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스크랩] 조선시기 流刑와 絶島定配의 推移

장안봉(微山) 2013. 11. 25.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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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기 流刑와 絶島定配의 推移


                                                장선영 (전남대 사학과 박사과정)


목 차

   

Ⅰ. 머리말

Ⅱ. 流刑의 種類와 流配地 等級 

  1)流刑의 종류

  2)유배지의 等級

Ⅲ. 流配地의 樣相과 絶島定配地

  1)유배지의 분포양상과 절도정배지의 특징

  2)시기별 유배횟수와 절도정배의 추이

Ⅳ. 絶島定配地의 증가와 그 요인

  1)절도정배지의 증가와 분포

  2)절도정배지의 증가 요인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역사 속에서 섬은 육지와는 다른 곳, 사람이 살기 힘든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것은 섬이 가지고 있는 ‘육지와의 단절’이라는 측면 때문이며, 또 섬에 대한 역사연구가 활성화되지 못함에 기인한 것이다. 섬의 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자료의 수집과 그에 기반한 객관적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 동안 유배에 대한 연구는 유배문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1) 역사학계에서의 유배연구는 제주도 유배에 대한 연구가 유일하다2) 내용을 보면 조선중기 이후 당파의 영향으로 변경이나 내륙지방의 유배는 아주 적었고, 대개 유인도나 무인도 등 絶島孤島로의 유배가 많았다고 보았다. 또 제주도의 성씨분포를 볼 때 전체, 인구 중 태반이 유배인의 자손이라고 하고 있다. 이외에는 법제사적인 입장에서 유형제도를 연구한 경우와 생활사적인 입장에서 유형의 전반적인 경향을 살펴본 연구들이 있다.3) 

   이 글은 역사 속에 나타나는 섬의 변화를 유배지의 분석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朝鮮王朝實錄》에서4) 유배와 관련된 기사 5860건을 발췌하여 분석하였다. 이때 사용한 색인어는 流配?歸養?定配?安置?付處?竄配?放置?竄黜?放黜?竄逐?放逐 등이었다.5) 그리고 분석의 시기는 1392년 조선건국시기부터 1896년 유형제도가 距離制에서 刑期制로 바뀌는 시점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 글은 먼저 유형의 전반적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유형의 종류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유배를 보내는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유배지를 선정함에 있어 어떠한 원칙이 적용되었는지를 살폈다. 3장에서는 유배지의 분포양상과 유배의 횟수가 시기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유배지의 전국분포와 그 중에서 절도정배지의 변화를 살피고, 시기별 유배횟수의 추이와 절도정배의 횟수는 어떠한지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절도정배지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다. 절도정배지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증가되는데, 증가되는 모습과 각각의 위치를 보고, 그 증가요인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피고자 하였다.

  

Ⅱ. 流刑의 種類와 流配地 等級


  1. 流刑의 종류


   流刑은 사람이 범죄를 범한 경우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 제도이다.6) 이는 삼국시대부터 우리 나라에 적용되기 시작하여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죄인을 처벌하기 위하여 운용되었다.

  유형은 고문헌에 ‘流’?‘配’?‘謫’?‘竄’?‘放’?‘徙’ 등의 다양한 용어로 쓰이고 있다.7) 이들 용어의 뜻을 각각 살펴보면 ‘流’는 유형을 뜻하는 말 중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配’는 도형과 유형에 모두 쓰이고 있으며, ‘謫’은 귀양 보낸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竄’은 刑을 집행할 때 職牒을 회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放’은 내쫓아서 안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徙’는 옮긴다는 뜻이다.8) 이렇게 용어 자체의 뜻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유형을 뜻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유형의 종류는 거리와, 罪의 輕重, 執行方法에 따라 분류해 볼 수 있다.《經國大典》에서는 유형을 거리에 따라 流 2천리, 流 2천 5백리, 流 3천리 등 3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죄의 경중에 따라 거리에 차등을 둔 것이었다. 이런 분류는 조선후기의《增補文獻備考》9)에서 좀 더 다양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 외에 遷徙, 充軍, 定配, 爲奴 등으로 세분화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되는 용어의 뜻을 살펴보면, 遷徙는 “遷離鄕土一千里外”로서 죄인을 고향으로부터 천리 밖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이다. 充軍은 徒刑의 일종으로 부과한 役이 軍役임을 뜻한다. 定配는 한 장소를 정하여 죄인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거리에 따라 遠地定配?極邊定配?邊遠定配로 나누고 있으며, 또 섬에 정배하는 것을 絶島定配,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는 것을 減死定配로 구분하고 있다. 爲奴는 官에 노비로 삼는 것을 말한 것으로 徒刑의 일종이다. 조선전기는 거리에 의한 구분만을 하고 있어 徒刑과 流刑이 혼용되지 않고 있으나 조선후기의 기록에서는 다양화된 종류들을 기록하고 있고, 또 充軍이나 爲奴 등과 같이 유배하여 役을 부과시키는, 즉 徒刑도 함께 섞어 쓰고 있어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 죄의 輕重과 집행방법에 따라 付處?安置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付處는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을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유배시키는 것을 말하며, 여기에는 自願付處?本鄕付處등이 있다. 安置는 부처에 비하여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배지 내에서 또 한 장소 지정하고, 그 안에만 거주하도록 제한하는 것으로, 本鄕安置?自願安置?圍籬安置 등의 방법이 있다. 안치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은 圍籬安置로 한 장소를 지정하여 가시로 집을 폐쇄하여 죄인을 가두는 것이다.

  付處와 安置를 신분에 따른 구분으로 보기도 한다. 부처는 하급관리에게 부과하는 것으로, 안치는 왕족이나, 고관, 현직에 있는 자에 한하여 적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10) 그러나 실제의 사례에서는 그와 반대로 재상일 경우 付處한다는 기록도 있어서 구분이 명확치 않다.11) 丁若鏞도 그의 저서에서 신분에 따라 네 등급으로 유배를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公卿大夫를 안치하는 형태의 귀양이요, 둘째는 죄인의 친족을 연좌시켜 보내는 귀양이요, 셋째는 탐관오리를 법에 따라 도류시키는 것이요, 넷째는, 천류?잡범을 귀양 보내는 것이라 하였다.12)

   초기의 유형이 配所까지의 遠近을 기준으로 하여 집행된 반면 후기로 오면 거리의 원근뿐 아니라 그 집행방법과 죄의 경중에 의해서도 그 종류가 나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거리를 기준으로 하는 유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로 한 지역을 지명하여 유배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운영되던 유형제도는 1896년 <流刑分等及加減例>에 의하여 刑期制로 바뀌었다. 즉 거리를 기본으로 하여 운영되어 오던 형태가 유배기간의 길이를 기준으로 변화되었는데, 기존의 流 3천리는 종신형에, 流 2천 5백리는 15년, 流 2천리는 10년에 처해졌다.    


  2. 유배지 等級


  조선 초기의 유형은 流 2천리, 流 2천 5백리, 流 3천리의 3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大明律》의 규정을 적용한 것으로, 국토가 좁은 조선에는 맞지 않았다. 《실록》에서 국토의 거리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을 보면, 국토 중 가장 먼 곳은 함경도의 경원부로 1천 6백 80리 밖에 되지 않았고, 그 다음이 경상도 동래로 1천 2백 30리, 다음이 경상도 축산으로 1천 65리로 적고 있다.13) 거리를 그대로 적용하여 유배를 실시할 경우 아무리 먼 지역이라 할지라도 2천리가 되지 않았다. 이에 조선은 하나의 방법을 선택하였다. 즉 하나의 지역을 유배지로 설정하고, 그 곳에 이르는 동안 거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돌아서 가는 방법을 ?㎢? 것이다. 그렇게 하여 경원부는 流 3천리, 동래는 流 2천 5백리, 축산은 流 2천리에 적용되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정조대의 기사에서 살필 수 있다. 臟物罪를 범한 金若行이 9백리에 해당하는 지역에 유배되었으나 그 죄에 비하여 너무 가까운 지역이므로 거리를 돌아가는 방법을 택하여 3천리를 채우게 했다는 것이다.14)

  그러나 거리에 따른 配所 지정에는 항상 많은 문제들이 뒤따랐다. 그 사정은 1430년(세종 12) 5월 갑인 기사에 보인다.15) 그 내용을 보면 일찍이《大明律》에 의거하여 마련했던 유배지에 대한 법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유배시키는 곳을 자세히 정하지 않아서 안팎 관리들이 임시로 요량하여 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멀고 가까운 것이 적당하지 못한 실수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를 막기 위해 다시 정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표 1> 出配地別 流配 等級地

      流配地等級

出配地 

流 3천리

流 2천 5백리

流 2천리

경성?경기 좌우도 유후사

경상?전라?함길?평안도 濱海各官

경상?전라?평안?함길도 중앙각관, 강원도 濱海各官

경상?전라?평안?함길도 始面各官, 강원도 중앙각관

 황 해 도

경상?전라도 중앙, 평안?강계도?의주 각관

전라?경상?평안?함길도 始面各官

충청도 빈해, 강원도 중앙각관

 평 안 도

충청도 濱海各官, 함길도 중앙각관

충청도 중앙각관, 강원?함길도 始面各官

충청도 始面各官

 충 청 도

평안?함길도 중앙각관, 경상?전라도 濱海各官

평안?함길도 始面各官, 강원?황해도 중앙각관

전라?경상도 중앙, 황해 함길도 始面各官

 전 라 도

경상좌도 濱海各官, 함길?평안도 중앙각관

황해도 始面各官, 강원도 중앙각관, 경상 좌도 각관

강원도 始面, 충청상면?경상우도 각관

 경 상 도

전라우도 濱海各官, 평안도 중앙각관

충청?강원?전라도 중앙각관

충청도 시면, 전라 좌도각관

 함 길 도

경상?충청?경상우도 濱海各官

경상?전라도 중앙각관, 황해도 濱海各官

충청?황해도 중앙, 전라도 경상도 始面各官

 강 원 도

전라?경상우도 각관, 황해도 濱海各官

전라?경상도 중앙각관, 황해도 빈해, 평안도 始面各官

충청?황해도 중앙, 평안도 시면, 경상?전라좌도 濱海各官

  

   <표 1>에서 보이는 것처럼 出配地를 기준으로 하여 각 지역을 거리의 원근에 따라 나누고 있다. 또 죄인이 살던 지역이 어디였는가를 고려하여 그 지역이나 인근지역으로 유배하는 것을 피하고, 국사에 관련된 죄수는 평안도 의주, 삭주, 강계와 함길도(함경도)의 길주 등에는 정배하지 말 것을 함께 규정하였다. 

  세종 시기에 이런 분류를 하고 있으나 《實錄》의 기사들을 보면 항상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죄인의 流配地를 선정하는데 법을 지키지 않고,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마음대로 멀게 혹은 가깝게 정배하는 일이 생기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고,16) 또 정조 10년의 기사를 보면 추자도, 흑산도, 탐라도(제주도)와 같은 유배지에는 特敎가 아니면 流配人을 보내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으나, 법령을 지키지 않고 적당히 조정하는 것이 옥관의 손에 달려 있었다.17)

  또 <표 1>는 전국 각지가 유배지로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록의 기사들을 통해서 그 규정 외에  또 다른 규칙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몇 가지로 묶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특정지역에 대해서 규정해 놓은 경우이다. 절도지방과 경기도, 북쪽 변방지역이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 절도로의 유배는 특정한 지역을 설정해 놓고 유형을 집행하도록 규정하였다.18) 경기도의 경우 전 지역에 대해서 임금의 특별한 교지에 의거하여 정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19) 북쪽 변방에 유배를 보낼 때는 삼수와 갑산, 평안도 강변 4읍 4곳 등으로 지정하고 있다.20)     

  둘째, 특정범죄를 지적하고 있는 경우이다. 제주도의 경우, 도적에 관계된 일로 徒配, 流配, 定役된 자들이 모두 제주 3읍으로 정배되어 도적이 성행하고, 그로 인하여 말을 기르기가 힘들다는 점을 상소하였고,21) 진도?거제?남해 지역에는 牛馬賊을 유배하였다는 기록들이 보인다.22) 또 앞서 살펴보았듯이 국가의 일에 관계되는 죄수는 평안도 의주, 삭주, 강계와 함길도의 길주 등에는 정배하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다.23) 

  세째, 죄인의 집이 있었던 곳이나, 任地였던 곳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유배를 보냈다가도 죄인의 집이 인근지역이었음을 알면 다시 移配시켰던 것이다.24) 임지였던 곳을 배제하였던 것은 혹시나 그 지역으로 돌아갈 경우 그 지역의 친분관계나 이익관계 때문에 죄인에게 후하게 대접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25)

  네째, 육진 지역으로의 유배이다. 육진 지역은 본래부터 인구가 많이 부족하여 방비에도 소홀함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을 全家徙邊시킬 경우에는 다른 곳에 정배하지 않고 모두 육진에 정배하여 인구를 늘려나가는 정책을 폈다.26) 이는 북방 徙民政策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이다.

  다섯째, 유배를 할 때 각 용어에 따른 지역들이 분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 4년의 기사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유배할 때에 絶塞라고 하면 六鎭 및 강변 고을로 정배하고, 絶島라 하면 濟州, 珍島, 南海, 巨濟 등지로 정배하도록 하였다. 또 遠竄은 남쪽과 북쪽을 막론하고 먼 곳에 정배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원찬하라고 명하였을 때 보낸 지역으로 전남의 해안지방인 광양, 순천, 영암, 강진 지역이 거론되고 있다.27)

  여섯째, 한 지역으로 유배인을 동시에 보내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조대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 대정, 정의 지방에 정배하면서 이미 그곳에 정배되어 있던 士大夫를 남해와 진도로 이배하고 있다.28) 이러한 사례들은 실록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이는 한 지역에 많은 사람을 유배함으로써 현지 民들의 생활이 피폐해지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Ⅲ. 流配地의 樣相과 絶島定配地


  1. 유배지의 분포양상과 절도정배지의 특징

  

  《실록》에 유배지로 이용된 곳은 총 408곳이었다. 이들을 각도별로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표 2> 각도별 유배지수와 유배횟수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불명

기타

합계

유배지수

26

49

28

23

51

70

74

81

6

 

408

유배횟수

429

356

124

131

174

320

915

670

8

2733

5860

*不明은 유배지 이름이 나와 있기는 하나 위치확인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기타는 원방, 외방, 먼 곳, 극변, 해안 등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표 2>는 경기도를 기준으로 하여 거리에 따라서 나열해 보았다. 이 표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각 지역별로 유배지 숫자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경상도가 81곳, 전라도가 74곳, 충청도 70곳으로 이른바 하삼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강원도는 23곳에 지나지 않는다. 유배횟수는 전라도가 가장 많은 횟수를 기록하고 있고, 경상도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이 두 지역은 유배지도 많고 횟수도 많다. 그러나 충청도의 경우는 유배지수는 많으나 횟수는 그리 높지 않다. 그렇다면 왜 하삼도 지역에 유배지가 집중되어 있을까.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유배지의 전국분포도를 그려보았다. 


<지도 1> 전국 유배지 분포도


  지도에 표시된 지역은 유배의 빈도가 10회를 넘는 경우에 한하여 표시하였다. 이것을 통해서 각도별로 유배지들이 보이는 특징을 살펴보고, 빈도수와는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지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은 북쪽보다는 남쪽지방에, 내륙보다는 해안지방과 북쪽 변방에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50회 이상의 빈도수를 보이는 지역이 종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쪽에 있다.

  전라도는 유배지수와 유배횟수에서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흑산도, 진도, 해남이 50회 이상의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유배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 전라북도보다는 전남의 해안지방과 섬에 유배지가 집중 배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상도의 경우는 전라도에 비해 유배지는 적으나 비슷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충청도는 앞의 두 지역과는 달리 내륙지방에 주로 위치하고 있다. <표 3>에서 확인되듯이 충청도는 유배지수에 비해 유배횟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또 여러 지역에 분산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강원도는 유배지수와 유배횟수 두 측면에서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 지역도 빈도가 높은 유배지는 보이지 않는다. 경기도는 서울을 둘러싼 가까운 근교에 몇 지역이 분포하고 있다. 51개소가 유배지로 이용되었던 것에 비하여 유배횟수가 그리 높지 않다. 황해도는 주로 해안지방에 유배지들이 배치되어 있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유배지의 분포 양상에서 비슷한 점을 보이고 있다. 북쪽 변경지방과 해안지방에 주로 유배지들이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평안도의 경우에는 여러 지역에 나누어 분포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반면에, 함경도의 경우에는 몇 지역에 집중되는 현상을 보인다.

  유배지는 제도적으로는 전국 어느 지역이나 이용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절도, 해안지방, 북쪽 변방이 많이 이용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전라도와 경상도는 해안지방과 절도를 포함하고 있어 많은 유배지가 분포하였다. 

  그렇다면 절도정배의 경우 각도별 분포는 어떠했을까? 절도정배는 전라도의 경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전라도의 유배지수 74곳 가운데 18곳(제주도 포함)이 절도정배지로 나타나고 있다. 또 빈도수도 50회가 넘는 섬이 5곳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상도는 전라도에 비하여 그 비중은 낮지만 3곳의 절도정배지가 나타나고 있고, 또 50회 이상의 빈도수를 보이는 곳이 거제와 남해 두 곳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은 절도정배의 횟수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유배지와 유배횟수를 정리한 것이다.


<표 3> 유배지별 빈도 순위표

순위

유배지

합계

순위

유배지

합계

1

제주

81

21

영암

28

2

거제

80

22

금갑도

28

3

진도

70

23

의주

27

4

흑산도

68

24

순천

27

5

남해

60

25

흥양

26

6

해남

58

26

단천

26

7

대정

51

27

고금도

26

8

종성

50

28

고성

25

9

갑산

49

29

영해

24

10

삼수

42

30

북청

24

11

강진

38

31

광양

24

12

동래

34

32

경흥

24

13

경원

34

33

청주

22

14

기장

33

34

장흥

22

15

사천

32

35

위원

22

16

추자도

31

36

벽동

22

17

강계

30

37

김해

21

18

경성

29

38

창성

20

19

정의

28

39

부령

20

20

온성

28

40

충주

19


  <표 3>은 유배지별 빈도의 순위를 40위까지 정리한 것이다. 그 중 1위에서 5위까지는 모두 섬이다. 즉 우리나라의 408곳이라는 유배지 중 절도로 일컬어지는 섬에 많은 사람들이 유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절도로의 집중적인 유배는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그 구체적인 문제들을 살펴보면, 가장 높은 빈도수를 보이고 있는 제주도는 유배인이 너무 많아서 말이 번식을 못한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그래서 본래 제주도의 徒, 流, 定役에 해당하는 자는 그곳에 유배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을 깨고 육지로 出配시키기를 청하고 있다.29)

  거제와 남해는 경상도에 있는 절도정배지로 많은 사람들이 유배되고 있었고, 그로 인한 문제도 야기되고 있었다. 경상감사 이상진의 狀啓는 絶島에 정배된 죄인의 숫자가 많아 유배지의 민이나 유배인들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먼저 와 있는 죄인들을 이배시키고, 앞으로는 정배시키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30) 현종 5년의 기사에서는 그에 대한 답으로 남해와 거제 지역의 유배인들을 이배하도록 하였다. 또 이때 남해와 거제 지역에 유배인이 무려 60인에 이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31)

  추자도의 경우도 유배된 수효가 많아서 주민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많다는 점이 보고되었다.32) 흑산도는 영조 14년의 기사를 보면 송인명이 옛부터 흑산도로 귀양 보낸 사람은 柳命天과 경종 때의 참판이었던 洪啓迪 두 사람인데, 작년 가을 이후에 정배된 사람이 3명이나 정배되어 지역민들이 힘들어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33)

  그러나 절도지방에만 이러한 현상들이 국한되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륙지방인 경상도 기장과 사천에서도 이런 유사한 기사가 보여지고 있다. 기장과 사천으로 귀양간 사람의 수효가 너무 많아서 쇠잔한 고을이 시달림을 받고 있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정배인의 수효가 10명이 될 경우에는 다른 곳으로 이배하도록 하고 있다.34)

  유배인의 집중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이미 가 있는 유배인을 移配시키거나, 유배인이 이미 있는 곳으로의 유배를 금하기도 하였다. 각각의 지역들이 갖고 있었던 공통적인 문제점들은 유배인과 현지민의 생활에 있었다. 죄인을 유배하였을 때 그 유배인의 기본적인 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현지 민들은 유배인이 점점 많아지면서 경제적인 부분에서 많은 부담을 져야 했고, 그로 인한 부담을 덜어 줄 것을 건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유배인이 한 곳에 유배될 수 있는 적정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어느 지역에 몇명을 보낼 수 있다와 같은 규정은 없다. 다만 한꺼번에 한 명 이상이 보내지는 것은 문제를 삼았다. 숙종대의 한 기사를 보면 귀양가는 사람들이 한 고을이나 한 섬에 겹쳐 정배되어 두서너 사람이 보내지기도 한다고 보고하고, 주객이 모두 곤궁해질 것을 염려하고 있다.35) 또 앞서 살펴보았던 기장과 사천의 경우에는 정배 수효를 10명으로 제한하고 그 이상이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규정하고 있다.36)

  지금까지 유배의 지역별 분포양상과 절도정배의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유배지는 주로 해안지방과 절도, 북쪽 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또 많은 유배인이 한 곳에 집중되는 사태가 발생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 유배의 횟수나 빈도수를 높게 하고, 또 다른 지역들에 비하여 유배인이 집중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음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절도정배의 경우 빈도가 매우 높고, 따라서 그로 인한 폐해도 많았다.


  2. 시기별 유배횟수와 절도정배의 추이


  지금까지 유배지의 지역별 분포양상과 절도정배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럼 시기별 유배횟수는 어떻게 나타날까? 이 절에서는 시기별로 유배지가 어떤 변화들을 겪고 있고, 또 그 변화들을 통해서 조선시기의 시기별 특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 그림은 조선 전 시기를 50년 단위로 구분하고, 그에 따른 유배횟수를 나타낸 것이다. 


<그림 1> 시기별 유배 횟수

           

  그림을 보면 유배의횟수는 조선초기에 높은 수치를 보이다가 1551-1600년에는 현저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점차 증가하여 1751-1800년에 극점을 보이고 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1392-1500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높은 유배횟수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이 시기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의해 전왕조 관련 인물들의 유배가 많았고, 또 태종대의 왕자의 난을 비롯한 많은 왕위쟁탈전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점과 연산군에 일어나는 사화와 관련한 사람들의 유배 때문으로 생각된다. 

  둘째, 선조대에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유배 횟수이다. 이것은 이 시기에 《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이 壬辰倭亂으로 인하여 충실하지 못하였음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春秋館日記》, 《承政院日記》, 《各司謄錄》 등과 같은 관련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어 실록 편찬의 자료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37)

  세째, 1751-1800년대에 최고의 유배 횟수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는 영?정조대로 조선시기 중 비교적 안정기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왜 유배는 가장 많이 이루어졌을까? 그 이유는 정치적인 상황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영조대에는 탕평책의 실시로 대표되는 군주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의 강화가 추구되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 여러차례 정치집단이 교체되는 환국이 진행되면서 많은 유배인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영조는 어느 시기보다 많은 법전을 편찬하고 있었다.38) 그 속에서 관리들에 대한 법률의 적용이 훨씬 엄격해졌고, 그에 따라 죄를 범한 관리들이 늘어났다. 또 하나의 이유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영조대에 이루어지는 혹형의 폐지에서도 살필 수 있다.39) 혹형이 폐지된다는 것은 죄인을 다스리는 데 있어 그만큼 관대해졌음을 의미한다. 즉 사형을 선고할 것에도 감하여 유배를 보내는 일이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네 번째로 철종대에서 고종대의 유배 횟수가 줄어든 점인데, 정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어지러운 정치, 사회적 현실로 인한 자료의 부실을 이유로 들 수 있다.

  한편 절도정배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낮은 수치를 보이다가 1701-1800년 사이에 높은 유배 횟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다시 감소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전체적인 유배 횟수의 추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1701-1800년에 많은 유배 횟수를 보이는 것은 전체적인 유배 횟수가 많아짐과 절도정배지가 증가된 부분이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Ⅳ. 絶島定配地의 증가와 그 요인

  1. 절도정배지의 증가


   絶島定配는 대상지가 국가에 의해서 지정되어 있었다. 1612년(광해군 4)의 가사를 보면 絶島定配地를 6개의 섬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제주, 정의, 대정, 진도, 거제, 남해가 절도정배지로 이용되고 있음을 밝히고, 이외에는 절도 정배지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40) 절도정배를 하는데 있어 모든 섬이 포함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1787년(정조 11)의 《전률통보》에서도 절도정배의 대상지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광해군조의 기사에서 밝히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섬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대상지를 보면 경기지역의 자연도, 주문도, 장진도, 교동, 해서의 백령도, 숙도, 호남의 고금도, 신지도, 흑산도, 지도, 추자도, 고군산, 금갑도, 도답, 위도, 장자도, 나로도, 녹도, 여도, 발포의 절도, 진도, 제주의 대정, 선의도, 영남의 거제, 남해 등이 있다.41) 대부분의 경우 실제 기록에서 보이는 지역들이지만 그 중 몇몇 지역들은 나타나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경기의 자연도, 주문도, 장진도, 해서의 숙도, 호남의 도답, 장자도, 선의도 등이다.

  또 앞에서 제시하였던 《전률통보》에는 절도정배의 구체적인 사항들을 규정하고 있어 주목된다. 첫째로 官守가 없는 절도에는 죄인을 보내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죄인을 통제할 수 있는 국가의 힘이 미치고 있는 지역이라야만 절도정배지로 이용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에 보여지고 있는 절도정배지의 확산이 주로 鎭이 설치되어 있는 지역인 것을 설명하게 해 준다.

  두번째는 특정 지역에 대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흑산도와 같은 극악한 지역에는 특별한 임금의 교시가 없으면 정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절도정배지 자체가 임금의 명령으로 보내는 것인데, 거기에 더하여 특별하게 교시하지 않는 경우에는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제주도에 경우에는 그 규정을 더욱 까다롭게 하고 있다. 제주 3읍에는 죄명이 특별히 중한 자가 아니면 정배하지 말 것이며, 또 제주 3읍의 죄인들은 제주도 안에서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절도정배의 경우는 특별한 명령으로 특별한 죄인을 보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그 보낼 수 있는 지역을 지정하고 있어 절도정배를 명하였다 하더라도 절도정배지에 유배인이 이미 한계를 넘어서면 그 외의 섬을 절도정배지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가 아닌 다른 지역을 고려해야 했다.

   실제의 통계에서 절도정배지의 확산은 입증되고 있다. 조선전기에 몇몇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던 대상지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아래 <표 4>을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 어느 섬이 어느 시기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고, 어떤 섬이 어느 시기에 유배가 많이 되었는지 빈도수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표 4> 시기별 절도정배지의 변화

유배지

1392-1450

1451-1500

1501-1550

1551-1600

1601-1650

1651-1700

1701-1750

1751-1800

1801-1850

1851-1896

 합계

팔도

유배지

경기도

강화도

6

1

 

 

5

1

 

3

 

 

16

경기도섬

 

 

 

 

 

 

 

1

 

 

1

교동

 

 

1

 

1

 

 

5

 

 

7

백령도

 

 

 

 

 

1

 

4

 

 

5

경상도

거제

7

14

6

2

12

4

7

21

7

 

80

남해

1

4

3

3

15

4

7

16

3

 

56

축산도

6

 

 

 

 

 

 

 

 

 

6

전라도

강진절도

 

 

 

 

 

 

1

 

 

 

1

고금도

 

 

 

 

 

1

7

6

9

3

26

고돌산

 

 

 

 

 

 

 

1

 

 

1

금갑도

 

 

 

 

 

 

3

12

12

1

28

나로도

 

 

 

 

 

 

4

 

 

 

4

나주절도

 

 

 

 

 

1

1

 

 

 

2

녹도

 

 

 

 

 

 

1

1

1

1

4

무안절도

 

 

 

 

 

1

 

 

 

 

1

사도

 

 

 

 

 

 

2

2

 

 

4

신지도

 

 

 

 

 

 

3

4

5

2

14

여도

 

 

 

 

 

 

1

 

2

 

3

고군산

 

 

 

 

 

 

1

 

 

 

1

위도

 

 

 

 

 

1

2

1

 

 

4

임자도

 

 

 

 

 

 

 

 

2

1

3

지도

 

 

 

 

 

 

5

3

1

1

10

진도

4

6

7

1

19

6

10

15

1

 

69

흑산도

 

 

 

 

 

3

19

39

5

2

68

흥양절도

 

 

 

 

 

 

1

 

1

 

2

제주도

대정

 

 

 

 

5

3

17

25

 

 

50

정의

 

 

 

 

5

4

7

11

1

 

28

제주

1

4

4

3

17

10

10

26

3

3

81

추자도

 

 

 

 

 

 

1

17

12

1

31

충청도

파지도

 

 

 

1

 

 

 

 

 

 

1

기타

 

22

11

 

43

42

90

62

13

19

300

총 합계

25

51

32

10

122

82

200

275

78

34

909

 

  1612년(광해군 4) 10월에 절도를 제주, 정의, 대정, 진도, 거제 ,남해 등 여섯 고을로 지정하고 있는 기사에 주목하여 그 이전과 그 이후를 구분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그 이전의 시기에 등장하고 있는 절도지역을 나열하면, 강화도, 거제, 교동, 남해, 제주, 진도, 丑山島, 波知島 등이 있다. 앞선 기사가 여섯 곳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반하여 강화도, 교동, 축산도, 파지도가 더해져 나타나고 있다.

  이 네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거제, 남해, 제주, 진도 지역은 전 시기를 거쳐서 나타나고 있는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시기별로 비슷한 이용도를 보이고 있으며, 절도정배지 중에서 높은 빈도수를 보이고 있음과 동시에 전체적인 빈도수에서도 상위 5위 이상을 점하고 있다. 대정, 정의는 광해군대부터 등장하고 있으며, 역시 많은 이용율을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 이전의 시기가 이런 경향을 보이고 있던데 반하여 그 이후에는 절도정배지로 이용되는 섬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현종대가 되면서 고금도가 새롭게 등장하고, 숙종대에는 금갑도, 녹도, 흑산도 등의 전남서남 해안의 절도와 고군산도, 위도와 백령도가 새롭게 절도 정배지로 이용되고 있다. 경종대에 이르면 여기에 덧붙여 나로도와 사도, 신지도, 지도, 추자도 지역이 추가되어 절도정배지 증가의 절정을 이룬다. 또 영조대에 이르면 여도가, 정조대에는 고돌산이 새롭게 추가되고 있다. 순종대에 이르면 임자도가 등장한다. 이렇게 하여 모두 15곳이 새로 등장하고 있다. 

  이 외에 정확한 지명이 없이 그냥 강진의 절도, 경기도내 섬, 나주 절도, 무안 절도, 흥양현 절도 등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절도정배임에는 틀림없다. 이들의 경우를 보면 무안절도는 숙종대에 흥양의 절도는 경종대와 순종대에, 강진 절도는 영조대에 나타나고 있고, 경기도내의 섬은 정조대, 나주절도는 숙종대와 영조대에 나타나고 있다.

  각 섬의 빈도수를 살펴보면 전기부터 이용되고 있던 섬들이 후기까지도 꾸준히 높은 빈도수를 나타내고 있다. 조선후기에 등장하고 있는 섬 가운데는 흑산도가 많은 빈도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 고금도와 금갑도, 신지도 등이 비교적 많이 이용되고 있으나 그 외의 지역들은 10회 이내로 이용되었다. 즉 새롭게 등장하는 섬들이 기존에 이용되고 있던 섬으로의 유배를 감소시키지 않고 있다. 그것은 유배의 전체적인 횟수가 높아지고, 그로 인해 절도정배의 횟수도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모든 절도정배지들을 지도상에 나타내 보았다.


<지도 2> 절도정배지의 위치 

         

        1. 백령도     2. 강화도     3. 교동도      4. 파지도      5. 축산도

        6. 남해도     7. 거제도     8. 고군산군도  9. 위도       10. 임자도

       11. 지도      12. 흑산도    13. 진도       14. 금갑도     15. 신지도

       16. 고금도    17. 나로도    18. 사도       19. 여도       20. 녹도

       21. 고돌산도  22. 제주도    23. 정의       24. 대정       25. 추자도

 


  절도정배지는 전체 유배지 408곳 가운데 25곳을 차지하고 있다. 그 분포양상을 지도를 통해서 살펴보면 대부분의 절도정배지가 서해안과 남해안에 집중배치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는 지역은 전라남도 지역으로 모두 12곳이 집중되어 있다. 이 섬들은 주로 조선후기에 새롭게 절도정배지로 등장한 곳으로 절도정배지의 확산이 대부분 이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전라북도에 위치한 두 곳도 전라남도와 마찬가지로 조선후기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 현재 제주도에 속해 있는 추자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조선전기부터 이용되어 오던 섬들이다. 추자도가 조선시기에는 전라도에 속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조선후기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섬들은 전라도 지역에 국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절도정배지의 등급을 살펴보자. 유배지의 배소를 지정할 때 極邊, 邊方, 遠地, 遠方, 中道, 近方 등의 단어를 써서 그 거리의 長短를 구분하고 있다. 이들은 安置, 付處라는 유배의 용어와 함께 쓰여서 그 죄의 경중과 거리를 나타내고 있다. 극변, 원방, 원지와 같은 예는 대부분 安置라는 용어와 함께 쓰여 그 죄가 중함을 나타낸다. 또 일반적인 유형을 뜻하는 流配, 歸養, 遠竄, 竄謫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 이에 반해 중도와 근방이라는 단어는 비교적 가까운 곳을 뜻하는 단어로 주로 付處와 함께 쓰여서 그 죄가 비교적 중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절도정배의 경우 육지와 같이 지시어에서는 죄의 경중과 거리의 장단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즉 절도정배지를 나타내는 단어로는 絶島, 遠島, 海島, 먼 섬 등이 쓰이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거리의 개념을 나타내기보다는 육지와 떨어져 있다는 뜻이거나, 바다에 있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25곳의 절도정배지 가운데는 분명히 좀 더한 絶島가 있고, 좀 덜한 絶島가 있다. 또 섬이긴 하나 絶島라기 보다는 육지보다 격리가 좀 더 쉬운 곳쯤으로 인식되는 곳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 구분을 명확히 해 보고자 한다.

  아래의 기사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흑산도로 정배할 것을 아뢰자, 조금 나은 고을로 정하라고 명하였다가, 위도로 할 것을 아뢰자, 서북 지방으로 귀양지를 옮기라고 명하였다.”42)


  죄인을 정배할 장소로 먼저 흑산도를 거론하고, 좀 더 나은 곳으로 위도를 말하고 있다. 흑산도는 서남해의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왕의 특교가 아니면 정배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절도 중의 절도였다. 그에 비하면 위도는 전라북도에 위치한 곳으로 거리상으로 흑산도에 비해 가까운 지역이었다.


??신이 삼가 의금부 죄인 李誠胤을 定配한 단자를 보니 南海를 배소로 정하였습니다. 남해가 비록 絶島라고는 하지만 이처럼 인심이 헤아리기 어려운 때를 당하여서 이성윤과 같이 품계가 높고 재주가 뛰어나며 마음이 흉칙한 자를 헐한 곳에 두어서 뒷걱정을 끼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濟州등으로 옮겨 위리 안치해서 굳게 지키도록 하소서.??43)

  

  위 기사는 남해와 제주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이다. 남해로 배소를 정했으나 그곳이 관리상 허술한 점이 있어 제주로 옮겨 안치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남해에 비하여 제주도가 관리상 편한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거리상으로도 남해는 같은 절도이기는 하나 경상도의 육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제주는 전라도에 속해 있었으나 그 거리가 상당하였던 것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추자, 흑산, 탐라44)는 특별한 전교가 아니면 정배하지 말도록 하는 법령을 제정하여 함부로 정배보낼 수 없는 곳으로 규정하고 있는 반면45),  지도, 고금도, 진도는 “비록 바다 속의 섬이지만 좋은 지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유배지에도 등급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46)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절도정배지 輕重의 구분은 육지에서 섬까지의 거리와 통제가 관건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과들을 토대로 하여 절도정배지를 좀 더 극악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 분류해 보았다.


<표 5> 절도정배지의 輕重 區分

區分

 重

  中間

  輕

絶島定配地名

대정, 정의, 제주, 흑산, 추자

 거제, 고금도, 고돌산, 금갑도, 나로도, 남해, 녹도, 백령도, 사도, 신지도, 여도, 옥구고군산, 위도, 임자도, 지도, 진도, 축산도, 파지도

 강화도, 교동

   위 표를 살펴보면 重한 지역에 5개의 지역이, 중간 지역에 16개, 輕한 지역에 4개의 지역이 놓여 있다. 重한 지역은 대부분 현재의 제주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바다 건너의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지역들이다. 또 앞의 기록들에서도 보았듯이 모든 지역이 왕의 特敎가 아니면 정배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極惡한 곳들이다. 

  중간지역에 해당되는 곳은 거제, 남해, 진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선후기에 등장한 곳들이다. 그 위치들은 대부분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는 곳으로 그 격리의 정도가 앞서 보았던 곳들보다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서 기사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비교적 살기 좋은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輕한 지역은 서울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은 곳으로 강화도와 교동이었다. 그래서 죄가 비교적 가벼운 사람을 유배시키거나, 왕족이나 중요한 인물들을 안치시키는 장소로 주로 이용되었다.

  서남해안 섬들이 輕重에서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서남해안의 섬들은 제주도나 흑산도, 추자도의 重한 그룹에 속해 있는 섬에 비하여 지리적으로 육지와 가까워 왕래의 불편이 적다. 그러나 강화도나 교동처럼 왕족이나 중요한 인물들을 안치시키는 장소로 규정되어 있지도 않았다. 즉 서남해안 절도지역은 지역적으로 왕래의 불편이 적으면서 섬이라는 격리된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을 가짐으로써 절도정배지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2. 절도정배지의 증가 요인


  지금까지 조선후기에 절도정배지가 증가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절도정배지 확산의 주된 원인은 전체적인 유배인의 확대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절도정배의 증가도 1392-1450년에 25회에 불과하던 것이 1601-1650년에 이르면 122회, 1701-1750년에는 200회, 1751-1800년대에는 276회를 기록함으로써 가장 높은 빈도수를 보이고 있다. 절도정배지의 확산도 횟수의 증가시점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즉 절도정배지는 1651-1700년 시기에 3곳이 증가하였고, 1701-1750년 사이에는 무려 9곳이 증가하고 있다. 그 다음 시기인 1751-1800년 사이에 1곳이 증가하고 있다.

  전체적인 유배자의 숫자가 늘어난 것은, 절도정배의 수치를 증가시켰을 것이며, 기존에 있던 절도정배지만으로 그 절도정배인의 숫자를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새로운 지역들을 절도정배지로 탐색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여진다.47)

  이와 함께 절도정배지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도 절도정배지의 증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유형제도는 죄인을 격리시키고,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인이 생활하던 根據地로부터 멀리 보내야 했고, 또 죄인을 도망가지 못하게 잘 統制해야 했다. 섬은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과 통제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流刑이라는 제도에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었다. 섬이 이런 조건들을 갖추고 유배인들을 수용하였던 반면 육지에서는 많은 유배인들이 배소를 이탈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었다.48) 이런 속에서 유배지로서 絶島는 더 많이 이용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지역에 동시에 여러 유배인을 보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여러 유배인이 한 섬에 유배됨으로써 많은 문제점이 야기되자 정부는 절도정배지를 증가시켜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절도정배지에 새롭게 관방이 설치되고 있는 점도 섬을 유배지로써 등장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배지가 갖추어야 했던 관의 통제라는 점을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등장한 절도정배지들이 갖추어 할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절도정배지가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관의 통제가 가능한 곳이어야 했다. 그럼 각 절도정배지에 관의 통제가 어느 정도 미치고 있었는지 표를 통해서 살펴보자.  

<표 6> 절도정배지의 關防49)

絶島定配地

  설치년도

關防

기타

강화도

태종

강화도호부

 

교동도

1395년(태조 4)

교동현, 교동만호

 

거제도

1422년(세종 4)

거제현

 

남해도

1418년(세종원년)

곤남군

 

진도

1409년(태종 9)

해진군

 

제주도

고려

제주목

 

대정

1416년(태종 16)

대정현

 

정의

1416년(태종 16)

정의현

 

파지도

조선초기

파지도만호

 

축산도

 

 

 

백령도*

1428년

강령현, 백령진

목장

고군산군도*

1683년 이전

고군산진

둔전

위도*

1683년 이전

위도진

둔전

지도*

1682년

지도진

목장, 둔전

임자도*

1711년

임자진

목장

금갑도*

1431년

금갑도진

 

흑산도*

조선초기

흑산진

 

고금도*

1600년

1681년

召募別將

고금도진

둔전

신지도*

1596년

신지도진

 

녹도*

조선초기

녹도진

 

여도*

여말선초

여도진

 

사도*

1427년

사도진

 

나로도*

 

 

목장

고돌산*

여말선초

1523년

돌산진

방답진

 

추자도*

 

 

 

*표시가 된 곳은 조선후기에 추가된 절도정배지이다.


  기존에 이용되고 있던 지역 중 파지도와 축산도를 제외하고는 군현이상의 지역이었다.   조선후기에 추가되고 있는 절도정배지들은 나로도와 추자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진이 설치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는 전후에 등장하고 있는 섬들이 모두 관방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에 따른 중앙통치가 가능했음을 말해준다. 또 전후기 등장하는 절도정배지들의 특징을 볼 수 있는데 기존에 이용되고 있던 섬들은 군현 이상의 규모가 큰 섬이었던 반면 추가되는 절도정배지들은 모두 군사적인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고, 조선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진이 점차 설치되어 가는 비교적 규모가 큰 섬들이었다. 

  두 번째로 절도정배지는 경제적인 여건이 유배인의 생활을 책임질 정도에 이르러야 했다.

죄인이 유배지에 보내지면 유배지의 民이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어야 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유배인의 집중현상이 문제가 되었던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유배인이 한 곳에 집중되는 문제점은 범죄의 가능성 뿐 아니라 現地民을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Ⅴ. 맺음말


  이 글은 유배지의 분석을 통하여 섬의 위상변화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대상자료는《實錄》에서 유배와 관련된 기사 5,860건을 발췌하여 분석하였으며, 대상시기는 1392년 조선건국부터 1896년 유형제도가 거리제에서 형기제로 바뀌는 시점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유형은 거리에 따라서 流 2천리, 流 2천 5백리, 流 3천리로 나뉘고, 죄의 경중과 집행방법에 따라서 安置, 付處, 定配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기에 유형의 집행은 거리에 따른 3등급제를 기본으로 하여 그 대상지를 규정하고 있었다. 즉 형을 집행하는 지역으로부터의 거리를 계산하여 죄인을 유배하였다. 

  조선시기 유배지로 이용된 곳은 총 408곳이다. 경상도가 81곳으로 가장 많은 유배지를 가지고 있었고, 전라도가 74곳, 충청도 70곳으로 나타났다. 가장 적은 지역으로는 강원도로 23곳에 불과했다. 유배지들은 주로 해안지방과 絶島, 북쪽변방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유배의 횟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팔도 중 전라도가 가장 많은 유배빈도수를 보이고, 경상도가 그 뒤를 잇고 있는 점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시기별 유배의 빈도수는 조선초기에 900회를 훨씬 웃도는 수치를 보이다가 1551-1600년에는 103회로 현저히 떨어진다. 빈도는 다시 증가하여 1751-1800년에 이르면 1,018회로 가장 높게 나타난다. 유배 횟수에서 보이는 시기별 특징들을 보면 첫째로 1751-1800년의 높은 수치는 시기의 안정으로 인하여 중앙의 통치력이 강화되고, 형벌제도가 엄격히 적용된 때문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1392-1500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높은 수치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의한 전왕조 관련 인물들의 유배와 많은 왕위쟁탈전으로 인한 유배가 많았던 때문이다. 세 번째는 선조대의 유배의 감소인데, 이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자료의 소실 때문이다. 절도정배의 경우는 처음에는 낮은 수치를 보이다가 1701-1800년 사이에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절도정배는 대상지가 국가에 의해서 지정되어 있었다. 광해군대에 절도정배지는 제주, 대정, 정의, 진도, 거제, 남해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점차 증가되는 양상을 보인다. 조선후기에 등장하고 있는 지역들을 보면 현종대에 고금도, 숙종대에 금갑도, 녹도, 흑산도, 고군산도, 위도, 백령도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으며, 경조대에 이르면 나로도와 사도, 신지도, 지도, 추자도가 추가되어 절도정배지 증가의 절정을 이룬다. 또 영조대에 이르면 여도가 새롭게 추가되고, 정도대에 고돌산, 순종대에 임자도가 추가된다. 절도정배지는 서해안과 남해안에 분포하고 있으며, 조선후기에 새롭게 추가되고 있는 지역은 모두 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절도정배지가 증가되고 있는 원인은 전체적인 유배횟수의 증가와 유배인의 통제를 유리하게 하는 고립성, 그리고 관방의 설치, 또 유배지의 부족 때문이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서 증가되는 유배의 횟수는 절도정배의 횟수도 증가시켰다. 그리고 늘어나는 유배인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유배지가 늘어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육지와 고립되어 있는 섬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절도정배지로 이용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다. 관의 통제가 미칠 수 있어야 했고, 유배인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이 갖추어져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절도정배지로 이용되었던 섬은 모두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섬이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이 글이 기초적인 자료들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성격을 가진 글이었던 것처럼 아직까지 유배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유배인의 생활문제, 유배문화의 실상, 유배인과 섬 주민과의 관계 등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국문키워드

  유배, 절도정배, 유배지, 전라도 

<Abstract>


 The Change of Exile and Exile to the Island in the Age of Chosun Dynasty


 Jang, Sun-Young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change of status of islands through the analysis of place of exile.  That is, it investigates the proportion of exile to the island among the whole places of exile and the shift of exile to the island and then explains the change of status of the islands. For the analysis, it extracts 5,860 articles related to exile from 「The History of the Chosun Dynasty; Chosun Wangjo Shilrok」.  The period extracted is from the construction of Choson Dynasty to 1896 when banishment system was changed into prison term system from distance system.

        Banishment was divided into Exile 2 thousand ri, Exile 2.5 thousand ri and Exile 3 thousand ri according to the distance, and into confinement, detention and exile according to the gravity of the offense. Total 408 places were used for the place of exile. The places of exile were mainly distributed at coastal area, island and northern edges.  The frequency of exile shows the similar distribution to the place of exile.  Chollado shows the most frequent exiles, followed by Kyungsangdo.

        In the frequency of exiles by period, it exceeded 900 times in early Choson Dynasty, but it was greatly reduced to 103 times in 1551-1600.  But it was increased again to 1,018 times in 1751-1800.  According to the features by the period shown in the change of frequency, first high frequency of 1751-1800 was because the central control was strengthened due to the political stability and the punishment system was strictly applied.   Second, high frequency of 1392-1500 was because there were many exiles of the persons related to the former dynasty due to the establishment of a new dynasty and there was the War of Prince.  Third, the frequency of exile was reduced in the period of King Sun Jo and it is because the materials related were lost due to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exiles to the island shows low frequency first, but it was increased between 1701 and 1800.  It is because there was the extension of the exile to the island in this period.

The exile to the island was designated by the nation.  It was Cheju, Daejung, Jungeui, Jindo, Geojae and Namhae in the period of King Gwang Hae Gun.  But, it was increased in late Choson Dynasty, that is, it included Gokumdo in King Hyun Jong, Gumkabdo, Nokdo, Heuksando, Gogunsando, Weedo and Baekryungdo in King Suk Jong, Narodo, Sado, Shinjido, Jido and Chujado in King Jung Jong, Yeodo in King Young Jo, Godolsan in King Jung Jo and Imjado in King Sun Jong.  The increase of the exile to the island was peak in King Suk Jong.

        The exile to the island was distributed at the West Coast and South Coast and it was noticeable that newly added islands in late Choson Dynasty were all in Chollado.        The reason of the increase of exile to the island in late Yi Dynasty was the increasing frequency of exile. Therefore the government substituted it with the island which has good conditions as the place of exile and then the number of exile to the island was increased greatly.  But, there was a requirement for the selection of the exile to the island.  First it should be controlled by government and has the economic ability responsible for the livelihood of the criminal.  It means the island was changed into the place for accommodating the people.


?? Key Words

  exile, exile to the Island, the place of exile, Chollado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初階(崔明宇)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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