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간략적인 역사
시 대 왕 조 / 존 속 기 간 존 속 연 수 하(夏) BC 2200 ~ BC 1700 은(殷-상나라고도 함) BC 1500 ~ ? 주(周) BC 1100 ~ ? 춘추시대(春秋時代) 오패:齊(환공),晉(문공),楚(장왕),吳王(합려),越王(구천) BC 770 ~ BC 403 전국시대(戰國時代) 秦. 韓. 趙. 魏. 齊. 楚. 燕. BC 403 ~ BC 221 진 (秦) / 15년 BC 221 ~ BC 206 서한(西漢) / 214년 BC 206 ~ AD 8 신(新) / 14년 AD 9 ~ 23 동한(東漢) / 195년 AD 25~220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 / 45년 220~265 촉(蜀) / 42년 221~263 오(吳) / 58년 222~280 진(晉) 서진(西晉) / 51년 265~316 동진(東晉) / 103년 317~420 5호16국(五胡十六國) 전량(前涼) / 31년 324~376 성한(成漢) / 45년 302~347 전조(前趙) / 25년 304~329 후조(後趙) / 31년 319~350 전연(前燕) / 33년 337~370 전진(前秦) / 43년 351~394 후진(後秦) / 33년 384~417 후연(後燕) / 25년 384~409 서진(西秦) / 46년 385~431 후량(後涼) / 17년 386~403 남량(南涼) / 17년 397~414 남연(南燕) / 12년 398~410 서량(西涼) / 20년 400~420 북량(北涼) / 38년 401~439 하(夏) / 24년 407~431 북연(北燕) / 27년 409~436 남북조(南北朝) 송(宋) / 59년 420~479 제(齊) / 23년 479~502 량(梁) / 55년 502~557 진(陳) / 32년 557~589 동위(東魏) / 16년 534~550 서위(西魏) / 21년 535~556 북제(北齊) / 27년 550~577 북주(北周) / 24년 557~581 수(隋) / 37년 581~618 당(唐) / 289년 618~907 오대(五代) 후량(後梁) / 16년 907~923 후당(後唐) / 13년 923~936 후진(後晉) / 10년 936~946 후한(後漢) / 3년 947~950 후주(後周) / 9년 951~960 십국(十國) 오(吳) / 35년 902~937 전촉(前蜀) / 18년 907~925 오월(吳越) / 71년 907~978 초(楚) / 44년 907~951 남한(南漢) / 64년 907~971 민(閩) / 46년 909~945 형남(荊南) / 36년 924~960 후촉(後蜀) / 31년 934~965 남당(南唐) / 38년 937~975 북한(北漢) / 28년 951~979 요(遼) / 218년 907~1125 북송(北宋) / 167년 960~1127 남송(南宋) / 152년 1127~1279 금(金) / 109년 1125~1234 원(元) / 161년 1206~1367 명(明) / 276년 1368~1644 청(淸) / 295년 1616~1911 오제시대(황제시대): [전설/신화시대 BC ? ] 황제시대라고도 하는 이 오제시대는 실제로 존재했는지에는 대해 의견이 많지만 대체로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여겨진다. 오제시대는 다섯 명의 황제인 삼황오제가 다스리던 시대를 일컫는 말로서 다섯명의 황제는 '1황제 2전욱 3제곡 4요 5순'로 첫번째 황제인 황제는 고대 중국 최초의 황제이며 고대 중국 신화의 세상 만물과 하늘과 땅의 신이자 창조신이기도 하다. 황제의 또 다른 이름은 '중앙 상제'이며 후에 진시황제가 자신이 신격화가 되고자 스스로 신화 창조신이던 황제를 칭호로 쓴 것이다. 요, 순황제시대는 태평성대로 이 두황제의 정치에 따라올자가 없었으며 도둑과 살인자가 없어 대문을 열어놓아도 도둑질하거나 살인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존재하는 전설의 제국 같은 국가지만 있다는 가능성이 높다. 기록상에는 17명의 황제가 있었다한다.
춘추전국시대 : 역사상 최악의 전쟁 암흑기라 불리우던 이때는 수많은 영웅들과 그들을 섬기던 사상가들이 활거하던 시대로 '눈만 감으면 나라가 사라졌다가 다시 건국되기를 계속 반복한다'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인류 역사상 가장 전쟁이 빈번하게 많았던 시기였다. 실제 이 때는 눈만 뜨면 전쟁이 날 정도로 엄청나게 전쟁이 잦았는데 그 이유는 주나라의 분열 때문이었다. 제후들에게 각 지방을 다스리게하던 주나라의 군사제도는 주나라 말기에 터무니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영토가 너무 커서 황제의 관할이 닿지않자 황제는 각 지방마다 황제의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을 제후를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그 지역에서만큼은 그지방의 제후가 왕인 셈이었다. 믿을 수 있는 혈연으로 맺어진 자들만을 선발하여 다스리게 했기 때문에 황제는 안심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권력과 군사 그외 모든 힘을 손에 넣은 제후들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게되어 주나라는 순식간에 제후들이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켜 소왕국들이 마구 생겨나게 된것이다. 그 왕국들을 다 합친다면 몇십만국은 훨씬 넘을 것으로 추측하며 모두가 적국이 되버린 소왕국들은 서로 영토를 넓히려고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국가가 멸망하고 흥하는 역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한나라 : 진시황제가 죽자 진나라는 통치할 자가 없게 되자 진나라가 정복한 여러나라들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들을 모두 진압한 초나라와 한나라가 옛 진나라 영토를 모두 수복하려 일어난 초한지의 배경이 되는 전쟁이다.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은 역사상 가장 성격이 판이하게 대립되는 군주였다. 이들은 서로 너무나 달라서 초나라 항우는 오직 자신만을 믿으며 자신만이 제국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하들은 모두 권력을 손에 잡으려고 부정부패를 꾀하기 때문에 부하들은 신용이안되며 오직 자신만을 믿고 나가야한다고 생각했다. 한나라 유방은 자신의 힘보다 군인, 장군들 모두의 힘을 더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유방은 신하들 중 출중한 자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등 자신 혼자 제국을 이끌어나가는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제국을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항우는 유방에게 패하게 되어 항우를 두고 패왕이라고불렸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좋은제도는 더욱 발전시켜 후한 시대의 채윤이 종이를 발명했으며 사마천이 사기를 저서하는 등 문화의 꽃을 피웠고 화약, 나침반, 인쇄술 등이 발명되었다. 한나라는 크게 전한-후한 시대로 나뉘며 전한 시대의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오던 한무제때에는 식민지 제후국까지 합쳐서 500만의 군대를 지니고 있었으며 한무제는 수많은 북방민족들을 정복하여 식민지화 시키고 노예로 두기도 하는 등 찬란하고 강력한 제국을 만들었다. 진나라는 물론 한나라는 직업군인이 대다수로 훈련이 잘된 군인들이 많았다. 단순히 농민들이나 백성들이 전쟁터에 징집되는 경우는 큰 전쟁이 터질때일 뿐이었고 일반백성은 농업등 생업에만 몰두했다. 실크로드를 건설하여 로마까지 이르는 세계 최대의 무역로를 개척하여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이였지만 환관들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5호 16국 : 북방부족의 세력이 거대해지기 시작해 대륙으로 진출을 하면서 서로가 제국을 자처하며 나라를 세우는데 이 시기를 5호 16국 시대라 부른다. 화북에서는 흉노(匈奴), ·갈족, 선비(鮮卑:터키계라는 설이 있다), 저(티베트계), 강(羌:티베트계)의 이른바 5호가 잇달아 정권을 수립하여 서로 흥망을 되풀이하면서 16개국을 넘었는데 이것을 흔히 5호 16국이라고 한다. 한나라때부터 주변의 이민족을 정복하여 한문화(漢文化)를 침투시켜 나가자 이민족이 중국 내륙에 거주하는 자가 늘어갔으나 민족의 자주성을 잃은 그들은 한민족으로부터 갖가지 압박을 받고 노예 ·농노 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같은 일은 위(魏) ·진(晉) 시대에 이르러 더욱 심했는데 크고 작은 반란을 거듭하다가 304년 흉노의 추장인 유연이 팔왕(八王)의 난에 편승하여 거병(擧兵), 산시[山西] 지방에 흉노국가를 재건하였다(漢:뒤에 前趙로 바꿈). 같은 해 저족인 이웅(李雄)이 쓰촨[四川]에 대성황제(大成皇帝)를 자칭하며 나라를 일으켰으며 서진(西晉)왕조는 한군(漢軍)에게 수도 뤄양[洛陽]을 빼앗기고 멸망하면서 강남(江南)에 망명정권이 탄생시켰다. (東晉). 한(漢:前趙)은 갈족인 석륵(石勒:後趙)에게 멸망되고 후조도 또한 동북방면에서 남하한 선비족의 전연(前燕)과 서쪽의 저족인 전진(前秦)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남조 : 송나라(420) - 제나라 - 양나라 - 진나라
송나라 : 다른 어떤 왕조봐도 송나라는 이질적이며 문화 자체가 다르다. 우리가 고대 중국 역사를 보는 시각은 송나라로 비추어 지지만 사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다르고 이질적인 국가가 송나라이다. 다른 고대 중국왕조들이 군사력을 주장한 것과 달리 송나라는 문치를 주장하면서 중앙에 군대를 배치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문관들이 다스리게 하는 정치를 하였다 . 이는 군인들이 너무나 강력해져서 멸망해버린 당나라때문에 군인들을 중앙에 집중시켜 그들을 감시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끔 하기 위함이었다고한다. 따라서 송나라는 군사력은 가장 약한 제국이었으나 경제력이 매우 높아 부유했으며 그 엄청난 경제력 덕분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손꼽혔다. 그 이유는 전쟁에 국고를 탕진하지 않았으며 꾸준한 무역과 여러 문관들이 성리학을 치중하여 학문과 과학 등의 발전을 꾀함으로서 여러 새로운 물건들이 발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송나라때 화약과 종이, 활판인쇄술 등이 꾸준히 발전되었다. 문관들이 우대받는 세상이 되어 사대부(士大夫)계층이 지배세력으로 떠올랐고 이들은 과거 무신, 군인, 장군, 문벌귀족과는 달리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층이었고 유교적 교양으로 무장한 교양있는 지배층이었다. 게다가 송대에는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性理學)이 발달하였으며 언론(言論)기능이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문치주의(文治主義)의 극성을 이루었다. 어느 관료가 부패했다고 하면 언관들이 가만히 있지 않아 그 관료를 탄핵하였는데 송은 역대 중국왕조 중 가장 관리의 녹봉이 높았으며(물론 이것 때문에 재정적인 압박은 있었지만..) 관리의 녹봉이 높다보니 다른 잿밥에 눈이 별로 가지 않아 부패가 덜 했다. 이는 관리의 녹봉이 박했던 명(明)과 청후기의 고증학 유행로 인한 비도덕적인 관료의 부패보다 훨씬 송나라 조정을 참신하고 건강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송나라가 중국역사와 세계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세계적이고 국제적이고 개방적이었던 당나라보다는 국수적이었고 서민적인 송문화가 오히려 현대 중국전통문화에 가깝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화창기병이라는 기마군단이 있었던 송나라는 화약이 개발된 제국답게 화약에 대한 지식과 화약에 대한 병종이 정말 많다. 화창기병은 폭죽같은 것을 창끝에 달아놓고 적을 공격하는 것으로 창에서 불이 뿜어져나와 적에게 화상입혔는데 이는 몽골제국의 침략전까진 거의 수많은 보병, 기병을 녹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송나라는 총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화약을 발명한 송나라는 석궁모양에 화약을 집어넣으면 어떨까 하는 관료들에 생각에따라 총을 개발하게 됐으나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미완성작에서 그치게 되었다. '비화창' '화룡창' 등으로 불리는 종이통으로 된 화기가 만들어졌고 원대에는 그것을 개량한 금속제의 통형화기가 출현했다.
원나라(대몽골제국) : 세계를 지배한 제국이며 송나라에서 제작하기 시작한 총을 완성시킨 제국이다. 몽골족을 통일한 칭기즈칸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세운 대제국으로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유목민족이던 몽골족은 한나라와 당나라 때는 노예였다가 칭기즈칸이라는 영웅을 만나면서 부족장 회의에서 우두머리가 된 칭기즈칸은 부족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타타르인을 말살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세계지배의 꿈을 이루기 시작했다. 우선 저물어가는 해와 다름없는 몰락기의 금나라를 정복하려고 했던 칭기즈칸은 실패로 돌아가자 서쪽으로 가서 차례대로 동유럽, 서유럽 국가들을 정복한 후 이슬람 국가들도 정복하고 대제국을 창설했으며 결국 다시 금나라를 정복한다. 차례로 남송, 북송마저 정벌한 칭기즈칸은 세계제국인 중국을 정복한 영웅으로 추대받으며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없어보였다. 중국에 수도를 정하고 그곳에 원나라라며 국명을 짓게 된 칭기즈칸이 죽자, 오고타이칸, 쿠빌라이칸대에 이르면서 제국은 더욱 확장되게 된다. 하지만 제국의 영토가 점차 커지면서 황제의 관할구역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었다. 애당초에 초원을 떠돌면서 전쟁만 해오던 몽골족은 정치, 문화라는 것에 무관심한 종족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선 세계최강이었지만 문자에서는 최악이었다. 결국 그들은 계속해서 확장되어가는 영토에 자신들이 더 공포를 느끼게 되며 영토 확장을 중단하기에 이르지만 너무 커진 영토는 이미 파멸을 예고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 이르는 수많은 국가들을 점령하니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의 국가까지 있었다. 백인, 흑인, 황인 할 것 없이 나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단결력은 언제 깨어질지 몰랐고 언제 어디서 누가 반란을 일으킬지 몰랐다. 소수의 몽골족이 수많은 국가들을 다스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결국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던 제국은 각 장군들이 빠져나가면서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면서 완전히 적국으로 나뉘게 되었고 후에는 여러 칸국으로 분리된다. 원나라 멸망 후에는 제국을 계승하는 무굴 제국, 티무르 제국 등이 새롭게 생겨난다. 몽골제국군은 그 당시에 벌써 철화포(鐵火砲)라고 하는 세계최초의 화기를 사용했다. 또한 총을 개발한 몽골군은 총을 앞세워 유럽과 아시아를 간단히 정복할 수도 있었다. 몽골군의 서양침략으로 인해 유럽에 총이 전파되었다. 명나라 : 원나라는 14세기에 들어와 제위상속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 통치능력이 저하되었다. 거기에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차례로 일어났기 때문에 백련교도가 1351년에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홍건군의 장군이었던 주원장(훗날 태조 홍무제)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홍무제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홍무제는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의 토지조사 및 인구조사를 진행해 이갑제, 위소제를 배포하고 내정의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홍무제는 건국공신을 숙청하면서 독재체제를 만들었다. 1398년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였던 손자 건문제와 숙부였던 홍무제의 아들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 북경을 중심으로 북방의 방비를 맡았던 홍무제의 4남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다(정난의 변). 1402년 주체는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로 이 후 정치의 중심은 다시 북경으로 이동했다.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여 홍무제의 신중책을 바꿔 왕성하게 세력을 넓혔다. 북쪽으로 후퇴한 원나라의 잔당(북원, 명나라에서는 이것을 타타르라고 부른다)은 1388년 토곤 티무르의 왕통이 단절되었으나 영락제는 원정을 감행해 이들을 제압했다. 만주에는 여진족을 복속시켜 위소제에 조직해 넣는 데 성공했다. 남쪽은 베트남을 진조의 내란을 틈타 정복했으며 해외의 동남아시아, 인도양까지 영토를 넓히기 위해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를 파견하여 일부는 메카,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도달한 대원정의 결과, 수십만 국가를 식민지로 두게 되고 수많은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대제국이 되엇다. 영락제의 사후 몽골에 대한 원정과 동남아시아의 함대 파견은 중지되고 베트남에서는 여조가 독립하였다. 그러나 영락제의 아들 홍희제, 손자 선덕제 2대동안 명나라의 국력은 충실해져 최전성기를 쌓았다(인선의 치).
청나라 : 명(明)나라 멸망 후 만주족 누르하치[奴爾哈赤]가 세운 정복황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황조(1636∼1912)이다. 특히 청나라하면 청나라의 군사제도와 청나라 최고의 기병군단인 팔기군을 빼놓을 수가 없다. 팔기는 누르하치가 명을 정복할 때 동참했던 8개 부족들의 수장들로 누르하치가 명을 멸망시키고 황제로 등극하자 이들은 부족장 신분에서 왕으로 신분이 급상승하게 된다. 이때 여덟 부족장들이 거느린 군단이 팔기군이다. 부족장이 왕이 되면서 이들 1개 군의 규모가 웬만한 소국(조선, 일본)의 규모의 군대정도로 커지게 되는데 팔기군의 힘이 어마어마하다보니 우리나라에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어 병자호란을 일어나게되었다. 당시 팔기군 300명이 조선군 4만명을 초토화시켰다고하니 이들의 얼마나 잘 훈련된 군대인줄 짐작할 수 있다. 청나라는 황제가 황태자를 뽑아 차기 황제를 뽑는게 아니라 이 팔기군에서 황제를 뽑았다. 따라서 청나라의 황제는 일반적인 장자상속이 아니어서 어떤 황제는 막내도 있었다. 정복황조라는 말답게 청나라는 원나라, 당나라, 한나라와 같이 정복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집권 당시에 수많은 나라들을 정복하여 발아래에 눕혔다. 특이하게도 청나라는 싸움과 전쟁을 업으로 삼았던 누르하치가 세운국가라 그런지 전쟁과 정복이 가장 심했었다. 한족의 문화를 그대로 흡수하면서도 정복활동에 미치도록 매진했던 청나라는 한족의 문화와 자신의 문화를 교묘하게 흡수해서 제국을 통치했던 나라였다. 전쟁에만 능했던 원나라와는 정말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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