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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冥學硏究論叢 第8輯(2000)
朱子․南冥․退溪의 性理學과 經世思想 硏究(Ⅰ)
-「戊申封事」․「 戊辰封事」․ 「 戊辰六條疏」를 중심으로 -
權 仁 浩*
1. 序論
‘改革이 革命보다 어렵다’는 말이 자주 膾炙된다. 한국과 중국의 과거 역대 왕조의 교체와 근대 이후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과 내부의 혁명과 개혁을 지켜보면서도 이 말이 지니는 含意는 아직도 퇴색되지 않는 것 같다. 개혁이란 힘(知識과 정보 및 財力軍武)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 憂患意識을 가지고 역사발전의 추이와 서민대중의 삶 그리고 국가 발전을 위해 그들의 기득권을 양보하고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엄청난(?) 용기가 없으면 공염불에 끝나고 만다. 그렇게 되었을 때 기득권 층 내분에 의해서든, 삶에 지친 민중의 힘에 의해서든, 국력이 약체화되었을 때 이를 침탈하는 외국세력에 의해서든 국가(왕조나 공화국)의 해체 과정1]을 겪게 마련이다.
* 哲學博士, 大眞大 敎授, 本院 常任硏究委員
1]이럴 때 머리에 먹물이 든 이른바 지식인(縉紳 士大夫나 在野山林을 불문하고)은 무엇을 해야 하나?
黃玹의 「絶命詩」와 王夫之의 「讀通鑑論」이 머리를 스쳐간다. 하지만 개화파의 갑신정변과 척사위정파의 상 소문 그리고 이미 때 늦어버리고 친일 매판세력에 의한 갑오을미개혁은 망국에 이은 日帝强占을 가속화하였다. 滅滿興漢과 中體西用을 외치며 민족운동과 근대화 모색은 신해혁명과 ‘打倒孔家店’의 문화혁명으로 이 어지지만 수구복벽과 반식민지의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에 남겨졌다. 그 이후 한국과 중국은 내전과 혁명(60년대 4.19와 문화대혁명)을 겪고 현재까지 똑같이 개혁과 개방을 외치고 있다. 이러한 때 지식인은 과거에 무엇을 하였고 현재에 어떤 어떠한 것을 비판과 분석하여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것일까.
흔히 고려조는 唐代를 모방하고 조선조는 宋代를 모방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적으로는 아마도 국가통치제도나 사회구조 그리고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종교와 학문사상의 면에서 유사한 점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당과 고려의 중앙관제에서 3省 6部制나 그 명칭, 비록 과거제도가 실시되었지만 사회신분에 있어서 귀족중심, 송과 조선조에서 唐末五代시대의 군벌 쿠데타의 악순환과 고려중기 무신정권의 경험으로 인하여 철저한 문신중심의 정치로 인한 대외정책에서 종속 내지 外患에 시달리는 모습, 唐과 고려의 佛敎와 道敎의 수용에 대한 것은 (비록 상대적이지만) 송과 조선의 비판적 태도 등을 비교해 볼 때, 참고와 依樣 그리고 모방이라는 말이 허구는 아니라고 본다.
또한 논자를 포함한 기존의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에 대한 철학사상의 연구가 대개 ‘퇴계는 朱熹(朱子)를 依樣祖述한 바에 그치고 南冥은 朱子를 포함한 陸王的 要所를 포함한다’는 등의 일반적인 논의에 대해 다시금 시론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다시 구체적으로 말해 下學而上達 및 格物致知와 誠意正心의 문제에 있어서 기존의 연구와는 상반된 담론이 가능하다는 것의 일단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 장단점과 함께 반성비판에서부터 이 논문의 문제의식은 출발한다.
또한 근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대한민국의 지나친 對日․對美종속과 모방은 민족허무주의와 함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전반에 걸친 비정체성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 唐․宋․明에 대한 고려와 조선의 事大意識 혹은 元․淸에 대한 굴욕적 稱臣 事大主義는 비록 일시적으로는 주체성이 없는 바 아니지만, 반면 문화의 수용 등으로 단기간에 발전은 가져왔지만 그 폐해가 더욱 많았듯, 현재 우리의 군사외교에서 정치경제적 對美從屬과 문화와 사상 그리고 교육 등의 사회 전반적인 모방은 그 근본적인 문화적 이질성으로 인하여 크나 큰 대가를 치룰 것이라 본다. 당과 송이 왜 멸망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지 않는 태도에서 일본과 미국의 단점은 따지지 않고 따라갈 때 우리도 같은 모습으로 망해 갈 것에 우환의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2]
이 논문에서는 구체적으로 南宋시대 朱熹(1130-1200) 3]의 「戊申封事」4]와 조선시대 曺植 5]의 「戊辰封事」 6]그리고 李滉 7]의 「戊辰六條疏」8]를 중심으로 그들의 性理學과 經世思想을 비교 硏究해보고자 한다.
주자와 남명 그리고 퇴계는 각각 남송과 조선의 왕조 중기에 살면서, 내부적으로는 힘있는 자들의 횡포와 부패무능과 외부적으로는 金 및 여진족(뒤에 後金 그리고 淸)과 日本의 위협에서 시급한 개혁이 필요한 때였다. 때문에 이들이 조정(임금과 대신)에 올린 建白(상소문)은 당연히 개혁을 요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유학자의 본분이 국가와 민중을 위한 憂患意識에 투철하여 內聖外王과 修己治人임에야!
때문에 이들 세사람의 상소문을 보면 전체적 목적과 이상 뿐만아니라 그 구체적 방법론에 있어서도 大同小異하다. 즉 格君心과 倫理綱常의 회복에 의한 王道政治의 실현을 그 목적으로 하는데에서는 大同하지만, 그러한 대처방안을 도출하는 현실인식과 분석에서는 小異하다.
바로 이 소이한 부분이 외형적으로 제시주장한 왕도정치는 같지만 실현내용에 있어서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과 이로 인한 후대 이들 학문사상의 각 유파가 지니는 성격이 국가사회 나아가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질 수 있는 점이다. 이 논문(1편)에서는 성리학과 경세사상 가운데 경세사상의 배경으로서 구체적인 당시 시대상황과 그 학문사상적 배경을 다루고자 한다.
2]19세기 유럽중심주의에서 이젠 미국 중심주의적인 세계관 속에서 우리 는 보다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을 해야 될 때가 되었다. 즉 서양의 고대 로마 제국이나 근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도, 동 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형성한 몽고제국이나 중세 이슬람 제국도, 동 아시아의 패권을 쥐었던 중국과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려던 일본도 그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몰락했다. 비록 새롭게 “영광이여 다시 한번!”을 외치며 재등장하려는 시도도 있고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도 언젠가는 멸망하고 다시 일어서거나 할 것이다. 벌써 그 조짐을 점치는 학자들의 목소리는 날카롭다. 그 내외부적 요인이 申采浩의 ‘我와 非我의 투쟁’이건, A.토인비의 ‘挑戰과 應戰’이건 역사는 피칭과 롤링을 하며 배가 앞으로 나아가듯, 나사모양으로 돌아 가며 浮沈을 계속하며 진행할 것이다. 과연 그것이 발전이냐 퇴보냐를 불문하고 말이다. 즉 진보사관이건 순환사관이건 아니면 그 절충론이건 간에 역사는 계속되고 그것을 해석하는 시각도 계속되어질 것이다.
권인호,「역사를 보는 눈」(한국철학사상연구회,『우리들의 동양철학』 所收), 동녘, 1997, p.147.
3] 字는 仲晦, 號는 晦庵, 이후 朱子로 통칭. 원래는 徽州務源(지금의 강서)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무원의 저명한 가문이며 부친 朱松은 “名家의 선비 吏部公으로 관직이 상서랑 겸 史事에 이르렀다”(『朱子年譜』권1 상). 그는 秦檜의 여진족에게 항복하자는 매국 정책을 반대하고 여진족의 침입에 저항할 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주희는 19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현의 注簿를 거쳐 훗날 寶文閣待制라는 관직을 지 냈다. 그는 30세 무렵 정식으로 李侗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동의 程頤의 제자이다. 주희는 스승 이동의 사상을 거쳐 정이의 유심주 의 이학 사상을 계승하여 송대 유심주의 이학의 집대성자가 되었다. 주희의 사상은 공자 이후 중국 봉건 시대의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그는 福建에서 태어났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의 학파를 ‘閩學’이라고 하였다.『四書章句集注』,『周易本義』,『朱文公文集』,『朱子語類』 등이 있으며, 그의 정치 사상은 주로『문집』과『어류』 등의 여러 편 속에 반영되어 있다.
4]朱子 59세 때인 南宋 孝宗 淳熙 16년(1188년:戊申: 金 世宗 大定28년)에 올린 상소문이다. 주희는 1187년 9월 江南西路提點刑獄公事待次에 임명 되어 다음해(1188) 5월, 6월, 9월, 10월 등에 황제의 부름에 入待와 사퇴를 반복하다가 11월 이 상소문을 올렸다.
5]字는 健中, 호는 南冥: 1501-1572, 이후 南冥으로 통칭.
6] 曺植이 68세 때인 朝鮮 宣祖 원년(1568년 : 戊辰) 5월에 당시 학자로서 兩大 元老라 할 수 있는 曺植(在野)과 李滉(朝廷)에게 왕의 求言에 부응하여 올린 상소문이다. 이에 앞서 大妃 文定王后가 죽자(1566년 4월) 政局이 일신되고 7월에 왕(明宗)이 조식에게 입대하기를 교지로 청하였으나 사퇴하다가 다시 8월에 尙瑞院 判官으로 불러 思政展에서 布衣로 入待하였다가 사임하고 8일만에 돌아왔다.
7]字는 景浩, 호는 退溪 :1501-1570, 이후 退溪로 통칭
8]李滉의 이 상소문도 曺植의 상소문과 같은 해 8월에 올린 것이다. 李滉은 明宗 년간 勳戚의 跋扈로 벼슬살이와 사퇴를 거듭하다가 명종이 죽은 해(1567년 6월) 6월에 上京 禮曹判書에 임명되나 8월에 사퇴귀향 12 월에 왕(宣祖)이 교지로 상경을 촉구하나 사퇴하였고, 다음해(1568년) 8 월에 判中樞府事로서 이 상소문을 올리고 12월에 「聖學十圖」를 왕에게 올린 다음 다음해(1569년) 3월에 고향에 돌아갔다.
2. 시대적 배경과 憂患意識
1) 宋代와 朝鮮의 사회현실
송대는 중국의 전후 왕조에 비해 관직의 수가 많았고 북송시대부터 주자가 살았던 남송 중기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관료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다. 北宋은 두 황제 徽宗과 欽宗이 開封을 함락한 金에게 잡혀가 망하고 휘종의 九子 趙構가 남송의 高宗으로 臨安(杭州)로 천도(1127)한 후, 남송의 국토는 북송의 3/5정도로 축소되었으며, 江淮이북의 광대한 지역은 송의 판도에서 벗어나 金의 세력권 안으로 귀속되었다. 주자가 12세 때인 소흥11년(1141) 남송의 高宗은 금과 和約을 맺었다. 9]
송은 금과의 장기적인 군사대치로 말미암아 재정부담이 가중되게 되었다. 남송은 평시에 40만 정도의 군대를 두고 있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군대의 증가로 군비가 가중되게 되었다. 여기에 남송의 국토와 인구는 북송 때에 비해 급격히 감소하여 조세의 來源역시 크게 감소하였다.
남송 정부는 재정적 압박을 모면하기 위한 적극적인 경제 정책을 모색하지 않은 채, 가중되는 재정의 부담을 민간에게 떠 맡겼다. 주자가 60세 되던 해인 순희말년(1189) 남송의 화폐수입 총액은 북송의 영종(英宗 : 治平2년)과 신종(神宗 : 元豊년간) 때의 정부수입 총액을 넘어섰다. 10]
군비의 가중과 旱災 그리고 물가상승으로 인한 남송의 재정 압박에도 불구하고 황실의 사치와 관료의 부패는 북송 대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북송때 가장 낭비가 심했던 황제는 徽宗으로, 그가 매월 戶部를 통하여 지출했던 금액은 95만관에 이르렀다. 남송의 고종은 소흥원년에 매월 110만 관을 지출하였으니, 이러한 시치의 정도는 북송 대의 휘종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후 남송 황제들의 사치 또한 이와 같았다.
황제뿐 아니라 문신과 무장들의 부패 역시 이와 같았다. 요직에 있는 관료들은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각지의 비옥한 토지를 겸병하였다. 11]
9] 이승환,『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고대출판부, 1998, pp.324-325.
이에 앞서 북송 太宗 雍熙3년(986) 燕雲 16주를 회복하고 遼를 정벌하고자 북벌을 개시했으나 실패하고 방어적으로 있다가 眞宗 景德원년(1004) 요의 聖宗과 蕭太后가 친히 20만 대군으로 남진하여 송의 재상 주전파 寇準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제와 주화파의 주장이 우세하여 강화하니, 형제지국과 매년 은 10만냥과 비단 20만필을 바친다 는 것으로 이른바 ‘전연의 맹약’이다.
요의 興宗 때 西夏와의 긴장된 국면을 이용한 요는 침공하겠다고 위협하여 송은 은과 비단을 각각 10만냥과 10만필을 추가로 바치게 되었다. 금은 요를 멸망한 후 북송도 멸망시켰다.
남송은 금에게 稱臣하고 歲貢으로 매년 은35만냥과 비단25만필을 바치기로 하였다. ‘紹興和議’ 이후 20여년간 송과 금은 대체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주자가 34세 때인 隆興원년(1163) 남송의 孝宗은 주전파인 張浚을 앞세우고 북벌을 시도하다 좌절당하게 되어 다시 금과 굴욕적인 ‘隆興和議’를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송과 금은 ‘叔侄之國’이라는 치욕적인 관계로 전락하게 되었다.
금과의 굴욕적인 화의를 놓고 남송 조정에서는 主戰과 主和의 두 의견이 일어나 격렬하게 당쟁을 벌이게 되었다.(송 당시 시대상황에 대해서는 이승환, 위의 책 pp, 324-330과 趙東元,「朱熹의 社會改革論」,『歷史와 人間의 對應』所收, 한울, 1989, pp.253-297. 徐連達외,중국사연구회 옮김,『중국통사』청년사, 1989, pp.489-570. 참조)
10]농토와 인구는 격감한데 비해 부세의 수입이 이처럼 늘어난 것은 결국 民戶의 부담이 배로 늘어난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재정 압박을 모면하게 위하여 지폐(會子)를 남발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水旱이 겹쳐 ‘물가 등귀’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승환, 위의 책, p.325) 莊季裕는 그의『鷄肋編』에서 당시의 물가 등귀현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建炎이후 江, 浙, 湖, 汀, 閩, 廣 지역에는 西北에서 유랑해온 사람들로 가득찼으며, 紹興 초기에는 밀(麥) 1斛이 12,000錢에 달했다.”
특히 소흥년간(光宗재위시)에는 水旱으로 인한 재해가 심각하여 각지의 양곡 값이 몇 배씩 등귀하기도 했다. 張孝祥은『于湖文集』에서 이러한 물가등귀 현상을 묘사하기를 “소흥 초년에 江西지방에 가뭄이 들어 쌀 한 되(斗)가 수천錢에 달했다.”고 적고있다.『宋會要輯稿』에서도 “福建路가 너무나 가물어 미곡 값이 翔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1]남송 초에 재상을 지냈던 秦檜(1090-1155)는 생전에 얼마나 많은 토지를 겸병하였는지 그가 죽은 후에도 자손들은 매년 10만곡의 조세를 거두어 들일 수 있었다. 남송 중기의 權臣 韓侂冑(1152-1207)는 開禧北伐 의 실패 이후 몰수당한 토지가 무려 72만곡에 이르렀으며 이밖에도 몰수당한 현금이 130여만 관이나 되었다. 남송 초기의 장군 張浚(1086-1154)은 토지를 여러 州와 縣에 분산하여 소유하고 매년 60만 곡을 조세로 거두어 들였으니, 紹興府가 매년 가을에 징수하는 秋稅의 총량을 넘어서는 양이었다. 장준은 당시의 재상 진회가 지기 집에 왕림하자 수백 가지의 과일로 연회를 베풀고 金器1천냥, 진주6만9천 개,고급 비단 1천 필과 각종보석과 서화 1백여 점을 헌납했다고 하니 그 사치한 생활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抗金名將 岳飛(1103-1142)는 남송의 유명한 장군 중 가장 적은 양의 토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려 토지는 80경에 이르렀다. 북송 仁宗때 조정에서는 관원들의 토지 소유 한계를 30경 이내로 규정하였지만, 악비가 소유했던 토지는 이러한 규정을 2.7배나 뛰어넘는 것이었다. 청대의 사학지 趙翼은『陔余叢考』에서 “남송 장군들의 사치는 前 代를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고 고증하고 있다.(이승환, 위의 책 p.326)
토지 겸병과 豪富의 기풍은 중앙 요직에 있는 관료․장수의 경우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남송 초년에는 전란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버려두고 피난을 떠났으며, 지방관부의 토지 版籍도 대부분 戰火로 불타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權貴之家에게 토지겸병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권귀지가는 지방의 관부와 결탁하여 토지를 은닉하거나 농민의 田地를 搶占하는 이리 다반사였다. 토지겸병의 악습은 남송말년 理宗재위시 극에 달하여 “權貴之家가 民田을 점탈한 것이 어떤 경우는 수천만 畝에 이르고 혹은 수백리에 걸쳐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紹興 4년(1134)에 客戶의 비율은 전체 호구의 36.1%에 도달하였으며, 심지어 토지를 소유하지도 않았지만 국가의 호적에는 5등호로 분류되어 여전히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無産稅戶’가 대량으로 출현하였다. 토지가 없는 佃戶들은 매년 지주에게 수확량의 절반을 地租로 바쳐야 했으며, 이외에도 耕牛의 사용료와 種粮 대금을 별도로 지불해야 했다. 지방의 관부는 각종 방법으로 조세 명목을 만들어 냈으며, 豪門大戶와 결탁하여 조세의 부담을 민호에게 떠넘겼다. 주자는 남송의 이러한 조세제도에 대하여 “옛날의 착취제도가 本朝에 모두 구비되어 있구나!”라고 한탄을 한다.
北宋 초부터 중앙집권에 따른 당말 이후 五代 시대에 발전한 지방정권에 대한 소외정책과 중앙귀족과 결탁한 형세호들의 토지겸병과 수탈은 민중들의 기의반항으로 나타났다. 태종 淳化 4년(993) 봄에 巴蜀 四川 지방의 王小波․李順의 起義와 兩浙지방에서 徽宗 宣和 2년(1120) 10월 방납의 기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명나라 중엽에도 權貴들의 토지겸병과 수탈로 英宗 正統연간(1436-1449)에서 武宗 正德연간(1506-1521)에 葉宗留, 鄧茂七, 劉通, 李原, 劉六, 劉七 등의 농민기의가 계속 이어졌다. 조선도 훈척파와 이에 연결된 지방 토호들의에 의한 토지겸병과 수탈은 과전법이 파탄되어 지주제를 심화시켜, 견디지 못한 민중들은 군도․화적 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대․송에 있어서 토지문제의 핵심은 대토지소유인데 이를 둘러싼 당시의 토지 문제를 정리 하면 크게 ① 대토지 소유와 그 경작지와의 관계 ② 대토지소유와 중소토지 소유와의 관계 ③ 국가와 대토지소유와의 관계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하고 있다.12]
조선 중기 남명과 퇴계의 생몰연간에도 남송의 주자시대와 못지 않은 양반관리들, 즉 勳戚派와 보수적 사림파의 海澤開發과 堰田擴大,王子.駙馬家가 謀利輩와 연결되어 防納의 利權을 나눠가지고 호화혼수,호화저택 新築과 補修 등 사치풍조는 점차 일반 양반가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민중으로부터의 수탈은 加重되었다.13] 이익을 옹호하여 당시 훈구파 귀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백성이 가렴주구를 당하여 유민화하고 도적이 창궐 14]하는데도 퇴계는 관청의 행정을 시비하는 자, 舊官을 전송하는데 불참하는 자도 중벌을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15]
이것은 남명의 제자 鄭仁弘이 “部民은 누구나 잘못된 守)과 胥吏를 告訴할 수 있게 하고 軍卒은 將官의 非理를 中央에 報告할 수 있어야 民情이 위로 전달되어 시정을 도모할 수 있다.”16]라고 하여 정인홍이 임진왜란 당시 관리와 장수의 횡포에 백성이 오히려 도망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당시 폐지되었던 ‘部民告訴之法’을 부활하고자 한 것과 퇴계의 주장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민중들의 貪官汚吏들에 대한 고소고발이 이뤄졌다면 과연 南宋과 조선중기의 사회상황에서 貪虐汚職으로 인한 群盜義擧 혹은 反抗騷擾가 창궐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당시 학자관료들의 현실과 유리된 ‘尊天理去人欲’을 내세운 주자성리학의 학문사상과 그 주장이 갖는 이중성 및 反民本 나아가 反儒學的 성격은 비판받아야 한다.
12]閔斗基 編, 『中國史時代區分論』所收, 梅原郁, 崔熙在 譯, 「時代區分 論爭에서 본 宋代史의 特質論爭」, 창작과 비평사, 1985, p.201
13] 李泰鎭,『한국사회사연구』지식산업사, 1986, pp.234-249.
권인호,『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 한길사, 1995, pp. 38-71. 참조.
?明宗實錄? 권20, 6년 9월. ‘近見民生, 十室九飢, 中外皆然’이라하여 당시 민중의 굶주리는 참상을 전하고 있다.
14]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조선통사? 상, 오월, 1988, pp.366-369 참조; 김식(1519), 순석(1530년경), 오연석(1557), 임꺽정(1559-1562) 등 전국에 걸쳐 양반귀족들의 가렴주구와 흉년 등에 의해 민중들의 流賊화와 폭동이 계속되었다.
15]권인호, 앞의 책, pp.227-228.
16] ?來庵集? 상, 「辭義將封事」(아本 p.76) 참조.
2) 朱子와 南冥의 현실인식과 憂患意識
朱子는 南康軍에서 知事로 근무하던 淳熙7年(1180), 孝宗에게 올린『庚子應詔封事』에서 당시 民戶들의 피폐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제가 南康 지방의 상황을 살펴보니, 토지가 척박하여 생물이 자라나지 못하고, 수원이 마르고 얕아 쉽게 고갈되며, 인민이 희소하고 곡식 농사가 안되어 이미 빈궁한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지방의 부세는 다른 지방에 비해 편중되어 주배 내지 다섯 배나 됩니다. 민간이 비록 힘을 다하여 농사를 짓는다 해도 거두어들이는 이익이 부세를 나부하기에도 모자라서, 반드시 별도의 방법을 강구해야만 관청에 바칠 세금을 채워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는 공고한 의지도 없고 정해진 생업도 없어서, 힘을 다해 농사를 지어 후손을 위한 장기계획을 세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요행히 풍년을 만나면 거친 곡식으로 눈앞의 편안함을 구차하게 때우지만, 한 번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 사방으로 유랑하여, 자기 밭과 오두막을 여니숙과 달리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외로 나와 사방을 둘러보면 황폐한 밭이랑과 부서진 집들만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17]
또한 주자는「戊申封事」에서도 “신이 오늘날 천하의 상황을 살펴보니, 마치 인체에 중병이 들어 안으로는 심장과 腹部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는 四肢에까지 퍼져, 터럭 하나에 이르도록 병이 들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비록 기거하고 음식을 먹는데는 큰 지장이 없지만, 그 증세가 위급하고 긴박하여 의사가 쳐다보기만 하다가 (치료할 것을 포기한 채) 도망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병은 반드시 扁鵲이나 華陀와 같은 명의가 만든 神丹과 妙劑로 내장과 위를 세척하여 그 病根을 제거하고 난 후에야 요행히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18]
한편 南冥은 명종 10년(1555년) 「乙卯辭職疏」에서 “殿下의 나라 다스리는 일이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해가고, 천심(天意)가 벌써 떠났으며 民心(人心)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이는 비유하건대 마치 백년이 된 큰 나무가 그 속은 벌레가 다 파먹었고 기름과 진액도 다 말라버렸는데, 회오리 바람과 폭우가 언제 닥쳐올지를 알지 못한데에 까지 이르른 것이 아득히 오래 되었습니다.” 19]라고 당시의 현실을 주자와 비슷하게 진단하고 있다.
당시에 왕의 정치행사가 민중에게 근본을 두지 못하여 민심과 天意가 떠났다고 직접 왕에게 상소하는 것은 정권의 정통성이 없는 것으로 왕권과 왕위자체를 비판한 죽음을 무릅 쓴 直言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유교국가에서 민심이 떠나고 천의가 옮겨졌다면 革命(天命, 즉 정권의 정통성이 바뀜)을 해도 가하고, 그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유교정치사상에서 민심의 向背는 천의를 움직이는, 즉 ‘민심이 곧 천심’으로서 국가의 존망과 왕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당시 민중이 魚肉이 된 현실을 直截하게 비판한 것은 유교정치사상의 핵심을 거론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바탕위에서 국가는 썩은 고목나무 같이 되어 비바람만 불어도 망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국가내부의 부패가 만연하여 외침이 있으면 큰 일이 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중종 때부터 다시 북족에는 胡人(여진족)이 발호하고 남쪽에는 乙卯倭變 등으로 倭人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은 때이고 보니, 미구에 큰 전란인 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예고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논지가 內治의 문란, 즉 국가 안의 부패가 나라의 힘을 약화시켜 밖으로 부터의 화를 자초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17]『朱熹集』권11,「庚子應詔封事」
18]『朱熹集』卷11,「戊申封事」
19] ?南冥集?권2,「乙卯辭職疏」:殿下之國事己非, 邦本己亡, 天意己去, 人心己離. 比如大木百年蟲心膏液己枯. 茫然不知飄風暴雨, 何時而至者, 久矣.
또한 남명은 「戊辰封事」에서도
“예로부터 권신으로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하였고, 戚里20]로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하였으며, 부인과 환관으로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급처럼 胥吏가 나라일을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정권이 대부에게 있어도 오히려 옳지 못한데, 하물며 서리에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당당한 제후의 국가로서 조종의 이백년의 업적에 힘입고 공경 대부가 앞뒤에서 서로 따르는데, 천한 서리에게 정권을 돌립니까? 이것은 쇠귀에도 들리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軍民에 대한 모든 정사와 국가의 기밀이 모두 서리의 손에서 나오므로, 실과 곡식을 관청에 바치는 데에도 뒷길로 돌려 바치지 않으면 통하지 아니합니다.
안으로 재물이 모이면 백성은 밖으로 흩어져, 열 명 가운데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각자〈자신이〉맡고 있는 고을을 자기 물건처럼 생각하여, 문서를 만들어서 교활하게 자기의 자손 대대로 전합니다. 지방에서 바치는 것을 일체 가로막고 물리쳐서 한 물건도 상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물을 가지고 바치러 갔던 자가 그 온 가족의 가산을 다 팔아도 그것이 관청으로 들어가지 않고 개인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백 곱절이 아니면 받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바치는 공물을 계속해 바치지 못하고, 도주하는 자들이 잇달아 생깁니다.
창건 이래로 고을의 백성이 바치는 것이 문득 새앙쥐 같은 놈들이 나누어 가질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王莽 21]과 董倬22] 같은 간악한 자들도 이런 적은 없었으며, 비록 망해 가는 나라에서도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이러고서도 만족하지 않고 國庫의 물건까지 다 훔쳐내어 아주 적은 옷감, 매우 적은 곡식도 저축된 것이 없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고 도적이 도성에 가득합니다. 나라는 한갓 빈그릇만 안고 다 썩어서 뼈대만 앙상하게 서 있으니 온 조정 사람은 마땅히 목욕재계하고 함께 쳐야 할 것입니다. 혹 힘이 모자라면 사방 사람들을 불러서 잠시도 잠자고 먹을 겨를이 없이 분주히 임금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좀도적이라도 있으면 장수에게 죽이고 사로잡도록 명해서, 하루도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서리가 도둑이 되고 온갖 관리가 한 무리가 되어 심장부를 차지하고 앉아 國脈을 모두 결단내니, 그 죄가 신에게 제사지내던 희생을 훔쳐내는 것뿐만 아닌데도 법관이 감히 묻지도 못하고 司寇23]도 감히 따지지 못합니다. 혹 한낱 司員이 조금 규찰코자 하면 견책과 파면이 그들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여러 벼슬아치들은 속수무책으로 제사상에 남은 희생만을 먹으면서 ‘예예’하며 물러납니다. 이것들이 믿는 바가 없으면서 어떻게 이처럼 꺼리낌 없이 방자하게 날뛸 수 있습니까?
초나라 왕이 이른바 ‘도둑이 권세가 있어 쫓아 보낼 수 없다’고 한 것24]이 이것입니다. 각자 狡兎같이 세 굴을 가져서,25] 냇가의 조개처럼 처럼 딱딱한 껍질로 방패막이를 하고 있습니다. 남몰래 전갈의 독을 품고 있으면서 안 그런 척 온갖 방법으로 꾸미니, 사람이 다스릴 수 없고 법으로도 형벌을 더할 수 없으며, 城과 社稷의 쥐가 되어 있어서 이미 불을 때거나 물을 부어 쫓아 낼 수도 없습니다.26] 그렇다면 그 세 굴이 되어 주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며, 딱딱한 껍질이 되어 주는 자는 어찌해서 벌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남명의 치열하고 구체적인 현실비판적 인식과 그 사상은 「民巖賦」27]와 「軍法行酒賦」28] 등에서 법과 제도개혁 나아가 百姓들의 民心에 의한 ‘天意(命)의 바꿈’ 곧 왕조의 革命까지도 암시한 것으로, 비록 朱子도 현실비판과 그 인식에 있어서는 直截한 면모가 없는 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天理君權의 절대성을 송대 중앙집권에서 왕조와 대권의 상하질서 내지 倫理綱常의 강조부여함에서 이미 그러한 사상은 퇴색되었고, 퇴계에 있어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20]중국 長安(지금의 西安)에 있던 漢代의 마을 이름으로, 그 마을에 황제의 姻戚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후에는 임금의 인척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한대 외척의 정치참여는 파행으로 치달아 외척에 대한 역대로 부정적 정치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21]漢나라 高宗孝元皇帝(劉奭:재위 BC 48-33)의 皇后 조카이다. 책모로써 平帝를 죽이고 한나라 왕조를 빼앗고 즉위하여 新나라를 세웠으나, 내치․외교에 실패하여 재위15년 만에 光武帝에게 망하였다.
22]後漢시대 사람으로 靈帝 때 前將軍이 되었다가, 少帝를 폐하여 弘農王으로 강등하고 陳留王 劉協을 獻帝로 내세워 폭정을 일삼다가 呂布․ 王允 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23]周나라 때 사법과 형벌 등의 일을 맡아보던 벼슬.
24]『左傳』「召公」7년條.
25]영리한 토끼가 굴 하나로 난을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 반드시 굴 세 개를 만들어서 제 몸을 안전하게 한다는 뜻이다.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가지고 있어서, 그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임금에 세는 하나의 굴만 있어니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 잘 수가 없다. 임금님을 위해 다시 두 굴을 파기를 청한다.[狡兎有三窟 僅得免其死耳 今君 有一窟 未得高枕而臥 請爲君復鑿二窟]”(『全國策』「齊策」)
26]城狐社鼠를 가리키는데, 城에 굴을 파고 사는 여우와 社에 집을 지은 쥐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여우를 잡으려고 굴에 물을 부으면 성이 무너질까 걱정되고, 쥐를 잡으려고 사에 연기를 피우다가 社를 태울까 걱정이 되어, 이렇게 하지도 저렇게 할 수도 없는 형편을 말한다. 간신이 임금의 세력을 교묘하게 끼고 있어 다른 신하들이 어떻게 할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晉書』「謝鯤傳」)
27]桀紂非亡於湯武, 乃不得於丘民
28]母嚚子庸臣傲, 邦之危兮扤隉
3. 下學而上達 과 天理君心 및 定分論과 闢異端論
1) 下學人事와 上達天理
간단히 살펴볼 때 남명과 퇴계가 성리학을 尊信하고 그들의 著書論議 등을 통해 볼 때 주자학을 학문사상의 중심으로 한 것에서는 큰 차별이 없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논자를 포함한 기존의 남명과 퇴계에 대한 철학사상의 연구가 대개 퇴계는 理氣四七論에 대한 논변에 밝고 이단배척에 철저하였고 今文으로 주자를 依樣祖術하여 道統을 천명자부하여 ‘海東朱子’로 논의하는 바이며, 남명은 주자학을 근간으로 하지만 老莊포함하여 陸王的 要所가 있고 古文인 左柳文에 능하며 出處大義로써 實踐躬行으로 經世之風의 학문경향을 일반적으로 논의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에 구체적으로 ‘下學而上達’,29] 즉 ‘下學人事와 上達天理’ 30]문제에 있어서는 퇴계가 人事上에서에 天理를 구하거나 日用의 人倫行事의 비근한 이치로부터 天理性命을 구하지 않고 남명의 비판대로 ‘灑掃之節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天理를 談論’하고 기대승의 비판대로 ‘不事下學 專務上達’ 31]의 에서 당시 퇴계의 진정한 위학체계와 진리인식 태도를 엿볼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퇴계의 「戊辰六條疏」의 한 단락을 인용해 보자. “어떤 사람은 帝王의 학문은 선비나 학생들과는 같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文義에 구속되고 詞章에 工을 두고 한 말입니다. 敬으로 근본을 삼고 窮理하여 致知하고, 자신을 반성하여 참된 행동을 실천하는 것은 오직 心法의 妙를 터득하고 道學을 전하는 요결이니, 이러한 점에 있어 제왕과 일반 사람과 어찌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眞知와 實踐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어느 하나가 빠져도 아니 되오며, 또한 사람의 두 다리와 같아서 서로 도와서 나아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程子는 ‘致知하지 못한 자는 敬하는 경지에 들지 못했다’고 말했으며, 朱子는 ‘몸소 실천하는 공부에 이르지 못한 자는 窮理 또한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眞知와 實踐의 두 가지 공부를 합해서 말하면 서로가 始와 終이 되는 것이며, 나누어 말하면 즉 또한 저마다의 始와 終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시작(始)이 없으면 물론 끝(終)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이 없다면 시작은 해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더욱이 임금들의 학문은 대개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으며, 처음에는 열심히 하나 나중에는 게을리하고, 처음에는 공경하나 나중에는 방자하게 되며, 들락날락하는 마음으로 했다가 말았다가 하고, 마침내는 한결같이 德을 업신여기고, 나라는 迷惑하게 되고 마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朱子 또한 구체적 사안을 들어 陳疏建議한 「戊申封事」에서 6가지(六條) 가운데 그 첫 번 째로 ‘태자를 輔導하고 翼贊(輔翼太子)’ 하는 주장에서 ‘태자가 習事(국가정사의 이해득실)보다는 修德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여 구체적 人事에 더하여 먼저 下學의 修身을 먼저 강조하고 있다.
분명하게 퇴계가 상소로 言表한 것은 知行並進과 下學而上達의 주장이다. 하지만 당대 철저하게 비판해 마지 않았지만, 오히려 陸王心學적 요소가 없지 않으며, 남명이 비록 번쇄한 문자중심의 학문연구 태도와 인사도 모르면서 천리를 논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주자가 일찍이 『大學』의 ‘誠意正心’ 앞에 ‘格物致知’를 놓고 그 補章을 달고자 했던 의도를 알아 ‘濂洛以後 不必著書’를 주장하고 實踐躬行의 학문태도와 연구대상이 博學廣義하였고 수제자 정인홍의 兩賢에 대한 比較褒貶 32]을 상고할 때, 논자의 새로운 이 가설은 기존의 연구와 비교하여 새로운 담론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문제는 조선 중기 이후 지금까지 400년간의 化石化된 논의구조를 흔드는 것이므로 보다 精緻한 연구는 훗일을 기약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누가 더 정통주자학자냐’라는 단순한 문제에 벗어나 있다.
또한 남명학파의 『大學』중시는 조선초기 개국 후에 守成의 문제와 경세사상의 분위기에서 眞德秀(1178-1235) 33]의 『大學衍義』가 太祖의 經筵에서 다뤄지는 것과, 주자학파와 육왕학파가 공히 『大學』의 판본과 그 해석문제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볼 때 그 의의가 깊어지는 것이다. 주자 또한 『大學』중시태도34]는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는 經世學적 實學문제에서 그대로 그 爲學체계와 차별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고 오늘날 순수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의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다음의 이단 배척 문제에서 다시 논의하도록 한다.
29]『論語』,「憲問」
30]程朱 性理學의 爲學체계에 있어서 기본구도
31]『退溪集』권26,「與鄭子中」
32]『光海君日記』권39, 3년 3월 26일 丙寅條 : 일명「晦退辨斥疏」. 여기에 대한 논의평가는 권인호, 앞의 책, 228-236. 참조.
33]南宋 建州人, 호는 西山이다.
34]朱子는 유교경전 가운데『大學』을 중시한다. 朱子는『大學』이 “孔子께서 남기신 글로서 처음에 배워 덕에 들어가는문”이기 때문에 “학문은 모름지기『大學』을 첫째로 삼아야 한다”(『朱子語類』권14)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주자는 마음과 같이 유교=송학의 경전으로서 『大學』의 지위를 우선 분명하게 한다. “大學을 첫째로 삼지 않으면, 강령을 들어서 論語, 孟子의 정밀하고 자세함을 다할 수 없다.
大學을 읽음에 論語, 孟子를 참고하지 않으면, 막힘이 없이 서로 통하고 中庸의 귀착점을 극진히 할 수 없다”(『주자어류』권17, 「大學或問」 朱子의 ‘학문론’은 『大學』을 기초로 한다.
朱子는 『大學』의 첫째章이 曾子가 기록했던 중심골자라 하여, 이에 주석을 달아 그의 ‘학문론’을 전개하고 있다. 朱子의 ‘학문론’을 『大學』의 첫째장의 注에 모두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朱子의 ‘학문론’은 『大學』의 첫째장은 첫머리에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이리하여 학문= 대학의 목적을 먼저 밝히고 있다. 朱子는 ‘明明得’ ‘親民’ ‘至善’ 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인다. 맑은 덕을 밝힌다 함은, 사람의 마음은 공허하여 형체가 없으나 그 기능만은 맑고 환하여 여러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할 수 있는 작용 즉 밝은 덕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사람의 본성이지만 언제나 氣稟에 구속 되어 그 본연의 작용의 발휘되지 않으니, 사람은 마땅히 그 구속을 탈피하여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이다..(守本順一郞,앞의책,pp.97-98)
2) 天理의 現實態와 格君心
朱子와 南冥 그리고 퇴계는 공히 성리학자로서 당시 민중의 구제와 나라의 일을 올바로 處事하기 위해서, 현실의 구체적인 제도개혁보다는 임금(황제나 왕)의 一心을 바로 잡기를 바랐다. 비록 당시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임금의 절대권력이 컸다고 하나 임금 주위의 부패한 중앙관료와 임금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庸君일 경우 이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명분 축적용 허공의 메아리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구체적으로 주자는 “폐하의 마음을 천하의 근본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천하의 일은 변화가 무궁하나, 그 단서를 궁구하지 않더라도 모두 폐하의 마음에 의거하지 않은 바가 없으니, 폐하의 마음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라 하여 무조건적․초월적으로도 보이는 군주의 절대성이 설명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人君의 마음이 바르지 않은즉 천하의 일이 모두 올바름에 연유할 수 없습니다.” 35]라 하여, 군주는 반드시 마음을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고 주장된다.36]
또한 朱子는 “무릇 천하의 큰 근본은 폐하의 마음입니다. 今日의 急務는 즉 太子를 輔導翼贊하는 일과 大臣을 選任하며 사물의 綱常과 줄거리가 되는 것을 진작하며 올리며 풍속을 변화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그 힘을 길러주며 군대를 훈련하고 정치를 밝히는 바로 이 여섯가지 37]입니다. …… 신이 문득 폐하의 마음을 천하의 큰 근본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천하의 일들은 수없이 변화하여(千變萬化) 그 실마리가 무궁하지만, 하나라도 임금의 마음에 근본을 두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마음이 바르다면 천하의 일들이 하나라도 바름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 천하의 일들도 모두 바름에서 나올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38]라고하여 ‘천하의 근본인 天理가 곧 君心’이라고 한 사실은 주자를 비롯한 송대 이후 중국의 성리학자나 우리나라 정주학자들도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北宋대 王安石도 南宋의 朱子도 모두 개혁을 주장하고 있지만, 전자가 보다 제도적 개혁을 후자가 임금의 正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그 방법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성패여부가 중앙집권적 황제의 절대권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취약점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39] 이것은 조선의 중종 때 조광조가 왕도 정치를 표방하고 개혁을 단행하려 했지만 임금(中宗) 한 사람에게 매달린 탓으로 성급한 제도개혁이 실패로 돌아가 後人들의 아쉬움을 토로하게 만들었던 것 40]과도 대비된다.
다시 말해 남명과 퇴계도 상소문에서 임금의 마음, 즉 격군심에 중점을 둔 모습은 송대 이후, 고려말 이후 성리학자들의 일반 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뿐만아니라 선배인 조광조의 실패를 아쉬워 하는 하는 점도 대동소이 하지만, 이를 보다 현실적 진단과 구체적 대안 제시의 모습에서 남명이 주자나 퇴계보다 ‘格君心’에 대한 상대적 비중을 가늠했을 때 보다 역사적 진보성을 지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남명과 퇴계의 임금에 대한 태도와 君心에 대한 절대성 부여 등에 대해서 두 상소문을 간단히 인용해 본다면, 먼저 남명은 「戊辰封事」에서 “主上께서는 上智41]의 자질을 타고나셔서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시는 마음이 있으니 이것은 질실로 백성과 社稷의 복입니다. 그런데 백성을 잘 다스리는 도는 다른 데에서 구할 것이 아니오라, 요점은 임금이 선을 밝히고 몸을 정성되게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퇴계는 「戊辰六條疏」에서 “마음(心)과 뜻(意)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은 天君이며, 뜻은 마음에서 발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성실하게 하고서 뜻을 발함은, 바로 하나의 성실로써 만 가지 잘못을 지우는 것이 됩니다. 또한 天君인 마음을 바로 하면, 바로 몸 전체가 잘 따르고 영에 복종할 것이라, 모든 행동에 실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그 뒤에 이어서 “나라에 있어서 임금은 한 나라의 元首42]이며 大臣은 바로 나라의 배(腹)이자 마음(心)이고, 臺諫은 바로 나라의 귀(耳)이자 눈(目)이옵니다. 이 셋이 서로 받들고 합심해야 비로소 서로가 제 맡은 바 일을 성취할 수 있으며, 이는 실로 천하의 고금을 통해 누구나 다같이 알고 있는 변치 않는 국가의 정상적인 모습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天理君權’과 ‘君權神授’, 즉 성리학에서 말하는 ‘理’(곧 天理로서, 理一分殊로 개개사물에도 理가 존재함)란 우주의 최고본체나 삼라만상의 본원으로 天의 지위를 말하는 것으로 임금의 권리(위, 한, 력)가 곧 천리이고 그것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는 뜻이다.43] 만약 그렇다면 정주 성리학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황권 절대우위의 사회정치사상은 유학의 民本思想44]과 孟子의 民重君輕45]의 사상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것은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35]『朱熹集』권11, 「戊申封事」
36]守本順一郞, 앞의 책, pp. 92
37] 退溪의 「戊辰六條疏」의 여섯 조목과 그 내용에 있어서도 大同小異하다. 다만 퇴계의 그 내용은 朱子보다 오히려 덜 구체적이고 유교경전의 일반적인 것을 지리하게 설명하여 교과서(?)를 읽는 느낌으로 임금(宣祖)이 求言한 취지, 곧 당시 국가 양 元老(남명과 퇴계)의 보다 현실의 진단과 이에 대한 구체적인 개혁의 방향 제시에 맞지 않았다고 보인다.
38]『朱熹集』권11,「戊申封事」, pp.461-2, 四川敎育出版社, 1996.
39]왕안석과 주희 死後 수십년래에 북송과 남송은 각각 여진의 金(1127)과 몽고의 元(1279)에 의해 멸망당했다.
40]퇴계도 朴淳에게 답하는 글「答朴參判」에서 “기묘의 영수인 조광조 등은 道의 배움이 이뤄지기도 전에 갑자기 큰 명성을 얻어서 성급하게 經世濟民을 자임함으로써 聖主가 그 명성을 좋아하고 그 책임을 두텁게 하였으니, 이는 수(바둑의 수에 비유)를 잘못 두어 실패를 자초한 원인이다”라고 하였다.
41] ‘性三品論’에서 나면서부터 아는 生而知之者를 말한다.『顔氏家訓』「敎子」에 “上智는 가르치지 않아도 뜻을 이루고, 下愚는 비록 가르치더라도 아무 보탬이 없으며, 보통 사람은 가르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上智 不敎而成 下愚 雖敎無益 中庸之人 不敎不知也]”라는 구절이 있다.
42]머리
43]『朱子語類』권13. 張立文,『朱熹思想硏究』,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1, pp.141-2. 참조
44] 『書經』: 民惟邦本 本固邦寧
45] 『孟子』: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3) 倫理綱常의 名分論
유학에서의 正名과 名分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定分論’은 先秦시대부터 禮樂의 강조로 시작되어 인륜도덕에서 상하질서의 강조에 이르기까지 사회정치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꾸준히 강조되어 왔다. 그것은 개인의 예의염치에서부터 사회나 국가의 정의나 질서를 바로 잡는 구실을하여 바람직한 면이 있는가 하면 기득권 보호를 위하여 민중에게는 사회적 굴레가 될 수도 있다.
주자학의 정분론 곧 상하질서를 화고히 하는 명분론은 군신 사이에서는 일단 사회적 신분이라고도 보여지는 상하관계를 제시하지만, 그 외에는 부자․부부․형제 등 완전히 혈연적인 따라서 비사회적인 신분적 상하관계를 나타낸다. 주자학의 명분론은 씨족제적인 전제지배의 논리로서, 군신 사이의 상하는 실인즉 부자 사이에서와 같이 혈연적인 관계에서 도출된 비신분적 사회의 상하론은 아닐까 하는 의문까지도 생긴다.
주자학은 역시 그 근본기저에 佃戶와의 分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주체가 봉건적인 신분구성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로, 신분의 확정을 군신간의 전제적 명분에서 요청한다. 그러므로 주자학의 명분론에서는 地主사대부와 佃戶의 分과 군신(사대부)의 分이 봉건적 산분으로 통일되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다. 그 때문에 군신의 分은 더욱 전제적인 성격을 강화하게 되고, 그에 따라 도리어 확대된 단절의 간격을 메워야 할 혈연적인 상하관계가 군신간의 상하관계의 보완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명분=상하론은 본질적으로는 佃戶지배의 사회 신분적인 상하확정을 목표로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혈연적인 상하관계를 강하게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오히여 농노지배를 관철하고자 하면 할수록 군신 사이의 초월적인 절대성이 강화되고 동시에 혈연적인 상하관계 또한 더욱 강하게 나타나기에 이른다. 46]
주자학의 기본시각, 즉 명분은 군신간의 상하관계인 명분을 기축으로 하여 일체의 사회적․인간적 관계를 상하신분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군신간의 상하관계는 일견 극히 전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신간의 상하관계에서 보이는 절대성, 곧 군주의 절대성은 농노지배를 관철하려는 봉건적 토지소유자, 즉 사대부가 자신의 주체성으로 영주제적 봉건지배를 관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요청한 통일권력 절대성이였다. 47]
南冥은 윤리에서 인간의 本性과 善惡의 문제 그리고 성리학적인 天理와 義理 문제를 다음과 같이 「戊辰封事」에서 피력하고 있다.
“이른바 선을 밝힌다는 것은 이치를 궁구함을 이름이요, 몸을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 몸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천성 안에는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 있으니, 仁․義․禮․智가 그 본체이고 모든 善이 다 여기서부터 좇아서 나옵니다. 마음은 理가 모이는 주체이고, 몸은 이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 이치를 궁구함은 장차 쓰려는 것이요, 그 몸을 닦음은 장차 도를 행하려는 것입니다. 그 이치를 궁구하는 바탕이 되는 것은 글을 읽으면서 의리를 강명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그 옳고 그름을 찾는 것입니다. 몸을 닦는 요체가 되는 것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이어서 內聖外王의 대덕왕도도 敬을 위주로 공부하여야 하며 그 방법으로 靜齊嚴肅을 말하고 있는 점에서 주자와 퇴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가슴속에 마음을 간직해서 혼자 있을 때를 삼가하는 것은 大德이고, 밖으로 살펴서 그 행동에 힘쓰는 것은 王道입니다. 그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으며, 가슴속에 본심을 간직하고 밖으로 자신의 행동을 살피는 가장 큰 공부는 곧 반드시 敬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이른바 경이란 것은 정제하고 엄숙히 하여, 항상 마음을 깨우쳐서 어둡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의 주인이 되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안은 곧게 밖은 방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이른바, ‘敬으로써 몸을 닦는다.’ 48]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을 주로 하지 않으면 이 마음을 간직할 수 없고, 마음을 간직하지 못하면 천하 이치를 궁구할 수 없으며,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면 사물의 변화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남명이 보다 구체적인 학문의 순서를 따지고 그 진리를 현실사회의 인간세상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주자나 퇴계와 약간의 차이점을 가진다고 보인다.
즉 “부부에서 시작해서 가정, 국가, 천하에 미치는 것은 다만 선과 악의 나뉨을 밝혀 자신이 성실해지는 데로 돌아가게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아래로 사람의 일을 배우고 위로 天理에 통하는 것이 또 학문에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은 곧 입에 발린 이치이며, 자신에게서 돌이켜 보지 않고 들어서 아는 것만 많은 것은 곧 귀에 발린 학문입니다. 天花49]가 어지러이 떨어지니 修身을 할 이치가 전혀 없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과연 敬으로써 몸을 닦으면서, 하늘의 덕에 통하고 王道를 행하셔서, 지극한 선에 이른 뒤에 그곳에 머무신다면, 밝음과 선을 밝히는 일과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 일이 모두 진전이 있어,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일이 아울러 극진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 교화에다 베푸는 것은 바람이 얼어나자 구름이 몰려 가는 것 같으니, 아래 백성이 본받는 것이 반드시 이보다 더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50]
이에 대해 퇴계는 「戊辰六條疏」에서 “첫째는 繼統을 중히하여 仁과 孝를 다하는 일이옵니다. 신이 알고 있는바, 天下의 모든 일 중에 君位의 一統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는 줄 아옵니다. 무릇 막중한 계농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으니, 이 얼마나 지극하고 중대한 일이겠습니까. 자고로 임금은 누구나 다 至大 하고 至重한 계통을 이어받습니다마는, 참으로 지대하고 지중한 뜻[義]을 아는 이가 적었으며, 따라서 孝에 있어 부끄러움이 있었고, 仁에 있어 道를 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는 정상적으로 계통을 이어받은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오니, 혹 旁支로 들어와 계승한 임금의 경우51]는 더욱 仁․孝의 道를 다할 수 있었던 분이 적었고, 더욱이 彛倫의 敎에 죄를 지은 분도 아울러 있었으니, 어찌 깊이 畏懼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으며, 집안에는 두 어른이 없고, 喪禮에는 두 斬衰가 없습니다. 옛날의 聖人이 本 生家의 은혜가 중하고 큼을 모르고 禮法을 정하여 남에게 立後한 자로 하여금 그의 아들이 되게 한 것은 아닙니다. 기왕에 그의 아들이 되었으면, 즉 인․효의 도도 養家를 위해 다해야 할 것이며, 본 생가의 은혜를 並立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大義를 내세우고, 본 생가의 은혜를 減殺하여, 양가의 은혜를 높여가지고 뒤를 이은 바의 의리를 완전하게 했던 것입니다.”라고하여 禮적 상하위계 질서와 명분을 중시하였다.
46] 守本順一郞, 김수길 역,『東洋社會思想史』, 동녘, 1985, pp. 91
47]위의 책, p. 92
48]『論語』「憲問」
49] 불교 용어로서 하늘 나라에서 내리는 묘화를 말한다.『法華經』「比喩品」에 “모든 하늘의 妓樂 수많은 종류가 虛空 가운데서 한 때에 한 목에 일어나니 천화가 비오듯 하였다.”고 하였다.
50]『南冥集』권2,「戊辰封事」
51]당시의 임금 宣祖는 中宗의 7남 德興君(나중에 덕흥대원군)의 셋째아들 호 하성군에 봉해졌었다. 처음 이름은 鈞 나중의 諱는 昖이다.
4) 道佛心學과 異端排斥
주자와 퇴계는 각각 「戊申封事」52]와「戊辰六條疏」에서 佛敎과 道敎(老莊) 및 法家 등을 비판하고 있는데53] 비해 남명은 「戊辰封事」에서는 일단 도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남명은 다른 글과 그의 행록54] 등에서 “불교가 유교와 같이 上達天理에는 한가지지만 단지 下學人事를 시행함에 있어서는 다리가 없이 땅을 밟고 있는 형국이므로 우리 유가에서는 본받지 않는 것”이라는 말과 “요즈음 배우는 이들이 매양 陸象山의 학문하는 바대로 지름길로 요약을 주로하여 그 自己(爲己)之學으로서 먼저 『小學』․『大學』․『近思錄』을 먼저 읽지 않고 『周易啓蒙』부터 먼저 읽으려고 하기 때문에 ‘格物致知 誠意正心’의 순서를 구하지 않고 반드시 性命의 이치나 말하려고 한즉 이 말폐는 단지 육상산의 학문에만 그칠 것이 아니리라”고 하였다. 실제로 남명이 서신왕래를 통하여 퇴계의 상달천리적 측면을 중시한 위학방법을 질책한 면이기도 하다.
퇴계는 知行並進과 함께 “하학이상달이 진실로 정상적인 순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배우는 자들의 오래동안 배워도 깨달아 얻는 바가 없으면 쉽게 중도에서 폐하기 쉬워 선생들이 本原과 그 源頭處를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것”55]이라는 성리학자의 道學적인 원칙주의자로서가 아니라 그의 出處처럼 구차한 변명으로 보인다.
더구나 퇴계 스스로 道家 특히 老子의 無爲自然이나 남명을 老莊을 숭앙한다(혹은 빌미로 한다)고 비판하였고, 육왕학적 성향을 불가의 禪宗의 頓悟식 진리인식으로 양명학적 색채가 있었던 南彦經이나 盧守愼 등을 비판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수미상관하지 못하는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논의한대로 퇴계 스스로의 학문방법이나 진리인식 태도가 그 스스로 비판해 마지 않았던 육왕학의 모습이 아닌가 다시 따져 보아야 할 것이고, 현재도 종교의 교의나 철학의 사상체계에서 왕왕 이단배척과 마녀사냥 그리고 정통성 시비를 거론하는 자가 오히려 더 문제가 있다는 진리를 되새겨 봄 직하며, 주자가 이른바 ‘北宋五子’를 맹자 이후에 이어 도통을 칭도하고 퇴계가 「宋季元明理學通錄」을 통하여 함께 道統淵源을 강하게 천명하고자 한 숨은 의도도 새로운 연구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
이것은 남명이 퇴계처럼 힘써 불교나 노장 그리고 육왕학을 적극 비판하지는 않았고 간접적으로 당시의 학문풍토를 빗대어 비판하는데 그치고, 도통을 되새기는데는 바쁘지 않았다는 점이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52] 朱子는 저 老子(道)浮屠(佛)之說을 儒學과 비교하여 ‘眞實과 空虛’의 차원에서 비판하고 있다.
53] “臣이 엎드려 살피건대, 東方에서 異端의 피해로 가장 심한 것은 佛敎이옵니다. 高麗조는 이것으로 해서 亡國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我朝의 隆盛한 다스림을 가지고서도 아직 그 뿌리를 능히 근절하지 못하여, 왕왕이 때를 타고 퍼지고 번지고 있으며, 비록 先王께서 그의 절못을 깨달으시고 일소하시고자 하셨으나 그 여파와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한편 老․莊의 허무하고 망발된 주장을 혹 높이고 聖君을 업신여기고 禮治를 모독하는 풍습이 간혹 일기도 합니다. 또한 管中이나 商鞅의 공 주장을 다행이 傳述하는 자는 없습니다만, 역시 功 利를 計謨하는 폐단이 곧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鄕愿들이 덕을 흐트리는 폐습이 세상에 아부하는 말단에서부터 시작되고, 俗學들이 방향을 그르치는 해독이 바로 과거꾼들이 名利를 좇는 데서부터 燎原의 불길 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이름만을 가지고 벼슬에 올라서 때를 타고 틈을 엿보고 이랬다 저랬다 하고 기만과 배반을 일삼는 무리들이 어찌 전혀 없다고 하겠습니다.”
54]『南冥集』권2「乙卯辭職疏」와 같은 책 권5,「行錄」裵紳. 참조
55]『退陶言行通錄』권2,「學問」
4. 小結
朱子와 南冥 그리고 退溪의 성리학적 담론은 대체적으로 보아 대동소이하다. 이들에 대한 성리학의 선행 연구논문들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논자의 견해도 큰 異見은 없다. 다만 그러한 송대 이후의 理學을 어떻게 바라보며 학문 연구태도와 시각 및 실천성에서 양상이 다른 行藏(出處) 데에 대한 것과 유학 혹은 정주학에서 바라본 이른바 ‘異端(浮屠, 老莊, 心學 등)’에 대한 수용태도에서 如何한데 있는가 하는 점에서 그 차별성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데는 이 ‘여하한가’가 중요한 관건이다. 주자와 남명은 그 목적의식이 비교적 뚜렷하다. 유학의 ‘儒(人+需)’자에 보다 충실하고자하여 性命義理之學(理氣心性之學)과 格君心을 통하며, 나아가 經世濟民의 현실개혁성향에서 유사하다고 보아진다.
반면에 퇴계는 후자가 전자를 그 외형에서 依樣의 모습을 철저하게 담아 고수했지만, 학문적 이론과 思辨的 천착에서는 그 방법성과 목적성 즉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라는 현실의 분석과 비판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56]라는 현실개혁과 時務의 大綱 57]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논자를 포함한 기존의 남명과 퇴계에 대한 철학사상의 연구가 대개 ‘퇴계는 주자를 依樣祖術한 바에 그치고, 남명은 주자를 포함한 육왕적 요소가 있다’는 등의 일반적인 논의에 대해 이 글에서 새롭게 試論的으로 문제제기를 하였다. 구체적으로 下學人事와 上達天理 문제에 있어서 퇴계가 당대에 비록 철저하게 비판해 마지 않았지만, 오히려 陸王心學적 요소가 없지 않으며, 남명이 비록 번쇄한 문자중심의 학문연구 태도와 인사도 모르면서 천리를 논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주자가 일찍이 『大學』의 ‘誠意正心’ 앞에 ‘格物致知’를 놓고 그 補章을 달고자 했던 의도를 알아 ‘濂洛以後 不必著書’를 주장하고 實踐躬行의 학문태도와 연구대상이 博學廣義하였고 수제자 정인홍의 兩賢에 대한 比較褒貶을 상고할 때, 논자의 이 결론은 기존의 연구와 비교하여 새로운 담론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문제는 조선 중기 이후 지금까지 400년간의 化石化된 논의구조를 흔드는 것이므로 보다 精緻한 연구는 훗일을 기약한다.
송나라와 조선조가 한 때 문화적으로 융성하였으나, 時務에는 부패무능하면서도 중앙집권적이고 외형적 정치이데올로기로 변질된 天理와 理氣心性 및 名分義理에는 밝아 왕실과 그들의 기득권 옹호와 이에 대한 핵심적인 비판논의와 세력을 이른바 ‘異端邪說’로 ‘斯文亂賊’으로 배척하는 것에는 용감한 허위의식에서 멸망했는지?
철학이 ‘시대정신 精華’라고 하면서 연구의 과제나 인물의 그 시대적 인접과학(역사,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에는 무식이 풍부하면서, 몇몇 알려진 先賢과 그 선현연구 글만을 다시 연구하고 그것도 그들의 語錄과 연구성과를 다시 依樣反復하는 학문태도가 계속되어서는, 논자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을 반성을 하면서, 한국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희망이 없다고 보인다.
이는 동서양과 한국철학 연구에서 공히 반성할 태도로서 주자와 남명 그리고 퇴계를 공부하며 느낀 바이다. 그 구체적인 문제는 이 논문의 Ⅱ편에서 經世思想을 논할 때 보다 분명하게 논의되리라 기약한다.
56] 최근 대학의 교육개혁과 관련하여 졸속하고 한국의 교육풍토와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미국 모방의 이식적 개혁은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그 가운데 학부제 도입으로 전국의 대학에서 철학과 지원학생이 거의 전무하여 존폐여부가 우려되는 상황은 과연 정부와 교육부 그리고 순수 인문과학인 철학의 학문가치를 몰라주는 학생이나 세태만을 욕해도 좋을 정도로 철학교수들의 연구태도와 한국에서의 철학연구 풍토를 자부할 수 있는가가 의문이다.
57]『星湖僿說類選』,권10,「退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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