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구상(趙龜祥)은 선산부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약정(約正)이란 직함을 지닌 사람으로부터 향낭의 사건을 보고 받게 되어 이를 방백(方伯)에게 보고하고 방백은 다시 조정에 상계(上啓)하였으나 아무런 조치가 없자 조귀상은 그 사실이 훗날 잊혀 질까 걱정되어 이듬해인 1703년 5월에 판각(板刻)본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그 기록에는 향낭의 죽음에 대한 과정이 사실에 입각하여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 전문(全文)은 아래와 같다.
무릇 목숨을 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장부도 오히려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아낙네에게 있어 서랴! 옛 사람의 말에,「강개(慷慨)하여 죽는 것은 쉬운 일이 로데, 조용히 죽음에 나아감은 어렵다. 하물며 시골 계집의 비천함이랴!」옛 사람이 어렵다고 한 것을 판단컨대 나는 그것을 향낭에게서 보았다. 향낭은 영남의 선산(善山) 상형곡(上荊谷)사람이다. 1702년 가을에 내가 선산에 부임한지 수 일이 지나지 않아서 남면(南面)에 사는 약정(約正)으로부터 글월이 이르렀는데 그 대략은 이랬다.
상형곡에 사는 양인 박자갑(朴自甲)의 딸인 향낭(香娘)은 어릴 적부터 용모가 방정하고 성품과 행실이 정숙하여 비단 이웃에 사는 남자 아이들과 더불어 장난하며 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계모의 성품이 매우 불량하여 향낭을 대함이 심하게 구박하여 날이 갈수록 꾸짖고 욕하며 때렸지만 그래도 향낭은 성난 기색을 조금도 하지 않고는 오직 공손한 말로써 뜻을 이어받고 따르더니 17살에 시집을 갔는데 한 고을에 사는 임천순(林天順)의 아들 칠봉(七奉)의 아내가 되었다. 칠봉은 나이가 14인데 성품과 행실이 괴팍하고 어그러져 향낭을 질시하고 미워함을 원수를 대하듯 하니 향낭이 이미 혼인하여 계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아버지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숙부에게 의지하고자 하였으나 숙부가 장차 향낭을 개가(改嫁)시키고자 하여 시아버지에게 돌아가니 시아버지 역시 다른 곳으로 가라고 명하니, 마침내 물에 빠져 죽을 때에 인근 마을에 사는 초녀(樵女)를 만나서는 그 슬픈 회포를 설명했다.
내가 그 초녀(樵女)를 불러서 물었는데 초녀의 나이는 12살로 성품이 꽤 영리하여 그 사건의 처음과 끝을 깊고 상세하게 진술하였는데 12살의 계집아이라면 필히 꾸며대는 말은 없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진실 된 행적 됨이 명백함이로다. 그 초녀의 말에 이르기를,
「9월 6일에 제가 오태동(吳泰洞) 길 가에서 사리나무를 줍고 있는데 어떤 한 젊은 여인이 길을 따라 통곡을 하면서 오더니 저를 보고는 흔연히 울음을 멈추더니 저를 불러서는 더불어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너는 뉘 집의 아이니?” 하여 제가 아버지의 성명을 말했더니 여인이 말하기를, 그러면 너의 집 거리가 우리 마을과 멀지 않으니 내 말을 우리 아버지에게 전해줄 수 있겠구나, 오늘 너를 만난 것은 하늘의 도움이다. 나는 한도 없이 말 못할 고통이 있으니 이제 너에게 모두 말하고 나서 죽을 것이다. 나는 본래 모촌(某村)에 사는 모(某)의 자식이고, 모촌(某村)에 사는 모(某)의 아낙으로 이름은 모(某)요, 나이는 올해 20살이고 17곱살에 시집을 왔는데 당시에 남편의 나이는 14살이므로 어리고 아는 바가 없는지라 나를 대우함이 원수처럼 하기에 나는 나이가 어려서 일을 해결할 수 없어서 그럴 것이므로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은인자중하며 지냈으나 세월이 조금씩 흘러도 나를 대함이 더욱 학대하여 큰 몽둥이로 어지럽게 때리고 머리를 뽑고 얼굴을 훼손함에 이르더니만 나를 쫓아내니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또한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우리 어머니는 날 낳아주신 생모(生母)가 아니고 계모였었는데 평상시에 나를 대함이 자애롭지 않았기에 나를 보고는 성내며 질책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미 시집을 보냈는데 다시 돌아왔으니 내가 어찌 너를 기르겠느냐!” 하시더니 하루하루 지날수록 꾸짖고 욕보임이 사람의 정(情)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고 아버지도 나를 보시고 용인하기 어려운지라 나를 숙부님 댁으로 보냈단다. 다행히 수개월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하루는 숙부님께서 나를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떻게 100년 토록 너를 부양하겠니? 네 남편이 너를 영원히 버린 것은 기필코 너의 잘못이 아닌데 떳떳하고 한창인 젊은 여자가 어찌 혼자 살아가겠니? 다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시더라. 내가 대답하기를, “숙부님께서는 어찌 차마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비록 떳떳하고 한창인 나이인데다가 또한 부도(婦道)의 덕을 행하지는 않았으나 몸은 이미 남에게 허락했건만 어찌 남편의 어질지 못함으로 다시 시집을 갈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라고 말했다. 숙부는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로부터 대우가 점차 박해지더니 의지를 꺾으려는 뜻이 있어서, 내가 다시 어쩔 수 없이 다시 시댁으로 왔더니 남편은 나를 박대함이 더욱 갈수록 심해지니 시아버지가 나의 궁박함을 가여워하시면서 다시 다른 곳으로 출가할 것을 권하시면서 분명히 약조한 글월을 만들어 그것을 내게 주기에 이르러 내가 숙부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답하고 또 말씀드리기를, “시아버지께서 만약 울타리 바깥에 흙집이라도 만들어주셔서 저를 받아주시면 저는 마땅히 죽는 날까지 그 속에서 있겠습니다.” 고 했지만 시아버지는 듣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저에게 집안을 더럽히지 말라고 감계하시면서 내심으로는 아마도 제가 스스로 자결할 것을 염려하셨던 것이다. 이로써 집에서 자결할 수 없었기에 물에 빠져죽기를 결심했단다. 비록 그러하나 죽음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곧 부모님과 시부모님께서는 필히 내가 몰래 다른 곳으로 개가했으리라 의심할 것이니 어찌 원한이 깊지 않겠는가! 오늘 너를 만남은 나의 죽음을 증거 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의 도움심이다. 또 비록 만난 사람이 남자 아이였다면 더불어 이야기할 수도 없었고, 어른인 여자였다면 반드시 나의 죽음을 말렸을 테니 너는 나이가 어려서 너의 성품과 지혜로 나를 만류할 수는 없을 테지만 능히 나의 말을 우리 아버지에게 전달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또한 천행(天幸) 아니겠는가! 하고 이에 저를 데리고 지주중류비에 이르러 못 위에서 머리를 풀고 그 치마와 신발을 벗어서 묶어서 제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부모님께 드려서 내 죽음의 증거로써 명백히 하고 또한 강 속에서 나의 시신을 찾게끔 하여라. 그러나 내가 죽으면 부모님께는 죄인이 되는지라 비록 죽더라도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을 뵈오리까. 내 시신은 필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니 내 장차 죽어서 지하에서 우리 어머니를 보게 되면 이 같은 만 가지 슬픔과 원망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말을 마치고는 오랫동안 통곡을 하더니 곡을 멈추고는 노래 한 곡을 하더니 장차 물에 몸을 던지려고 하는데, 제가 무섭고 두려움을 이길 수 없어서 몸을 일으켜 달아났더니 그 여인이 쫓아와서는 저를 만류하며 다시 강의 위에 이르러 말하기를, “두려워 말아라, 내가 너에게 노래 한 곡을 가르쳐줄테니 너는 모름지기 암기하고 낭송하다가 언젠가 사리나무를 구하러 이곳에 오게 되어 이<산유화> 한 곡조를 노래하면 나의 혼백은 틀림없이 네가 온 것을 알 것이다. 푸른 물결을 굽어보아서 만일 소용돌이치는 곳이 있으면 나의 혼백이 그 가운데에서 놀고 있다고 알아라.” 거듭하여 강물에 몸을 던지려다 돌아와 멈추며 말하기를, “한번 죽음을 이미 결정하였으나 물을 보니 오히려 두려운 마음이 있어 차마 몸을 던지지 못하니 가련하구나. 나는 차마 물을 볼 수 없구나.” 라고 하더니 마침내는 그 적삼을 벗어서 얼굴에 덮어써서 강물을 볼 수 없도록 한 이후에 한 번에 뛰어서는 영원히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초녀(樵女)가 돌아가 그 아버지에게 알리니 아버지는 곧바로 시신을 찾으러 갔으나 합쳐서 14일 동안 시신을 찾지 못하고 아비가 어찌할 수 없어 관(棺)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는데 시신이 물결 위로 떠올랐는데 홑적삼이 아직도 얼굴에 덥힌 채로였는데 그것 또한 기이했다. 그 노래에 이르기를, 「하늘은 어찌하여 높고 먼 것인가 / 땅은 어찌하여 넓고도 광막한가? /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해도 / 이 한 몸을 의탁할 수 없으니 / 차라리 이 연못에 몸을 던져 / 물고기 배속에 장사지내리라」
아이의 말이 이에서 그치자 내가 듣고서는 측연하여 방백에게 알려 말하기를, 생각건대 선산이 고을이 된 옛날부터 충효절의(忠孝節義)가 대대로 있어 사람들에게 들으니 짐승에 이르러서도 또한 의로운 죽음이라 칭함이 있으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식한 촌맹(村氓)의 딸도 이같이 빼어난 절개의 행실이 있으니 비록 옛날의 열녀라도 어찌 이에서 더함이 있겠는가. 그 일을 처리함이 분명함은 죽음에 나아감이 조용한 것이라 민멸되어서는 아니 되는 까닭이 있기에 감히 이렇게 가르치고 알리고자 하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조정에 알려서 그 무덤에 정표를 내려서 열(烈)과 의(義)의 풍습을 세우고자 말하였더니 방백이 계(啓)를 지었는데 듣자니 해당 부서에서 그를 두고 아직 표정(表旌)의 거행됨이 없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으리오. 내 그 이름이 민멸되어 칭송됨이 없어지지 않을까 안타까워 이에 삼강행실의 예에 의거하여 그 형상을 그리고 그 사건을 서술하여 의로운 소의 그림 아래에 붙임으로써 훗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향낭이 있었음과 그 죽음은 열(烈)이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안타깝도다! 나의 할아버지 조찬한(趙纘韓)께서 이 고을에 선산부사로 부임하였을 때는 의로운 소가 있었는데 불초한 손자 조구상(趙龜祥)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서는 이 고을에 향낭이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한 일이 쌓였다고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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