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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冥學硏究論叢 第9輯(2001)
朱子․南冥․退溪의 性理學과 經世思想 硏究(Ⅱ)
- 「戊申封事」․「戊辰封事」․「戊辰六條疏」를 중심으로 -
權 仁 浩
- 차 례-
1. 序論 및 政治思想과 現實
2. 朱子學의 收用과 公車文의 經世思想 比較
1) 朱子學의 收用傾向과 『朱子大全』
2) 明善誠身과 格君心의 方法과 目的
3) 朱子와 南冥의 急務와 經世思想
3. 改革政治와 王道․覇道政治 및 君臣義理
1) 朱子의 改革과 王安石의 新法
2) 董仲舒와 朱子 그리고 退溪의 天人感應說
3) 王業과 王道․覇道政治 및 君臣義理
4. 結論
1. 序論 및 政治思想과 現實
儒敎의 經典인 『書經』의 「禹貢冀州」에 의하면 ‘治天下의 實效는 公田과 貢擧’라 했으니 곧 經世濟民와 인재등용(교육) 문제이며, ‘王政의 요체는 保民制産’이라 하여 治世의 성공여부는 그것들이 잘 지켜지고 시행되는가의 여부라고 했다. 그렇다면 요즈음 이른바 ‘국민의 정부’는 비록 후세 역사의 재평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성공여부가 확실치 않다. 또한 政制와 도덕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正德과 利用厚生이 한가지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오늘날 개인과 사회의 윤리도덕과 국가의 정의가 인문학의 쇠퇴로 철학과 역사학이 실종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器機制度와 政法은 이미 사상누각이 예고되어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현실은 더더욱 암담함을 느낀다. 이에 본 논문은 바로 이것을 문제삼고 과거를 재조명하여 현재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미래를 조망하고자 한다.
南宋의 朱子學은 許衡(1209-1281) 등에 의해 元나라 世祖 쿠빌라이의 漢化政策에 힘입어 官學으로 되었다. 象山學이 吳澄(1249-1333) 등에 의해 주자학과 겸해서 유행했다는 설도 없지 않지만, 元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와 철저한 인종차별적인 사회계급체제의 유지와 통치에는 주자학이 가지는 上層貴族의 保衛的 성격을 지닌 ‘定分論’이 그들에게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고 보인다.
한편 元의 지배하의 高麗에서 원의 앞잡이 세력들과 고려 중기 이후 武臣亂으로부터 시작된 地方鄕吏層으로부터 新興士大夫로 성장한 세력들의 합리적 자기 방어와 새로운 질서의 이론적 무장의 필요에 의하여 주자성리학이 도입 연구발전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것은 다시 정주 성리학이 가지는 漢族우월주의 내지는 華夷論과 正統論 혹은 義理論 등으로 북방의 半狩獵․半農(金) 半遊牧․半農(遼, 西夏, 蒙古 등)에 대해 문화적 우월주의 성격의 또 다른 양상을 표출한 것이다. 그런데 고려 말에 元나라의 쇠퇴와 中原과 남쪽 長江 지역 등에서 屈起한 漢族세력들이 등장하자, 원나라에 대한 자주의리가 국제정치 속에서 고려는 親元派과 親明派이라는 파벌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는 마치 1945년 광복과 1948년 정부수립 과정에서 친일파의 청산문제 및 다시 친미․친소로 분단과정과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고려의 요동정벌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그리고 社稷之臣의 절의와 易姓革命과 참여 등으로 주자학 스스로의 다양한 장점과 모순점이 드러났다. 그것은 조선조가 가지는 주자 성리학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정비에 복무한 면과 아울러 이율배반적 정치사상과 학문성격의 원죄적 天刑이었다.
주자의 「戊申封事」와 퇴계의 「戊辰六條疏」가 남명의 「戊辰封事」보다도 월등하게 분량이 많고 1] 특히 성현들의 이야기와 경전 등의 인용문이 많으며,2] 이단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포폄이 많은데 이는 퇴계의 상소문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한 분석은 남명의 상소문에서 질타한대로 “아래로 사람의 일을 배우고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하는 것이 또 학문에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은 곧 입에 발린 이치이며, 자신에게서 돌이켜 보지 않고 들어서 아는 것만 많은 것은 곧 귀에 발린 학문입니다.” 3]라고 한, 즉 가까운 人事에서 天理를 구하고 口耳之學을 止揚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퇴계의 평가대로 ‘왕실에 대한 언어가 不恭하여 거만스럽고, 세상을 굽어내려다 보며 가볍게 여겨 高亢의 선비로 不仕王侯 高尙其事적 태도가 문제’라는 시각이 과연 옳은 것인지?
혹은 퇴계가 온건착실한 성품이라 저술이 많고 언설과 분석적 태도에서 상소문이 마치 꼼꼼하게 각주를 달면서 쓰는 논문이라면,4] 남명은 ‘朱子以後 不必著書’라는 태도에서 언설보다는 의리실천에 중점을 두고 종합적이면서 자신에게 體化溶解된 필요한 문자만을 함축적으로 특별한 인용없이 쓰는 大家의 논문이나 성명서 같은 인상을 받는다.
주자는 王安石의 「萬言書」 5]와 비슷한 분량과 구체적 개혁내용이 비슷하지만 퇴계는 주자의 「戊申封事」와 같은 6개조와 비슷한 장문의 「戊辰六條疏」를 올리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왕안석과 주자와도 다른 점이 있다. 한편 남명은 「戊申封事」에서 내용상으로는 왕안석과 주자의 개혁적 요소가 유사하면서도 형식상으로는 간략하다.
* 哲學博士, 大眞大 哲學科 敎授, 本院 常任硏究委員
1] 주자와 퇴계는 각각 1만여 자와 8천여 자, 남명은 1600여 자.
2]퇴계는 대개 『周易』 『書經』 『詩經』 『春秋公羊傳』 『論語』 『孟子』 『小學』 『大學』 『中庸』 『荀子』 등의 경전 본문을 반복해서 인용하며 그 출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곳곳에 그 篇名까지 노출하였고, 주자는『周易』 『尙書』 『論語』 『大學』 등을 그 인용출전을 밝히거나 상소문에 용해되어 있다. 남명이 구체적으로 경전 이름은 밝히고 인용한 것은 『周易』 뿐이고, 상소문에 용해되어 출전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中庸』 『書經』 『春秋左傳』과 불교의 『法華經』의 일부 내용이 인용되고 있다.
3] 『南冥集』권2, 「戊辰封事」 ; 由下學人事, 上達天理, 又其進學之序也. 捨人事而談天理, 乃口上之理也. 不反諸己而多聞識, 乃耳底之學也.
4]착실한 학문태도와 상소문을 올리는 대상인 왕에 대한 忠順과 恭遜일 수도 있지만, 혹은 자신의 言說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고 그 권위를 위한 것일 수도 있으며, 이미 왕실과 외척 및 훈구 보수세력에 대한 보호와 배려 그리고 스스로의 부귀에 대한 보험적 성격일 수도 있다. 그 성격은 퇴계의 「戊辰六條疏」 첫째와 둘째에서 잘 언표되고 있다고 본다.
5]왕안석은 1042년 進士급제 후에 1060년 까지 揚州․鄞縣․舒州 등지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柳宗元과 劉禹錫의 天에 대한 새로운 학설과 宋初의 政事治平에 착안한 경세적 학문사상의 인물로 胡瑗, 孫復, 范仲淹, 李覯 등에 영향을 받아 ‘道在政事’의 입장을 지니고 행정과 관개 그리고 재정 등에 능력을 보여 北宋 仁宗 嘉祐 3년(1058) 이 상소문을 올린다. 이는 범중엄의 「十事疏」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이며, 훗날 신법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으며 중국 역대 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2. 朱子學의 收用과 公車文의 經世思想 比較
1) 朱子學의 收用傾向과 『朱子大全』
남명과 퇴계는 그 독서경향과 경력을 살펴보면 사서육경의 유학의 경전과 성리학 서적을 두루 섭렵하는 것을 볼 때 일반적인 성리학자와 별다른 점은 없다. 다만 남명이 諸子百家와 佛敎 6] 및 道敎 그리고 陸王學 7]에도 일반적인 성리학자들의 의례적 비판은 있지만, 퇴계나 훗날 宋時烈처럼 특별하게 적극적인 이단배척을 하지 않고 독서에 포함한 것 같다. 이는 앞선 본 논문에서 언급한대로 주자가 「戊申封事」에서 비록 퇴계의 「戊辰六條疏」에서와 유사하게 道佛을 虛空하다고 비판은 하고 있지만, 주자도 그 독서범위는 도불에까지 미치고 있고 理氣心性의 성리학이 道佛의 영향이 크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중종 38년(1543년)에 수입간행된 『朱子大全』이 보급되자 퇴계가 이 때부터 이를 중시하고 주자의 서찰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간추려서 「朱子書節要」를 만들기까지 하여 初學者들에게 四書에 앞서 독서하기를 권하였다.8] 또한 퇴계는 일찍이 23세 때 『心經』을 일고 남명에 비해 매우 중시하여 것을 볼 때 주자학의 수용경향에서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남명은 퇴계에 비해 주자학의 이해도 면에서 떨어진다고 보지만,9] 『性理大全』과 『近思錄』만 읽고는 주자의 상소문인 「戊申封事」와 형식과 내용이 유사한 남명의 상소문 「戊辰封事」가 建白되지 않았으리라 보며, 당시 널리 보급된 『주자대전』를 비록 지방에 있었지만 중앙과 연락 또는 교유관계가 광범위한 남명이 입수하여 읽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남명의 학문과 독서범위 나아가 주자학 이해에서 그 대체적인 맥락과 경향성을 파악하고 그 장단점을 알았기 때문에, 조선 중기 당시 이미 주자성리학의 一尊主義가 횡행하여 획일화되고 관념화하여 앞서 논의한 바대로 남명의 비판, 즉 실천성이 결여된 이론중심의 학문경향이 陸象山의 심학적 병폐보다 심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여기에 또한 퇴계의 주자학만을 존숭하여 문제점이 있는 독서와 학문 경향성까지 비판한 것이라 본다.
6]上達의 논리는 인정하지만 下學의 부족을 지적하여 비판(『南冥集』권2, 「乙卯辭職疏」)하지만, 이는 退溪와 그 학파의 학문경향성에 대해서 같은 비판(『南冥集』권2, 「與退溪書」)을 하고 있다.
7] 『南冥集』권5, 「行錄」裵紳
8] 『退陶言行通錄』권2, 「學問」
9]金允濟, 「南冥 曺植의 出仕觀」, 『韓國史論』24, 別冊, 1991, pp.174-181. 참조
2) 明善誠身과 格君心의 方法과 目的
학문의 인식의 방법과 그 목적이 유학을 정치철학하는 왕조시대에서는 격군심을 통한 왕도정치의 실현에 있었다. 그리하여 주자나 남명과 퇴계도 그 위학체계의 전체적인 모습은 대동하고 구체적인 주장에서 소이하다. 그러나 소이한 부분이 특색으로 작용하여 그 주장하는 바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남명은 구체적으로 「戊辰封事」에서 “백성을 잘 다스리는 도는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아니라, 요점은 임금이 선을 밝히고(明善)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誠身)데에 있을 뿐입니다, 이른바 명선이라는 것은 이치를 궁구(窮理)함을 이름이요, 성신이라는 것은 몸을 닦는 것(修身)을 말합니다”라고 한 다음 “마음은 理가 모이는 주체이고, 몸은 마음을담는 그릇입니다. 그 궁리함은 장차쓰려는 것이요, 수신은 장차 도를 행하려는 것입니다. 그 궁리의 바탕이 되는 것은 독서를하여 의리를 講明하고, 정사를 처리함에 그 옳고 그름을 찾는 것입니다. 수신의 요체가 되는 것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안으로 마음속에 간직해서 혼자있을 때 삼가는 것은 天德이고, 밖으로 성찰해서 행함에 힘쓰는 것은 王道입니다.”라고 하여 明善誠身의 궁극적 목적이 의리강명과 應事當否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남명은 “전하께서 과연 敬으로써 몸을 닦으면서, 하늘의 덕에 통하고 왕도를 행하셔서, 지극한 선에 이른 뒤에 그곳에 머무신다면, 明善과 誠身케 하는 일이 모두 진전이 있어,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일이 아울러 극진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 교화에다 베푸는 것은 바람이 일어나자 구름이 몰려 가는 것 같으니, 아래 백성이 본받는 것이 반드시 이보다 더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하여 정치교화와 제절로 이룩되어 백성이 본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주자 또한 『中庸』의 注와 格物致知의 「補亡章」까지 달며 평생 심혈을 기울인 『大學』연구 10]에서 擇善으로서 博學 審問 愼思 明辨을 격물치지의 방법으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知를 말하고, 고집으로서 篤行으로 誠意正心과 나아가 수신의 行을 주장하고 있다. 비록 주자는 남명처럼 목적에 관한 주장에 언표로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위학의 방법과 목적에 대체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퇴계도 「戊辰六條疏」에서 『大學』의 格治誠正 『中庸』의 명선성신을 열거하며 설명하고 있으나 그 일관된 근본요체는 敬에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經의 강조만큼은 주자와 남명과는 별로 다른 것은 없으나 상소문에서 크게 6가지의 주장을 개진 11]에서 구체적인 정사의 개혁에는 별다는 언표가 없거나 성급한 법제개혁을 비판하거나 유보적이고, 내적인 心得과 常倫의 본을 지켜나가면 저절로 말단인 것을 이뤄지리라는 것에서 차이점이 있다고 볼 것이다. 이어서 퇴계는 “앞에 든 여섯 개의 조목은 새삼 驚天動地하고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할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삼가 常倫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性과 道에 뿌리를 두고, 聖賢의 말을 宗主로 하고, 『中庸』과 『大學』에 바탕하고, 역사 기록에 상고하고, 사실에 징험하고서 말씀드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退溪의 이 상소문의 형식과 내용이 유사한 것은 주자의 「戊申封事」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인다.
여기에서 다시 말한다면 주자와 남명은 敬을 存養(未發)과 省察(己發)의 두 가지 측면에 모두 배치함으로써 진리인식의 방법과 목적, 즉 격물치지의 실천성과 외향성을 지니며 이와 비교해서 퇴계는 존양성찰에 모두 경의 내향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본 논문의 (Ⅰ)에서 주장한 바 퇴계의 진리인식 모습은 혹시나 주관유심론적인 양명학과 유사하지는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낳게 되고 남명은 진리인식 문제에서는 주객합일성, 즉 내면과 외향의 동시 강조는 주자의 객관유심론적인 형식과 유사하고 실천성의 강조면에서는 양명학적 요소가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인용제시로서 남명의 高弟 鄭仁弘이 “선생은 格物致知를 제일의 공부로 삼았다”라고 했으며 理氣心性 문제에 있어서는 비판을 할 정도였음을 감안하면서, 일반적으로 주자가 평생 대학의 격치문제에 매달렸던 태도를 함께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한편 앞에서 논의한 대로 남명이 선물로 친구들12] 로부터 『心經』을 두 번이나 선물받아 31세 때에 읽었지만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이에 반해 퇴계는 평생에 걸쳐 이에 대한 독서강론과 글을 남기고 있는 것 13]을 볼 때 그의 학문 속에서 心學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일반적으로 程朱學을 理學이라 하고 陸王學을 心學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상기할 때 다시 한 번 주자와 남명 그리고 퇴계의 학문사상의 방법과 목적 그리고 기존선행 연구들의 논의는 새로운 고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10]朱子는 종래 유교경전 가운데 경시되었던 『大學』을 중시한다. 朱子는 『大學』이 “孔子께서 남기신 글로서 처음에 배워 덕에 들어가는문”이기 때문에 “학문은 모름지기 『大學』을 첫째로 삼아야 한다”(『朱子語類』권14)고 주장한다. 그는 『大學』의 지위를 첫째로 삼고 『論語』, 『孟子』의 정밀하고 자세함과 『中庸』의 귀착점을 찾았다(『朱子語類』권17, 「大學或問」) 朱子의 ‘학문론’을 『大學』의 첫째장의 注에 모두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明明得’ ‘親民’ ‘至善’ 에 대해 마음과 같이 주를 붙여 “맑은 덕을 밝힌다 함은, 사람의 마음은 공허하여 형체가 없으나 그 기능만은 맑고 환하여 여러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할 수 있는 작용 즉 밝은 덕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사람의 본성이지만 언제나 氣稟에 구속 되어 그 본연의 작용의 발휘되지 않으니, 사람은 마땅히 그 구속을 탈피하여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명도 특히 대학을 중시하였다(守本順一郞, 『東洋政治思想史』-朱子思想의 社會經濟的 分析-, 동녘, 1985, pp.97-98. 참조)
11]퇴계의 「戊辰六條疏」에서 6개조의 대강과 그 중요한 부분을 간단히 발췌하여 본다면,
첫째는 繼統을 중히하여 仁과 孝를 다하는 일(權衡의 정한 바 윤리의 법칙이 명백하거늘, 하물며 旁支로서 들어와 大統을 계승하고, 天命을 받아 寶位에 오르셨으니, 종묘 사직에 대한 책임이 어떠할 것이며, 신하나 백성들이 우러러 기대함이 크다).
둘째는 讒言을 막아 兩宮을 친근하게 하는 일(그것은 帝王의 感情이나 事勢가 막히기 쉽고 한편으로는 참언에 의한 이간이 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양궁의 사이에는 側近과 左右에서 일을 받드는 자들이 대개가 宦官이나 婦女이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셋째는 聖學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바로세우는 일(帝王의 학문 중 心法의 요체는 원래가 舜 임금이 禹에게 명한데서 淵源한 것입니다. 즉 학문을 배우고 德行을 이룩하는 것이 바로 다스림의 大本이며, 精一로써 中和를 잡는 것이 학문을 이룩하는 大法이고, 이러한 대법을 가지고 大本을 세우게 되면 바로 천하의 바른 政治가 모두 저절로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道術을 밝혀서 人心을 바로잡을 일(唐․虞와 夏․殷․周 三代의 隆盛期에는 도술이 매우 밝게 이루어졌으며, 다른 異端의 미혹이 없었습니다. 그 후에 周나라가 쇠퇴한 이후로는 도술이 밝지 못하여 邪惡하고 奸慝함이 아울러 일어났습니다. 그런고로 사람의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고, 다스려도 잘 다스려지지 않았고, 교화해도 교화가 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다섯째는 정사를 腹心에게 맡기고, 耳目을 통하실 일.
여섯째,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시어, 하늘이 총애를 받으실 일(『書經』에서는 ‘皇天은 따로 친애함이 없다. 오직 공경하는 자를 친애한다. 백성은 누구 한 사람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仁德 있는 사람을 사모한다. 귀신은 언제나 흠향하지 않고, 능히 정성하는 자에게 흠향한다’고 하였고, 『詩經』에서도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이에 보전한다.’고 했으니 오직 聖明께서 이에 유의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12]李浚慶과 李霖
13] 『退溪集』권41, 「心經後論」
3) 朱子와 南冥의 急務와 經世思想
주자는 「戊申封事」에서 구체적으로 크게 6가지 개혁내용을 建白하는데 이를 대강 살펴본다면, 먼저 그는 “今日의 急先務는 즉, 첫째 太子를 輔導翼贊하는 일인데,14] 여기에서 지금 삼대의 제도는 고찰할 수 없지만 唐의 六典를 논해 본다면 동궁의 관직은 사부와 빈객이 보도의 역할을 담당했는데, 첨사부와 좌우춘방이 실로 천자의 삼성이다. 그런데 지금 사부와 빈객이 다시 설치하여야 하며, 皇孫의 덕성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皇太子에 비교되지는 않지만 그 保養과 官屬이 엄하고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宗廟社稷의 안녕과 통일의 대업을 영구히 무궁토록 이어져 내리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急務의 하나다.
둘째, 大臣을 選任하는 일인데,15] 앞에서 저가 말한 바 ‘힘써 賢人을 구하여 현인이 등용되지 못하는데 대개 그 발단이 있다’. 대신을 선임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剛明·公正한 인물을 얻은 후에야 천하의 일들을 맡길 수 있음을 폐하의 총명으로 이찌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항상 이러한 인물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지위나 탐내는 천박한 인간들을 용납하게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곧바로 한 생각이 일어나는 사이에 아직 私邪의 마음을 물리치지 못하고, 사사로이 좋아하고 총애하는 일들은 모두 法度에서 말미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강명정대한 인물을 등요하여 輔相으로 삼는다면 그 때문에 내 일에 방해되고 내 사람들을 해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人選을 할 때에, 항상 강명정대한 사람을 먼저 제쳐놓은 다음에, 보통 때는 감히 直言이나 正色도 못하는 나약하고 나긋나긋한 자들을 선출하여, 이리저리 재어 보고, 또 그 중에서도 지극히 평범하고 비루하여 절대로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확인된 연후에야 천거하여 벼슬지리를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류 때문에 임명장(除書)이 나오기도 전에 인물들은 미리 정해져 있고, 성명이 공표되기도 이전에 이미 안팎의 사람들은 임명될 자가 결코 천하의 일류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대개 천하의 일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강직하고 공명정대한 사람을 얻은 다음 임용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16] 느긋하게 사사로운 가깝게 습관화된 한 때의 계책을 하지 말고 국가(宗廟社稷)과 백성(生靈)들의 만세무궁한 계책을 도모하십시오.
셋째와 넷째는 倫理綱常과 사물의 줄거리가 되는 것(紀綱)을 진작하며 올리며 엄숙하게 하고, 풍속을 변화하는 것입니다. 기강이 위에서 떨치지 못하기 때문에 아래로 풍속이 퇴폐해지는 것입니다. 대개 이런 병통이 오래되었고 浙江省 중에 더욱 심합니다.17] 비록 현인군자라도 그러한 이야기의 풍습에서 면하지 못하고, 한 사람의 강직하고 도리를 지키는 선비가 그 속에서 니와도 오히려 사람들에게 기롱당할 뿐이다. 기강은 나날이 허물어지고 풍속은 나날이 경박하여 天寶년간의 변란 18]을 보는 것 같다. 폐하가 보시기에 이러한 풍숙이 어떠하십니까? 가히 反求諸身하여야 변혁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다섯째와 여섯째는 백성을 사랑하여 그 힘을 길러주며, 군대를 훈련하고 정치를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民力이 넉넉하지 못하는 것은 私心을 이기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고 이 그 직을 잃습니다.
軍政이 제대로 닦여지지 않는 것도 私心을 이기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고 습관적으로 되어버린 장수를 뽑는 태도 때문입니다. 臣이 듣기로 우윤문이 재상이 되고 난 후 장부에 세입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이십여년 동안 내탕금의 세입이 얼마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사로이 저축하고 전당잡히는 것으로 재상이 규칙으로 세금(공물)을 고르게하여 출납하고 장부에는 누락을 하는 것이 날로달로 소모되는 것으로써 오랑캐(燕;金나라)를 받드는 것 그 얼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태조 황제 때에는 경비장부에 대한 감독이 준엄했는데 마침내 祖宗舊法이 파기되어 버렸습니다. 지방관들이 조세 외에 명목도 없는 부과세 독촉이나 하니 재물은 쌓이나 백성은 잃어버리니, 항차 지금은 정사는 번다하고 세금은 무거워 백성들과 병졸들은 달아나 도망다니고 있습니다. 臣은 매양 『大學』을 마지막 장을 읽습니다.
이미 唐나라 말기의 장수들과 비슷하여 장수들이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면 그 폐해가 단지 사졸들 만이 아니라 백성에게로 미칩니다. 오래되어 뿌리깊은 비리를 하루아침에 고치기는 힘들어도 폐하께서 마음과 몸을 돌아보아 반성하시어 성심과 정성이 부정이 없다면, 가렴주구와 횡령이 없어지는 방법으로 재상과 지방관 및 대간 등 인사를 제대로 뽑고, 환관과 병종 및 장수가 서로 연락교통하는 것을 엄히 다스리며, 屯田과 漕運 문제를 바로 잡으시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자는 마지막으로 “무릇 이 여섯 가지 일은 모두 폐하의 한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큰 근본을 정성스럽게 바로 잡고 상소로 올린 急先務를 정성스럽게 개혁수행하였는데도 다스림의 효과가 不進하고 國勢가 강해지지 않고 中原이 회복되고 원수 오랑캐들을 滅하지 못한다면 신은 청컨대 도키를 지고 엎드려 죽여주시기를 폐하게 상주하겠습니다. 폐하께서 비록 용서하시더러도 신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며 강한 개혁의지로 상주하였다.
14] 『朱熹集』2, 권11, 封事, 「戊辰封事」, 四川敎育出版社, 1997, pp.469-471. 참조.
15]위의 책, p.471 ; 至於選任大臣之說, 나라의 정치는 임금 혼자서 할 수 없기에 서로 분담해서 할 수밖에 없다.(黃宗羲, 『明夷待訪錄』「原臣」참조) 그런데 신하가 백성과 국민의 복리증진보다 위만 보고 아부를 하면서 자신의 치부에 골몰하거나 정치철학과 능력이 없는 자를이 대신의 자리에 앉으면 나라가 망하기 시작한다. ‘人事는 萬事’인데 최근 ‘이해찬 세대(1998-9:그 시절의 정책에 영향 받은 학생들)’라는 말이 돌 정도로, 명색이 한 나라의 교육장관이 교육철학도 강단경험도 없는 새파란 40대 젊은이가(임금과 대통령은 40대가 해도 괜찮지만) 미래 교육에 대한 백년대계도 없이 1600년의 대학역사를 가진 나라가 300년 대학역사를 가진 미국식(?)의 어설픈 교육개혁으로 ‘열린교육이다’, ‘수요자 중심교육이다’, ‘다양한 선발제도와 사교육비 절감’ 운운 하면서 교실붕괴, 학력저하, 선생에 대한 권위추락과 학생과 학부모의 고발폭행, 천정부지의 사교육비 증가 등을 양산하고 있다. 공정한 실력위주의 인사선발(과거나 국가고시)과 학교입시가 나라의 국력과 문화발전을 가져온 것은 세계역사가 증명을 했는데도 아무런 기준이 없는 대입제도와 변별력 없는 수능시험 등이 나라를 미래가 없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장관과 대신 한 사람의 책임만은 아니지만 과거 왕조 시대의 고려의 禮部尙書(대개 조선의 禮曹判書, 藝文館, 集賢殿(弘文館) 大提學 겸임)나 공화국 시대 문교부나 최근 교육부장관 까지 元老를 임명했다. 朱子는 아무리 英明한 황제라도 정치를 분담하고 보필합심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능력과 어진이를 뽑아(尊賢使能) 대신에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6]또한 주자는 인사문제에 있어서 대강 다음과 같이 “폐하 같이 英明하고 剛斷이 있고 불세출의 지략이 있는 분이 漢나라 汲黯과 唐의 魏徵과 비슷한 자를 뽑아 자연히 보필케하지 못하고, 돌아보건대 반대로 秦檜의 晩年執政 같은 臺諫者를 등용합니까. 그렇게 되면 남의 신하된자가 國柄을 도적질하여 忠言으로 군주를 각성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간사스러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이런 부류들을 취함으로 해서 현인들의 관로가 막히고 임금의 마음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폐하가 극히 존귀한 궁궐에 계시면서 그 威嚴과 福이 스스로 일어나지만, 역시 어찌 이러한 부류에 의뢰해서 더불어 천하의 정치를 한다면 스스로 폐하의 총명이 가려지고 자연히 기강이 무너져 천하로 하여금 그 폐해를 받지 않겠습니까? 오직 간사스럽고 사기치며 黨與를 심고 뇌물을 받아서 폐하의 조정이 혼탁하고 어지러울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17]南宋 당시 수도는 臨安으로 지금의 절강성 杭州다. 지금의 절강성이 대개 당시 浙西路와 浙東路 나뉘고 임안은 절서로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서울 근처의 風俗이 퇴폐문란한 것은 위에서 紀綱이 무너지는 것이 더욱 문제라고 질타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래로 풍속이 퇴폐해진다고 하였다.
18] 唐 玄宗 때 楊貴妃와의 관계와 그 풍속 등으로 인한 ‘安史의 亂’을 비유.
남명도 또한 「戊辰封事」에서 ‘王道政治’를 말하며 임금이 몸소 모범을 보여야 되며, 올바른 인재등용과 ‘胥吏亡國論’을 개진하면서 “신이 전날에 ‘위급한 것을 구제해야 한다(救急)’고 아뢴 일 19]은, 아직도 전하께서 불 속에서 사람을 끄집어내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것과 같이 급하게 서두르신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 다만 ‘응당 늙은 선비가 자신의 곧음을 드러내는 말이라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기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물며 이번에 말씀드린 ‘임금의 덕(君德)’에 관한 이야기는 옛사람이 이미 이야기한 도철(塗轍) 20]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도철로 말미암지 않으면 갈 만한 길이 다시 없습니다. 임금의 덕을 밝히지 않고 다스려지기를 구하는 것은 배 없이 바다를 건너는 것 같아서, 다만 저절로 빠져 죽을 뿐입니다. 그 경우는 전날에 말씀드린 것보다도 더욱 급합니다.”라고하여 나라의 현실을 소상하게 그 실상을 말하고 시급하게 고쳐야 할 것을 개진하였다.
이것은 곧 孔子의 ‘時中之道’로서 時務에 中正하여 時急하게 시행되어야 함을 말함이고, 孟子의 왕도정치의 지름길이니 주자와 남명의 상소문이 이와 수미상관한다고 하겠다.
19]남명이 1567년(선조 즉위년) 5월에 올린 「丁卯年辭職呈承政院疏」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20]길에 난 수레바퀴 자국으로 앞 사람이 갔던 길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先賢의 말씀’이란 뜻이다.
3. 改革政治와 王道․覇道政治 및 君臣義理
1) 朱子의 改革과 王安石의 新法
최근 한국에서는 ‘개혁’과 ‘정치’라는 말이 나오면 국민 전체가 얼굴을 찌푸리고 식상해하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남명이 상소문에서 말한 바대로 “몸이 닦이지 않으면 자기 마음 속의 저울과 거울이 없으므로, 선악을 분별치 못하여 사람을 쓰고 버리는 데 실수하게 됩니다. 또 옳은 인물이 쓰이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도를 다스리는 일을 이룩하겠습니까? 옛날에 남의 나라 염탐을 잘하던 사람은 그 나라 국세의 강약을 보지 않고, 사람을 얼마나 잘 쓰고 못 쓰는가를 보았습니다. 이것으로써 천하의 일이 비록 극도로 어지럽고 극도로 잘 다스려지더라도 모두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다른 데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닦는 것이 다스림을 펴는 근본이며, 어진 이를 쓰는 것이 다스림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몸을 닦는 것은 또 사람을 쓰는 근본이 되기도 합니다. 성현의 千․萬 마디 말이 어찌 ‘자신을 닦고 사람을 쓰는 것’ 밖에 있겠습니까? 옳은 인재를 쓰지 않으면 君子는 草野에 있고 小人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21]
…… 여러 벼슬아치들은 속수무책으로 제사상에 남은 희생만을 먹으면서 ‘예예’하며 물러납니다. 이것들이 믿는 바가 없으면서 어떻게 이처럼 꺼리낌 없이 방자하게 날뛸 수 있습니까? 楚나라 왕이 이른바 ‘도둑이 권세가 있어 쫓아 보낼 수 없다’고 한 것22]이 이것입니다.”라고 한 것이 절실하게 여겨지는 참담한 현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北宋이 여진족 金나라에게 망하고 난 후 이에 대한 책임문제를 南宋 시대에 와서 王安石의 新法에 돌렸다. 즉 광범위한 富國强兵과 損上益下적인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제도적 개혁정책이 구법당과 宣仁太后를 비롯한 황실외척들에 의해 실패한 후, 왕안석은 死去하고 다시 용렬한 신법당의 후예들이 집권 후에 일관성 없는 정치로 인한 것이지만 왕안석과 신법도 함께 貶斥되었다. 특히 程子 두 형제들이 舊法黨이었고 그 제자인 楊時로부터 羅豫章-李侗-朱子로 이어지는 師承관계는 주자로 하여금 王安石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元나라가 주자학을 국가철학으로 인정하고 고려말에 우리에게 유입된 후 조선 초기 개혁정치 시대에는 일정하게 왕안석이 인정되었지만,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이 시작되고 주자학이 보다 국가철학의 확고한 위치로 자리 잡게되자 다시 상대방을 비판하는데 서로 왕안석에 비유하여 이른바 ‘小人’으로 몰아부치며 비판 23]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선중기 宣祖년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림파 내부의 갈등으로 인한 당파싸움 24]에서도 주자학의 발전융성과 그 이해도의 증진 및 仁祖反正 이후 주자학에 대한 벽이단의 풍조와 아울러 왕안석에 대한 인식은 주자의 평가가 절대적으로 더욱 화석화하여 폄하되었다. 한편 주자의 구체적인 제도개혁과 경세사상은 왕안석의 그것을 모방인용했다는 사실과 퇴계가 「戊辰六條疏」에서 구체적으로 왕안석의 그 철학적 논의를 지칭하여 폄척한다는 사실 25]은 이율배반적이며 상반된 것 같지만, 앞서 말한 논의의 구체적 사례이며 주자와 퇴계 상소문의 성격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1] ‘人事는 萬事다’. 최근 나라의 모든 일이 인사정책의 편중과 혼란 때문인 줄을 알아야 하고, 이것이 시정되지 않으면 다만 亡國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 동서고금 역사의 교훈이다.
22]楚의 靈王이 令尹으로 있다가 임금이 되었다. 芋尹 無宇가 죄지어 도망간 자기 부하를 잡으려고 하자, 유사가 도리어 무우를 잡아다 왕 앞에 꿇어앉혔다. 무우가 죄를 지은 놈은 처벌해야 나라가 강해진다고 하면서 임금도 왕위를 훔친 도둑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네 부하는 잡아가거라. 그러나 도둑(왕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은 권세가 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다(『左傳』「召公」)
23]申採湜, 「王安石과 程子의 新․舊法黨 및 君子小人論」, 『歷史와 人間의 對應』(中國史篇), 한울, 1989, pp. 233-252. 특히 朝鮮前期 君子․小人論으로 王安石에 대한 南宋과 朝鮮中期 黨爭시대까지의 논의에 대해서는 지두환, 『조선시대 사상사의 재조명』, 역사문화, 2000, pp.81-113. 참조.
24]혹은 사림파를 가장한 훈척체력과 사림파의 새로운 갈등양상인 당파싸움으로 보는 시각이 더욱 정확하다고 본다. 권인호,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 한길사, 1995, pp.20-31 참조.
25]퇴계는 상소문의 여섯째 조목으로 “임금의 성실한 수양과 반성이 하늘의 총애를 받을 것”이라고 하며 漢나라 董仲舒가 武帝에게 한 天人合一的 災異說에 대해 말하고, 왕안석(퇴계는 姓도 없이 ‘安石’이라고 이름만 지칭하여 그의 왕안석에 대한 폄척의식을 노출)이 말한 ‘天變은 가히 두려워할 바가 못된다’는 보다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天論에 대해, 퇴계는 “기만과 아첨을 일삼는 간사한 말이며, 마땅히 죄를 하늘에 크게 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자는 짧은 지방관 경력 26]속에서도 시종일관 빈민구제에 전념하여 개혁정책을 펼쳤는데, 그 가운데서도 社倉法과 經界法은 대표적인 것이다. 그것은 北宋의 王安石의 개혁정책인 新法 가운데 靑苗法과 方田均稅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단지 청묘법에서 錢을 대부하고 主管이 縣(官)이 아니라 鄕(士)이었다는 점이 다른 점일 뿐이다.27] 그렇다면 주자가 왕안석의 국가와 관주도의 개혁정책을 모방답습하면서도 그 주체를 자신의 출신성분이라 할 수 있는 지방의 鄕士에게로 돌리는 모습은 조선조 사림파의 형성과정에 중요한 영향과 의미를 가진다. 바로 이를 모방한 퇴계와 율곡 등의 鄕約실시에서 그들 사림 출신들의 향촌에서의 이권을 옹호하고 나아가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발판을 삼으며 새로운 당여를 심고 향리와 경저리의 연결, 나아가 조선후기 시장상인들과 중앙관료와의 결탁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바로 서인과 남인이 인조반정 이후에 주자학을 신봉하며 향촌 기반을 가진 山林과 중앙관료들과의 연결 등에서 정권의 재창출이 가능했던 문제도 설명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점은 주자가 “匹夫로써 人主의 권한을 도적질하려 했다.” 28]는 비판에서도 보이다시피, 君主―官僚로 연결되는 기존의 통치질서에 새로이 州縣官 대신에 鄕官을, 官吏대신에 士大夫를 並列시킴으로써 향촌질서를 2원화시키려 기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鄕村 단위에서도 민간의 질서를 保甲制와 더불어 耆戶長制로 2원화시켜 철저한 2중 조직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鄕士大夫에 의한 鄕村의 2원화 조직이 실현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일방적인 통로에 의해 上戶와 縣官이 결탁하여 겸병을 恣行하였다. 결국 양 집단의 균형은 급속히 깨어진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아래서 上戶의 富를 억제하지 않는 것은 상대적으로 中産을 몰락시켜 下戶를 佃客化시키는 富人爲主의 정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왕안석의 兼倂抑制策을 일관성있게 추구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鄕士大夫에 의한 兼倂의 억제는 縣官과 협동해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고, 또 위로는 君主의 결심에 의해 수행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王安石의 개혁처럼 神宗을 만나지 못하는 한 실현 될 성격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29] 이는 君主權에 대한 도전이라는 성격이라기 보다는 하나에서 둘(理一分殊)로 라는 절대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부터 연유한 것이다.30]
이는 바로 남명이 “지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좀도적이라도 있으면 장수에게 죽이고 사로잡도록 명령한다면 하루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리가 도둑이 되고 온갖 관리가 한 무리가 되어 심장부를 차지하고 앉아 國脈을 모두 결단내니, 그 죄가 신에게 제사지내던 희생을 훔쳐내는 것뿐만 아닌데도 법관이 감히 묻지도 못하고 司寇 31]도 감히 따지지 못합니다. 혹 한낱 司員 32]이 조금 규찰코자 하면 견책과 파면이 그들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여러 벼슬아치들은 속수무책으로 제사상에 남은 희생만을 먹으면서 ‘예예’하며 물러납니다. 이것들이 믿는 바가 없으면서 어떻게 이처럼 꺼리낌 없이 방자하게 날뛸 수 있습니까?”라고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바로 벼슬아치(官)와 구실아치(吏)의 2원화 된 결탁구조를 비판한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西人 金長生과 宋時烈 등 畿湖學派의 이른바 ‘山林出身’의 후예들이 外戚과 결탁하여 王權에 도전하며 國權을 농단하고, 나아가 조선말기 勢道政治로 이어져 망국하는 모습은 단순한 성리학적 이론인 理一分殊의 현실적 실현이 아니다. 그것은 곧 주자 성리학과 현실적 왕권의 무력화로 권력독점을 통한 反民本的이며 孔孟과 儒敎經典에 나타난 經世思想을 배반한 反儒敎的이다.
그것은 宋왕조의 관료=사대부는 지방의 전호제 지주=봉건적 토지소유자였으며, 이른바 宋學 33]은 이들 관료지주층의 이데올로기였다는 점에서 이미 그러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학의 唱導者들 즉, 范仲淹․周濂溪․二程子․歐陽脩․司馬光 등은 모두 사대부였으며, 따라서 송학은 또한 ‘사대부의 학문’이라 일컬어졌다. 宋代의 신관료=사대부층은 北宋․南宋을 통하여 결코 동일한 경제적․사회적 기반 위에 서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宋왕조의 관료이며 또한 지방의 봉건적 토지소유자란 점에서는 동일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 점에서 성격을 달리한 바도 있었다.
宋왕조의 관료=사대부에는 華北출신의 관료 및 江南출신의 관료가 있었다. 北宋이 초기인 太祖․太宗의 兩朝에서는 宋왕조의 권력기구의 중추인 宰相․執政․樞密院執政에는 華北출신의 사대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眞宗(1011~1023) 무렵부터는 江南출신의 사대부도 임용되기 시작하여 神宗朝(1068~1085)에 이르면 華北․江南출신의 각 관료는 수적으로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王安石(1021~1086)의 개혁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들은 華北관료=舊法黨과 江南관료=新法黨으로 명확한 대립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神宗朝의 유명한 王安石 개혁은 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華北관료군과 王安石․蔡確 중심의 江南관료군이 제정책을 둘러싸고 벌인 왕조권력에 대한 주도권 쟁탈전이었다.34]
바로 그 성격의 차이점에서 학파의 분열과 사화당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고려말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시대에 지방아전과 사림파의 중앙정계 등장으로 시차적으로 관료지주화 되는 과정에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에서 그대로 포출된다.35] 또한 여기에서 바로 왕안석과 경세학과 정주성리학의 정치사상에 대한 이해와 주장이 다르게 나타났다.
중국의 三代之治와 堯․舜․禹․湯․文․武․周公에 이어 孔子와 朱子 및 그들 계통의 스승들을 나열하여 이른바 ‘道統淵源’을 내세워 바로 ‘그들의 나라’ 36]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26]朱熹는 50년 가까운 관료생활 가운데 지방관을 9년간 역임했고 조정에 선 것은 불과 40일이었다. 지방관 9년동안 초기의 20대 초반은 縣吏로서 수업하던 시기였으므로 본격적으로 지방행정을 펼 수 있었던 시기는 5년간이었다. 그것도 江東의 南康軍, 福建의 漳州, 湖南의 潭州 등의 知事와 浙東의 旱害를 구제하기 위한 常平使로 파견된 일들이 각각 1년 남짓이었으며 그래도 南康軍의 2년이 가장 긴 것이었다. 趙東元, 「朱熹(1130-1200)의 社會改革論」, 『歷史와 人間의 對應』(中國史篇), 한울, 1989, p.252-3.
27]위의 책, p.254, p.262.
28]『朱子大全』권21, 「回申轉運司乞侯冬季打量狀」
29]二元 조직을 형성한 官僚층은 그 맨 아래층에는 향촌에서 鄕官과 縣官으로 조직되었다. 결국 군주는 鄕官과 縣官의 상호 견제를 통해 절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의 社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경향을 그는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兩頭(上戶와 客戶를 의미하는 것)는 밝은데 중간이 어둡다”고 말하며 陸九淵 一派를 주로 지칭하였고, 또 하나는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永康․永嘉一派(陳亮과 葉適 일파)를 지칭하였다. 또는 한마디로 ‘頓悟’와 ‘功利’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다시 형이상학과 경세치용의 차이 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계층의 이해에도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보았다. 兩頭에 밝은 사람은 중간이 어둡고, 중간이 밝은 사람은 兩頭가 어둡다는 의미는 大土地所有者의 이해에 밝은 사람과 中産의 이해에 밝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大土地所有者의 이해에 밝은 사람은 兼倂의 억제, 토지 소유의 제한을 통해 井田의 회복을 목표로 삼은 반면에, 中産의 이해에 밝은 사람은 겸병의 억제나, 토지의 제한에는 관심없고, 그 대신 上戶처럼 中産도 富를 추구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趙東元, 앞의 책, pp.296-297)
30]위의 책, pp.295-296.
31]周代에 형벌, 도난 등의 일을 맡아보던 법무행정의 벼슬.
32]형을 규찰집행하는 사람.
33]송대 송학(후일 程朱學으로 다시 朱子學이란 명칭으로 대개 통일 정리됨)의 형성과 그 정치적 이데올로기성과 그 사회정치적 역활은 그대로 宋을 모방하는 조선의 중기에 와서 철제하게 완성되고 허위의식화 되었다고 본다.
34]王安石의 개혁은 均輸法․靑苗法․市易法․保甲法․募役法 등으로, 그것은 전호제 대지주인 華北관료와 왕조의 차․소금 등의 전매제도에 기생하는 전국적인 특권대상인의 결탁을 깨뜨리고 보다 강력한 통일권력=집권제를 수립하고자 한 개혁이었다. 華北 旱地農業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었던 생산력의 상대적 低位 및 전호제의 상대적 후진성과 江南 水稻作農業의 생산력의 우위 및 전호제의 진보성이 왕조의 집권화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華北․江南 양 관료군 대립의 경제적인 기반이었다. 여진족 金나라의 침입과 더불어 南宋이 성립되었다. 송학은 宋왕조의 신관료=전호제 지주의 이데올로기로 되었으며, 송학의 완성형태인 주자학은 특히 南宋의 관료=사대부의 이데올로기였다. 이 사실은 주자학의 역사구조를 규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守本順一郞, 앞의 책 pp.82-83).
35]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권인호,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 한길사, 1995, pp.51-71. 참조.
36]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2000, 참조.
2) 董仲舒와 朱子 그리고 退溪의 天人感應說
西漢 때 武帝의 유교국가 형성과 절대왕권적 정치사상의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董仲舒(BC.179-104)의 天人感應的 災異說 37]을 지지하는 것이 주자와 퇴계의 상소문에 직․간접으로 나타나 있다. 朱子는 「戊申封事」에서 “무릇 천하의 대본은 폐하의 마음일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6개조에 걸쳐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요 근년에 겨울에 雷聲이 치고 가을에 눈이 내리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평소 때 폐하가 諱言이나 疏遠한 말에 쫓아가고 도리의 일은 싫어하고 가까이하는 사람(幸人:寵臣과 幸姬)만을 깊게 사랑하는 잘못된 心事와 政事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깊이 우려될 만합니다. 때문에 폐하는 종묘사직과 후대 자손의 만세를 위하는 思慮하고 인내하고 행한다면 천하세상의 깊은 행운일 것입니다”라고 하여 일찍이 董仲舒가 말한 天人合一說과 災異說 혹은 天人相感論을 政事와 格君心에 인용하고 있다.
退溪 또한 이와 같이 「戊辰六條疏」의 마지막 여섯째에서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시어, 하늘이 총애를 받으실 일이옵니다. 신이 알고 있는 바 董仲舒가 武帝에게 말했습니다. ‘나라의 정치와 도를 잃은 잘못이 있으면, 하늘이 먼재 災害를 내리어, 이를 견책하여 고하고, 그래도 스스로 반성할 줄을 모르면, 다시 괴이한 변고를 내려서 이를 경고하고 겁을 주며, 그래도 모르면 그 때에는 그 나라의 임금에게 패망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것으로써 하늘이 마음으로 임금을 仁愛하고 그가 문란하게 되는 것을 막고자 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참 잘한 말입니다. 이 말은 참으로 萬世의 人主들의 귀감으로 가히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직접적으로 동중서의 이론을 격군심에 활용하여 주희와 함께 경세론보다는 형이상학적 사변이론으로 현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어서 다시 퇴계는 “비록 그러하오나, 임금이 여기에서 마땅히 天心이 나를 仁愛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며 또한 내가 천심을 받드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深思熟考하고, 몸소 실천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天心을 享受하고, 임금의 도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신이 전하께 그 이유를 말씀 드리고자 하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天地의 大德을 生이라 하옵니다. 무릇 천지 사이에는 많은 생물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즉 동물․식물 또는 큰 것․작은 것이 다 하늘의 보호와 仁愛를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사람의 모습이나 秀靈함이 바로 천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스스로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반드시 수령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聖스럽고, 밝고[哲], 으뜸[元]이 되고, 착하고[良], 또한 德이 神․人에 協和한 사람을 뽑아서, 그를 임금으로 삼고, 그에게 백성을 司牧하는 일을 부탁하여 하늘의 인애의 정치를 행하게 합니다. 이렇듯 하늘은 임금에게 명을 내리는 한편, 임금을 보우하여 사방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혹 임금이 게을리하거나, 또는 소홀히하여 亂이 일어날까를 두려워하여, 다시 이른바 天災地異로써 경계시키고 견책하기도 합니다.”라고 하여 천지의 災異가 임금의 정치행위와 구체적으로 연결됨을 역설하고 있다. 즉 퇴계는 임금의 德治를 天命과 天道 그리고 天變災異를 장황하게 이어서 설명하고 38] 있다.
37]절대군주의 법가적 전제정치에 대항하여 유가관료의 정치사상인 德治主義를 동중서는 『孟子』와 『中庸』 등 유교경전의 천인합일사상과 陰陽五行의 기계론적 세계운동이론을 일식과 월식 그리고 홍수나 가뭄 등 自然災異 현상을 통치자의 정치행위와 이에 대한 비판사상으로 융합한 세계관을 확립시킨 것이다. 그러나 天命이 언제나 천하지배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로 여겨졌기 때문에 帝王(天子)들에게 덕치를 강요하는 수단이 된 반면 제왕들의 절대권력을 하늘에 빙자하여 타당화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董仲舒, 『春秋繁露?, 馮寓, 『천인관계론』,신지서원, 1993, pp.51-110, 송영배, 「董仲舒의 歷史哲學」, 『철학』제23호, 1985 봄호. 참조.
38]하늘이 임금에게 이와 같은 처사를 거듭 되풀이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일단 인애의 중책을 임금에게 위탁했으니, 임금은 스스로 인애로써 보답하고, 성실하게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임금된 사람이 하늘이 자기에게 인애를 베풀어 준 이유가 이렇듯 중대한 뜻이 있고, 막연한 것이 아님을 안다면, 그때에는 임금도 반드시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고, 또한 天命을 받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알 것이고, 또한 하늘이 높고 높은 것에서 내려다보고 감시하여 털끝만큼의 속임수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즉 평상시에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삼가고 공경과 정성으로써 하늘로부터 받은 바 천명을 받들어 도를 다할 것이며, 판편 재난이나 견책을 받으면은 반드시 잘못을 반성하고 바르게 다스려서 신중하고 성실하게 天意를 감득하여 더욱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무릇 이렇게 하면 즉 흐트러지기 전에 잘 다스려질 것이고 기울기전에 나라를 잘 보존할 것이며, 언제나 평안하고 재화나 패망을 멀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거늘, 오직 天心을 알지 못하고, 덕을 삼가 지키지 못하면은, 일체가 이와는 반대가 되는지라 上帝가 진노하고 재화나 패망을 벌로 내리게 되는 것이며, 이는 하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처사이오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현재 주상전하께서, 寶位에 오르시어 정사를 돌보심이 한 돌이 되었습니다. 무릇 위로는 하늘을 공경하옵고, 아래로는 백성을 사랑하시고, 덕을 닦고 바르게 다스리셨으며, 한 번도 인심에 위반되고 하늘에 거스른 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天候가 자주 변하고 시변[天變]이 같이 일어나, 和氣가 응하지 아니하여, 농작물이 다 죽고, 또한 水災가 옛날에 보지 못하게 참혹하고, 게다가 바람과 우박과 메뚜기와 멸구의 재앙마저 겹치어 나타나니 上天이 전하에 대하여 어찌 노하여 이와 같이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天道는 먼 것 같으면서도, 실은 가까운 것이며, 하늘의 위엄은 지엄하지만 쉽사리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小臣은 우매하여 감히 망령되게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삼가 董仲舒의 말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즉 이것은 天心이 전하를 인애함이 깊고, 또한 전하를 경계하기를 지극히 하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지금은 전하께서 하늘의 사랑을 받으시고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시어, 왕위를 계승하고 정치를 도모하는 시초이자, 喪中에서 효도를 지키고 계시는 때이며, 또한 모든 근본과 시작을 端正히 바로잡아야 할 때이자 스스로 밝은 명을 남겨야 하실 때이기도 합니다. 만약 하늘이 총애한다는 안도감에만 만족할 줄 아시고, 하늘의 위엄이 赫然하다는 것을 모르신다면, 즉 하늘을 두려워하고 겁내는 마음이 날로 풀리고, 편벽하고 사악한 정욕이 점차로 뻗어나서, 마치 강물이 둑을 뚫고 나가듯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듯 하늘이 미리 재해를 일으키어 견책하고 고하고자 하며, 또한 괴변을 가지고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니, 천심이 전하를 인애하심이 이렇듯 깊고 절실하고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수양하시어 가지고 하늘의 뜻에 맞게 하시고 또한 禍難의 싹을 지우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퇴계는 천인감응설에 반대하는 異說과 인물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여
“옛날에 孔光은 ‘天道는 반드시 겁낼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安石(왕안석)은 ‘天變은 족히 두려워할 바 못된다’고 했으나, 이들의 말은 모두가 기만과 아첨을 일삼는 간사한 말이며,39] 마땅히 크게 죄를 하늘에 질 것입니다. 한편 동중서나 劉向 같은 사람들은 어떠한 재앙은 반드시 어떠한 실책에 대한 對應이라고 결정짓고, 지나치게 막히고 좁게 구속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혹 어떠한 실책을 했는데도 이에 대응하는 바가 없는 경우에는 도리어 임금으로 하여금, 하늘을 겁내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하는 길을 터주는 결과가 될 것이니, 이러한 생각도 역시 옳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臣은 어리석은 생각이오나, 임금이 하늘에 대하는 태도는 마치 자식이 어버이에 대하는 태도와 같다고 여깁니다. 어버이가 자식에게 노했을 때, 자식이 겁내고 두려워하고 반성하고 수양함에 있어, 어버이가 무슨 일로 노했으며 자기가 노여움을 샀는가를 묻지 말고, 오직 모든 일을 효성을 다해서 받들 것 같으면, 마침내 어버이도 그 자식의 효성을 기뻐하게 되고, 노여워했던 일도 함께 후련히 지워지고 흔적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잘못만을 지목하여 그 잘못을 두려워하고 겁내고 반성하여 고치고,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방자하게 행동한다면, 즉 성실과 효를 바치는 도리가 아니고, 도리어 어버이를 기만하는 것이니, 어찌 어버이의 노여움을 풀 것이며, 또한 어버이의 기쁨을 살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하늘과 임금의 관계설정을 父子의 위치에 둠으로써 ‘하늘의 아들(天子)’로서 帝王의 권력과 권위를 절대화하고 나아가 덕치의 기준에 의하여 사대부 관료의 비판권과 참여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한편 남명은 일찍이 과거답안에서까지 그 문장경향이 左柳文 40]을 즐겨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春秋』「左傳」의 현실에 대한 의리적 역사철학과 柳宗元이 일찍이 陸淳의 춘추학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춘추학을 정립하고 나아가 門閥과 親疎로 사람을 등용할 것이 아니라 개인적 능력에 의해서 뽑아야 한다는 등의 주장은 남명의 경세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유종원은 「封建論」에서 봉건적 세습제의 불합리를 지적하고 ‘정치는 필경 사람을 얻는데 있다’는 주장과 「送薛存義之任序」에서 ‘지방관리란 백성에게 복무하는 것이고 그들의 보수란 것은 백성들의 세금이니 그 직분에 태만한 자는 백성을 도취하는 것이니 주인의 물건(貨財器物)을 도적질한다면 주인은 그를 징벌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남명의 ‘胥吏亡國論’과 李瀷과 丁若鏞 등의 ‘鄕吏論’ 등과 일맥 상통하며, 구체적으로 정약용의 「監司論」에서 말한 진정한 도둑이 곧 지방관과 이를 감독하지 않는 감사라고 한 것과 직접 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종원은 「天說」에서 天人相應의 길흉화복적 災異觀을 비판배격하면서 ‘天이 어찌 賞功과 禍罰을 내릴 수 있을까? 功이란 스스로 功이요, 禍란 스스로 부르는 화다. 상벌을 하늘에서 바란다는 것은 큰 오류다’ 41]라고 하였다. 일찍이 孔子는 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며, 유교란 인간의 도리와 사회국가의 政事治平에 대하여 합리적인 비판분석 방법으로 보다 이상적인 사회건설을 지향하는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퇴계의 천에 대한 왕안석의 이론비판과 동중서의 천인감응과 재이설을 인용지지한 것은, 앞서 말한 道佛에 관한 퇴계의 비판논의와 함께 새로운 평가를 요하는 대목이다.
39] 董仲舒의 天人相感과 災異說이 당시 漢武帝 이후 중앙집권적 황제(天子)권력의 강화와 절대화(하늘과 연결)에 복무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어떤 이론이 기만과 아부를 한 것인가 알 수 있겠다.
40] 『春秋』「左傳」의 左丘明과 唐代 柳宗元(773-842)의 문장
41] 柳宗元과 같은 시대 인물로 절친한 친구인 劉禹錫(772-819)도 韓愈와 柳宗元의 天人關係論爭에 뛰어들어 「天論」에서 ‘天與人交相勝說’을 주장하여 전통 儒家의 ‘天人感應說’과 ‘天命決定論’에 부정적 견해를 밝혔고, 유종원의 ‘天人相分說’에 대해서도 일정한 수정을 가했다. 이에 대한 논의는 劉明鍾, 『宋明哲學』, pp.19-22, 馮寓, 앞의 책, pp.160-168, 朴仁成, 「劉禹錫의 詩文硏究」, 고대 박사논문, 1995, pp.41-43. 참조.
3) 王業과 王道․覇道政治 및 君臣義理
공자는 管仲이 齊나라 桓公 때 재상이 되어 이룬 공로와 업적에 대해 찬양하고 비록 인자는 아닐지 몰라도 인의 공에 대해서는 인정했다.42] 그러나 공자의 제자인 子貢과 子路의 관중에 대한 회의적인 질문(仁)은, 齊나라 桓公이 비록 ‘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패업을 이뤘지만 일찍이 그의 형인 公子 糾를 죽이고 군주의 지위에 올랐는데 그 때 관중은 규의 신하였다.
唐太宗 李世民이 이른바 ‘玄武門 事件’으로 형인 太子 建成을 죽이고 아버지 高祖 李淵을 上皇으로 유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중국 역사상 인정할 만한 업적을 남겨 이른바 ‘貞觀의 治’를 이룩했다. 그 뒤에는 재상 魏徵의 거침없는 諫爭과 建議獻策이 있었다. 그런데 위징은 일찍이 태자 건성의 신하였다. 남송이 멸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섰을 때 남송의 신하였던 許衡은 다시 元世祖의 신하가 되어 국자좨주(祭酒)로서 정주성리학이 관학이 되는, 즉 이른바 ‘道學’의 창달의 공 43]이 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쿠데타 이후 조선의 창업을 할 때, 그 과정에서 鄭夢周와 鄭道傳 등은 각각 이른바 ‘安社功臣’과 ‘開國功臣’의 칭호를 받으면서 그 功業이 지대하다. 태종 이방원도 태조 이성계의 왕자 가운데 유일하게 고려의 과거(문과) 급제자로 유학(道學)의 윤리강상과 의리를 알았으면서도, 형제들을 죽이고 형인 定宗을 세웠다가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아버지 태조를 태상왕으로 함흥에 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학문을 장려하며 아들 世宗의 위업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 배후에는 權近․河崙․卞季良․황희․맹사성․김종서․집협전 學士群이 있었다.
한편 평소에 왕도정치를 주장하던 맹자는 제자인 公孫丑가 자신과 관중을 비교하자 무력으로 ‘仁을 가장하는 자가 바로 覇’ 44]라고 하며 ‘春秋五覇는 三王의 죄인’ 45]이라고 하며 패도정치를 반대하며 불쾌하게 생각했다. 주자는 북송 시대 왕안석의 신법이나 당시 陳亮과 葉適 등의 공리적인 실학 46]을 비판하고 이상적인 황제의 一心과 天理를 주장하였다. 趙光祖도 마찬가지로 至治主義(왕도정치)를 내세워 勳舊世臣들을 몰아내고 임금의 한마음에 매달렸다. 그러나 남명은 출처문제로서는 先見之明이 부족했다고 조광조를 비판하고 있으나47] 대체적으로 남명과 퇴계는 유학자이며 성리학자로서 공자와 맹자는 물론 위에서 거론한 許衡과 주자 및 조선 중기까지 사림파의 도통연원의 인물과 조광조를 인정하였다.
그러면서도 허형이 兩朝(南宋과 元)에 出仕한 의리문제나 조광조가 중종반정 이후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섣불리 왕도정치를 표방하고 성급하게 개혁하다보니 주위의 많은 士類들을 희생시킨 문제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했다. 정도전이나 권근 그리고 훈구파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에 서있고 정몽주에 대해서는 출처사상을 중심으로하여 그 의견이 대조적48]이다.
42]『論語』,「憲問」
43] 중국 700년, 고려조선의 600년, 베트남 600년, 일본 덕천막부에서 소화시대(1945) 까지 350년의 관학.
44] 『孟子』,「公孫丑上」
45] 위의 책, 「告子下」
46] 朱子와 陳亮의 王覇논쟁에 대한 것은 이승환,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고대 출판부, 1998, pp.286-319. 참조
47] 『南冥別集』, 「言行總錄」
48] 권인호, 앞의 책, pp.80-119. 참조
4. 結論
주자의 「戊申封事」는 남명의 「戊辰封事」와 퇴계의 「戊辰六條疏」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유사점과 상이점이 나타나는데, 현실을 개혁하여 보다 나은 정치를 위해서 임금에 대하여 경으로서 明善誠身케 하여 격군심할 수 있도록 한 상주한 점은 유사점이다. 그리고 주자와 남명은 政在養民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제도개혁을 주장하여 주자는 조세제도나 재상과 지방관 및 대간 등의 인사문제와 宦官과 兵卒 및 將帥들의 결탁비리, 屯田과 漕運 문제 등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고, 남명은 관리들의 人事문제, 戚里․宦官․女謁․권신보다도 더 악랄한 ‘胥吏亡國論’에서 상하가 결탁한 것을 재상에게 따져야 한다는 점, 공물과 방납의 폐해 등의 상소문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또한 주자와 퇴계는 종묘사직의 안녕과 常倫의 가르침과 性과 道에 뿌리를 둔 공통된 내용들은, 즉 주자는 태자를 보익하고 紀綱을 振擧하며 풍속을 변화하기 위해 황제부터 反求諸身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퇴계는 왕위계승의 君位一統과 仁孝를 말하고, 讒言을 막아 大妃들을 친근하게 하고, 성학을 정치의 근본으로 하고, 인심과 풍속을 바로하고, 임금이 수양과 반성을 하여 하늘의 총애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퇴계는 다섯째 조문에서 ‘政事를 大臣인 心腹에게 맡기고 臺諫인 耳目을 통해하라’는 것으로 주자의 宰相과 臺諫에 대한 적극적인 개선책으로 내용적으로 보다 구체적이지 못하지만 일정한 방안을 다른 다섯가지 조목과 비슷한 경향으로 제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실학자 李瀷의 질타의혹을 받았고, 선조 조에 있었던 일련의 정치개혁과 임진왜란 등에서 퇴계학파의 후예들인 남인들이 온건개혁과 왜군과의 강화 49]논의가 나왔다고 보인다.
한편 선조 말년과 光海君의 전후 일련의 복구사업와 大同法 실시, 明과 後金에 대한 등거리 외교 등 구체적인 개혁정책 50]에 남명학파의 후예들이 북인으로서 대거 참여한 사실은 남명이 일련의 公車文과 실학적 학문적 경향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북송 멸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송대 초기 경세사상적 신학을 이어받은 왕안석의 신법과 개혁정치의 실종과 인재등용의 실패였다. 그 실패의 원인은 남명이 말한 ‘女謁’의 횡행 곧 宣仁太后 및 昭慈太后 등과 결탁된 반개혁 보수세력 51]인 구법당의 집권기의 개혁중단과 방해와 제도개변으로 제 2 차 개혁기의 정치문란이라고 본다. 이것은 후일 淸末의 西太后와 조선조 말의 閔妃 그리고 선조 말년과 광해군 시대의 개혁정치를 위협한 西人과 小北세력 들이 仁嬪金氏 52]와 대비 仁穆王后 등 外戚과 결탁하여 개혁을 파행화하여 기존권력과 부귀를 온존하려는 음모에 의해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거나 결국 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남명의 상소문에 나타난 구체적인 파행비리의 정치현실 비판과 그 경세사상이 바로 時中之道로서 얼마나 救急한 일인가 알 수 있다. 그것은 왕안석의 신법이 가지고 있는 개혁과 경세사상이 남명과 남명학파 그리고 후일 조선후기 실학파들의 개혁주장과 일맹 상통하고 있다. 그 실학의 주장에 동조하여 正祖의 개혁정치가 순조의 등극과 함께 순조의 증조모 곧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함께 급전직하로 보수반동화하여 실패하였다. 그리고 개혁파의 인물들이 조정에서 몰러가고 귀양가거나 처형되는 것이 바로 ‘女謁’ 과 그 배후에 결탁된 반개혁적 노론의 보수세력에 의해 이뤄지며 나아가 100년간 이어진 勢道政治 53]에 나라가 결단난 것이다.
주자의 학문범위가 매우 廣博하였고,54] 또한 모순된 사회정치적 현실에 대해 구체적인 개혁방안 및 윤리기강의 진작과 풍속의 순화를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본 논문을 통하여 남명의 ‘朱子以後 不必著書’와 修養實踐의 의도 55] 및 당시 퇴계학파가 下學人事를 통한 上達天理로 나아가지 않고 常倫과 理氣心性 論辨을 주로 한 道學 중심의 고정화된 학문 태도 56]를 대강 살펴보며 관련된 경세사상과 구체적 개혁방안을 고찰하였다. 또한 남명은 ‘실천성이 결여된 이론중심의 학문경향이 陸象山의 심학적 병폐보다 심하다’고 비판한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이 試論的으로 진리인식의 문제에서 퇴계의 학문사상의 경향성이 양명학에 대한 闢異端的 言表와는 다르게 그러한 색채와 요소 57]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조 학문사상에 대한 闢異端적 마녀사냥인 이른바 ‘斯文亂賊’ 등이 퇴계나 宋時烈 이후 그들의 道統淵源에 대한 강한 집착과 牽强附會 및 朱子學 一尊主義는 사회정치적 富貴의 기득권 유지 및 사상적 보수주의와 함께 새로운 앞으로 점검과 진실규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흑백논리나 율곡 중심의 기호학파와 퇴계 중심의 영남학파의 결탁내지 여타 학파나 학문사상에 대한 배타적 독존주의 태도로, 여타 先賢들과 학파들의 학문사상을 이단시 하거나 백안시하는 학문풍토 58]는 청산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땅의 올바른 학문지성사와 전통문화의 재조명을 위하여 새로운 연구풍토가 이룩될 수 있어야 국가와 민족의 장래가 암담한 이 때 미래가 있을 것이다.
49]같은 퇴계학파로서 퇴계의 高弟이며 同鄕인 趙穆은 남명학파인 鄭仁弘 등이 柳成龍의 和議論을 비판한 논의에 동조하였기에, 仁祖反正 후에 안동과 상주지역의 유성룡계 퇴계학파로부터 비판을 받고 조목의 고향인 예안지역의 퇴계학파가 몰락하였다. 鄭萬祚, 「月川 趙穆과 禮安地域의 退溪學派」, 『韓國의 哲學』제28호, 경북대 퇴계학연구소, 2000, pp.21-34. 참조.
50]올해 김대통령은 2월 말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서울에서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의 보존과 강화를 약속하고, 3월 초에 워싱턴에서 미국의 부시 대통령와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에 적극 동참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동북아 전역미사일방위(TMD)체제로 확대될 때 어떻게 할 것이며, 우리의 국가안보와 민족의 命運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고려 때 徐熙(942-998)는 中國 中原의 北宋과 북방의 遼나라(거란)의 두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993년 윤10월에 거란의 蕭遜寧 군대 80만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 외교담판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康兆가 비록 외척의 발호를 막은 공은 있으나 穆宗을 폐하여 弑害하고 顯宗(大良院君 詢)을 세우고 스스로 行營都統使가 되어 30만 군으로 通州에서 거란에 대비했다. 그러나 강조는 遼의 聖宗이 거느린 거란군 40만 군에 의해 그의 죄를 물어 처들어 오니, 강조는 잡혀죽고 수도 개성이 유린된 바 있다. 광해군은 중원의 명나라와 북방 後金(뒷날 淸나라)의 삼각구도 속에서 등거리 외교정책으로 전쟁을 막았다.
그러나 광해군의 왕위를 찬탈한 인조가 명나라에 대한 事大外交와 임진왜란(이 때 명나라의 원병을 현재 중국은 ‘抗倭援朝’라 하고 6.25 한국전쟁은 ‘抗美援朝戰爭’이라 부르고 있다)에 대한에 대한 이른바 ‘再造之恩(여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2000, pp. 67-88, 참조)’을 명분으로 광해군을 몰아내는 궁정쿠데타를 단행한 후에, 그 결과 청나라의 침입으로 인조는 국왕으로서 역사에 전무후무한 삼전도의 굴욕수모를 당하고 국토는 숙밭이 되었으며 수십만에 달하는 이른바 ‘호로(胡虜)자식’과 ‘화냥년(還鄕女)’을 양산하여 백성을 피눈물나게 한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학자와 정치가들이 가까운 장래 20-30년 후에 중국이 미국을 모든 면에서 능가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히고 있다. 동서고금의 모든 강대국과 대제국도 멸망하였다. 그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한편 역사이래 9백 수십차례의 외침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국경을 이웃하고 있는 중국의 침략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 美․中․日․露의 최근 100년간의 역사를 되돌아 보아도 우리가 국가의 존망과 민족의 생존을 염려한다면, 한 때의 정부나 정권의 생존안위와 재창출 등에 매달려 외교정책을 해서는 안된다. 흔히 하는 말로 한 국가의 정치외교상에서 ‘영원한 적국과 영원한 우방은 없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朱子의 金에 대한 복수의리와 중원회복의 열망 및 임진왜란 때의 明軍과 한국전쟁 때의 美軍(유엔군)과 中共軍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새로운 ‘再造之恩’과 事大主義 그리고 대외종속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100년전 伊藤博文의 ‘東洋三國平和論’에 이완용이 동조한 결과는 親日賣國과 亡國이었다.
일제말기 大東亞共榮圈에서 1965년 한일협정 그리고 최근 한일어업협정까지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국민의 생존에서부터 독도문제와 일본교과서 왜곡 그리고 계속되는 망언의 실체는 무엇인가?
멕시코가 IMF 사태를 두 번이나 맞아 미국의 의도대로 금융개혁과 구조조정을 한 후에 빈민층이 40%에서 70%로 늘어나고 빈부격차가 더욱 극심해진 사례를 쳐다보면서, 우리의 이른바 국민의 정부가 IMF 사태를 극복하고 구조조정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한다고 하면서 중산층이 무너지며 하층민이 늘어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간다는 것(損上益下와는 반대로)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혁이란 것이 누구에게 厚하고 누구에게 薄하게 한다는 명확한 비젼없이 진행되었을 때, 고소득자와 상층민의 탈세와 부정부패가 만연할 때 우리는 동서고금의 모든 역사가 그렇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교훈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강한 정부가 여당이 정권의 재창출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서민들을 위한 개혁정책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民意(民心)의 반영인 투표에 의한 정당한 정권재창출로 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51]퇴계는 明宗 때 文定王后 아래서 벼슬살이 하며 그 악행과 정치비리를 경험한 그로서 비록 「戊辰六條疏」의 그 두 번째로 兩宮인 두 大妃(仁宗妃인 王大妃 仁聖王后와 明宗妃인 大妃 仁順王后)와 孝慈로써 화합하게 하고 讒言과 宦官妖妾 등과 결탁한 무리들을 경계해야 된다고 했지만, 대비의 정치참여나 외척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적극적 언표가 없다. 이것은 남명의 「乙卯辭職疏」와 「戊辰封事」과 대조를 이루며 퇴계의 富貴(대토지와 수많은 노비 소유 및 崇品벼슬)와 관련하여 이미 대비에게 관심을 부여하는 것은 북송 구법당이 兩太后와 결탁하여 개혁을 방해중단한 것과 그가 개혁파 왕안석에 대한 비판은 많은 시사점이 있다고 본다.
52]끝내 西人 보수세력과 결탁하여 ‘逆謀로서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의 왕위를 찬탈한(仁祖反正:이 때의 거사가 반정이 아닌 쿠데타적 성격에 대해서는 權仁浩, 「朝鮮朝 17世紀 社會現實과 政治思想의 比較硏究」, 『民族統一論集』4, 경상대 통일문제연구소, 1988. 참조)’ 仁祖의 祖母, 定遠君(追尊 元宗)의 母.
53]퇴계의 상소문 내용이 아니라 주자와 남명이 주장한 내용의 철저한 반대현상, 특히 인재등용의 공정성(과거제도의 파행과 이른바 ‘淸職’에 대한 補職原則 묵살, 公卿의 독점 그리고 특정지역 소외)이 망국을 초래하였다.
54]朱子學은 道問學을 중심으로 尊德性을 포함했다면, 象山學은 尊德性에 치우쳤다.
55]이 이야기는 일찍이 明代 初에 說瑄(1392-1464)이 한 말로서 그렇기 때문에 ‘實踐躬行’할 뿐이라고 하였다. 같은 시기에 吳與弼(1391-1469)이 일생을 處士로 지내며 ‘自得實踐과 修養工夫’를 첫째로 하였는데, 이는 남명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56]이러한 道學 중심의 학풍은 일찍이 明代 初 曹端(1376-1434)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간단히 보아 퇴계가 『理學通錄』의 부록에 그를 언급하고 있으며, 수제자 趙穆의 號가 비록 禮安 月川里를 딴 것이지만 조단의 호도 月川이며, 조목이 스승 퇴계와 理氣心性을 비롯한 성리학 전반에 걸친 교학상장의 모습은 참고가 될 만하다.
57]퇴계는 「王陽明傳習錄辨」과 「白沙詩敎傳習錄抄傳因書其後」를 통하여 陸象山․陳白沙․王陽明에 대해 비판하였고, 이는 조선조 程朱學자들의 陸王學 비판의 지침이 되었으며, 그들을 ‘유학자라 하지만 불교를 믿었다’고 異端으로 몰았다. 사실 정주학의 理氣心性論과 體用論理도 道敎와 불교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도……. 이에 대한 논의는 유명종, 『성리학과 양명학?, 연대출판부, 1994, pp.175-188, 劉明鍾, 『宋明哲學』, pp.24-35 참조.
58] 蘆沙 奇正鎭(1798-1879)은 湖南 長城사람으로 율곡과 다른 學說로 畿湖學派의 공척을 받았고, 寒洲 李震相(1818-1886)은 嶺南 星州사람으로 왕양명과는 다른 ‘心卽理’를 주장하고 퇴계학파와 이론이 다르다하여 영남학파의 배척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문집인 『蘆沙集』이 尤庵의 후손인 宋秉璿에 의해 출판의 어려움을 당하고, 『寒洲集』은 陶山書院에서 퇴계의 후손에 의해 불살라 지는 불상사가 있었음은 19세기 말 조선조가 마감하는 때에도 여전히 16세기 退溪의 강한 闢異端的 학문성향과 17세기 宋時烈에 의한 ‘斯文亂賊’의 망령이 힘을 발휘하여 ‘修己治人’의 儒學, 곧 시대적 학문사상의 발휘가 제약되고 있으니 조선조의 亡國이란 우연이 아닌 것이다.
Abstract
A Study on the Neo-Confucianism and Governing Thoughts of the Chu-Hsi․Nammyung․Toegye(Ⅱ)
- Centered on Mushin secret memorial to the Throne․Mujin six provision memorial to the Throne․Mujin secret memorial to the Throne -
Kwon, In-Ho
Chu-Hsi's Mushin secret memorial to the Throne 「戊申封事」 is similar to Wang An-shih's 10 thousand-letter memorial to the Throne 「萬言書」 in the respect of amount and definite reform bill. Toegye's Mujin six provision memorial to the Throne 「戊辰六條疏」 is composed of six provision like Chu-Hsi's Mushin secret memorial to the Throne. But compared with Wang An-shih and Chu-Hsi, his Mujin six provision memorial to the Throne 「戊辰六條疏」 has different thing in the respect of contents. On the other hand, Nammyung's Mujin secret memorial to the Throne 「戊辰封事」 is similar to Wang An-shih and Chu-Hsi's reform bill, but judging from formal respect, simply it is only 1600 letters.
This three figure's memorial to the Throne is writed in order to reform the hard facts and politics. Their common point is statement that the king has to have right mind. Besides Chu-Hsi and Nammyung emphasized that politics must try to raise the people. So they insisted definite reform of system. Chu-Hsi insist that the system of taxation, the personnel affairs problem and the land problem must be reformed. Nammyung insisted reforming the personnel affairs problem of goverment official, prohibition of political intervention by queen, and ‘national ruin that is misrule of taxation by petty officials(胥吏亡國論)’. Toegye insisted the king has to get along with Queen Dowagers(大妃) and emphasized reform of morals and customs as the political foundation. Because of this statement, afterwards the practical scientist Yi ik criticized that Toegye didn't have theory of political reform.
On the other hand, Nammyung's memorial to the Throne is related with not only a chain of reform policy and diplomacy in the period from sǒnjo(宣祖)‘s later to Kwanghaegun(光海君) but also practical science in the latter years of Chosǒn(Yi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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