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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충남 부여]회양공 조신(淮陽公 趙愼)? 묘-풍양조씨

장안봉(微山) 2013. 9. 16. 06:52

회양공 조신(淮陽公 趙愼)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본명은 사렴(思廉)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조맹(趙孟)의 후손이며, 고려 공민왕 때 회양부사를 지내 '회양공(淮陽公)'으로도 불린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에게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와 사복시정(司僕寺正)의 지위를 추증받았다.

충숙왕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 右副代言)과 좌상시(左常侍)를 지낸 조염휘(趙炎暉)의 4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으며 모친은 식목녹사(式目錄事)를 지낸 손원계(孫元桂)의 딸 밀양 손씨(密陽 孫氏)이다. 고성 이씨(固城 李氏)와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조선 건국 이후에 공조좌랑(工曹佐郞) 등을 역임한 조안평(趙安平)이며, 작은아들은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지낸 조개평(趙開平)이다.

공민왕 때 정4품 봉상대부(奉常大夫)가 되어 강원도 북부 회양부(淮陽府)의 부사(府使) 등을 역임했다. 큰형인 조사충(趙思忠)은 종4품 봉선대부(奉善大夫)로 왕을 시종하는 천우위(千牛衛)의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작은형인 조사공(趙思恭)은 상서(尙書), 아우인 조임(趙袵)은 보문각(寶文閣)의 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에 형인 조사공이 김정ㆍ김흥조ㆍ유사의(兪思義) 등과 함께 신돈을 살해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자 형제가 모두 곳곳으로 흩어져 피신했다. 조신은 이때 사렴(思廉)이라는 이름을 신(愼)으로 바꾸고 둘째아들인 조개평만을 데리고 부여의 임천(林川)에 은거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고성 이씨는 맏아들인 조안평을 데리고 친정인 춘주(春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로 피신했다.

조신은 임천에 은거하여 후학을 양성했으며, 이색ㆍ정몽주 등과도 교유했다. 훗날 조선의 3대 임금이 되는 태종 이방원에게도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 스승이었던 조신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왕사(王師)인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보내 묘자리를 잡게 하고, 특명(特命)으로 수묘군(守墓軍)을 보내 조신의 묘를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정3품 통훈대부의 품계를 추증하고, 그의 후손을 관직에 등용했다.

조신은 조선 후기 세도 가문 가운데 하나인 풍양조씨 회양공파(淮陽公派)의 분파조(分派祖)로 숙종 때에 좌의정을 지낸 조상우, 영조 때에 2대에 걸쳐 우의정과 좌의정 등을 지낸 조문명조재호 부자,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과 헌종 때 외척으로서 풍양조씨의 세도정치를 이끈 조만영·조인영 형제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처럼 후손들이 영화를 누렸기 때문에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점상리 덕림고개에 있는 그의 묘는 ‘조선의 8대 명당’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출처] 조신 | 두산백과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회양공 조신의 유적비

회양공 조신의 묘는 화살표 반대 방향의 우측 길로 계속 가야 한다

마을에 세워져 있는 조신의 신도비

조신신도비는 김응한이 찬하고 이시영이 썼다

 

덕림병사

 

 

조신묘 전경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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