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충신 정몽주선생과 저헌이석형묘★
경기도 기념물 제1호
경기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3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5부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으며,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경상북도 영일과 영천) 중 한곳인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문화재청)
신도비각
신도비
경모사
모현당
영모재
가운데가 정몽주묘
왼쪽 높은 언덕에 맏아들 내외의 묘가 있고,
조금 아래로 보이는 곳 긴 봉분이 이석형묘,
오른쪽 담장 두른 곳이 정몽주묘이다.
정몽주의 묘 뒤로 네모난 돌판이 하나 보이는데,
제사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아마도 산신께 지내는 제인 모양...
정몽주 묘 왼쪽 언덕의 영일정씨 묘역
영모재에서 마주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맏아들 내외 묘
맏아들 묘쪽에서 바라본 정몽주 묘
오른쪽이 저헌 이석형 묘
칡덩굴이 무성하고 산딸기가 한창이었다.
저헌이석형묘및신도비 (樗軒李石亨墓및神道碑)
경기도 기념물 제171호
조선 전기의 문신 저헌(樗軒) 이석형(1415∼1477) 선생의 묘소이다.
세종 23년(1441)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14년간 집현전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다.
세조 2년(1456) 사육신 사건을 전해 듣고 그들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동헌에 남겼는데,
다른 관리들이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조가 막아주었다. 그후에도 세조의 총애를 받아
황해도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성종대에는 손성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로는『대학연의』,『대학연의집략』,『저헌집』등이 있다.
그의 묘는 포은 정몽주의 묘역 오른쪽에 있는데, 묘역 안에는 묘비·문인·석·향로석·
상석(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 놓도록 무덤 앞에 마련해 놓은 돌) 등의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다.
묘역 오른쪽 아래에는 인조 2년(1624)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조선시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워 주던 비)가 있는데,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신익성이 글씨를 쓴 것이다. (문화재청)
* 신도비는 현재 묘역 첫 입구 오른쪽의 연안이씨비각공원에 옮겨 보관 중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171호 저헌 이석형선생 묘
이석형선생의 부인이 영일정씨로 부인의 친가 증조부가 포은 정몽주
묘소 앞에 신도비가 있었는데, 현재는 연안이씨비각공원에 이전 보관 중이다.
정몽주 묘역 첫 입구 오른쪽에 있는 연안이씨비각공원
저헌 이석형선생 신도비각
저헌 이석형선생 신도비
뒷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한국등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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