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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과 정변의 불씨 남긴 여진 정벌 책임론
고려사의 재발견 윤관과 부국강병책
윤관의 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사적 제323호. 묘역에는 묘와 영당(影堂), 교자총(較子塚), 신도비(神道碑), 재실(齋室) 등이 있다. 조용철 기자
부왕 숙종의 상을 마친 예종은 1107년(예종2) 12월 17만의 군사로 2차 여진 정벌을 단행한다. 1104년(숙종9) 1차 여진 정벌이 실패한 지 3년 만이었다. 넉 달 만인 이듬해 3월 정벌지역에 9성(城)을 쌓았다.
사령관 윤관(尹瓘)이 이끈 정벌은 한마디로 파죽지세였다. 윤관은 휘하의 임언(林彦)을 시켜 9성 중 하나인 영주(英州)성 남쪽 청사에 정벌의 공을 기리는 글을 쓰게 했다.
“『맹자』에, ‘약한 것은 진실로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으며, 작은 것은 진실로 큰 것을 대적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외운 지 오래되었으나 이제야 이 말이 진실이란 것을 믿게 되었다. 여진은 우리보다 군사도 약하고 인구도 적은 데도 병란을 일으켜 많은 백성을 죽이고 포로로 삼았다
… 숙종께서 대로해 군사를 정비해 대의로써 토벌하다가 애석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지금 임금(*예종)은 3년상을 마친 뒤, ‘큰 효도란 어버이의 뜻을 잘 잇는 것이라는 옛 사람의 말에 따라 어찌 정의의 깃발을 들어 무도한 자를 쳐서 선왕의 치욕을 완전히 씻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고려사』 권97 윤관 열전)
윤관은 백성을 죽이고 사로잡은 무도한 여진족을 약한 자로 규정하고, 그들이 강한 고려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강약의 논리로 정벌을 정당화했다. 또 자신의 정벌은 숙종과 예종 두 국왕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 했다. 한 달 뒤인 4월 윤관이 개선하자 예종은 그에게 ‘오랑캐를 평정하고 영토를 넓혀 나라의 근심을 잠재운(平戎拓地鎭國)’ 공신이란 칭호를 주고 2인자인 문하시중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승패를 결정짓는 전쟁은 끝이 아니라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7만 고려 대군과의 전면전을 피해 내륙으로 군사를 후퇴시킨 여진은 고려 주력군이 철수하자 곧바로 대규모 반격을 시작한다. 강약의 논리로 여진을 조롱한 영주 성벽에 내건 현판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이었다.
‘윤관척경입비도’는 윤관이 9성을 쌓고 영토를 개척한 그림이다. [고려대박물관 소장]
9城 쌓고도 여진 공세로 수많은 희생
여진의 반격을 예상해 9성 수축을 반대한 의견도 있었다. 정벌에 참여한 병마부사 박경작은 윤관에게 ‘무공을 떨쳤으니 군사를 거두어 만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오랑캐 땅 깊숙한 곳에 성(*9성)을 쌓는 일은 쉽지만, 지키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윤관은 이를 무시하고 9성을 쌓았다. 그 후유증은 실로 컸다.
“처음 조정에선 병목[甁項] 지역을 빼앗아 방어하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빼앗고 보니 이곳엔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여진의 공세에도) 9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진 않았지만 전투에서 아군은 많이 희생되었다.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 적들이 복병을 두어 성과 성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군사를 징발하자 온 나라가 소란해졌고, 기근과 역병으로 원망이 일어났다.”(『고려사』 권96 윤관 열전)
위 기록과 같이 여진 지역 깊숙한 곳에 쌓은 9성은 실제로 여진의 표적이 되었다. 더욱이 성과 성 사이의 거리가 멀어 방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벌에 따른 군사 징발에다 기근·역병까지 겹쳐 온 나라가 소란할 정도로 민심이 동요했다. 여진의 군사는 윤관이 귀환한 직후인 이 해(1108년) 4월부터 한 달간 9성의 하나인 웅주(雄州)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등 전면 공세를 취한다.
이 해 5월엔 부사령관 오연총이, 7월엔 사령관 윤관이 다시 출정한다. 많은 역사서가 9성 수축을 여진 정벌의 성과로 기록한 것은 편향적이다. 여진 정벌 후 9성 수축까진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후 9성을 반환한 이듬해(1109년) 7월까지 1년간 여진의 일방적인 공세에 시달린다. 9성 수축이 패전을 자초한 셈이 되었다.
9성 반환 직전인 이 해(1109년) 6월부터 사령관 윤관에게 패군(敗軍)의 죄를 묻는 처벌론이 제기된다. 9성 반환론도 동시에 제기된다. 대부분의 관료집단이 처벌론과 반환론에 동의한다.
“김인존은 ‘토지는 백성의 삶의 터전입니다. 지금 성을 서로 빼앗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땅을 돌려주어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契丹)과 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정벌 지역은 우리 땅이고 백성도 우리 땅이라고 정벌의 이유를 거란에 통보했는데, 거란이 조사해 사실이 아닌 것이 드러나면 거란과의 외교 마찰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북쪽의 거란과 함께 9성 설치로 동쪽의 여진을 동시에 방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결코 나라에 복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96 김인존 열전)
고위 관료들, 윤관 처벌 요구하며 출근 거부
9성 반환은 거란과의 외교 마찰을 해소하고 거란과 여진을 동시에 방어하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다. 또한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정벌을 주도한 예종과 윤관은 사면초가에 몰린다.
이 해 7월 재상 등 3품 이상의 고위 관료가 모여 9성 반환 여부를 논의했는데 이들은 모두 반환론에 동의했다. 국왕은 여진에 9성 지역을 반환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처벌 대신 윤관의 지휘권만 박탈한다. 관료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처벌을 요구한다. 이듬해(1110년) 5월까지 처벌론은 계속 제기된다.
“왕(*예종)이 건덕전(乾德殿)에서 조회를 했다. 재상(宰相) 최홍사와 김경용이 대간과 함께 윤관과 오연총이 패전한 죄를 묻는 상소를 올렸다. 왕이 듣지 아니하고 곧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최홍사 등이 궁궐에 가서 오후 4시까지 죄를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재상들이 모두 집으로 간 후 출근하지 않아 관청이 모두 비었다. 왕이 평장사 이오와 중서사인 이덕우 등을 불러 당직에 숙직시켰다. 최홍사 등이 수십 일 동안 출근하지 않았다.”(『고려사』 권13 예종 5년(1110) 5월)
관료들은 처벌론이 관철되지 않자 수십 일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업무를 보지 않은 항의성 시위를 벌인다. 절대권력의 국왕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진 정벌의 후유증은 국왕과 관료집단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예종은 끝까지 윤관을 옹호해 명예를 회복시킨다. 즉 이 해 12월 윤관을 다시 문하시중과 함께 판병부사로 임명해 군사권을 맡긴 것이다. 윤관이 사양하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윤관)가 여진을 정벌한 것은 선왕(*숙종)의 남기신 뜻과 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서 적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9성을 쌓아 나라의 오랜 치욕을 씻은 공은 실로 크다… 관리들의 탄핵으로 관직을 박탈당했으나 내가 그대의 잘못을 따지지 않은 것은 다시 공을 세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고려사』 권96 윤관 열전)
여진 정벌은 이같이 두 국왕의 의지가 담긴 것이며, 그 의지를 몸소 실천한 이가 윤관이었다. 따라서 윤관 처벌론은 단순히 패전 책임을 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숙종·예종이 구상한 새로운 정치에 반대하는 관료집단의 뜻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예종은 윤관을 끝까지 옹호했던 것이다.
예종은 처벌론을 잠재우고 윤관을 다시 기용해 정치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윤관은 다시 기용된 지 5개월 후 사망함으로써 이 정책은 더 이상 추진될 수 없었다. 측근 윤관의 죽음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관료집단의 동의를 받지 못한 정책은 절대군주로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 했던 숙종과 예종의 정치는 9성 반환과 윤관 처벌론을 계기로 분출된 관료집단의 뿌리 깊은 불신과 저항에 부닥쳐 추진력을 잃었다.
숙종과 예종이 추구한 새로운 정치는 무엇일까. 숙종은 외척 이자의(李資義)가 병약한 헌종 대신 자신의 조카를 왕위에 앉히려 한 이자의를 제거하고 즉위했다. 숙종은 기득권층인 외척과 문벌귀족 중심의 정치를 청산하고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부국강병’이라는 실용주의 정책을 시행한다.
이 정책은 적극적인 대외 경략과 과감한 재정 개혁을 통해 개인이나 사문(私門)이 아닌 국가의 부를 확대하려 한 정책이다. 당시 송나라에서 시행된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모델로 삼았다.
『고려사』에서도 숙종의 정책을 또한 신법이라 불렀다. 어진 정치(仁政)와 덕을 앞세운 덕치(德治)를 내세운 유가(儒家)적 군주상과 달리 숙종은 법가(法家)적인 군주상을 지닌,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국왕이었다.
이자겸·묘청의 난과 무신정변으로 번져
숙종의 부국강병책은 구체적으로 수도 천도, 화폐 유통, 여진 정벌의 세 가지다. 예종 전반기까지 추진된 이 정책을 앞장서서 실현한 인물이 윤관이다. 윤관은 숙종의 동생인 승려 의천(義天)과 함께 숙종을 보좌한 최측근이었다. 거란과 송나라는 갑작스럽게 헌종의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한 숙종을 의심했다.
윤관은 두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즉위의 정당성을 알렸다. 그는 화폐를 주조하고 유통시켜 문벌귀족 대신 국가가 유통과 경제권을 장악하는 데 앞장섰다. 문벌귀족의 정치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궁궐을 신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숙종 때 여진 정벌에 실패하자 별무반 편성을 건의했고, 이 군사를 거느리고 예종 때 다시 여진 정벌에 나섰다. 윤관은 두 국왕이 가장 신뢰한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여진 정벌이 실패하자 관료집단은 이를 빌미로 윤관 처벌론을 제기해 두 국왕이 추구한 새로운 정치를 부정하려 했다. 이로써 약 15년간 시행된 한국사 초유의 부국강병책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 파장은 컸다.
국왕과 문벌귀족 세력의 극렬한 대립과 갈등을 낳았고,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물론 끝내는 무신정변이라는 엄청난 정치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여진 정벌을 둘러싼 정치권의 대립과 갈등은 그 신호탄이었다.
고려, 금나라 ‘신하’로 전락 … 묘청의 난 불씨 되다
고려사의 재발견 이자겸과 형제맹약
고려 문벌귀족의 생활을 그린 ‘아집도(雅集圖)’. 고려 후기 제작. [호암미술관 소장]
역사 속에서 권력은 언제나 현실주의자의 몫이었다. 이상주의자에게 권력은 아침 햇살 앞의 이슬에 불과했다. 현실정치의 작동 원리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거란에게 당한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시도한 송(宋)나라의 왕안석이나 현실정치의 개혁을 추진한 고려의 숙종과 윤관이 그런 존재였다.
숙종의 사후 안식처인 ‘천수사(天壽寺) 공사를 중단하라’는 관료집단의 매정한 요구는 현실정치의 냉혹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진 정벌 한 해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때 예종은 국정쇄신을 위해 신하들에게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당장에 부닥친 문제가 천수사 건립 문제였다.
“짐은 천수사 공사를 둘러싼 찬반 논의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선왕(*숙종)께서 공사를 시작했을 땐 반대가 없었는데 승하하신 이후에야 공사를 중지하라는 여론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지세의 길흉을 따져 중단을 요구한 것은 하찮은 이유에 불과하다. 천수사를 세우려 한 선왕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 다만 올봄에 공사를 강행한 것은 잘못이니, 3년 후에 시행할 것이다.”
(『고려사』 권12 예종 원년(1106) 7월조)
천수사는 숙종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숙종의 원찰(願刹·죽은 이의 명복을 빌던 법당)이다. 역대 국왕은 모두 원찰을 지어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숙종 재위 땐 반대하지 않다가 관료집단이 사후에야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관료들은 선왕의 명복을 빌 장소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 속엔 숙종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담겨 있다. 그런데 예종은 이를 묵살한다. 3년 뒤 공사를 재개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석 달 뒤인 이해 10월 윤관에게 명령해 공사를 강행한다. 이듬해에는 윤관을 앞세워 여진 정벌을 강행한다. 현실정치를 무시한 예종의 정치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관료집단, 민생 안정 앞세워 개혁 반대
여진 정벌 실패와 윤관의 사망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예종은 이자겸(李資謙)의 딸을 비로 맞아들인다. 그 돌파구로 당대 최고의 문벌인 인주(仁州; 지금의 인천) 이씨와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
“왕(*문종)은 이자연(李子淵)의 딸을 비로 삼고, 그에게 (최고 명예직인) 수태위(*정1품)라는 벼슬을 내렸다. …… (이자연은) 뒷날 문종의 공신으로 문종의 신주와 합사(合祀)되었다. 아들도 모두 고위직에 올랐다. 이호(李顥)는 경원백(慶源伯)의 작위를 받았다. 이정(李頲)은 문하시중(*종1품), 이의(李顗)와 이전(李顓)도 모두 재상(*2품 이상)을 역임했다. 세 딸은 모두 문종의 비가 되었다. ……이자겸은 이호(李顥)의 아들이다.”(『고려사』 권95 이자연 열전)
이허겸의 묘(인천시 연수구 소재ㆍ사진 위)와 인주 이씨의 발상지라는 뜻(원인재)의 묘 재실 현판.
위 기록과 같이 이자겸의 조부인 이자연 때 그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면서, 인주 이씨는 왕실의 외척 가문이 된다. 아들도 작위를 받거나 재상이 되었다. 문종 이후 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까지, 숙종을 뺀 다른 국왕들은 모두 이자연 때부터 손자 이자겸 때까지 3대에 걸쳐 이 집안의 딸들을 왕비로 맞는다.
이 집안과 고려왕실 간의 인연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문종의 모후는 안산 김은부(金殷傅)의 딸이다. 고려왕실 초기에 ‘백년 근친혼’의 관행을 깨고 처음 맞이한 이성(異姓) 후비였다. 김은부는 이자연의 조부 이허겸(李許謙)의 사위이다. 이허겸 때부터 인주 이씨는 이미 명문가 반열에 올라섰다. ‘가문의 영광’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예종은 이자겸을 외척으로 삼아 자신의 왕권을 보장받았지만, 부왕 숙종을 위한 정치는 포기해야 했다. 나아가 신법에 반대한 문벌귀족세력이 정치적으로 득세하고 뒷날 외척이 발호하는 길을 터주는 실책을 저지른다.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인존·고영신·최계방 등 유교 문신 귀족세력은 당장 숙종과 예종이 시도해온 신법에 반대한다.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이 모두 갖추어 있는데, 떠들썩하게 (신법으로)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성헌을 지키고, 그것을 잃지 않는 것만이 가능합니다.”(『고려사』 권97 고영신 열전)
“공은 정사를 처리하면서 조상의 법을 함부로 고치거나, 새로운 법(*新法)을 만들어 풍속을 동요시키는 것도 기꺼워하지 않았다.”(「최사추(崔思諏) 묘지명」)
곽상(郭尙)은 윤관이 화폐유통정책을 시행하려 하자, 풍속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반대했다
(『고려사』 권97 곽상 열전).
이미 만들어진 법을 따르면 될 일이지, 굳이 새로운 법을 만들어 풍속을 동요시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신법으로 불린 숙종의 부국강병책은 화폐 유통과 여러 형태의 조세를 신설해 재정을 확대하고, 확보된 재원으로 이민족 정벌과 같은 대외 팽창책을 펼쳐 왕권을 강화하려는 외치론(外治論)이었다. 반면 관료집단은 지배층의 도덕적 각성과 민생 안정에 중점을 둔 내치론(內治論)을 내세웠다. 예종은 내치론자와 타협한다.
이자겸, 측근에게 피살 … ‘석 달 천하’ 종지부
예종의 사후 왕실의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국은 급변한다. 잡은 권력은 쉽게 놓치지 않는 법이다. 이자겸은 예종의 아들이자 외손자인 인종에게 다시 두 딸을 비로 들인다.
인종은 모후의 여동생인 두 명의 이모를 비로 맞아들인다.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 된 이자겸은 왕권을 압도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절대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자겸은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시키고 관직을 팔아 자기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 고려 최고작위)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 국왕 생일에만 붙이는 이름)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고려사』 권127 이자겸 열전)
1126년(인종4) 2월 인종은 측근 김찬·안보린 등을 시켜 외척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그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다. 거사에 실패한 뒤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거처할 정도로 왕실과 국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석 달 후 인종은 이자겸 측근인 척준경을 회유해 이자겸을 제거한다. 이자겸의 ‘석 달 천하’는 막을 내린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새로운 사태가 불거진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125년(인종3) 5월 금나라는 고려가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신(臣)이라 하지 않고 황제라 표현한 것을 구실로 삼아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한다.
금나라는 형제맹약을 했던 고려에 신하의 예를 취하라고 압박한다. 조정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중국의) 한나라가 흉노에게, 당나라가 돌궐에게 혹은 신하라 일컫고 혹은 공주를 시집보내어 무릇 화친할 일은 모두 했습니다. 지금 송나라도 거란과 서로 백숙형제(伯叔兄弟)가 되어 대대로 화친하여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오랑캐 나라에 굴하여 섬기는 것은 이른바 성인은 ‘임시방편(權)으로 도(道)를 이룬다’는 것으로, 국가를 보전하는 좋은 계책입니다.”(『고려사』 권97 김부의(金富儀) 열전)
외척 발호와 문벌귀족 失政에 민심 이반
1125년 5월 금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한 직후에 김부식의 아우 김부의가 제기한 견해이다.
이에 ‘대신들은 반대하고 금나라 사신을 베어 죽이자고 극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상들은 이를 비웃고 배척하여 금나라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고려사』 권97 김부의 열전).
그러나 김부의의 견해 속엔 군신관계라는 형식적인 관계를 통해 고려의 안정을 유지하자는 현실론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김부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 주장이 당시 조야에 먹혀들어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고 권력자 이자겸도 김부의와 같은 견해였다.
“금나라가 옛날에는 작은 나라로 요나라와 우리나라를 섬겼으나, 지금 갑자기 중흥하여 요와 송을 멸했다. 그들은 정치를 잘하고 군사가 날로 강해지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어 형세로 보아 섬기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옛날 어진 왕의 도리이니, 마땅히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려사절요』 권9 인종 4년 3월조)
이자겸은 이듬해(1126년) 3월 마침내 금나라에 칭신(稱臣)하기로 결정한다. 고려는 거란과 약 100년간의 분쟁을 벌인 끝에 보주(保州)를 금나라의 양해를 받아 1117년(예종10) 고려 영토로 귀속시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발생한 신흥강국 금나라와의 마찰은 지배층에게 커다란 부담이 됐을 것이다. 칭신 결정을 내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급 관료집단과 일반인의 생각은 달랐다. 금나라에 대한 칭신을 고려왕조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이자겸의 난 이후 나타난 외척의 발호, 개경 중심 문벌 귀족의 현실주의 정책에 대한 평소의 불만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이런 불만은 묘청의 난으로 폭발한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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