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공주 송산리 고분군

장안봉(微山) 2012. 12. 27. 21:38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13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1~7번은 고분 번호이며, 8번은 모형관입니다.

처가집에서 가족들과 공주 시내로 나왔습니다. 금강교 오른쪽에는 공산성이 있으나 전에 갔다와서 바로 송산리 고분군으로 갔습니다. 공산성 입구의 정면 도로를 1Km 정도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바로 송산리 고분군이 있습니다. 길 건너에는 공주문예회관이 있습니다.

 

전에는 백제 무령왕릉이라고 한 것 같은데, 지금은 무령왕릉을 포함한 7기 모두를 포함하여 공주 송산리 고분군이라고 하는군요. 당시는 관리가 허술하더니 지금은 주차장도 넓고 고분군 입구에서부터 주변을 잘 가꾸어 놓았습니다.

▲ 송산리 고분군 정문

▲ 송산리 고분군 모형관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 宋山里 古墳群) 정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고분군 모형관이 있습니다. 전시관을 둘러 보고 전시관 뒤로 나가면 6호분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 곳에는 3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데, 왼쪽 봉분이 6호분이고, 오른쪽 봉분이 5호분이며, 뒷쪽에 큰 봉분이 7호분입니다. 이 7호분이 그 유명한 무령왕릉입니다. 십 수년전에는 7호분에 들어가서 직접 내부를 본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고분 입구를 철문으로 닫아 놓아서 안은 들여다 볼 수 없으며, 모형관에서 모형이나 사진으로 내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녕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무령왕릉은 발굴 전까지 왕릉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71년 조사 당시 108 종류, 2906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묘지석이 나와서 삼국시대의 왕릉 가운데서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왕릉이라고 합니다.

 

7호분에서 발견된 유물이 몇 십점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7호분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공주박물관은 문 닫을 뻔 했을 정도입니다.

7호분인 무령왕릉에 문제가 있다는 KBS TV 방송(2004.07.19) [뉴스타임] [이석재의 사건 파일]백제 무령왕릉, 왜 다시 파묻혔나의 내용을 발췌하면...

 

무령왕릉의 이상징후가 뚜렷해진 것은 지난 96년, 공주의 한 대학연구소가 무령왕릉에 대해 1년여에 걸쳐 정밀조사를 했지만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무덤의 벽이 안쪽으로 기울면서 천장에 박힌 벽돌들이 빠지기 직전이었으며, 또 석식 내부에 습기가 차고 이끼가 자라는 등 왕릉 내부가 심각하게 훼손돼 있었습니다.

 

전체 구조가 한쪽으로 기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 손을 댔다가는 이게 더 심각해질 수 있다. 무령왕릉이 이렇게 훼손된 가장 큰 원인은 발굴 직후 문화재 당국이 사적지 조성을 하면서 무덤 위에 흙을 높이 덧씌웠기 때문입니다.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당시 무령왕릉 발굴단원은 무령왕릉 봉분이 이 정도는 됐을 것이다 하고 소위 우리가 추측해서 봉분을 마련한 거죠. 4, 5m 정도 쌓았죠.

 

왕릉 내벽이 덧씌운 봉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서서히 기울면서 발생한 일입니다. 결국 문화재 당국은 지난 98년 무령왕릉을 덮고 있던 봉토의 일부를 다시 깎아내렸습니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고려 없이 겉모습만 중시했던 문화재 정책이 빚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습니다. 무려 1500년 동안이나 원형이 보존됐던 왕릉이 발굴 25년 만에 관리 소홀로 제모습을 잃고 다시 어둠 속에 파묻힌 것입니다.

▲ 6호분 입구

▲ 5호분 입구

▲ 7호분 입구

▲ 7호분 내부 사진

6호분의 입구는 맨 왼쪽에 있으며, 5호분의 입구는 오른쪽에, 7호분 입구는 5호분 입구 뒤쪽에 있습니다. 7호분 입구있는 곳은 좁은 길 옆에 있어서 사진 촬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7호분 앞에는 안내판과 더불어 석실 내부 사진도 있어서 한 장...

▲ 1~4호분 전경

▲ 4호분 입구

▲ 1호분에서 내려다 본 전경

7호분 입구를 지나면 위 왼쪽 사진의 1~4호 고분이 있는 곳이 나옵니다. 1호분이 있는 끝에까지 가면 더 이상 길은 없으며, 다시 돌아 내려와야 합니다. 백제 고분은 고분의 내부가 아니면 봉분만 볼록하게 솟아 있어서 밖에서는 특별히 볼 것은 없습니다.

비공개 10년 … 무령왕릉은 아프다

 

1997년 관람 중단 이후에도 벽돌 파손
졸속발굴에 엉성한 관리 훼손 부추겨

 

2007.11.15  충청투데이 전진식 기자

 

지난 1997년 보존상의 문제로 영구 비공개 조치된 무령왕릉이 관람 중단 이후에도 상당기간 '중병'을 앓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공주시가 용역을 발주하고 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연구소가 조사를 실시, 지난 2000년과 2004년 각각 발간한 '송산리 고분군 제2차 종합정밀조사보고'서와 '송산리고분군 계측용역' 보고서 등에 따르면 무령왕릉은 지난 1996부터 1999년까지 3년간 전체 벽돌의 2.75%인 166장이 깨졌다.

발굴 1년만인 1972년 조사된 435장의 깨진 벽돌과 1972년에서 1996년 사이 추가로 깨진 637장까지 합하면 무령왕릉 전체 벽돌의 20% 이상이 깨져 있는 상황으로, 졸속 발굴에 이은 주먹구구식 관리가 세계문화유산까지 거론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의 훼손을 불러왔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무령왕릉 동벽의 경우 1996년 278장에서 1999년 307장으로 29장이 추가로 깨졌고, 서벽은 275장에서 322장으로 47장이 폐쇄 이후 깨져 있었다고 밝혔다. 남벽과 북벽은 각각 24장, 18장이 추가로 깨진 것으로 조사됐으며, 특히 연도 동벽은 전체 벽돌의 4.8%나 되는 31장이 추가로 깨졌다. 여기에 연도 서벽은 139장에서 156장으로 17장이 더 깨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1996∼1999년 3년간 매년 55.33장의 벽돌이 깨진 셈으로, 무령왕의 시신이 안장된 525년부터 1972년까지 1447년간 매년 0.3장이 깨지고 1972∼1996년 24년간 매년 26.54장이 깨진 것에 비하면 심각한 양상이다. 이처럼 무령왕릉의 벽돌 깨짐현상이 급격히 진행된 가장 큰 이유는 묘실 전면 개방에 따른 환경변화가 꼽히고 있다.

1500년 가까이 완전 차단 상태였다가 갑자기 개방된 데다 유리벽으로 안팎을 인위적으로 차단한 후 조명시설까지 설치하고, 관람객이 끊임없이 왕래하면서 온도와 습도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

또 이전까지만 해도 평지였던 왕릉을 발굴 이후 봉분을 만들어 토압이 왕릉 내부에 작용한 점도 벽돌 파손을 부추겼으며, 내부에 물이 스며들면서 이끼류가 서식해 벽돌 균열 현상을 촉진시킨 것이나 습기 제거를 위해 에어컨을 가동시킨 것도 파손을 부채질했다는게 조사 결과다.

지난 1997년 폐쇄 이후 벽돌 파손 원인으로는 관람시설 봉쇄와 진출입로 개설, 잔디 식재 등 시설공사 과정에서의 외부 충격과 남조류 번식과 결로현상 방지를 목적으로 취해진 제습 등으로 나타났다.

공주시는 1996∼1997년 종합정밀조사 결과를 토대로 1999년 보수공사를 실시하고, 1999∼2000년 2차 종합정밀조사를 실시한 뒤 2003년 항온·항습장치 설치 및 고분군 주변 보수공사를 했으며, 2004년과 올해 각각 계측조사를 실시하는 등 주기적인 계측조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연구소 관계자는 "무령왕릉은 지난 1996∼1999년 사이 상당량의 벽돌이 깨졌으나, 항온·항습장치 설치 등의 조치로 현재는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주 주변 위치도

빨간 압정 부분이 공산성 입구입니다.

 

지도 왼쪽에 공주문예회관과 송산리 고분군(백제무령왕릉) 그리고 그 위 에는 선화당이 있습니다.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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