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한양의 비보풍수에 관한 연구
김현욱*·김두규**·김용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 우석대학교 교양학부·**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
A Study of Complementary Setup Fengshui based on the Historical Record of the Chosun Dynasty
Kim, Hyoun-Wuk* Kim, Du-Gyu·· ** Kim, Yong-Ki***
*Graduate School, Sungkyunkwan Univ.**Dept. of Woo-Suk Univ.
***·Dept. of Landscape Architecture, Sungkyunkwan Univ.
Abstract
Fengshui is based on the presupposition of the human pursuit of a good site for buildings, including houses, villages, cities and graves. During the Koryo Dynasty(918-1392) and Chosun Dynasty(1392-1910), a major task of Korean traditional scholars, who studied geomancy, was to "read" geographical features and configuration. It aimed to seek for a site to decide on what is good and what is not. Under the circumstances in which they have no other alternative concerning the dwelling area of their life, they have been forced to do their best to turn a worse residential area into a better one. They, thereby, have invented and promoted an idea concerning Complementary Setup Fengshui(裨補風水). The Complementary Setup Fengshui had been forged in view of a national project during the Koryo Dynasty and Chosun Dynasty. Consequently, we have called it 'National Landscape Architectur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take an analytic look at the history and basic principles (of the Complementary Setup Fengshui), based on the historical record of the Chosun Dynasty with a view to finding the traces of Complementary Setup Fengshui. Only two traces of the Complementary Setup Fengshui are examined in this paper. One is the protection of landscape, the other is to clean the water. And the positive technics of the Complementary Setup Fengshui are to plant, to dredge the stream and to make artificial hills. The negative technics are to prohibit the use and close up a road
Keyword : Complementary Setup Fengshui, Urban Planning, National Landscape Architecture
Ⅰ. 연구배경 및 목적
고려 시대에는 산천비보도감이라는 국가 관청에서 주관하여 전국토의 지형지세를 살펴 그 부족한 것을 보완하고자 하였다.(김두규, 2000) 또한 조선 세종 30년 3월 8일, 음양학 훈도(陰陽學訓導) 전수온(全守溫)은 신라의 왕업이 천여 년이나 된 것은 조산과 나무를 심음으로서 허한 곳을 보충 한 것이라 하여 비보풍수의 중요성을 말하고 도성 내외의 산에서 채석을 금하자는 상소를 올린다.1) 이처럼 고려시대에 성행하였던 비보풍수는 조선시대에도 그 맥을 이어져 왔는데, 민간에서는 자생적으로 돌탑과 장승 등으로 정주지를 비보하였고, 한양 및 각 주요 도시의 비보는 국가적 차원에서 주관했던 일종의 국역조경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비보풍수에 관한 연구는 민속학, 조경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주로 탑, 당간, 장승, 남근석, 돌탑 등은 민속학에서 접근하였고, 사찰과 마을 숲 등은 지리학과 조경학에서 다루었다. 최근의 연구동향을 살펴보면, 영남의 비보탑과 조산 등으로 최원석(2001)의 연구가 이루어 졌으며, 전라북도의 비보입석 등으로 송화섭(2001)의 연구가 진행되었고, 김두규(2000)는 朝鮮王朝實錄과 白雲山內院寺事迹을 통해 비보의 원칙을 규명하고 사례를 통해 검증하였다. 최근의 연구는 기존의 비보풍수에 관한 연구가 지녔던 한계성에서 벗어나 비보의 유형과 원칙을 구체적으로 규명하였으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졌던 한양의 비보에 대해서는 관왕묘(김두규,2000)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언급된 연구는 없었으며, 나무를 심고, 개천을 준설하고, 造山을 하는 조경적 비보풍수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비보풍수에 관한 기록을 분석함으로서 조선시대 국가적 차원에서 나타났던 비보의 유형과 원인을 규명함에 그 목적이 있다.
Ⅱ. 연구방법
본 연구의 연구방법은 일단계로 조선왕조실록CD의 검색기능을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비보풍수에 관한 내용을 조사하는 것으로 이루어 졌다. 검색어는 풍수, 상지, 감여, 비보로 하였으며, 풍수에 관련된 기록 중에서 도성 내에서 이루어졌던 비보풍수에 관한 내용으로 한정하였다. 그 결과 도성 내에 비보풍수로 나타나는 공간적 범위는 창의문, 숙청문, 內外 四山, 남대문, 南池, 개천(청계천)과 造山(방산동 일대), 관왕묘로 나타났다. 이 중 관왕묘는 선행연구에서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본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비보적 흔적이 나타나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관련된 문헌 및 고지도를 조사하여, 비보풍수의 이론적 근거 및 비보풍수의 원인과 기법을 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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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공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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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脈 |
창의문, 숙청문, 남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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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堂水와 水口 |
南池, 청계천, 조산(방산동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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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연구대상지 (붉은색:조선전기, 파란색:조선후기) 한양경성도(輿載撮要, 장서각소장), 작자미상 19c 말엽
Ⅲ. 결과 및 고찰
1.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비보풍수의 이론
세종 30년 음양학훈도 전수온의 상소의 내용을 살펴보면, 도성 내외의 산에서 채석을 금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그 이론적 근거를 지리전서에서 제시한다. 그가 언급한 풍수서는 감룡경, 곤감가, 장중가, 착맥부, 동림조담, 명산론, 지현론인데, 수구와 관계된 것은 감룡경, 곤감가, 장중가, 착맥부이며, 지맥에 관계된 풍수서는 동림조담, 명산론, 지현론이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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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서 |
내용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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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룡경 |
수구에 중첩하게 괴이한 돌이 있게 되면 반드시 羅星은 물을 當하여 서 있게 되는 것이니..... 羅星은 羅城 밖에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火星과 서로 對를 짓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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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감가 |
수구에는 관쇄가 조밀하게 되지 못했다고 혐의하지 않나니, 천중만첩이 모두 기이한 봉우리가 된다. 나성, 철장과 화표, 보전, 용루 따위가 모두 유허하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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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중가 |
수구에는 산세가 튼튼하고 조밀한 것이 요청되나니, 천병이 모여 선 듯한 것을 이름하여 귀지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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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맥부 |
수구가 닫아 주지 못하면 당년의 부귀는 쓸 데 없는 것이나 수국 밖으로 훨씬 내려가서 잘 잠그어 준 것이면 여러 세대를 두고 호걸과 영웅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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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림조담 |
돌은 산의 골격인데 산의 골격이 없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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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론 |
산이 흙으로써 살을 삼고 돌로써 뼈를 삼으며 초목으로써 모발을 삼는 것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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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론 |
산에 부족함이 있으면 법은 증첨하는 것이 좋으니, 전맥이 접속을 얻게 되면 기운이 오히려 타 나오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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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온이 언급한 풍수서는 세종 때 수많은 풍수논쟁에 있어 항상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때 언급되었던 서적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규장각에 보관되어 전해오는 것은 감룡경과 명상론 뿐이고 나머지 서적은 공식적으로 전해오지 않는다. 아마도 임진왜란 전후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수구는 닫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산은 흙과 돌 그리고 초목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수구의 중요성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언급되는데 수구가 닫혀 있음은 곧 좌우의 청룡, 백호가 혈을 잘 감싸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수구가 벌어져 있으면 조산을 만들어 국을 형성해야 한다. 문맹검은 한양 도읍지의 풍수적 문제점, 즉 한양 수구(水口)의 취약성을 지적하며,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비보풍수를 시행할 것을 주장한다:
“명당의 수구에는 3개의 작은 산을 만들어, 각기 나무를 심어서 수구를 진압하고 막게 하는 것이 곧 옛날 사람의 법입니다. 지금 국도(한양) 수구의 안에 옛날 사람이 3개의 작은 산을 만들어 각기 소나무를 심었지마는, 이 작은 산이 수구에 있지 않고서 도리어 수구의 안에 있고, 또 산이 무너져서 낮으며 소나무는 말라죽었습니다. 지금 보제원의 남쪽과 왕심역의 북쪽에 작은 산을 혹은 3개나 7개를 만들어 소나무와 홰나무․버드나무를 심어서 수구를 좁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2)
즉 수구가 벌어져 있다면 인위적으로 산을 만들고 수목을 심어 수구의 허함을 채워 국을 형성시키는 것이 비보풍수의 구체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수구막이에 대해서는 당나라 때 복응천(卜應天)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설심부(雪心賦)에서는 “단이나 사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3) 이러한 예로는 동대문 밖에 관왕묘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김두규, 2000)
한편 나성이라 함은 명당을 사면으로 둘러싸고 있는 뭇산들을 말하는데, 마치 성과 같은 형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당의 기를 보호하는 기능을 갖는다(羅城者明堂四面衆山.羅維有如城象所以保障龍氣者也)4) 음양학 훈도 전수온의 상서5)의 내용 중에서 한양의 문제점은 나성이 공결되고 수구가 관활하게 된 것을 지적하고 흙을 쌓아서 산(山)을 만들어 보결(補缺)하는 것은 어려움으로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보방법은 크게 수구를 허하게 하지 않기 위해 가산을 조성하고 나무를 심는 방법과 나성의 공결함을 채우기 위해 산에 초목을 식재하는 것으로서 국가적인 차원에 행해졌던 비보풍수라 할 수 있다.
2.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비보풍수의 흔적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비보풍수의 유형은 크게 지맥보존, 명당수와 수구막이로 나타났다. 지맥보존의 사례는 장의동과 관광방 동쪽 고개길과 북악산의 주맥 및 낙산 그리고 內外의 四山의 地脈보존과 남대문이며, 수구와 수구막이의 예는 명당수 淨化와 관왕묘, 그리고 조산으로 나타났다.
1) 지맥보존
태종 13년 최양선이 경복궁의 좌우 지맥을 보존하자는 상소6)를 올린다. 그 결과 창의문과 숙청문을 닫고 대신 서전문을 열었다.
“지리(地理)로 고찰한다면 국도(國都) 장의동(藏義洞) 문과 관광방(觀光坊) 동쪽 고갯길은 바로 경복궁(景福宮)의 좌우 팔입니다. 빌건대, 길을 열지 말아서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부에 명하여 신문(新門)을 성(城)의 서쪽에 열어서 왕래에 편하게 하였다.....각사 종으로써 장의동에서 소나무를 심으라고 명하였다.
장의동은 현재 효자동과 청운동일대로서 북악의 서령에 해당된다. 장의동 문은 장의동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곳의 문을 말함인데 도성의 서북쪽의 문 창의문7)을 일컫는다. 창의문은 평소에 열어 두지 않다가 가뭄이 심하면 숭례문을 막고 창의문을 열었다라는 기록8)이 있는데, 음양오행상 남쪽은 火에 배속되고 북쪽은 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세종 28년 풍수학인 이양달이 장의문은 경복궁을 임하여 누르고 또 해가 있으니 사람들의 다니지 못하도록 말해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9)과 세종 30년 목효지10)가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 시키자는 보아 장의문의 맥을 보존하려는 의도가 나타나고 있다.
“......장의문(藏義門)은 천주(天柱)의 자리인데, 인물(人物)이 밟고 다니는 것이 미편하니 상시로 닫고 열지 아니하여 천주(天柱)의 자리를 보전하게 하소서......”
이는 장의문이 장의동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음으로 해서 지맥이 쉽게 손상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통행을 억제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관광방의 동쪽 고갯길은 주산인 북악의 동령에 위치하는 곳으로 도성의 북문인 숙청문이 있다. 서전문은 장의문(藏義門, 彰義門)과 돈의문(敦義門, 舊 西箭門) 사이에 1개 소문(小門, 新西箭門)을 개치(開置)한 사실이다. 태종은 최양선의 말을 따라 新門을 상지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숙번이 인덕궁 앞에 작은 동네가 있으니 거기에 길을 내고 小門을 열고 장의동에 소나무를 심도록 하였다.11) '서전문(西箭門)'은 태조 때 돈의문의 속명(俗名)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때 새 간문의 칭호도 그렇게 정하였던 것이다.(서울 육백년사) 그 후 세종 4년(1422) 도성을 수축할 때에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다시 돈의문을 조성하였다. 서전문에 옹성을 쌓기 위하여 특별히 평안도 군인 1,000명을 계상(計上)하였으나 옹성을 쌓지 않고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그 남쪽의 마루턱에 새로 문을 세우고 문명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고 하였다. 한편 세종 15년 기록에는 북쪽 주산의 내맥의 손상으로 인해 담을 쌓아 막고자 하였다.12)
“궁성 북쪽 주산의 내맥이 행인의 통로가 됨이 마땅치 못하므로, 담을 쌓아 막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가 “좋습니다마는 무릇 이런 공사들을 일시에 한목에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오니, 그 선후와 완급을 참작하여 순차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도성안의 지맥보전은 주로 북악의 좌우 팔인 동령과 서령 그리고 내맥의 보전을 우선시 했는데, 그 이유는 창의문과 숙청문 같은 고갯길은 사람들의 통행에 의해 쉽게 파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으며, 비보의 방법으로는 문을 폐쇄하거나 담고 쌓고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세종은 남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건(改建)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地臺)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에 구애되어 남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의 포국(抱局)을 아늑하게 형성하고자 했다. 이에 대하여 황희 이하 모든 대신들이 다 찬성하므로 곧 공사를 착수하려고 하였으나 이 때 남대문공사 뿐만 아니라, 강녕전·경회루의 보첨을 개수하는 일과 궁성 쌓는 일과, 남대문의 흙을 고쳐 쌓는 일과, 물시계를 살펴서 조성하는 일과 소격전 동네 두 군데 못 파는 일과, 혜정교 개천을 옮겨 파는 일과, 가각고(架閣庫) 서편 개천에 돌 쌓는 일과, 장의동(藏義洞)에 못파는 일과, 내사복시 뒤에 웅덩이 못 파는 일과, 남대문 밖의 못에 돌 쌓는 일 등 많은 공사를 병행하게 되었으므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일시에 기공하는 것을 반대하고 풍년이 들 때에 하나씩 기공하여 민력을 휴양할 것을 청하므로 남대문 개건공사는 뒤로 미루어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다.
“나는 남대문이 이렇게 낮고 평평한 것은 필시 당초에 땅을 파서 평평하게 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제 높이 쌓아 올려서 그 산맥과 연하게 하고 그 위에다 문을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청파역(靑坡驛)에서부터 남산에까지 잇닿은 산맥의 여러 산봉우리들과 흥천사(興天寺) 북쪽 봉우리 등처에 소나무를 심어 가꿔서 무성하게 우거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세종 15/07/21(임신)
한편, 문종 1년 청룡인 낙산에 소나무를 심어 산맥을 보호하려는 기록과 성종3년 도성의 內外의 四山에 경작을 금해야 하는 곳을 정하도록 한다.
풍수학(風水學)에서 아뢰기를, “경복궁(景福宮)은 백호(白虎)가 높고 험준하나, 청룡(靑龍)이 낮고 미약하므로 가각고(架閣庫) 북쪽 산의 내려온 맥(脈)에 소나무를 심어 길렀는데, 근년에 벌레가 먹어서 반이 넘게 말라 죽었으며, 그 마르지 않은 것도 근방의 무식한 무리가 가지와 줄기를 베어 쳤고, 혹 맥혈(脈穴)을 파고서 집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청룡이 날로 더욱 쇠약하여지니, 청컨대 표(標)를 세워서 한계를 정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산맥을 비보(裨補)하게 하소서.” 하니, 예조와 한성부의 풍수학에게 명하여, 함께 살펴서 표를 세우게 하였다. 문종 01/04/18(병술)
한성부(漢城府)에 전지하기를,
“내외(內外)의 사산(四山)에 경작(耕作)을 금해야 할 땅을, 본부(本府)와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가 풍수학(風水學)을 거느리고 살펴 정해서 표(標)를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 03/05/05(신축).
한양의 內四山은 북쪽의 백악산(북악산, 342m) 동쪽의 낙타산(125m), 남쪽의 목멱산(남산, 265m), 서쪽의 인왕산(338m)이고 外四山은 북쪽의 북한산(836m) 서쪽의 덕양산(행주, 125m), 남쪽의 관악산(829m), 동쪽의 용마산(348m)을 말한다. 內外의 四山은 풍수용어로 羅星인데, “나성이란 명당을 사면으로 둘러싸고 있는 뭇산들을 말하는데, 마치 성과 같은 형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당의 기를 보호하는 기능을 갖는다”13) 한편 명산론에서는 “흙으로서 살을 삼고, 돌로서 뼈를 삼고 물로서 피를 삼고 나무로서 모발을 삼는다14)”라고 하여 수목으로서 산의 기운을 보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즉 羅星은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內外 四山이며, 나성이 한양의 기운을 보호해 주기 위해, 경작을 금하고 소나무 등의 수목을 식목함으로서 한양을 비보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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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
목적 |
원인 |
비보기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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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문 |
지맥 보전 |
고갯길로써 지형파괴 쉬움 |
통행금지, 소나무 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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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문 |
지맥 보전 |
고갯길로써 지형파괴 쉬움 |
통행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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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
지맥 연결 |
인왕산의 벌어진 형국 |
남대문의 지대 높이기, 소나무 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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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外 四山 |
산세 보존 |
산림 훼손 |
경작금지, 소나무심기 |
명산론 감룡경 |
2) 명당수와 수구
풍수적으로 한양 입지의 문제는 명당수의 부족과 수구의 허함이 지적되고 있다. 수구의 허함은 청룡인 낙타산의 낮고 짧은 형세로 형성이 된 것이다. 더욱 인왕산과 북악산의 주산 논쟁 이야기15)에서 무악대사가 주장하였던 인왕산으로 주산으로 하였을 경우 청룡이 되는 북악은 배반이 되고(그림 표시 1) 수구는 북악을 주산으로 했을 때보다 더욱 벌어지는 형상을 하게 되며(그림 표시 2) 남서방향과(그림 표시 3) 북서방향이 허하게 되어 오히려 입지적으로 불안정하게 된다.
그림 4). 인왕산을 주산으로 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점
또한 태조 3년 3월 13일(경진)에 태조가 왕사 자초(무학대사)와 여러 신하들을 의견을 들어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다. 이 때 왕이 자초에게 터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을 때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결정 하소서’라고 대답한다16). 이러한 자초의 대답을 볼 때, 정도전과 무학의 주산 논쟁설화는 어느 정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윤신달에게 한양터를 물어보는데 그가 대답하길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는 부족한 점은 건방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 뿐이라고 대답한다.17) 즉 한양터에서 물의 부족은 천도하기 전부터 거론되었던 문제점이었다.
세종 15년 실록의 기록18)을 살펴보면 궁성의 동서편과 내사복시의 북지 등처에 못을 파고 도랑을 내어서 영제교로 물을 끌어 들이고자 하였다. 명당수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근자에 글을 올리어 지리를 배척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나, 우리 조종께서 지리로서 수도를 여기다 정하셨으니 그 자손으로서 쓰지 않을 수 없다. 정인지(鄭麟趾)는 유학자인데, 역시 지리를 쓰지 않는 것은 매우 근거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고, 나도 생각하기를 지리의 말을 쓰지 않으려면 몰라도, 만일 부득이하여 쓰게 된다면 마땅히 지리의 학설을 따라야 할 것인데, 지리하는 자의 말에, ‘지금 경복궁 명당에 물이 없다.’고 하니, 내가 궁성의 동서편과 내사 복시(內司僕寺)의 북지(北地) 등처에 못을 파고 도랑을 내어서 영제교(永濟橋)의 흐르는 물을 끌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명당수의 부족으로 도성의 곳곳에 연못을 조성하였는데, 위에 언급된 북지 및 동서편의 연못 이외에 남대문 밖에 南池도 조성되었다. 세종 15년의 기록에 의하면 南池는 경복궁의 백호인 인왕산에 대한 비보로서 조성되었다고 그 목적을 밝히고 있다.
“경복궁의 오른 팔은 대체로 모두 산세(山勢)가 낮고 미약하여 널리 헤벌어지게 트이어 품에 안는 판국이 없으므로, 남대문 밖에다 못을 파고 문안에다가 지천사(支天寺)를 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세종 15/07/21(임신)
남대문 밖의 연못인 南池는 한양의 부족한 명당수를 확보하기 위한 비보와 관악산의 화기를 진압하는 두 가지의 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한양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명당수의 부족인데, 이는 인왕산과 낙산이 암반으로 이루어져 물의 저장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명당수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그 흔적이 나타나는데, 동지와 서지 그리고 경회루와 성균관의 연못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명당수의 확보로서 조성된 연못은 방화수 역할 뿐 아니라 농경사회에 저수지 역할 그리고 연꽃 등을 길러 감상을 목적으로 한 장소로서 이용되는 등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림 5). 이기룡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1692
한편 세종 26년 집현전 수찬 이선로가 개천의 오염 문제를 제기하였다.19) 이선로는 궁성 서쪽에 연못을 파고 영제교로 물을 끌어 들리고, 개천을 맑게 하자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 들여 세종은 중신들에게 그 가부를 의논케 하였다. 중신들의 논의 끝에 이선로(李善老)의 계청에 이유가 있다고 결론지어 성내 오부(五部)와 한성부 낭청(郎廳),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 낭청들에게 성내의 각 가호(家戶)를 분장하여 더럽고 냄새나는 물질을 구거(溝渠)나 개천에 버리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처벌할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집현전 교리 어효첨이 불가하다고 상소를 올려 세종이 어효첨의 말을 옳게 여기고 이선로의 말은 배척하여 청계천의 정화사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궁성(宮城) 서쪽에 저수지(貯水池)를 파서 영제교(永濟橋)로 물을 끌어넣을 것이며, 도 개천(開川) 물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도록 금지하여, 물이 늘 깨끗하도록 해야 하겠나이다.” 하매, 그 일을 내려서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 황희·우의정 신개·좌찬성 하연·우찬성 황보인·예조 판서 김종서·우참찬 이숙치·예문관 대제학 정인지·판한성부사 이맹진·예조 참판 윤형 등이 의논하기를,
“저수지 파는 일을 내년 가을을 기다려서 다시 의논하기로 하고, 개천(開川) 물을 서울의 각 부(部)와 한성부 낭청(漢城府郞廳)과 수성 금화 도감 낭청(修城禁火都監郞廳)으로 하여금 성내의 각 집을 나누어 맡아 가지고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개천에 버리지 못하게 하여 깨끗하게 하도록 힘쓰게 하고. 한성부의 당상(堂上)과 금화 도감 제조(禁火都監提調)가 항상 고찰을 행하고, 또 사헌부로 하여금 무시(無時)로 규찰 검거하게 하소서.”하였다.
명당수에 문제는 문종 2년 풍수학인 문맹검에 의해 또다시 거론되었다. 문맹검은 명당수가 사복시20)에 의해 개천 오염이 되었음으로 사복시를 옮기고 명당수를 깨끗하게 하며, 보제원 남쪽과 왕십리역 북쪽에 조산을 만들어 수구를 좁게 하자고 상언을 하는데 이 중 명당수와 수구와 관련된 실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21)
“1. 지금 우리 나라의 도읍(都邑)은 명당(明堂)의 물이 본디는 원류(源流)가 없었는데, 왼쪽으로는 호조(戶曹)의 샘물과 오른쪽으로는 사온서(司춠署)의 샘물이 실제로 명당(明堂)의 원류(源流)가 되었으니, 깨끗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사복시(司僕寺)가 왼쪽 샘물의 가에 있기 때문에 말똥이 쌓여 있어 그 물을 더럽게 만드니 실로 미편(未便)합니다. 원컨대 사복시를 개천(開川)가로 옮겨서 더러운 것을 흘러보내게 해서 명당(明堂)의 물을 깨끗하게 하소서.
1. 명당(明堂)의 왼쪽물과 오른쪽 물이 모여서 흘러 충동(衝動)하여 서로 부딪치는 형세가 있으니, 두 물의 사이에 마땅히 한 무더기의 작은 돌산[石山]을 만들어, 두 물이 서로 부딪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 명당(明堂)의 수구(水口)에는 3개의 작은 산을 만들어, 각기 나무를 심어서 수구(水口)를 진압하고 막게 하는 것이 곧 옛날 사람의 법입니다. 지금 국도(國都) 수구(水口)의 안에 옛날 사람이 3개의 작은 산을 만들어 각기 소나무를 심었지마는, 그러나 이 작은 산이 수구(水口)에 있지 않고서 도리어 수구(水口)의 안에 있고, 또 산이 무너져서 낮으며 소나무는 말라 죽었습니다. 지금 보제원(普濟院)의 남쪽과 왕심역(旺心驛)의 북쪽에 작은 산을 혹은 3개나 7개를 만들어 소나무와 홰나무·버드나무를 심어서 수구(水口)를 좁게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그 후 개천의 준설작업은 영조 36년 영조 36년(1760)에 한성판윤 홍계희와 호조판서 홍봉한(洪鳳漢) 등의 주장에 따라 경중오부(京中五部)의 방민(坊民) 연 15만 명과 품삯을 주고 채용한 인부 연 5만 명을 동원하고 전(錢) 3만 5,000냥, 미(米) 2,300석 등을 들여서 청계천의 모래를 파내어 이 곳에 산같이 쌓았는데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57일 간에 걸쳐 대역사(大役事)를 진행시켰다.22)(서울육백년사) 또한『영조실록』영조 36년 2월 임인(壬寅)에 의하면 개천을 준설하다가 사람의 고골(枯骨)이 나왔다는 보고를 받고 왕이 스스로의 부덕함을 탄식하고 뼈를 모아 깨끗한 곳에 헝겊으로 덮어 두었다가 준설작업이 끝나면 수구문(水口門) 밖에 단(壇)을 차려 제사를 지내주라고 하교(下敎)한 기록으로 보면, 개천의 오염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개천(開川)을 준설(濬渫)하는데 따라서 생기는 토사(土砂)는 이를 한두 군데에 모아 쌓아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림 6). 한양경성도(輿載撮要, 장서각소장), 작자미상 19c 말엽
조선왕조 전기에도 도성(都城) 수구내(水口內) 훈련원(訓練院) 동북에도 수북(水北) · 수남(水南)에 각각 한 개씩의 조산(造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왕조 전기에 있었다는 조산은 그것을 소개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지기(地氣)를 모아두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듯이 풍수지리설의 이른바 비보(裨補)인 듯 하며 조산한 흙은 개천공사 때 나온 토사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98)
이렇게 개천의 준설을 할 때마다 그 토사를 쌓아 올려 이것이 완만하나 비교적 큰 언덕을 이루었으니, 오늘날의 청계천6가의 양측, 남측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동 일대에 걸쳐서 하나의 산 언덕이 생겼고 그 맞은 편 즉 개천의 북측에는 동대문종합상가가 입지하고 있는 일대에도 생겼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이 조산을 나지(裸地)로 두면 보기가 흉하기 때문에 나무와 화초를 심게 되었다. 1914년에 서울의 지명을 새로 정할 때 속칭 조산동(造山洞)이라고 불려 오던 지구의 조산에 심어놓은 꽃 향기가 좋아서 이 곳을 방산동(芳山洞)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http://seoul600.visitseou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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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
목적 |
원인 |
기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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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地, 東池, 西池, 내사복시 北池 |
명당수 확보 |
명당수 부족 |
연못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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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 |
청계천 정화 |
명당수 오염 |
감찰, 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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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 |
수구 막이 |
동쪽의 허한 수구 |
단과 사당 조성 |
설심부 지리신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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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
수구 막이 |
동쪽의 허한 수구 |
개천 준설로 생긴 토사로 인공산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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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결론
본 연구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국역조경으로서의 비보풍수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 결과 도성 내에서 나타났던 비보행위는 크게 지맥보전을 목적으로 한 비보풍수와 명당수의 확보 및 정화 그리고 수구막이로서의 조산 등 명당수와 관련된 비보풍수로 나타났다.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세종 때 경복궁의 주산 논쟁, 인왕산의 비보, 청계천의 정화사업 등 많은 풍수 논의들이 있었다. 그 후 문종 때는 낙산을 보호하려는 움짐임이 있었고 성종 때에는 외사산에 대한 보전 논의가 나타났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의 중국풍수가 관왕묘의 조성 때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영조 때에는 무엇보다도 청계천의 정화사업과 준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려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결국 조선초기에는 경복궁의 터에서 내사산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다면 중기에는 외사산에 대한 보전운동 그리고 후기에는 그 동안 오염되었던 청계천의 정화사업이 보다 큰 국가적인 사업으로 대두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지맥보전을 목적으로 한 비보풍수는 한양의 내외 사산과 북악을 주맥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방법으로는 內外 四山에 함부로 경작을 금지하고, 고갯길로서 지맥이 쉽게 손상될 우려가 있는 곳은 장의문과 숙청문의 통행을 조절함으로서 지맥의 보전했다. 또한 한양의 內 四山을 보전하거나 맥을 잇기 위한 방법으로는 남대문의 지반을 높게 쌓아 인왕산과 남산의 맥을 잇고, 산에 나무를 심음으로서 지맥을 보전했다. 명당수와 관련한 비보풍수는 명당수의 수량 확보를 위한 연못조성과 수질정화 그리고 수구의 허함을 채우기 위한 조산과 관왕묘의 조성으로 나타났다. 특히 영조 36년의 개천의 준설 공사는 오염되어 있는 명당수를 정화하는 동시에 준설된 토사를 이용하여 조산을 조성한 국가적인 조경공사이자 국역적인 비보행위라 할 수 있다.
Ⅴ. 참고문헌
地理正宗 卷十一, 山龍語類)
김두규(2000), '국역 조경'으로서의 비보풍수 연구, 한국정원학회지, Vol.18,No.4, pp. 39-47.
(2000),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역(2001), 호순신의 지리신법, 장락출판사.
역(2002), 명산론, 비봉출판사.
김용기 외(1996), 동양조경사, 문운당.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CD-ROM(1998), 서울특별시.
송화섭(2001), 풍수비보입석과불교민속, 한국사상사학, Vol.17, No.0, pp. 205-249.
조선왕조실록(태조-철종)CD-ROM(1997), 서울시스템(주).
최원석(2001), 영남지방 비보의 기원과 확산에 관한 일고찰, 한국지역지리학회지, Vol.7, No.4, pp. 4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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