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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김부식, 인종도 쩔쩔매는 냉혹한 권력자 변신
고려사의 재발견 김부식과 묘청의 난
고려문신이자 유학자인 김부식 선생의 표준 영정. 작은 사진은 삼국사기. [중앙포토]
1123년(인종1) 송나라 사신 서긍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김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커다란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해 글을 잘 짓고 예와 지금의 일을 잘 알아, 학사들에게 존경을 받기로는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고려도경』 권8 인물조)
한 달가량 고려에 체류한 그가 남긴 평가 속에는 그가 전해들은 고려인의 얘기가 섞여 있어, 당대 고려인의 평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쨌든 서긍의 눈에 비친 49세의 김부식은 고금(古今)을 꿰뚫는 박람강기(博覽强記: 박식하고 총명함)의 기백을 지닌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묘청(妙淸)의 난이 진압된 지 4년이 지난 1139년(인종17) 김부식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국왕 인종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여러 글을 읽게 하고 그를 칭찬하면서, ‘사마광의 충성스러운 절의가 이렇게 훌륭한데 왜 사람들은 당시 그를 간사하다고 했는가?’ 하고 물었다. 김부식은, ‘왕안석의 무리들과 서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지, 잘못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왕은 ‘송나라가 망한 것은 왕안석 때문임이 분명하다’라고 했다.”(『고려사절요』 권10 인종17년 3월)
왕권에 집착한 국왕 인종의 자충수
김부식은 부국강병책을 시도한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보다는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 한 사마광의 구법(舊法)을 더 높이 평가했다. 김부식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4년 전 묘청의 난을 진압한 총사령관이었다. 왕안석에 빗대어 금나라 정벌과 서경 천도와 같은 변법(變法: 신법)이 나라를 위기에 빠뜨릴 위험이 있음을 인종에게 알리려는 것이 그의 진심일 것이다. 인종은 왕안석의 신법이 송나라 멸망의 원인이라고 말해 김부식의 생각에 동의했다.
이 대화 속에서 묘청과 손을 잡고 개경 귀족을 억누르고 새 정치를 추구한 인종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인종 즉위 초에 최고의 학자인 김부식은 약 20년이 지난 이제 국왕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권력자로 변모했다. 왜 이렇게 상황이 급변했을까? 오로지 국왕 인종의 자충수 때문이다.
1126년(인종4) 이자겸은 제거되었지만 ‘개경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 깊어갔다. 그 부담은 인종이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궁궐이 불타고 왕권이 실추된 것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인종은 새로운 정치를 모색한다. 정치의 중심 무대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려 했고, 그에 화답한 세력이 개경 정치에 불만을 가진 서경의 묘청,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이다. 그들은 1128년(인종6) 8월 인종이 서경을 방문했을 때 서경에 새 궁궐을 짓고 새 정치를 할 것을 주문한다.
“묘청 등은 말한다. ‘서경 임원역(林原驛)의 지세는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궁궐을 세워 이곳으로 옮기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습니다. 즉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하며, 36국이 모두 (고려의) 신하가 됩니다’라고 했다.
…또 묘청의 무리는 왕이 황제라 칭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고(*稱帝建元), 유제(劉齊: 금나라의 지원을 받은 한족에 의해 세워진 대제국(大齊國)의 왕)와 협공해 금나라를 없애자고 했다. 식자(識者)들이 다 불가하다 했으나, 그들은 계속 주장했다.”(『고려사』 권127 묘청 열전)
새 궁궐지는 대화세(大華勢), 즉 나무에서 꽃이 피는 대화세(大花勢)로서 풍수지리상 명당이고 길지라는 것이다. 이곳에 궁궐을 지어야 금나라는 물론 주변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한다는 것이다.
김부식, 공신 칭호 받고 정계 실력자로
1129년(인종7) 1월 서경에 신궁(新宮)인 대화궁(大華宮)이 완성된다. 다음 달 인종은 서경에 간다. 1131년(인종9) 8월 대화궁의 외성(外城)인 임원궁성(林原宮城)이 완성된다. 이자겸이 제거된 게 1126년(인종4)이니 불과 3∼4년 만에 서경이 정치의 새로운 중심지로 급부상한 것이다. 국왕 인종이 묘청 세력을 끌어안아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서경 천도가 거의 확정될 무렵 개경 귀족세력이 크게 반발한다. 이자겸과 함께 사대정책을 주도한 김부식과 이자겸 대신 외척이 된 정안(定安: 지금의 전남 장흥) 임씨의 임원애(任元敱) 등이 앞장서 반대한다.
“(1133년 8월) 임원애는, ‘묘청과 백수한 등은 간사한 꾀를 부리고 해괴한 말로 민심을 어지럽혔습니다. 몇몇 대신과 근신도 묘청의 말을 따라 국왕을 잘못되게 했습니다. 장차 생각지도 못할 환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묘청 등을 저잣거리에서 죽여 화의 싹을 끊으십시오’라고 상소했다. 국왕은 답하지 않았다.”(『고려사』 권127 묘청 열전)
묘청을 처벌하자는 임원애의 주장은 개경 문벌귀족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김부식은 1134년(인종12) 인종의 서경 행차에 이렇게 못을 박는다.
“묘청 일당이 국왕을 서경에 오게 하여 역모를 꾀하려 했다. 이에 대해 김부식은 ‘이번 여름 서경 궁전에 벼락이 쳤습니다. 벼락 친 곳으로 재앙을 피하러 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납니다. 가을 곡식을 아직 거두지도 않았는데 행차하면 벼를 짓밟아 농사에 방해가 됩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서경 행차에 반대했다. 왕은 행차를 중단했다.”(『고려사절요』 권10 인종 12년 9월)
김부식의 제동으로 인종의 서경 행차가 없는 일이 되었다. 서경 천도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안 묘청 일파는 1135년(인종13) 1월 서경에서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다.
“묘청은 조광(趙匡) 등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의 명령을 위조해 서경유수와 관원을 잡아 가두고, 서북면(지금의 평안도 일대) 일대의 군사 지휘자와 서경에 거주하는 개경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잡아 가두었다. 군사를 파견해 서경과 개경으로 오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서북면 일대 여러 성의 군사를 징발했다.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정부의 관서를 조직하고, 군대 이름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했다. 묘청이 조광 등과 함께 군마(軍馬)를 호령하여 두어 길로 나누어 곧장 개경으로 향했다.”(『고려사절요』 권10 인종13년 1월조)
난이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이해 3월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토벌할 사령관에 임명된다. 진압 작전에 나선 그는 약 1년 만인 이듬해 2월 난을 진압한다. 국왕은 그에게 ‘충성을 다해 난을 바로잡아 왕조를 안정시켰다’는 공신 칭호(*輸忠定難靖國功臣)를 준다. 이로써 그는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한다.
신라 중심 사관과 유교 통치이념 확립
다섯 임금을 섬겼던 김부식은 곧바로 권력을 휘두른다. 진압사령관 시절 자신의 막료이자 윤관의 아들이기도 한 윤언이(尹彦頤)의 처벌을 국왕에게 건의한다.
“김부식이 말했다. ‘윤언이는 정지상과 결탁하여 서로 죽기로 맹세하고 한 무리가 되어 크고 작은 일을 함께 의논했습니다. 1132년(인종10) 국왕께서 서경에 행차하셨을 때 독자의 연호와 황제로 칭할 것을 요청하고, 국학의 학생들에게 이 일을 상소케 했습니다. 이는 금나라를 격분시키는 일이며, 그 틈을 타서 자기 무리가 아닌 사람을 없애고 반역을 꾀하려 했습니다. 결코 신하로서 할 짓은 아닙니다’라고 했다.”
(『고려사』 권96 윤언이 열전)
신법에 부정적이었던 김부식은 숙종·예종 때 신법을 추진한 윤관의 아들 윤언이도 그런 존재로 여기고, ‘반역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해 그를 제거하려 했다. 국왕도 어쩔 수 없이 양주(梁州: 지금의 경남 양산) 지방관으로 좌천시켰다가, 6년 후 광주(廣州)목사로 임명해 윤언이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 그제야 윤언이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상소를 올린다.
“연호를 제정하자고 건의한 것은 임금을 높이려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태조와 광종의 전례가 있습니다. 신라와 발해도 그렇게 했으나, 큰 나라(*당나라)가 한 번도 정벌하지 않았습니다.
… ‘금나라를 격분시켰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강한 적국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면 막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틈을 타서 반역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대화궁을 짓자는 논의에 가담하지 않아 정지상과도 다릅니다.”
(『고려사』 권96 윤언이 열전)
김부식은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정적을 내칠 정도로 냉엄한 권력자로 변모했다. 1142년(인종20) 김부식은 현직에서 사퇴한 후 왕명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해 1145년(인종23) 완성한다.
“지금의 학사대부들은 중국 경전과 역사는 잘 알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삼국은 일찍 중국과 예로 통해 그들의 역사서 한서(漢書)나 당서(唐書)에 삼국의 사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소략하게 다루어 자세하지 않다. 우리나라 옛 기록은 문장이 졸렬하고 내용이 소략하여 군주의 선악, 신하의 충사(忠邪), 국가의 안위(安危), 인민의 치란(治亂)을 모두 나타내지 못하고 또 교훈을 주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 권44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학자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잘 모르고, 내용이 소략하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편찬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서경 천도운동의 역사의식인 고구려 중심 사관을 수정해 신라 중심의 사관을 확립하려 했다. 또한 묘청의 난 이후 정국 혼란을 수습하고, 유교 정치이념을 확립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이다.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까지도 그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랐던 것일까?
정국은 다시 개경 문벌귀족이 주도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선 그의 발 밑으로 ‘무신정변’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격랑이 밀려오는 조짐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묘청의난
•한자 妙淸─亂
•분야 역사/고려시대사
•유형 사건
•시대 고려
•성격 반란
•발생/시작 일시 1135년(인종 13) 1월
•종결 일시 1136년 2월
•관련장소 서경(지금의 평양)
•관련인물/단체 묘청|김부식
•집필자 하현강
[정의]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
[역사적 배경]
1126년 이자겸(李資謙)의 난 이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정치기강이 해이해졌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서경출신의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거,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개경(開京)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서 그는 인종의 총애와 함께 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했고, 그의 건의에 따라 서경의 명당인 임원역(林原驛 :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에 대화궁(大花宮)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서경천도계획에 반대하는 세력도 많았다.
특히,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항복할 것이며, 많은 나라가 조공할 것이라고 했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대화궁 근처 30여 곳에 벼락이 치고, 인종의 서경 거둥 도중 갑작스런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기도 하였다.
이에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김부식(金富軾)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마침내 인종은 서경 거둥을 단념, 서경천도계획도 그만두게 되었다.
[경과]
묘청 일파의 정치적 목표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개경 귀족 대신 서경인 중심의 새 정권을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금국정벌론 등 자주적 기백과 내정혁신의 의욕도 보였으나, 인심을 현혹시키는 얕은 속임수가 발각되고 재앙이 자주 생겨 서경천도계획을 배척하는 여론이 고조되어갔던 것이다.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은 1135년 정월서경의 분사시랑(分司侍郎) 조광(趙匡), 동 병부상서(兵部尙書) 유참(柳旵) 등과 함께 반기를 들고, 부유수(副留守) 이하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들과 서경에 와 있던 상경인(上京人 : 開京人)들을 잡아 가두었다. 그리고 자비령(慈悲嶺) 이북을 차단, 서북면 내의 모든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天遣忠義)라고 하였다.
이에 정부는 김부식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임명, 반란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먼저 묘청의 일파로서 개경에 있던 백수한·정지상·김안(金安) 등을 처형, 후환을 없앴다. 그리고 좌·우·중 3군을 거느리고 평산역(平山驛)-관산역(管山驛 : 新溪)-사암역(射嵓驛 : 遂安)을 거쳐 성천(成川)에 이르러 토적(討賊)의 격문을 여러 성에 보냈다. 다시 3군을 지휘해 연주(漣州 : 蓮州)를 거쳐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 安州)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들이 정부군에 호응, 협력하였고, 정세는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김부식은 7, 8차례에 걸쳐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실권자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유담·유호(柳浩 : 유담의 아들)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경(分司大府卿) 윤첨(尹瞻) 등에게 주어 개경으로 보냈으나, 개경정부는 윤첨 등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 등은 항복해도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서경 반란군은 정부의 어떠한 회유교섭도 거절하였다. 인종이 보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김부(金阜), 내시 황문상(黃文裳)을 죽였으며, 김부식이 보낸 녹사(錄事) 이덕경(李德卿)도 죽였다.
이와 함께 선요문(宣耀門)에서 다경루(多景樓)까지 강을 따라 1,730칸의 성을 쌓고, 그 사이에 여섯 문을 만들어놓았다.
[결과]
정부군은 서경성 바로 밑에까지 진격, 중·좌·우·전·후의 5군이 성을 포위했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고전하였다. 이처럼 반란군은 1년 넘게 항전을 계속했으나,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1136년 2월 정부군은 총공격을 감행, 서경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조광 등 반란군의 지도자들이 자결함으로써 반란은 끝나게 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난의 특징은 왕권에 도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첫째, 국호·연호 등은 제정하면서 왕을 새로 옹위하지 않은 점, 둘째, 왕에게 거사 소식을 직접 전달한 점에서 서경세력과 개경세력간의 다툼으로 파악될 수 있다.
신채호(申采浩)는 이 난을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난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서경의 권력구조상의 지위가 격하되면서,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개경 세력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던 서경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세력은 왕권마저 능멸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신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사(韓國史)-중세편(中世篇)-』(이병도,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1)
『고려시대사(高麗時代史)』(김상기, 동국문화사, 1961)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연구(硏究)』(이병도, 을유문화사, 1948)
「고려귀족사회(高麗貴族社會)의 제모순(諸矛盾)」(김윤곤,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 한국학중앙연구원
1.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A. 신 등이 서경 임원역의 땅을 보니, 이는 음양가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그 곳에 궁궐을 세워 옮겨 가시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니, 금나라도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해 오며, 주변 36국 모두가 우리의 신하가 될 것입니다. - 고려사 -
B. 정지상 등이 왕께 아뢰기를, “대동강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청컨대 위로는 천심과 아래로는 백성들의 바람에 따르시어 금나라를 타도하소서.”하였다.
왕이 어찌하면 좋은가 물으니 이지저가 “금나라는 강적이니 가벼이 하지 못할 것입니다.”라 하니 왕이 그만두었다. 황주첨 등이 또 칭제 건원할 것을 아뢰었으나 왕이 듣지 아니 하였다. - 고려사 -
C. 금년 여름에 서경 대화궁에 30여 개소나 번개가 떨어졌으니, 만약 그곳이 길한 땅이라면 하늘이 반드시 이렇다 할 리가 없을 터인데 그런 곳으로 재난을 피하러 간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까?
하물며 서경 지방은 추수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만일 거동하신다면 반드시 농작물을 짓밟을 것이니 이것은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끼는 본의가 아닙니다. - 고려사 -
D. 13년(1135) 묘청이 분사시랑 조광, 병부상서 유감, 사재소경 조창언·안중영 등과 서경을 거점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서경)부유수 최재, 감군사 이총림, 어사 안지종 등을 잡아 가두고, 가짜 승선 김신을 보내어 서북면 병마사 이중과 그의 막료 및 여러 성의 수령을 체포해서 서경의 창고에 가두었다. 무릇 개경인으로서 서경에 있던 자들은 귀천과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모두 구속하였다.
그리고 병사를 보내어 절령(嶺)길을 끊고,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의 군병을 윽박질러 징발하였다. 가까운 지역에서 기르는 말도 약탈하여 모두 서경으로 들여갔다. 이들은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건원하여 연호를 천개라 하며, 군대의 칭호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 - 고려사-
E. 인종 13년(1135) 정월에 왕이 천복전으로 나오니 그는 군복을 차려입고 들어와 알현하였다. 왕이 그를 계단 위로 오르라고 명령하고서, “정벌에 관한 모든 업무는 그대의 처리에 맡기니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명령에 복종치 않는 자는 벌을 주라. 그러나 서경 백성도 다 나의 자식이니 음모의 괴수만 섬멸할 것이고 결코 살육을 많이 하지 않도록 삼가라.”라고 말하였다.
2.
A.
서경
대화세 : 풍수지설에서 말하는 최고의 길지
궁궐을 세워 옮겨 가시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니
B.
대동강
금나라를 타도하소서
칭제 건원
C.
대화궁에 30여 개소나 번개가 떨어졌으니 … 그런 곳으로 재난을 피하러 간다는 것은 잘못
만일 거동하신다면 반드시 농작물을 짓밟을 것이니
D.
묘청이 … 서경을 거점으로 난을 일으켰다
E.
정벌에 관한 모든 업무
서경 백성도 다 나의 자식이니 음모의 괴수만 섬멸할 것이고
3.
A. 고려 귀족의 상소로 대화궁에 벼락이 떨어진 것을 들어 서경 길지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농번기임을 강조하여 서경 행차를 반대하고 있다.
B. 서경천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서경파 관료들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C. 묘청의 대표적인 주장으로 풍수지리설을 기반으로 한다.
D. 묘청은 서경으로의 천도가 좌절되자 무력을 이용해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다.
E. 인종이 묘청의 난 진압을 위해 토벌군의 출전을 명하고 있다.
과거를 통해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리들 중 일부가 왕의 측근 세력을 형성하여 기존의 문벌 귀족 세력과 대립하였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그 전의 이자겸의 난은 이러한 문벌 귀족 지배 체제내의 갈등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이자겸의 난 이후 어지러워진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 여러 개혁을 추진하는 인종에게 정지상은 서경 출신 승려인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하였다. 서경 출신인 정지상은 대표적인 왕의 측근이었다.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진 묘청은 수도인 개경의 지덕(地德)이 다했다며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천도하면 고려가 강력한 국가가 되어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러한 묘청의 주장은 신라 말부터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쉽게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경에 새로운 궁을 건설하기로 한다. 그러나 대화궁이 준공되면 금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조공이 들어올 것이라던 묘청의 주장과 달리 달라진 것은 없었고 오히려 불상사가 잇달아 일어났다. 1132년 인종의 서경행차 도중 폭풍우를 만나 수많은 인마(人馬)가 살상되고 왕을 비롯한 여러 신하가 고초를 겪었다. 또한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던 대화궁이 여러 번 벼락을 맞아 불타는 일이 일어나고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는 일이 일어나자 묘청을 향한 인종의 믿음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의 거센 반발에 서경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사태의 반전에 묘청 등은 1135년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과 서경에 와 있던 개경 사람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그리고 자비령(절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면의 모든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칭호를 천견충의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을 원수로 하는 토벌군이 쳐들어오자, 수하에 있던 조광이 그를 살해하였고, 대위국은 1년여를 더 버티다 고려군에게 패망하여 그 자취가 사라지게 되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으로,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한국사 간신열전]
서경 천도·칭제건원의 주인공 - 묘청
간신열전
간신’이란 단어에서 떠올려지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간살스런 얼굴로 “예예!”만 반복하는 예스맨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실제로 이런 인물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단순한 예스맨은 간신 중에서도 가장 하급의 인물이다. 이번 주부터 역사 속의 다양한 ‘간신’들을 탐구해보는 역사작가 최용범의 <한국사 간신열전>을 연재한다.
저자는 뚜렷한 악행을 저지른 간신을 비롯해, 세간의 악평을 넘어서 새로운 시각으로 ‘악인’을 재평가하기도 하고, 혹 과대평가된 인물에 대한 재정립을 시도해보기도 할 것이다. <편집자주>
서경 천도·칭제건원의 주인공 - 묘청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의 주인공 묘청이 간신이라고?
묘청을 간신으로 꼽는다면 의아하게 생각할 독자가 많겠다. 아니 어쩌면 분노까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묘청이 누구인가! 식민지시대 최고의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채 신채호 선생이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평가한 ‘묘청의 난’의 주인공 아닌가.
신채호는 이 묘청의 난이 ‘낭가사상과 불교사상 대 유가’, ‘국풍(國風)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한판 전쟁이며, 전자의 대표자를 묘청, 후자의 대표자를 김부식으로 꼽았다. 이 독립 대 사대의 싸움에서 묘청이 졌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가 1천년간 사대로 이어져 오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탄식하는 것이다.
신채호의 평가에서 보자면, 묘청은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입장에선 민족의 영웅이어야 마땅하다.
과연 그런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묘청의 난이 발생한 배경과 그 전개과정을 보면서 판단해야 할 것 같다. 묘청의 난이 일어났던 12세기초 고려는 위기국면에 놓여 있었다. 1126년(인종4년)에는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는데, 강력한 외척이었던 이자겸의 반란은 고려 왕실에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또한 지배층은 경제발전의 소득을 독차지하면서 향락생활을 즐긴 반면, 일반 백성은 극심한 착취구조에 저항해 살던 곳에서 도망을 가버리는 유망(流亡)현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또한 지배층 안에서도 대대손손 고위직을 지켜가며 권력과 부를 움켜쥐고 있는 문벌귀족과 과거제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 신진관료 사이의 대립이 격화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새롭게 발흥하는 금(金)은 강성한 힘을 바탕으로 고려에 대해 속국이 될 것을 강요했다. 금은 거란을 멸망시킨 데 이어 송(宋)까지 격파해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던 것이다.
여진이 세운 금은 예전에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터라 고려인들은 분노에 떨었다. 그간에도 실력자였던 이자겸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금의 속국이 될 것을 주도했지만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금은 명실공히 대륙의 절대 강자가 된 것이다. 이제 그 누구라도 대륙의 패자 금에 거역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경에 기반을 둔 구신????이 아닌 서경의 신흥세력이 부각되었다. 서경 출신이자 빼어난 시인으로 알려진 정지상은 이자겸 제거에 공을 세운 권신 척준경을 과감히 탄핵해 그를 귀양보내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써 정지상은 인종(仁宗)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정지상은 서경 출신의 승려인 묘청의 사상을 신봉했다. 지덕(地德)이 다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동북아시아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묘청의 주장이었다.
인종을 매혹시킨 천도 주장
정지상의 추천으로 묘청을 만난 인종은 서경 천도 주장에 솔깃했다. 문벌 관료들이 득실거리고, 몸서리치는 반란을 겪은 개경을 벗어나 새로운 기운을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개경과 더불어 고려의 2대 도시인 서경의 인재 풀(pool)을 가동해 친위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결국 서경 천도는 추진되었고, 인종 6년(1128)에는 풍수지리설상 가장 좋다는 대화세(大花勢)의 명당에 해당하는 임원역에 대화궁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대화궁의 낙성을 기념해 서경에 행차하기로 했다. 당시 한겨울에 벌어진 대공사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이 컸다.
이후 묘청과 정지상 등은 서경 천도에 이어 황제 칭호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나라의 자긍심을 높일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금에 항복한 북송인이 세운 대제국(大薺國)과 연합해 금을 협공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개경 세력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도 인종은 묘청과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서경에 자주 행차해 대화궁을 쌓기도 하고 팔성당이란 일종의 만신전을 쌓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인종이 묘청의 말에 대해 신뢰성을 의심하게 된 일이 발생했다. 1132년(인종 10년) 2월 왕이 묘청 일파와 함께 서경으로 가던 중 큰 폭풍우를 만나 인종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고, 수많은 인마(人馬)가 살상되었다.
이에 묘청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그러자 묘청은 무리수를 썼다. 기름이 들어간 떡을 대동강에 던져 수면에 기름이 흘러 오색으로 빛나게 했던 것이다. 묘청은 강물이 오색으로 빛나는 것은 용이 침을 토했기 때문이라며 이는 천년에 한 번 있기도 힘든 상서로운 기운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상서가 있을 때를 놓치지 말고 금나라를 공격하자고 했다. 검교태사를 지낸 이재정 등 서경인 50여 명도 묘청의 주장에 동조했다.
인종으로서는 서경에서 이를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신중했던 인종은 대신 문공인과 참지정사 이준양에게 대동강에 뜬 ‘용의 침’이 무엇인지를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 대동강에 뜬 ‘용의 침’은 기름떡을 가지고 농간한 것임이 탄로났다. 묘청과 정지상 등의 정치적 위신은 크게 실추되고, 조정에서는 묘청 일파에 대한 숙청 요구가 잇따랐다. 그러나 인종은 용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간은 서경의 대화궁에 행차할 것을 요청하는 묘청의 건의를 절반쯤 받아들여 옷만이라도 보내게 했다.
묘청의 ‘반란 아닌 반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묘청 일파의 입지는 좁아지기만 했다.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는 대화궁이 여러 번 벼락을 맞아 불타는가 하면,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던 것이다. 또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던 인종이 풍랑을 만나 큰 위험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경의 대표적 권신인 김부식이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인종도 이를 받아들여 서경 천도 중지 명령을 내리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묘청 등은 인종을 서경으로 납치해 서경 천도를 강행하려 했지만 개경 관료들의 견제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묘청 일파는 정치적 생존은 물론 자신들의 목숨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묘청 일파는 사태가 반전되자 1135년(인종 13년) 정월 서경에서 성급하게 난을 일으켰다.
서경의 최고 행정책임자였던 분사시랑 조광과 군사책임자인 분사병부상서 유참, 재정책임자인 분사대부경 윤첨 등을 끌어들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국호는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로 한 이 나라는 그가 인조에게 권유했던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실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라라고 하기에 대위국은 너무나 어설픈 것이 사실이었다. 묘청 일파는 서경 관료 중 동조하지 않는 자는 구속하고, 서경에 와 있던 개경인은 모두 가두었다. 묘청에 동조한 세력도 모두가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한 개경의 정부군이 반란군을 진압하러 오자 내부 분열이 일어난 끝에 자멸했던 것이다. 반란의 공동 주모자였던 조광이 반란의 중심인물인 묘청, 유참 등의 목을 베고는 항복했다.
그러나 개경의 중심세력은 이들의 투항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쩔 수없이 정부군과 대치한 서경의 반란세력은 1136년(인종 14년) 2월 관군의 총공격으로 두 달 만에 진압되었다.
현실성 없던 ‘금국정벌론’
이상이 묘청의 난의 전부다. 신채호가 후하게 평한 것에 비해 반란은 어설펐고, 칭제건원은 종이에 그린 호랑이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묘청 일파가 주장했던 금나라 정벌은 현실성 있던 주장이었을까?
식민 치하에 있던 신채호가 묘청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금국 정벌이란 그들의 주장 때문이었다. 독립 의지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민족 자주적인 입장에 선 사례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신채호의 기대와 달리 묘청 세력의 금국 정벌 주장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당시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거란족이 세웠던 강대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격파해 대륙의 남쪽으로 몰아냈을 정도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다. 금은 이때 송의 황제를 포로로 잡기도 했다. 금은 중국 영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금을 정벌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이 침략할 경우 나라를 보존하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여진족인 금의 병력은 기마부대가 주력이었다. 이들과 대적할 기마부대가 절대 부족했던 고려가 국경을 넘어 만주 일대의 평원에서 전투를 벌였다면 절대 불리할 것은 자명했다.
고구려와 고려가 방어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들을 붙태워 적에게 먹을 것을 남기지 않고 산성에 올라가 싸워 기병을 무력화시켰던 청야전술(淸野戰術)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려군이 보병 중심으로 정벌에 나서는 것은 짚을 안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물론 인종 전대인 예종 때 윤관이 여진 정벌을 단행해 동북 9성을 축성하는 성과를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고려의 국력을 다 쏟아부어 동북 9성을 쌓았지만 얼마 뒤에는 고스란히 되돌려줘야 했다. 윤관의 여진 정벌은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해 겨우 이긴 싸움이었다. 고려는 예종의 선대인 숙종 당시부터 여진 부락을 공략하기 위해 기병 양성에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더욱이 여진은 요와의 전쟁에 집중해 고려와는 화평하려는 입장이었기에 고려와의 전쟁을 회피했다.
그러나 이제 입장은 달라졌다. 요를 멸망시킨 금으로서는 상대가 누구라도 전쟁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금을 정벌한다는 정책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상징조작의 선수였던 묘청 세력
이런 사정을 묘청 일파는 몰랐을까? 반란군을 제대로 조직할 능력조차 없었던 묘청 세력으로서는 현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묘청 일파에게 금국 정벌의 가능성 여부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금국 정벌과 서경 천도는 국내 정치에 필요한 수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국내용 여론 호도책에 불과한 것이다.
묘청 세력은 3대 광종 사후 세력을 잃었던 서경 출신이 주력이었다. 고려의 주류는 개경 이남 출신의 문벌 세력이었다. 이들 사이의 대립과 투쟁은 필연적인 역사의 과정이라 할 수 있었다.
묘청 일파가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서경으로의 수도 이전이 핵심 포인트였다. 그 명분으로 그들은 금국 정벌이란 대의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인종 역시 이자겸의 난 이후 문벌 귀족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고, 기득권 세력이 포진한 개경을 벗어나고자 했다. 이런 인종의 이해와 맞아 한때나마 묘청은 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묘청이 인종의 총애를 받는 방법은 전형적인 상징 조작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인종 7년 서경에 새 궁궐이 완공됐을 때 인종은 건룡전(乾龍殿)에 나가 앉아서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이때 묘청 등은 이런 말을 한다.
“방금 임금이 건룡전에 좌정할 때 공중에서 선악(仙藥) 소리가 들렸으니 이것이 어찌 새 대궐로 온 데 대한 상서로운 징조가 아니냐!”
그러고는 하표(賀表)를 초안하고 고위 신하들에게 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들리지도 않는 신선의 음악을 들었다고 서명할 신하는 없었다. 앞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대동강에 기름떡을 넣고는 용의 침이라고 사기친 것 역시 상징 조작의 일환이었다.
묘청은 상징 조작으로 뜨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몰락을 재촉하기도 했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병서인 <육도(六韜)>에서는 “허위의 방술, 이상한 기술, 방자한 방법 등으로 남을 저주하며, 사악한 도술과 상서롭지 않은 말로 선량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자”를 경계하고 물리쳐야 할 간신의 하나로 꼽았다. 묘청이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들의 권력 투쟁에 죽어났던 것은 일반 백성이었다. 한비자는 간신의 술책 중 하나가 “자신의 욕심과 사사로운 이득을 채우려는 속셈으로 대대적으로 백성을 동원하여 궁실을 짓고 누각을 세우는 대규모 공사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묘청은 무리한 서경 천도를 강행해 고려 백성의 피눈물을 짜냈다.
<고려사>에는 엄동설한에 공사 독촉을 심하게 해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당시의 신궁 공사 상황을 전한다.
더욱이 묘청은 서경에서 대위국을 일시적으로 세웠을 때는 서경 양부(兩府)부터 주군수(州郡守)까지 모두 서경인만을 임명했고, 개경 출신은 모두 가두었다. 지역 차별에 반대했던 그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을 때는 정작 서경인만을 등용했던 것이다. 반란의 명분조차 잃었다는 얘기다.
묘청이 권력을 얻는 방식이나 세력을 규합하는 방법은 전형적인 간신의 그것이었다. 명분은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이었지만 그것은 허황된 정치적 수사에 그쳤던 것이다. 이자겸의 난을 극복했던 것을 계기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던 기회를 인종은 인재 기용의 실패로 놓쳤던 것이다.
결국 뒤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은 무신란으로 인해 정상적인 정치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르게 된다. 인재 기용의 실패로 왕권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최용범/ 역사작가
....
역사는 사실을 기초로 해석해야한다.
분명한 亂이고 반란이다.
티비사극이나 소설, 일부 치우친 역사물들이 심각한 오류가 있다. 먼저 사료(史料)를 찾아보아 기록된 사실을 바탕으로 내용을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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