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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사의 재발견 / 명품 열전 ⑨ 고려선(高麗船)

장안봉(微山) 2013. 12. 4.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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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전에 짧은 창검 꽂은 ‘과선’ 개발 … 거북선으로 진화

 

고려사의 재발견 명품 열전 ⑨ 고려선(高麗船)

 

 

‘황비창천(煌丕昌天:아주 화창한 하늘)’이 새겨진 고려 구리거울. 고려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조선강국이다. 조선강국의 DNA를 고려의 조선기술에서 찾는 일은 지나친 역사적 상상력일까. 고려는 당시 독자적인 조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기술로 만든 선박을 고려선(高麗船)이라 한다.

 

“1274년(원종15) 원나라 황제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김방경(金方慶)과 홍다구(洪茶丘)에게 전함(戰艦)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게 했다. 나라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데 만약 만양(蠻樣·蠻은 남중국, 즉 남송) 식으로 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제때 만들지 못할 것을 근심했다.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전라도에 있던 김방경은 이에 고려의 조선기술(本國造船樣式)로 배 만드는 일을 감독했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 열전)

 

남송(南宋)식보다는 고려 기술로 전함을 제작하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단기간에 전함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과 다른 조선기술을 고려가 확보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실제로 김방경은 고려 기술로 전함을 제작했다. 그런 사실은 다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장군 나유(羅裕)가 원나라에 보고하기를, ‘금년(1274년) 정월 3일 대선(大船) 삼백 척을 건조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허공(許珙)을 전주 변산(邊山)에, 홍록주(洪祿遒)를 나주 천관산(天冠山·장흥)에 각각 보내 재목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시중 김방경을 도독(都督)으로 삼아 정월 15일 함께 모여 16일에 시작해 5월 그믐에 크고 작은 배 구백 척을 완성했습니다. 지금 배들은 금주(金州·김해)로 출발했습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27 원종 15년(1274) 6월조)

 

원나라 황제의 명령대로 이해(1274년) 정월에서 5월까지 모두 900척의 전함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만양식, 즉 남송의 기술이 아니라 고려 독자의 조선기술로 불과 다섯 달 사이에 건조했다. 이렇게 만든 900척의 전함으로 이해 10월 고려는 몽골군과 함께 제1차 일본 정벌에 나선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간행한 『고려, 뱃길로 세금을 걷다』 표지의 고려선 조감도.

 

 

日 정벌 당시 中 전함보다 실전에 유용

 

1281년 원나라는 고려군 외에 원나라에 복속된 남송 출신의 군사까지 징발해 제2차 일본 원정에 나섰으나 역시 정벌에 실패했다. 실패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자(충선왕)가 황제를 뵈었을 때… 정우승(丁右丞)이란 자가 아뢰기를, ‘(2차 정벌 때) 강남(江南·남송)의 전선(戰船)은 크기는 하지만 부딪치면 깨어졌습니다. 정벌에 실패한 원인입니다. 만약 고려에서 다시 배를 만들게 해 일본을 치면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30 충렬왕 18년(1292) 8월)

 

선체는 크지만 쉽게 파손된 남송 전선의 취약점을 언급하면서, 정벌에 성공하기 위해선 고려에서 배를 만들 것을 주문한 내용이다. 즉 고려의 전함이 작기는 하나 매우 튼튼해 실전에 매우 유용하다는 얘기다.

당시 중국인도 일본 정벌 당시 ‘크고 작은 전함이 파도에 휩쓸려 많이 부셔졌으나 오직 고려의 전함은 튼튼해 온전하였다’고 증언한 사실(『秋澗先生大全文集』 권40 汎海小錄)이 그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고려는 값싼 비용으로 빠르게 배를 만들면서도 중국 전선보다 단단하고 견고한 독특한 선체 구조를 가진 조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선의 모습과 제작기술의 특성은 무엇일까.

 

“(고려) 관선(官船)의 만듦새는 위는 띠를 이었고 아래는 문을 내었다.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고, (배의 좌우를) 가로지른 나무(橫木:혹은 駕木·멍에)를 서로 꿰어 치켜올려서 포판(鋪板·누각)을 만들었는데, 윗면이 배의 바닥보다 넓다. 선박 몸체는 판책(板簀·판자)을 쓰지 않고, 다만 통나무를 휘어서 굽혀 나란히 놓고 못을 박기만 했다.”(『고려도경』 권33 주즙(舟楫) 관선조)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기록한 고려선의 모습과 제조 기술이다.

고려선은 전체적으로 판자를 쓰지 않고 통나무 형태를 그대로 가공해 제작했다. 자연히 두꺼운 외판(배 옆면)과 무거운 저판(배 밑면)으로 제작돼 외형이 둔중하고 속도가 느려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선체가 무거워 바람이나 파도에 쉽게 전복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선은 전함이나 물자·식량을 운반하는 조운선에 적합하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선은 대부분 목질이 강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를 재료로 해 제작되었다(문경호, 『고려시대 조운제도의 연구와 교재화』, 2012년).

앞에서 말한 대로 일본 원정용 전함 제작을 위해 그 재료를 변산반도와 장흥 천관산에서 구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도 선박용 소나무 제작을 위한 산(封山)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소나무가 풍부했다.

 

 

 

 

배 밑바닥이 넓은 평저선 구조가 강점

 

고려선의 건조 기술은 다음과 같다. <그림 참고>

소나무와 같은 원목을 여러 개 결합해 평탄한 저판(배 바닥)을 만들고, 거기에다 미리 조립한 선수재(船首材이물비우)와 선미재(船尾材고물비우) 등을 고착시켰다.

굵은 가룡목(駕木)을 배의 외판, 즉 배의 좌우 바깥으로 뚫고 나오게 한다. 그 위에 나간을 세우거나 갑판을 깔았다. 이렇게 설치된 여러 개의 가룡목이 선체 내부의 칸막이 구실을 했다. 칸막이를 중국과 같이 판자나 삿자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가룡목을 뱃전 밖으로 연장해 그곳을 잘 이용하는 것이 우리나라 선박의 큰 특징이다. 따라서 배의 모양은 배의 옆 부분이 좀 부른 장방형의 상자 모양이었다.

이러한 선박 구조는 배의 밑바닥이 좁은 첨저선형(尖底線型)의 배에는 사용할 수 없다. 실제 고려선은 배의 밑바닥이 넓은 평저선형(平底船型)을 특징으로 한다.(김재근, 『한국 선박사연구』, 1984년) 이러한 선박 제조 기술은 이미 고려 초기에 나타난다.

 

고려의 군선(軍船) 역시 이러한 선박 구조를 갖고 있다. 궁예 정권 때 왕건은 개성 해상(海商·바다상인) 세력의 후예답게 직접 군선을 제작해 커다란 공을 세웠다.

 

“(914년 궁예는) 왕건에게 배 백여 척을 더 만들게 했다. 큰 배 10여 척은 사방이 각각 16보(步)이며 위에 망루를 만들고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군사 삼천여 명과 군량을 싣고 나주로 갔다.”(『고려사』 권1 태조총서)

 

후백제 근거지인 나주를 공격하기 위해 태조 왕건은 16보(96자, 1보는 6자), 즉 길이 약 30m나 되는 큰 선박을 제조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중국의 전선이 평균 15m 정도임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대형 선박을 제조할 능력을 보유했다. 9세기 후반 이래 장보고의 활약과 개성의 왕건 집안 등 해상 세력이 대두하고, 이들은 대내외 해상무역을 위해 선박을 제조하면서 고려 초기에 대형 선박을 제조할 기술을 축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근래 일본에서 발굴된 자료의 일부다.

1018년(현종10) 4월 고려는 진명 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府署·함경도 덕원 소재)에서 여진의 해적선 8척을 사로잡았는데, 이때 잡혀 있던 일본인 남녀 259명을 일본에 돌려보낸 사실이 있다. (『고려사』 권4)

이때 귀국한 일본인이 당시 전투에 사용된 고려 병선(兵船)을 목격한 기록이다. 현종(1009~1031년 재위) 당시 고려 병선의 특징이 잘 묘사돼 있다.

 

여진족 해적 퇴치와 조운·무역에 활용

 

“고려국의 병선 수백 척이 쳐들어가 적(여진)을 치자, 적들은 힘을 다해 싸웠으나 고려군의 사나운 기세 앞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고려의 병선은 선체가 높고 크다. 무기가 많이 있어 배를 뒤집고 사람을 죽이자, 적들이 고려군의 용맹을 감당할 수 없었다.

고려선에 들어가 보니 이같이 넓고 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층으로 만들어져 상층에는 노가 좌우에 각각 4개가 있으며 노를 다루는 자가 4∼5명 정도 있었다. 병사 20여 명이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층에는 좌우에 각각 7∼8개의 노가 있다. 뱃머리는 적선과 충돌하여 깨부수기 위해 선체 바깥에 쇠로 만든 뿔이 있다. 선내에는 철갑옷과 크고 작은 칼과 갈퀴 등의 무기가 준비돼 있다. 적선에 던져 배를 깨부수기 위한 큰 돌(大石)들도 준비돼 있다.”

(『小右記』(寬仁3년-1019년 8월)

 

뱃사공을 제외한 약 80명의 병사가 고려의 병선에 탄 모습이 실감나게 기록돼 있다. 참고로 1374년(공민왕23) 제주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 장군이 거느린 부대가 배 315척에 2만5605명이라 한다.

척당 약 80명이 탄 셈이다. 조선 초기에 대형 전함의 정원 역시 80명이었다. 요컨대 고려 전기부터 이런 대형 전함을 제조했던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술이 발달한 배경은 뭘까. 고려왕조에선 개방정책 덕에 대외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또한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해와 서해 항로와 한강 등 내륙 수운(水運)을 통해 전국의 조세를 수도 개경으로 거두어들이는 조운(漕運)제도를 실시한다. 또 동해안 지역은 해로를 이용한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다.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막기 위해 연해안 거점도시에 해상 방어관청인 도부서(都府署)를 설치한다. 이 과정에서 조운선과 전선 같은 선박 수요가 상당히 많았다. 이에 따라 독자적인 조선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선 기술은 조선왕조로 계승돼 우리나라 전통 선박 한선(韓船)의 기원이 되었다. 그 가운데 고려의 군선(軍船)이 주목된다. 군선은 다른 배와 달리 뱃전에 짧은 창검(槍劍)을 빈틈없이 꽂아놓아 적이 배 안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과선(戈船)이라 부른 이유다.

이런 형태의 고려 전기 과선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 사이에 검선(劒船)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당시엔 구선(龜船·거북선) 제작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고려선 제작 기술은 이렇게 조선시대 중반까지 계승됐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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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대별 배의 종류

 

고려시대

 

고려는 막강한 수군 함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고려의 왕건은 여섯 차례나 후백제의 견훤을 공략하여 섬멸하였다. 해양 세력을 주축으로 반도를 통일하게 된 통일 고려는 수군 함선 뿐 만이 아니라 조운선과 기타 전투선도 크게 발달하였다.

 

1)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소개된 고려선(高麗船)

 

1123년에 송나라의 서긍(徐兢)이라는 사신(使臣)이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놓은 견문록인 「고려도경(高麗圖經)」이 있는데, 여기에는 주즙(舟楫=船舶) 편에 고려의 순선(巡船), 관선(官船), 송방(松舫), 막선(幕船) 등에 대한 배의 생김새와 만듦새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순선(巡船=순라를 도는 배)의 구조

 

“배 가운데에 돛대를 하나 세웠다. 배의 겻집(鋪板=甲板) 위에는 뱃집(棚屋=樓屋)이 없다. 다만 노를 걸고 고물에 치를 꽂았다. 배에는 정기(旌旗=군의 임무를 나타낸 깃발)를 꽂았으며, 뱃사람과 순라꾼은 모두 푸른색 옷을 입었다.”

순선의 구조에 대한 설명은 한선의 야거리(돛대가 하나뿐인 작은 배) 평선(平船)의 구조와 똑같다.

 

관선(官船=관에서 쓰는 배)의 구조

 

“뱃집의 위는 뜸으로 지붕(덮개)을 덮었다. 그 아래에는 문짝과 창문을 달았다. 뱃전 둘레에는 난간이 있다. 멍에(橫木=가로로 댄 나무)로 양쪽 삼판을 서로 꿰뚫어 내었으며 그 끝은 뺄목이 된다. 배의 윗면은 배밑 바닥 보다 넓다. 배의 선체 안의 (船艙)에는 나무 판자(隔艙壁)나 대나무 삿자리로 가로막아 대지 않았다. 다만 구부려 바로 잡은 긴 통나무 막대기(참나무 장쇠)를 걸고. 그 양끝은 삼판에 꿰어서 박아 서로 쐐기 물림을 하였다. 배의 앞쪽 이물에는 닻줄 물레가 있다. 뱃집 위에는 허리 돛대를 세우고 스무 폭 정도의 돛을 늘였다. 접반선에만 옥막(천막을 친 집)을 설치하였다.”

 

송방(松舫=소나무 배)의 구조

 

“송방은 군산 섬의 배다. 배 앞의 이물비우와 뒤의 고물비우가 다 같이 평평하고 곧게 되어 있다(方頭 方). 배 위의 가운데에 다섯 칸의 뱃집이 있다. 위는 뜸으로써 덮개를 하였다. 앞과 뒤에 작은 선실 방 두개를 들였다.”

 

막선(幕船=막을 둘러 친 배)의 구조

 

“중급과 하급의 사절들이 타고 기다리는데 쓰인다. 위는 푸른 천으로 집을 만들고 아래는 기둥 대신에 긴 장대를 썼으며 네 귀퉁이를 붉게 칠하고 장대를 동아줄로 잡아 매었다.

 

 

 

 

 

 

고려동경속의 고려선(高麗船)

 

고려동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에 고려시대의 구리거울(銅鏡)이 있는데 이 거울의 뒷면에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배의 이물과 고물은 높이 솟아있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각의 그림으로 보아 앞에서 본 고려의 관선의 모양과 똑같이 생겼다. 그림의 위쪽에는 해(세 발가락이 달린 까마귀가 들어 있는 것)와 달(계수나무와 토끼가 들어 있는 것)이 떠있다.

세 발가락이 달린 까마귀(三足烏)는 고구려 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똑 같다. 이 동경의 조각 그림에서 고구려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를 계승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조각 그림의 맨 위에는 황비창천(惶丕昌天) 이라는 명(銘=새겨 넣은 글씨)이 있다.

 

 

 

 

송의 동경

 

1981년에 중국의 강소성 보응현(江蘇省 寶應縣)에서 출토한 동경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해선문동경(海船紋銅鏡)이라고 한다. 거울의 명(銘)은 황비창천이다. 이 거울의 조각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동경의 거울 조각과 비슷하다. 다만 해와 달이 없다. 공주박물관 소장품에 고려동경(惶丕昌天 銘)이 있는데 이 동경의 모양이나 조각의 그림이 중국의 해선문동경과 똑 같다.

 

 

3) 고려전함

 

몽골-고려 연합군은 1274년과 1281년 2차례에 걸쳐서 일본 큐슈의 하까다(九州 博多)를 공략하였다. 이때 타고 갔던 배는 전라도의 천관산 해안, 변산반도 해안과 마산의 합포 등지에서 고려식 선형으로 건조한 전함이다. 고려의 전함에는 평전선(平戰船)과 누전선(樓戰船)이 있다.

 

 

 

 

 

4) 완도(莞島)에서 발굴 인양한 고려선(완도선)

 

1985년에 완도 근해에서 10-11세기 경의 도자기 운반선이 인양되었는데, 배밑은 통나무를 옆으로 이어 마치 뗏목배와 같은 평저선(平底船)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첫 번째 뱃전(杉板)인 부자리(不者里)를 뱃밑 가장자리 토막(庶子) 위에 턱홈을 파서 얹어 놓고 나무못을 박아 무으었다. 그 생김새가 마치 안압지에서 출토한 통나무배의 양쪽 뱃전과 똑 같으며, 그 뱃전을 그대로 가져다 얹어 놓은 것 같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한선의 선형은 10-11세기 이전에 이미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완도 근해에서 발견하여 인양한 이 고려선은 해남 완도 장흥 일대의 연근해를 항해하면서 생활용 도자기와 생활용 토기 등을 무역(貿易)하던 배였다. 이러한 배를 상고선(商賈船) 또는 무역선(貿易船)이라고 한다.

 

이 고려선(莞島船)이 발굴됨으로써 문헌을 중심으로만 논의되어 왔던 한선의 선형이 밝혀지게 되었고, 전래되고 전승되고 있는 전통 한선에 대한 조선 공작 기법(技法, 法式)이 사실로 확인되는 등 여러 가지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이 고려선을 기준으로 해서 전시대와 후시대의 한선의 선형과 조선기술, 조선기법 등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 해양과학교실

 

 

 

 

고려선

 

(1) 송의 徐兢(서긍)이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마중 나온 순례선을 보고 기록한 『高麗圖經』卷 33

 

“官船…官船之制 上爲茅蓋 下施戶牖(들창 유) 周圍欄檻(우리 함) 以橫木相貫 挑出爲棚 面濶於底 通身不用板簀(대자리 책) 唯以矯楺(휠 유)全木 使曲相比釘之 前有矴輪 上施大檣…

 

① 上爲茅蓋 下施戶牖 : 위에 띠로 지붕을 덮고 그 밑 갑판에 창구가 뚫려 있다.

② 橫木相貫 挑(휠 도)出爲棚(시렁 붕) : 굵은 駕木(橫梁)이 양현 외판을 관통하여 현외로 뻗어나가 그 위에 판자를 깔고 시렁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

③ 周圍欄檻 : 兩舷棚部 끝에 난간이 세워져 있다.--梁을 현외로 연장하여 그곳을 잘 이용하는 것이 舟船의 특징

④ 面濶於底 : 갑판부의 면, 즉 배의 너비가 밑의 底板보다 넓다.-平底船型

⑤ 通身不用板簀 : 선체의 칸막이는 加龍木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칸을 내기 위해 판자나 삿자리는 쓰지 않는다.

⑥ 唯以矯楺(휠 유)全木 使曲相比釘之 : 梁 바로 아래에서 양현 외판마다 棒材로써 서로 연결하여 선체에 횡강도를 부여하는 加龍木을 가리킨 것

 

松舫…松舫群山島船也 首尾皆直 中爲舫屋五間…

① 首尾皆直 : 선수재와 선미재가 平直하여 고물과 이물이 뾰족하지 않음

② 中爲舫屋五間 : 가운데 선실이 다섯 칸

 

 

(2) 완도 발굴선

 

① 1984년 전남 신안군 약산면 어두리 앞바다에서 발굴

 

② 청자 3만 645점, 토기 28점, 금속 18점, 목제품과 석제품 10점 발굴, 원광대학교의 윤용삼 교수가 발굴 청자를 분석한 결과 청자 제작 장소는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일대의 청자요이고, 제작 연대는 고려 시대 11세기 중반으로 문종 연간으로 추정. 이 배의 항로는 해남을 출항하여 장흥, 완도, 고흥 등 남해안과 제주로 항해하던 중 침몰.

 

③ 전남대학교의 박상진 교수는 선체 재료를 분석한 결과 저판에 한국 남해안 특산인 비자나무가 사용된 점을 들어 이 배의 건조지역을 남해안 지방인 것으로 추정

 

④ 선형 : 평저선형, 남아있는 저판의 길이 6.5m, 선체 중앙 너비 1.65m. 그러나 만곡부재도 평저한 저판의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저변의 너비는 2.3m 정도(복원한다면 길이 9m, 저판의 길이 7.7m), 너비는 외판이 몇장으로 구성되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H판까지 있다고 하면 3.5m, 깊이는 1.7m

 

⑤ 크기 : 이 정도의 크기의 선체라면 배가 1cm 침하 또는 부상할 때마다 필요한 중량, 즉 매Cm배수톤수는 약 0.2톤. 완도 발굴선은 10여톤으로 추정.

 

⑥ 선체구조 : 완도 발굴선은 저판과 외판으로 逆梯(사다리 제)型 단면을 이룬 일종의 평저선형이고, 저판은 두꺼운 條材 5개를 長槊(창 삭)을 가지고 평탄하면서도 선수미 방향으로 완만한 만곡면을 이루도록 조립하였다. 외판은 흠붙이 겹쳐붙임(클링커)식으로 矩(곱자 구)型斷面 나무 못으로 결착하고, 저판과 외판은 통나무를 L자형으로 성형한 만곡부재를 사이에 두고 서로 고착했고, 선체 내부에는 격벽이 없고 몇 개의 加龍木으로 횡강도를 보강. 저판은 平直面이 아니라 선수, 선미 쪽으로 가며 곡면을 이루고 있어, 저판이 모두 평면으로 되어 있는 전통적인 한선과는 다르다. 돛대는 중앙 선미 쪽에 치우쳐 설치되었고, 돛 하나만 설치.

 

⑦ 중국선과의 비교 : 중국선은 평저선이기는 하지만 외판과 저판은 동일한 두께의 판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고, 더욱 장삭을 써서 저판을 고착한 예는 거의 없다. 게다가 중국선은 외판을 맞대어 붙이는 카벨 이음 방식으로 접합하였고, 皮槊(피삭)으로 판재를 결합한 예는 찾아 볼 수 없고, 격벽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완도선은 격벽이 전혀 없고, 加龍木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⑧ 한선과의 비교 : 외판은 흠붙이 겹쳐붙임(클링커)식 이음으로 동일. 그러나 완도선의 고착 못인 피삭의 모양은 현대 한선의 경우는 뾰족한 나무 못인데 반해, 완도선의 피삭은 못이라고 하기에는 둔탁하고 무뎌 일종의 나무쐐기라고 할 수 있고 그 수도 적어 피치도 넓어 그 결착효과가 의문시 되고 있다. 그외에 완도선은 한선과 같이 격벽이 없고 가용목을 썼다.

 

⑨ 결론 : 완도선은 그 구조방식에서 중국선과 아무런 연관성을 발견할 수 없으며, 우리 고유의 한선의 구조와 공통점을 갖추고 있다. 즉 한선의 시원적 형태를 갖춘 배

 

 

(3) 한선의 정착

 

① 11세기 고려 문종 무렵에 한선의 시원적 형태를 갖춘 완도선과 같은 선체구조법이 파생

② 건조 : 각재를 여러 개 결합하여 평탄한 저판을 만들고, 거기에 좌우현 외판 몇 개를 결합하여 미리 조립해 놓은 선수재와 선미재 등을 상호 고착하여 배가 좀 부른 장방형의 상자 모양의 船殼을 꾸며 놓고, 거기에 駕木과 加龍木 등 횡강력재를 붙인 뒤 필요하면 갑판을 깜.

③ 크기 : 고려 초기부터 사용된 조운선인 哨馬船은 고려 정종 때 1,000석 규모로 제한, 底板을 기준으로 하면 길이 57 척(1척 0.303m, 17m), 너비 13 척(3.93m)

④ 원종(1260-1275년) 연간에 한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 때 중국식 조선법을 따르지 않고 고려식 조선법으로 큰배 300척을 포함하여 900척을 건조한 것으로 미루어 확고한 한선식 조선법이 정착하고, 그 전통이 조선에 이른 것으로 추정

 

 

 

 

 

 

 

고려 평저선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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