체로 태극론太極論?이기론理氣論?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분된다.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主理論’ 과 ‘주기론主氣論’ 의 두 계통으로 발달했다. ‘주리론’ 은 주자의 견해를 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의 입장에서 ‘이理’(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흡사)와 ‘기氣’(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흡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본원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心性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理(본연本然의 性)는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고 기氣(기질의 성)는 가선가악可善可惡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이理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언적에서 시작되어 이황에 이르러 집대성 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東方의 주자朱子’ 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했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김성일?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일본유학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은 서경덕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울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어 이이에 의해 대성을 보았다. 이것은 우주 만물의 근원을 기氣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이 기氣의 변화?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理는 기氣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롱心性論에 있어서도 본연의 성(理)보다 기질의 성(氣)을 더욱 중요시 했으며 정치?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이후 영남과 기호 두 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했다.
▣ 이황의 생애
정통 성리학의 완성자. 이름은 황, 퇴계는 호.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30대 초반의 모친은 별로 배우지는 못했으나 매우 현명하고 덕성스러운 여자였다.
21세에 결혼하고 23세(중종 1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과거를 세 번 보아 모두 낙방하는 쓰라린 경험을 맛본다. 당장은 쓰라린 일이었으나 길게 보면 그의 인간수련에 좋은 교훈이기도 했다.
율곡이 과거를 아홉 번 보아 모두 장원급제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퇴계는 대기만성형이었다.
27세부터 과거에 합격하기 시작했다. 34세에 승문원 부정자라는 최하위직으로 출발하여 49세에 풍기군수를 끝으로 관에서 물러나기를 결심할 때까지 중앙에서 29종의 벼슬을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로 일시 파면당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그후 고향에 돌아와 조그만 암자를 짓고 독서와 사색에 열중한다.
그의 호인 퇴계退溪는 고 이은상 선생에 의하면 “물러나 시냇가에 거처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49세에 은퇴하여 7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왕명으로 4번이나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 대사성(국립대 총장),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거쳐 학자 문사로서는 최고이 영예인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왕의 정책결정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홍문관과 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예문관의 장) 등의 벼슬을 억지로 한다.
16세의 어린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올리고
68세에 완전 은퇴하여 『주자서 설요』 등 저술작업과 학문연구, 그리고 제자양성에 전력한다.
그는 특히 『주자전서』에 감동하여 침식을 잊고 연구한 결과 ‘동방의 주자’ 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이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대표적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로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이理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기氣가 발하여 이理가 기氣를 타는 것은 7정情이라 했다. 그의 학풍은 후에 영남학파를 이루어 이이의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당쟁과 관련이 있고, 그의 학설은 일본유학계와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현실생활과 학문생활을 엄격히 구분하여 최후까지 학자의 태도를 지켰다.
퇴계는 타고난 학자로서 벼슬에 있을 때나 야野에 있을 대나 손에서 책을 놓는 경우가 없었다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생각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저술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건강을 해쳐 소화불량?안질?현기증에 시달렸다.그러나 만년에 학문을 대성하고 성인의 경지에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을 달관한 탓인지 건강도 저절로 회복되고 수척하던 몸도 원숙한 마음과 더불어 보기좋게 살쪘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를 ‘신명神明,’ 즉 신처럼 존경하고 받들었다.
▣ 이황의 사상
이황의 사상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적 주리론 理氣二元論的主理論’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과, 기대승과의 ‘4단 7정논쟁,’ ‘성경론誠敬論’ 에 있어서는 ‘경敬’ 사상 등으로 요약된다.
1. 이황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진다. 이理는 무형무질의 정신적인 형이상학적 존재이고, 기氣는 유형유질한 물질적인 형이하학적 존재라고 보았다. 이와 기는 상호의존적이나 이를 기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로 파악했다. 이리하여 이理 우위론적 이기론이 그의 본체론을 장식한다.
2.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4단端 7정情의 해석을 놓고 기대승과 벌인 4단7정논쟁이다. 4단이란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단仁之端이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지단義之端이요,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지단禮之端이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지단知之端 이다”에서 인仁?의義?예禮?지知를 말하며, 7정情은 『예기』의 희喜?로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을 말한다.
이황은 심성의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 절대적인 이理와 상대적인 기氣로 임했으며 언제나 인간의 심리현상은 이발기수理發氣隨, (理가 작용하여 氣가 理에 따르기도 하고)와 기발이승氣發理乘(氣가 작용하여 理가 그위에 타기도 함)의 이기호발설로써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순선무악한 4단은 반드시 이理에서 발發해야 하며 가선가악한 7정은 기氣에서만 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대승은 이에 반대하여 이기理氣의 혼륜渾淪이 정情이고 그 정情은 기氣의 작용에 의해서만 발출한다고 보고 이발理發을 인정치 않았다. 또한 4단은 7정에 포함되어 있고 4단과 7정의 근원은 같다고 보아 4단 7정四端七情을 상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즉, 이기理氣는 분리할 수 없고 기氣를 통해서만 이를 알 수 있다고 했다(從氣推理).
3. 그는 평생을 ‘경敬’ 으로 일관했다. “마음을 방만하지 말고 항상 정신을 집중, 통일된 상태로 지녀야 하고 모든 기거동작을 가볍게 하지 말고 모든 일에 조심하고 삼가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말할 때에도 경敬해야 하고 움직일 때도 경해야 할 것이며 앉아 있을 때에도 모름지기 경해야 한다. 이는 일부러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심신이 숙연해 지고 표리가 하나로 되는 경지가 되는 것이라야 한다.”
또한 그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이나 선행후지先行後知를 배격하고 지행병전론知行竝進論을 주장했다. 지와 행, 정과 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본이 되는 것이 ‘성聖’ 이며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경敬’ 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