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元均)장군
1540(중종 35)∼1597(선조3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고려 태조 때의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 병부령 극유(克猷)의 후손이다.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 데도 공을 세웠으며, 1592년(선조 25)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그 해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양국간의 전쟁 준비 격차로 말미암아 전쟁 발발 초부터 일방적인 패주의 연속이었다. 이에 거진(巨鎭)의 명관들은 다투어 도주하고, 백성들은 모두 산간으로 피난해 성읍이 모두 텅 빈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 제일의 요충인 경상좌수영의 군사도 수사 박홍(朴泓) 이하 모든 장병이 도주해 싸워보지도 못한 채 완전 궤멸되었으며, 우수영 관할의 장병들도 거의 흩어져 휘하에는 약간의 장병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조정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 고군분투하였다.
몇 차례에 걸친 원병 요청 끝에 마침내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해 옥포(玉浦)·당포(唐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그러나 포상 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하였다. 급기야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해 이듬해 12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병사로 재직 중에도 여러 차례 수군 작전에 관한 계획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번 수사로 재기용할 것을 검토하던 중,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울로 잡혀가 국문을 받게 되자 1597년 1월에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 수군을 통제하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군을 이겨야 한다는 각오 아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중인 것도 모르고,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삼도 수군을 이끌고 부산의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1604년 이순신·권율(權慄)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책록되어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1605년 왕이 내린 치제문과 숙종 때의 대사헌 김간(金幹)이 찬한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 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 있다.
원균장군 묘역 입구
원균장군 신도비
원균장군 묘소 전경
묘후경
재실 모선재 전경
재실에서 바라본 묘소
원균장군 사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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