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탁본의 아름다움

장안봉(微山) 2014. 1. 19. 21:49

 

 

탁본의 아름다움

   
희재 한상봉
  한국서예금석문화연구소장
 
 
탁본(拓本)은 탑본(榻本), 탑본(搭本), 사출(寫出)이라고도 하는데 금석에 새겨진 문자나 그림, 문양에 종이를 대고 찍어내는 것을 말한다. 탁본의 유래는 남북양조 시대부터, 또는 후한 시대 종이가 발명된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헌사의 기록으로 보아 늦어도 5세기 말엽부터 탁본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탁본은 인쇄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성행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이다.
소위 탁본이란 종이문화와 바위문화의 접목에서 나온 하나의 결정체이다. 수천년이 지난 바위에 새겨진 문자나 그림 선각의 무늬들은 현대의 고도로 정밀한 촬영기술로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종이를 원적 위에 덮고 세심하게 묘사하면 문자나 그림의 형태가 나타난다. 기계문화로 캘 수 없는 비밀을 종이와 먹으로 간단히 찍어내어 판독할 수 있느다니 인간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탈본(脫本), 세본(세本)으로도 불리는 탁본은 건탁과 습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엄격히 말해 책으로 장포(裝袍)된 것만 탁본이고 석각의 탁인(拓印)은 탁편(拓片)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탁본의 대상물로는 금(金), 동(銅), 옥(玉), 비(碑) 도기(陶器) 마애(摩崖) 석경(石經) 묘지(墓誌) 등이나 낚시꾼들의 어탁(魚拓)도 성행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어떠한 대상물이든 요철이 뚜렷하면 채탁이 가능하다고 본다. 나뭇잎, 나무결, 풀잎은 집안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며 응용탁으로 아주 좋은 대상물이라 하겠다.
응용탁이란 비갈(碑碣), 종, 금석문 이외의 탁본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정서를 주는 탁본으로 취미탁본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어탁과 엽탁이다. 어탁은 일반적으로 어척(魚尺)이라 불린다. 고기의 크기를 가늠하고자 함이니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큰 고기를 낚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니 정확히 어탁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어탁은 일반적인 탁본의 방법과는 달리 목판본 책을 인출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탁본의 간탁(刊拓)에 알맞는 기후는 봄, 가을로 청명(양력 4월5일)후와 하지(6월 21일) 전, 추분(9월 22일) 후, 입동(11월 7일)이 적시이다. 이때가 인사(印寫)함에 판본과 돌이 잘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먹도 갈아 쓰기에 좋고 일하기도 가장 좋기 때문이다.
눈으로 읽기 어려운 역사적 기록을 탁본으로 판독해
금석학, 즉 탁본을 이야기하자면 중국을 논하지 않을 수 없기에 잠시 중화문화를 살펴본다. 중국은 은시대부터 갑골문자와 종정문(鐘鼎文)이 불완전한 문자부호로 사용되었고 서주시대에 종정문자가 진시황의 천하통일 후 급격한 대전(大篆)문자로 발전했으며, 한 대의 예(隸), 위, 진, 남북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문자가 단순한 부호가 아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갑골문자나 종정문의 탁본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들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마멸되고 사라졌다. 간간이 적은 양이 출토 되어 육안으로 분간키 어려운 것은 탁본으로 판독되었다.
우리나라 남해 금산의 거북바위의 상형문자는 가까운 나라들의 상형문자나 갑골문자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다. 이들은 자형의 동일성과 거북바위라는 점, 거북등에 새겨진 문자의 배치성을 주목할 만하다. 어쩌면 쉽게 판독될 것 도 같은 거북바위의 문자는 회화성 또한 배제할 수 없고 전설과도 무관하지 않은 점을 생각할 때 한층 문자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중국의 문화는 크게 북방문화와 남방문화로 나눌 수 있다. 옛날 중국 북쪽의 종이는 무늬가 옆으로 들어 있는데다 바탕이 두껍고 거칠어 먹이 잘 받지 않았다. 먹은 송연먹을 많이 썼는데 그 빛 또한 푸르고 엷었다. 금석에 칠할 때 유납(油蠟)을 섞지 않기 때문에 북탑(北榻)은 빛이 엷고 무늬와 주름이 있어 마치 엷은 구름이 청천에 흐르는 것 같아 협사(夾紗)라든가 선시탑(蟬翅榻)이라고 불린다. 반면에 남쪽의 종이는 무늬가 세로로 들어 있고 먹은 유연을 쓰며 납과 오금지를 섞어 물에 두들겨서 비문에 바른다. 그러므로 빛은 순흑이며 광택이 있어 오금탁(烏金拓)이라 불린다
요즈음은 학문을 하는 이나 서예가들은 많으나 금석에 대하여 연구하고 공부하는 이는 적다. 사람이 글씨를 배우자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이 여럿 있다. 우선 고인을 한방에 모으고 책상위에서 그 모습을 접하여 손으로 잡고 마음으로 속삭이되 그 자체(字體)와 형세 전측(轉側) 결구(結構)를 연구함에 탁본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쇄된 책자로 글자의 획과 구성을 논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참다운 고법(古法)의 맛과 멋을 추구하려면 고비9古碑)와 탁본을 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뜨거운 물인가 찬 물인가는 마셔본 자만이 알 수 있다 라는 옛 스님의 말씀은 이를 두고 이르신 것이다.
최근 발견된 울진 봉평신라비, 영일냉수리비, 가야고비는 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며 하루속히 완독되어 새로운 기록으로 역사에 올려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저 유명한 광개토대왕비는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영원히 빛낼 유산이다. 압록강을 굽어보는 백두산의 정계비는 조선조 19대 숙종 38년(1712)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하여 천지의 남동 4km지점에 세운 비이다.
필자가 갑자기 정계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탁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은 백두산에 다다라 우리 접반사 김응헌을 따돌리고 "서위압록동위토문고어분수령상륵석위기(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上勒石爲記)" 라는 비를 세우니 이로써 양국의 국경이 압록강, 토문강 선이고 따라서 간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1909년 청나라와의 사이에 두만강으로써 국경협정을 맺음으로써 그 광활한 북간도를 잃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백두산천지와 백두산정계비란 말이다. 천지란 말은 중국사람들이 일컬어 불렀다. 자기네 왕족이 천족(天族)임을 과시 주장기 위하여 천지(天池)라고 하였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문헌과 지도를 살펴보면 대택(大澤)으로 기록되어 단군이 나신 곳이며, 백두산정계비 또한 목극등계비임을 알 수 있다.
백두산 정계비란 어느 때부터 기록되고 입에 오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청나라 목극등이 세운 비를 우리는 마냥 백두산 정계비로 불러왔다. 일본이 청나라와 국경협정을 맺고 그 비석을 없애 버렸으나 다행히 당시 탁본한 것이 국내에 한 두점 남아 있어 역사적으로 귀중한 증거자료가 된 것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 또한 탁본의 일종인 사출을 통해 지금까지 남게 된 것이다.
탁본은 금석문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기술
탁본을 하고 모사(模寫)를 함은 금석문과 고고학 및 그 시대의 모든 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금석류에 새겨진 글을 한 자 한 자 베낀다면 오자나 결자가 생길 수 있으나 탁본을 하면 이러한 염려는 없다. 나아가 아무리 읽기 어려운 금석문이라도 탁본을 하여 놓고 보면 해독하기가 쉽다. 그러니까 탁본은 금석문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기술이다. 탁본술은 금석학의 연구뿐만 아니라 고고학, 문학, 역사학을 하는 사람들도 알아야 할 기술이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해서 자기의 의사를 오래도록 전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이전부터 금속붙이나 갑골석류등에 문자나 그림을 조각하였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전하여 오는 것을 대상으로 사학, 고고학, 문자학의 연구에 바탕을 둔 학문을 금석문학이라 한다. 금속이나 석류 외에 기와, 벽돌, 나무에 새긴 것도 길이 잊혀지기 않기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다시 말해 전탁(鐫拓), 양각, 주(鑄) 대신에 칠(漆), 묵(墨), 주색(朱色)으로 쓴 것도 금석문학에 포함시켜도 타당할 것이며 탁본의 대상인 것이다.
금석문학은 인류가 남긴 유물 중에 새겨진 연대에 의거해서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신사의 발달과정도 살펴보아 올바른 지침으로 삼고자 함이 목적이다. 금석류에 문자나 문양을 새기는 것은 고대로부터 행해져왔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를 연구하는 방법 중에 탁본이 발달되었으니 이는 탁본에 의해서 연구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함이다. 중국은 예부터 탁본을 중요시하여 탁본한 것을 금과 맞바꾸었다고 할 만큼 귀중하게 취급하였다.
금석의 연구는 고고학적 목적과 서체의 연구등 여러 가지 학문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학자들이나 호사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취미로 하고 있다. 탁본이 성행하게 되고 지금까지 적게나마 문헌으로 남아 맥을 유지하게 된 것은 수많은 금석학자와 서예가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이다. 지금도 전국 산하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금석문 보존에 우리 모두 애써야 할 것이다.
1989년 가을호 <한국투자금융>에 게재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동산마술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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