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한국 전통 가구_text

장안봉(微山) 2013. 6. 23. 17:48
한국 전통가구의 아름다움  


한국 전통가구의 아름다움

사랑방 가구
안방 가구
주방가구
칠과 금속장식
한국의 전통가구 시장
특별기고 "한국의 목상감 가구"
김학철 [사대부가구 전무]

특별기고 "한국적이고 독창성있는 가구를 만들자"
유문용 [사임당가구 개발감사, 문화재전문위원]


국내 가구시장의 디자인 경향은 참으로 다양하다. 이미 세계시장의 주류가 되어버린 미니멀리즘, 이를 뒷받침하는 젠 스타일, 모방의 근원이 된 유럽풍 모던 스타일…….

현대적으로 변화된 우리의 생활양식과 주거환경은 이처럼 많은 서구적인 구조와 디자인의 제품들을 원하고 있고 이들이 우리의 방과 거실을 차지하고 있다.

국내 업계도 이러한 소비자들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유행한다는 스타일은 거의 도입하여 제품화하고 있다. 물론 한국이 산업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모든 주거환경이 서구 선진국의 그것을 따라가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어쨌든 현실은 서양의 스타일이 점령하고 있으며 우리의 멋과 전통은 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내 시장의 상황과는 달리 해외 시장은 오리엔탈리즘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실제 디자인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사조를 지배했던 합리주의는 현대에 와서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했다. 급속한 산업화와 대량생산, 대량 소비체제에 따른 획일성은 그들의 한계를 실감하게 한 것이다. 또한 디자인의 근본 가치가 상업주의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졌던 것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는 동양의 사조가 전 세계에 활발히 퍼져나가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전통가구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각별한 이해를 바탕으로 간결하고 절제된 선과 면이 만들어 내는 구조의 아름다움은 선조들의 미의식과 생활철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미는 기교에 넘치며 화려하고 복잡한 서구적인 것과는 달리 자연을 추구하며 깊은 내면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 중에서 목가구는 자연의 나뭇결을 그대로 이용하여 화려한 조각이나 장식을 대신함으로써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자연에 가깝고, 또 그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한민족이 갖고 있는, 자연을 사랑하고 소박하면서도 깊이있는 성격이 잘 반영되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더욱이 가구는 일상 생활에 있어 늘 가까이 대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목가구가 이러한 특성을 갖게 된 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민족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 못지 않게 자연환경과 주택구조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생활공간에 따른 특성, 오랫동안 한민족의 의식을 지배해 온 유교사상, 특히 남녀유별의 관념에 의하여 남성과 여성의 생활 공간이 각각 나뉘어져 있었고, 남성들은 주로 사랑에서, 여성들은 안방에서 생활의 대부분을 영위하였으므로 사랑방과 안방의 가구들이 그 용도와 취향에 따라 뚜렷한 개성을 갖게 되었다.


사랑방 가구

사랑방은 남성의 생활 공간으로, 깊은 사색에 잠기거나 글을 읽고 그림과 시를 즐기며 후학을 기르는 학문의 온상인 동시에 손님을 맞아 인생과 정치를 논하는 사교의 장소였다. 이러한 사랑방의 내부 공간은 화려하고 복잡한 것보다 소박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필연적이어서 이에 적합하도록 크지 않은 공간에 단순한 구조, 쾌적한 선을 지닌 목가구가 제작되었다.

더욱이 조선시대에는 유교로 말미암아 명나라로부터 문방생활에 대한 영향을 크게 받아 문갑, 향꽂이 등 문방용기가 급격히 발전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중국의 것이 입자생활로 인하여 높고 크며 또 권위와 기교로 이루어진데 반해, 조선시대에는 평좌생활에 따라 행동 반경이 좁고 낮으므로 자연히 단순하고 소박한 소품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사랑방 가구들을 살펴보면, 아랫목의 다닭문이나 병풍에는 자연경관이나 남성의 기백 또는 인생의 좌우명을 나타낸 산수화. 사군자. 시 등을 그려 넣어 그 방의 주된 분위기를 나타내었다. 실내의 중심인 아랫목에는 글을 읽거나 쓰는 용도 외에 내객과 마주 앉은 주인의 위치를 지켜 주는 그 측면에 문방사우인 벼루, 먹, 종이, 붓을 넣는 것이 놓여졌다. 또 그의 옆에는 낮고 넓은 4각의 목판형 재판이 있어 재떨이. 담뱃대 등을 한데 모아 정리하여 편리하게 하고 또 단정하게 보이도록 했다.

벽면에 붙여 배치하는 가구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지 않도록 세로폭을 얕게 설계, 제작하였다. 그 중 책을 얹어 놓는 것은 가느다란 골재와 층널로 구성되어 실내 공간에 부담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쾌적한 면 분할과 비례는 한국 목가구의 미를 대표하고 있다 하겠다.

대표적인 사랑방 가구로는 책을 넣어 두는 책장이 있다. 원래 대가에서는 서고가 따로 있어 책을 보관하고 있으나 가까이 두고 항상 읽혀지는 책들을 위해 실내에 자그마한 반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책장은 책의 무게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굵은 골재와 견고한 짜임이 중요시되었다. 문갑은 중요 기물이나 문방용품을 보관하는 가구로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의 아래 공간이나 측면벽에 놓여졌다. 이는 낮게 제작되어 벽면에 시원한 여백을 주므로 생활 공간을 너르게 보이도록 하여 효과적이었다. 사랑방 문갑 중에는 많은 공간으로 구성된 공간문갑이 있어 생활 공간과의 조화에 세심한 배려를 보이고 있다.

고비는 벽에 걸어 놓고 방세간의 하나로 벽을 장식하는 기능이 매우 강했다. 특히 낮은 가구의 배치로 생기는 벽면의 활용에 유용했으며, 문갑 등과 잘 조화되고 그 방 주인의 취향이나 안목에 맞게 마련되었다.

이밖에 사랑방 가구로는 향, 좌경, 등과 등과 여가를 즐기는 바둑판, 거문고 등이었다. 가구의 재료로는 광택이 없고 시각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는, 부드럽고 소박한 질감의 오동나무와 소나무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느티나무와 먹감나무 등 무늬결이 좋은 나무를 이용하여 자연미를 살렸거나, 은행나무에 십장생, 용문, 시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장식성이 강조되고 귀족적인 품위를 나타낸 것도 있다.


안방가구
여성들이 거처하는 안방은 사회적 규율에 얽매이고 또 외부와 단절된 속에서도 자신의 생활을 찾고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으며, 자녀를 기르고 가정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므로 항상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가구가 제작되어졌다.

따라서 안방의 가구는 사랑방 가구의 정선된 선과 검소한 분위기와는 달리 색이 곱고 밝고 따뜻하며 화사한 것이 특징이다. 안방에 사용되는 가구로는 몸단장을 위한 좌경, 빗접, 주연경과 의복을 관리하는 반짇고리, 화로 등이 있었으며,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은 계절에 따른 많은 의복과 솜, 천, 버선 등을 보관하기 위하여 이층장, 삼층장과 용장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외에 솜장, 버선장, 의걸이장, 머릿장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장과 단은 안방의 주된 가구로 장은 각 층이 분리되지는 않으나 앞면이 1, 2, 3층으로 구획된 것이며, 많은 힘을 유지하기 위해 굵은 기둥과 두꺼운 판재로 양측 널을 구성하고 있다. 반면에 단은 각 층이 분리되어 기둥보다는 얇은 판재로 짜여져 있다. 원래 단은 뚜껑이 있는 고리짝을 쌓아 놓을 때 아래층의 것이 사용에 불편하므로 각 층의 앞쪽에 여닫이문을 달아 발전시킨 형태이다.

장을 용도에 따라 분류하면 머리맡에 놓고 귀중품이나 일상 용품을 간편하게 보관, 사용하게 만든 자그마한 머릿장, 의복을 포개어 보관하는 일반 버선이나 간단한 의류를 넣는 버선장, 솜장, 이불장, 옷을 구기지 않도록 햇대에 걸쳐 보관하는 의걸이장, 2·3층은 일반 버선이나 간단한 의류 같으나 1층이 둘로 나뉘고 이 나란한 두 개의 문이 원앙새 같다 하여 이름지어진 원앙삼층장, 장의 상부에 설치한 것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장 중에는 특별히 화초장이라 하여 출가하는 딸을 위해 제작하여 집안의 가풍을 유지시키고 개인의 취향까지 고려한 것도 있다.

재질에 따라 분류하면 느티나무, 먹감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등 아름다운 목리를 이용하여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것, 그리고 은행나무, 가래나무, 피나무에 화조문, 십장생문을 조각한 것, 대나무를 삿자리형식으로 엮거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모자이크한 죽, 비단헝겊을 바른 비단, 나무 표면에 종이를 바른 후 고운 색으로 산수, 화조, 문자를 그리거나 헝겁에 수를 놓아 판재에 끼워 붙인 영롱하고 화사한 자개를 시문하고 옻칠을 한 자개장, 투명 유리판에 화조를 그려 넣은 화초장, 십장생문을 조각한 것, 대나무를 삿자리형식으로 엮거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모자이크한 죽장, 비단헝겊을 바른 비단장, 나무 표면에 종이를 바른 후 고운 색으로 산수, 화조를 그리거나 오려 붙인 장, 헝겊에 수를 놓아 판재에 끼워 붙인 수장, 영롱하고 화사한 자개를 시문하고 옻칠을 한 장, 적, 황, 녹, 백, 흑 등의 짙은 석분으로 그림을 그린 화각장, 투명 유리판에 화조를 그려 넣은 화초장 등이 있다. 안방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가구를 놓아 여성의 취향을 살리고 외부 세계를 느껴 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들 가구에 주로 사용된 문은 자연경관, 화조, 삼강오륜도, 십장생, 길문, 부귀다남, 자손번창, 다산, 장수 등을 기원하는 내용들이다.

안방의 가구를 살펴보면 아랫목의 다락 미닫이문이나 병풍에는 색이 밝은 화조도를 그리거나 수놓아 화사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머리맡에는 낮고 자그마한 머릿장을 놓아 열쇠, 문서, 귀중품들을 안전하고 손쉽게 보관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옆의 마당으로 통하는 미닫이문 아래나 측면 면에는 낮고 긴 문갑을 배치하여 벽면에 시원한 여백을 구성하고 있다.

아랫목을 중심으로 반짇고리, 화로화, 몸단장을 위한 좌경, 빗접, 걸이경 등이 놓이거나 결렸다. 좌경과 빗접은 앉은 자세에 알맞도록 설계되었는데 지나친 몸단장을 삼가며 또 외형적으로 나타남을 꺼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접어 둘 수 있게 하였다. 걸이경은 기둥에 걸고 놓고 전신을 비추는 거울로써 조선조 후기부터 사용되었다. 그 밖의 안방 가구로는 불을 밝히는 등가, 촛대, 좌등 등이 있다.


주방가구
한국의 주방은 온돌양식으로 인해 부엌 바닥이 지표보다 낮고,식당이 부엌과 연결되지 않아 음식상을 마당과 대청을 거쳐 실내로 운반해야 했으므로 이에 따른 인간공학적인 설계와 적절한 재질이 요구되었다. 주방가구로는 소반, 찬장, 뒤주 등과 기타 소품이 있는데, 소반은 남녀유별. 장유유서 등의 풍습에 따라 독상이 주로 사용되었고 그릇들이 무거운 사기나 놋 으로 되어 있기에 소반은 가벼운 재질이 필수적이었고 들기에도 편하도록 작은 크기가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넓은 판재를 구할 수 있고 얇아도 터지거나 휘지 않는 피나무, 호두나무, 가래나무, 은행나무 등이 이용되었다. 이 중 은행나무는 음식 냄새에도 좀이나 벌레가 쏠지 않으며, 탄력이 있어 깊은 흠이 생기지 않아 좋은 재질로 취급되어졌다.

찬장은 식기류를 얹어 놓는 주방가구이다. 그릇의 대부분이 많은 양을 쌓아 두고 사용하므로 그 힘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굵은 기둥과 두꺼운 판재, 그리고 이 점을 고려한 짜임과 이음새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굵고 투박한 재료가 반대로 시각적으로 시원함과 신뢰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골재로만 연결되는 것은 너무 단조로운 감을 줄 수 있어 다른 종류의 가구보다 신중한 설계화 제작이 요구되었는데 그 쾌적한 공간의 비례는 한국 목공술의 으뜸이었다.

재질로는 두꺼운 소나무 통판을 사용하거나, 얇은 판재의 경우 대청의 널처럼 판재를 끼워 넣은 은촉짜임 형식을 하고 있다. 또한 다리 부분의 족대 역시 바닥의 습기를 고려하여 높고 굵게 설계되었다. 찬장은 그릇을 넣거나 음식을 담아 보관하는 주방 가구이다. 찬장 또한 찬탁과 같이 그릇의 무게를 고려하여 튼튼한 짜임새가 요구되므로 굵은 소나무 골재에 목리가 좋은 느티나무, 참죽나무를 이용하였고 견고한 무쇠장식을 달았다. 찬장은 2, 3층이 대부분으로 전면이 같이 판재로 구성된 것과 천이나 종이로 발려져 통풍을 고려한 것이 있으며, 크기 또한 7자가 넘는 것에서 3자가 되지 않는 소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형 찬장은 부엌이나 대청에 놓여져 음식이나 곡물, 잡다한 그릇 등을 손쉽게 보관하는 역할을 했다. 반면 소형은 인간공학적인 면을 고려하여 부뚜막 위나 찬마루에 놓여졌다.

이밖에 쌀이나 곡물을 보관하는 뒤주가 있다. 뒤주는 곡물이 습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통풍이 잘 되고 쥐와 해충으로부터 보호되며 충분한 힘을 받을 수 있도록 굵은 소나무 골재에 두꺼운 느티나무나 소나무 판재로 높게 구성되어 있다.

뒤주에는 많은 양을 넣을 수 있는 대형에서부터 팥, 깨를 넣는 소형에 이르기까지 각종 형태가 있다. 또한 대형 뒤주 중에는 2층으로 분할하여 아래층은 그 여닫이문 안에 잡곡을 자루에 넣어 두거나 그릇이나 기타 소품들을 보관하는 동시에 위층의 곡물을 해충으로부터 더욱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한 이층뒤주도 있다.



칠과 금속장식
가구 표면의 칠은 생칠, 주칠, 흑칠, 그리고 일반 기름칠이 있다. 이는 가구의 표면에 흠이 생기거나 때가 묻는 것을 막고 방수가 되게 하여 수명을 연장시키고 동시에 화사한 빛을 발해 미장효과를 가져오기 위함이다.

색은 황토분, 석간, 치자 등을 물에 묽게 타서 바르는데, 이때 좀더 진한 색을 얻기 위해 먹물이나 고운 검은흙을 섞어 바르기도 했다. 이를 마르기 전에 걸레로 원하는 색만큼 닦아내고 그 위에 잣, 호두, 콩, 오동 등의 식물성 기름을 바른 후 곱게 헝겊으로 문질러 자연 그대로의 질감을 살리는데, 식물성 기름은 나무의 표면에 엷은 막을 형성하여 트는 것을 막아 기물을 보호하고 은은한 광택으로 아름다움을 더해주어 널리 애용되었다.

소반과 고급 가구에는 생칠을 하였으며, 궁중용과 내간용 가구에는 주칠 또는 흑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투명한 칠은 일반 가구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한국 목가구는 자연 목리를 살리는 데 주력하였다.

금속장식으로는 무쇠, 주석, 백동 장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무쇠장식은 힘을 많이 받는 반닫이 등에서 크고 두껍게 사용되었고, 검소한 질감으로 인해 사랑방의 가구에 널리 이용되었다.

주석장식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구리, 주석, 백동을 합금하여 만든다. 이는 배합 비율에 따라 성질과 색깔이 달라지게 되는데 비교적 연질이어서 자유로이 오려낼 수 있다. 색감이 밝고 화사하여 여성용 가구에 애용되었으며, 단순한 형태로 제작하여 사랑방 가구에도 이용하였다.

백동장식은 20세기 초부터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희고 깨끗하여 단정한 멋을 내는 장식이다. 나무질보다 금속장식에 치우치던 20세기 초의 가구와 함께 성행되던 것으로 다양한 형태가 발달되었다

이러한 금속장식들은 문을 여닫는 경첩, 들어 옮기거나 당기는 들쇠, 짜임새와 이음새를 견고히 해 주는 거멀장식, 모서리를 튼튼하게 하는 귀장식, 자물쇠 앞바탕, 고리 등의 형태로 널리 사용되어졌다.

금속장식은 대체로 초기에는 필수적이고 기능적인 역할을 강조하여 단순하고 검소하게 제작되었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점차 복잡해지고 도식적으로 흐르고 있다.

자료제공 : 한국 고가구 박물관



한국의 전통가구 시장을 살펴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과거의 전통과 기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기법이나 재료, 문양, 패턴 등을 전통을 바탕으로 시대적 요구에 맞게 디자인한 부류이다.

현재는 이 두 가지 양식이 공존하고 있는데 소비자들의 취향은 대체로 재료나 형태를 현실에 맞게 적용한 후자의 경우를 선호한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전통가구 디자이너 이진욱 씨는 “소비자들이 변화된 전통가구를 많이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 외형적인 디자인의 세련미와 함께 가격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라고 강조한다.

물론 소비자들이 원하는 경향은 새로운 스타일과 구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이어가는 쪽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거나 변화를 모르는 부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바람직한 것은 두 방향에서 균형 있게 발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전통가구업계 종사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고전가구 공동전시판매(주)는 전통을 철저히 계승하는 것은 아니지만 디자인면에서 최대한 전통 그대로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업체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20여년 전부터 친목회를 만들어 운영해 오던 57개 전통가구 생산 공장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전통의 미를 살리면서 실용성이 조화된 전통가구 브랜드 ‘맥(脈)’을 개발하여 활발한 판매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동안의 전통가구 생산공장은 유통업자들에게 이끌리면서도 이에 따른 유통마진으로 판매가 부진했던 실정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 회사는 공동전시장을 마련하여 유통마진의 부담을 줄여 가격 경쟁력 면에서 상당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57개 업체의 공동판매라는 장점을 이용하여 600여점에 달하는 아이템을 구비하고 있다. 각기 업체에서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품목들을 달리하고 있어 제품력에서도 뛰어나나고 송태현 대표는 밝혔다.

우리 전통가구는 재료나 기법 등이 섬세하여 우수한 구조와 장식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고유의 의식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전해 왔다. 이처럼 우수한 한국의 전통가구를 실제 사용함에 있어서는 현대에 이르러 변화된 생활과는 많은 기능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좌식생활과 사랑방 가구, 안방가구를 구분하던 내외사상으로 각기 독특한 구조와 기능성을 보였었다.

이를 그대로 현대생활에 옮겨놓을 경우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능성만을 가지고 비교해볼 경우 다기능과 많은 수납공간을 제공하는 현대가구에 비해서는 많은 부분이 부족하다. 또한 디자인의 경우에도 외형의 다양함과 화려한 색상, 다양한 질감 등을 가진 가구에 비해 일률적인 색채와 장식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현대감각이 떨어진다.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전통가구가 현대가구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며 단순한 기능과 형태의 전통가구는 요즘에 이르러 가구의 기능성보다는 장식적인 효과만을 제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업계 내에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한국의 미를 살려내면서 현대적인 생활환경에 적응하는 업체들이 적지 않다. 사임당가구, 사대부가구, 선화당가구 등의 업체는 이미 브랜드 이미지를 확고히 한 상태로 국내적으로는 한식가구 수요계층으로부터 폭넓은 시장을 확보하고 있으며 세계시장 진출에도 적극적이다.

업체들 중 좌장 격인 사임당가구는 전통의 얼이 담긴 한식가구를 안방의 좌식생활과 거실, 주방 등의 입식생활에 적합하도록 개발하여 국내·외에서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사임당가구의 가장 큰 특징은 예부터 전해오는 아이템의 특징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재창조하는 과정에 있다. 이 바탕에는 현대가구에서 말하는 디자이너 즉, 장인들의 힘이 매우 크다고 한다. 한편 사임당가구는 지난 6월 1일부터 10월말까지 독일 하노버의 세계 엑스포에 초대되어 한국 전통가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온 바 있다. 이 전시회를 통하여 보다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 전통가구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신선한 초목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선화당가구는 100여개의 다양한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는 점을 경쟁력으로 삼고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시장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는 이 회사는 자체 브랜드에 의한 판매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20년 이상 공예가구를 제작해온 장인출신의 제작진을 갖춰 탄탄한 기술력이 돋보인다. 또한 전국 대리점과 판매점들을 통해 소비자들의 기호와 요구를 직접 수용하여 보다 실용적이면서도 전통의 미를 살린 선화당가구만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35년 동안 전통 목상감 가구만을 고집하며 장인정신을 발휘해온 사대부가구는 정교한 상감 기법과 짜맞춤 공법으로 품격이 높은 가구만을 생산하는 업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전통의 미를 재현한 제품에서 거실장, 장식장 등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제품까지 다양한 아이템을 구비하면서도 제품 하나 하나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수공예로 제작되어 고급화 되어있으면서도 실제생활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한 것도 특징이다.

한편 모던가구의 자리에서 전통적인 감성을 접목시킨 까사미아와 같은 업체도 주목할 만하다. 82년 원목 소품가구와 가정용 액세서리 등의 생산을 시작으로 첫 발을 디딘 까사미아는 그 동안 미국, 유럽 등의 스타일을 차별화 시켜 한국에 소개함으로써 좋은 반응을 얻었다.

80-90년대 무분별한 카피가 이루어지던 시절 국내의 가구시장은 디자인의 정체성을 잃기 시작했다.

우리 문화와 디자인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시작된 연구로 97년부터 ‘살림(salim)’에 대한 연구·개발을 시작하였고 시행착오를 거쳐 현재 각광받고 있는 살림제품들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살림’의 목표는 한국적인 미의식과 전통적 가치세계로부터 느껴지는 모티브로 전통 디자인을 표방하여 기능적인 주거문화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마루, 가람, 하늘, 참 시리즈 등 전통적인 감성이 물씬 배어있는 실용적인 제품들로 독특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통성에 원형을 두고 현대적인 느낌을 더하고자 한 연구의 본래 의도와는 조금 달리 결과물에 있어서는 형태적인 근거에 기초를 둔 디자인의 연구가 한국적 감성연구에 앞서게 되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한 한국의 미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과 연구는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국내 가구시장이 유럽풍 모던가구 일색이며 이제 한국 가구업계는 디자인의 한계에 이르렀다고 많은 사람들은 지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의 미를 사랑하고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계승 발전시키려는 많은 이들이 있다.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러한 사람들과 업체들이 많다는 것은 우선 바람직한 일이다. 일체의 변형도 가하지 않은 순수한 전통의 계승도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며 현실과 시대에 맞는 적절한 변화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이 현대에 이르러 빛을 보고 확고한 위상을 정립하게 위해서 해결 되어야할 많은 문제들이 있다. 첫 번째로 지적되는 것은 디자이너의 절대적인 부족이다. 현실적으로 국내에는 디자인을 교육하는 많은 학교와 기관들이 있지만 전문화된 전통가구 디자이너를 육성하는 곳이 매우 부족한 상태이다. 물론 전통가구에 대하여 공부한 디자이너들이 있지만 이들은 공예가구 분야에만 종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전가구 업체에서는 오래 전부터 기술을 전수 받아온 몇몇 장인들만이 외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 더욱 아쉬운 것은 이들의 기술조차도 제대로 전수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몇몇 브랜드화 된 업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통가구를 표방하는 대부분이 영세화를 면치 못하고 있다. 열악한 국내 가구시장의 유통구조에서 이 업체들이 살아남기는 매우 힘든 것이다. 자체적으로는 소규모의 여러 업체들이 연합하여 다양한 판매 활로를 개척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될 수 있으며, 자신들만의 특화된 기술력과 제품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자본력과 판매망을 점유하고 있는 대형 기업들의 투자와 관심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외형적인 면에서는 전통가구의 근본적인 정신과 이미지를 잃지 않는 전제 하에 디자인과 컬러의 다양화, 현대 생활방식과 감각에 맞는 독특한 아이템의 개발이 발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고유의 문화와 생활방식의 보전과 계승은 이미 상업화된 가구산업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 업계 종사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가구업계 내에서 풀어야 할 숙제는 현대화된 생활구조에 적응하고 소비자들의 기호를 파악하는 것이다. 아울러 변질되어진 대다수 소비자들의 취향에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업체의 관계자들은 가구업계에도 경제의 상승, 하강과 같은 흐름이 있다고 설명한다. 시기에 따라서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발전·퇴보하는 제품군들이 커다란 궤적을 가지고 돌아간다는 것이 이들의 견해이다. 물론 얼마 전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체리컬러 계열의 제품들처럼 고전가구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복고의 바람이 어느 정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전통가구를 표방하는 여러 업체들이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조금씩 변화, 발전해 간다면 세계 가구시장에서 한국의 우수한 문화를 표현한 제품들이 확고한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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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가구의 이해



김삼대자

(전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1. 용어의 정의

2. 가구양식의 형성배경

3. 가구의 재료와 짜임새

4. 가구의 변천과정

5. 사랑과 안방가구

6. 부엌과 사당용

7. 전통가구 양식의 변화



1. 용어의 정의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가구란 ????① 집안 살림살이에 쓰이는 기구·집물 ② 목물을 주로 해서 만든 세간·책상·의자·찬장이라고 정의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기구·기물 등의 살림살이가 가구이다.

가구라는 용어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현재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기구(器具)·기용(器用)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숙종 16년(1690)에 편찬된 《역어류해(譯語類解)》나 영조 51년(1775)에 편찬된 《역어류해보(譯語類解補)》에는 탁자·궤·경대·보자기·주전자 등 일상 생활용품 모두를 기구(器具) 또는 기구보(器具補) 항에 포함시키고 있다. 영조 28년(1752) 왕실의 각종 의례 행사에 관한 절차와 물품 및 비용 등을 기록한 《상방정례(尙方定例)》에 공정책(空頂幘)·원류관(遠遊冠)·독옥대(禿玉帶) 등의 복식류 명칭 밑에 ‘家具’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때의 가구(家具)는 목물을 사용하여 만든 세간이라는 뜻이 아닌 ‘집에 구비함’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헌종 년간(1835∼1849)에 간행된 《재물보(財物譜)》에는 상·의자 등속을 기용(器用)항에서 다루었다. 1897년 게일(James S. Gale)의 《한영자전(韓英字典)》에 가구는 Household furniture 라고 영역되어 있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가구라는 단어와 동일한 뜻임을 확인 할 수 있다. 1920년에 간행된 《조선어 사전》에 가구는 ‘가용(家用)의 기구(器具)’ 라고 하였다. 따라서 19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가구라는 현대적 의미의 용어가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가구는 혼수품으로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부유한 가정에서는 딸의 혼수로 장·농·반다지·경대 등을 해 주며, 또 아들의 결혼 때에도 장과 농 등을 준비하여 며느리를 맞이한다. 그러나 서민들은 딸의 혼수로 반다지 또는 버들고리(농)를 해 가는 것이 고작이었고, 며느리를 맞이할 때도 가구를 마련하지 않았다.

한국 전통 가구는 안방용으로 장(欌)·농(籠)·반다지·함(函)·반지그릇 등이 있으며, 사랑방용으로는 서안(書案)·경상(經床)·문갑(文匣)·사방탁자(四方卓子)·책장·연상(硯箱)·궤(櫃)·함(函)·각게수리·평상(平床)·의자 등이 있다. 이렇게 안방용과 사랑방용으로 구분은 하였으나 상류 계층의 안방에는 서안·문갑·사방 탁자·각게수리 등을 구비하기도 했다. 부엌용은 소반·뒤주·찬장(饌欌)·찬탁(饌卓)이 있으며, 사당용은 제상(祭床)·교의(交椅)·향상(香床)·진설탁자· 궤(櫃)가 있다.

 

 

2. 가구양식의 형성배경

한국 가구의 형성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사계절이 뚜렷한 자연 환경과 그러한 자연 환경에서 자란 풍부한 목재, 기후와 풍수지리 사상이 곁들여져 형성된 낮은 집,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 고안된 온돌방 구조, 신분제도에 따른 가옥의 크기와 규모에 대한 규제 및 남녀유별에 의한 여성의 공간인 안채(안방)와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사랑방)의 구분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다. 또 평면 재단으로 만들어진 한복은 구태여 옷걸이에 걸어 둘 필요가 없이 접어서 차곡차곡 개켜 두어도 무방하였으므로, 현대의 양복을 넣는 옷장처럼 높이가 높고 폭이 넓은 가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국의 가구들은 좁고 낮은 방문을 쉽게 통과할 수 있고 이동하기에 쉽도록 너비와 폭이 좁고 높이가 낮은 가구 양식이 형성되었다. 가장 높이가 높은 3~4층 장·사방탁자·책장·찬장등 장의 경우 한국인의 평균 신장 165㎝를 전후하며 단층장의 경우 좌고인 76㎝를 넘지 않고 문갑은 35㎝ 내외이다. 옛 가구들 중에 이례적으로 큰 것들은 일반인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절, 향교, 궁중에서 사용한 것들이다.


 

3. 가구의 재료와 짜임새

과거 우리 나라 산야에 자생하였던 나무는 1,000여 종이 넘었다. 우리 선조들은 이와 같은 풍부한 산림 자원을 이용해 일찍부터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로 집을 짓고 여러 가지 생활 용품들을 만들어 쓰는 목재 가공술이 발달하였다. 목재 가구는 불에 쉽게 타는 등 내구성(耐久性)이 약해 오래된 가구의 예가 거의 없고 현존하는 가구의 대부분은 18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가구 재료는 소나무가 가장 많으며 오동나무, 배나무, 감나무, 느티나무(槻木, 櫷木), 회화나무(槐木), 물푸레나무(梣木), 산벚나무, 참죽나무, 들뫼나무, 느릅나무 등이 쓰였다. 신라 흥덕왕 9년(834년)에 제정된 법령을 기록한 《삼국사기》잡지(雜誌)의 거마(車馬)조에 따르면, 진골은 안장 길마에 자단과 침향을 금하였다. 그리고 4두품까지는 안장 길마에 자단·침향·회양목·괴목(槐木, 회화나무)·산뽕나무 등을 쓰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또 가옥조에 보면 진골은 평상에 대모와 침향으로 장식하지 못하고 6두품은 평상에 대모·자단·침향·회양목으로 꾸미지 못하며, 5두품과 4두품은 느릅나무 재목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신라 때 나무의 특징에 따라 가구 재료의 우열이 정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벌목한 생나무는 껍질을 벗겨 내고 물·개흙·바닷물 또는 땅을 파고 풀잎과 함께 묻어 여러 달 동안 결을 삭힌 후 통판으로 켜서 판재와 판재 사이는 각목으로 괴어 통풍이 잘 되도록 2∼3년간 그늘에 재어 자연건조 시킨 후 사용하였으며, 우수한 장인은 이렇게 건조시킨 나무를 온돌방에 1년 이상 두어 온돌방의 환경에 적응시킨 다음 가구를 제작하였다.

각 부재의 선택은 목재의 특성을 살펴 힘을 받아야 되는 기둥은 곧고 단단한 나무의 곧은 결〔柾目〕을, 판재는 무늬가 뚜렷한 나무를 널결〔板目〕로 제재하여 마련하였고, 화장재는 나무의 혹, 나무가 선회(旋回)·교착(交錯)되어 기묘한 무늬를 이룬 뿌리 부분(根材), 풍상에 시달려 마디지게 자란 낙엽 활엽수의 지상 1m 이내의 목재, 먹감나무의 자연스런 검은 무늬, 오동나무의 두드러진 나무결을 이용하는 등 목재의 특성을 살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사용하였다. 비록 장기간 건조하였어도 큰 판재는 휘거나 트는 율이 많았다. 특히 우리 나라의 가구는 대부분 온돌방을 중심으로 사용되어 계절에 따른 온·습도에 의한 목재의 수축·팽창에 따라 뒤틀리거나 터짐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나무로 머름간·쥐벽간·서랍 등을 만들고 사개짜임·연귀짜임·맞짜임의 기법으로 짜 맞추어 면 분할하였다. 또 쇠못은 거의 쓰지 않았으나 꼭 필요한 경우 대못(竹釘)을 사용하였다.

머름간·쥐벽간 등 적절한 비율의 면은 쇠목과 동자주에 의해 반복 또는 대칭시켜 구성하여 안정감과 통일의 질서를 보인다. 또 알갱이로 사용한 문목(紋木; 나무결)이 나타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 여기에 간략한 금구장식이 어우러져 소박한 느낌이 든다. 물론 나전칠기 제품이나 화각(畵角)으로 만든 가구도 있지만 그러한 것은 귀족과 부유한 일부 계층에서 사용하였다. 특히 옛 가구들은 결이 좋은 나무를 얇게 켜서 화장재로 사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눈속임으로 무늬목을 대는 경우는 없었다. 이렇게 만든 가구에 생칠이나 황칠, 또는 들기름·아주까리기름 등을 먹여 나뭇결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터지거나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러한 가구들은 사용할수록 길이 들며 나무의 부드러움으로 친밀감이 든다.

가구에 기능적인 필요와 구조 보강을 위해 부착하는 금속 장식은 경첩·자물쇠·고리 등 반드시 필요한 장식들은 가구의 형태와 용도에 맞추어 사용하였다. 사랑방용은 기능 위주의 간결한 형태로, 안방용은 여성의 취향에 맞춰 아름답고 염원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식을 하였다.


 

4. 가구의 변천과정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면서 사용한 저장 용구는 토기이다. 주로 곡식을 저장하였고 작은 연장이나 섬유류 등도 저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한 추정은 최근까지도 독(항아리)에 책·의류 등을 넣어 두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88년에 발굴 조사된 경남 의창군(현 창원) 다호리 유적(기원 전 1세기∼2세기)에서 통나무 목관과 죽협(竹篋: 대나무로 엮어 짠 상자)이 발굴되었다. 이 시기에 출토된 목관 중에 판재(板材)로 된 것도 있어 지배 계층에서는 나무로 된 궤(櫃)가 의류나 귀중품을 담는 용도로써 사용되었다고 보여진다. 또 다호리의 죽협이나 평남 대동군 남정리 낙랑 유적지(1∼3세기)에서 출토된 채화칠협(彩畵漆篋) 등의 예로 보아 대나 버들·싸리 등의 재료로 엮어 짠 상자류가 널리 보급되었다고 보인다. 《예기》 내칙에 “남녀는 옷걸이를 함께 쓰지 않는데, 그러므로 여자는 감히 남편의 휘이에 걸지 않으며 감히 남편의 협사에 간수하지 않는다. (男女不同 椸架 不敢縣於夫之楎椸 不敢藏於夫之篋笥)”라는 기록이 있어 협사(대나무상자)는 그 사용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게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탈해왕(脫解王)의 탄생 설화에 나오는 길이 20척·넓이 13척의 궤(櫃), 김알지의 황금 궤, 사금갑(射琴匣)조의 거문고집, 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表訓大德)에서의 벚나무통(櫻筒) 등 궤와 통 등 가구 명칭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쌍영총·무용총·사신총·각저총 등의 고분 벽화에는 평상·의자·탁자 등의 그림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려 시대에 사용된 가구로는 함·상자·탁자·소반·의자·평상·농 등이 있다. 고려 시대는 불교를 국교로 하여 왕실과 승려가 사회의 상류층을 이루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나전칠기와 같은 화려한 공예가 꽃피었다.


고려 시대 가구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권3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의 침향함(沈香函)과 나전함(螺鈿函), 《고려도경(高麗圖經)》제 32권의 등비(藤篚: 등으로 만든 상자)·와탑(臥榻: 침대)·좌탑(坐榻: 의자)·연대(燕臺: 탁자)·단칠조(丹漆俎: 붉은 칠한 소반)·흑칠조(黑漆俎:검은 칠한 소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고려도경》의 나전연갑과 나전필갑 등이 있다. 《고려사》제 59권 및 60권의 <길례대사(吉禮大祀: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에 관한 예식)>와 제 65권 빈례(賓禮: 외국손님을 맞이하는 의식) 및 제66·67권 가례(嘉禮: 결혼 책봉 등의 경사스러운 의식)에는 향안(香案)·책함안(冊函案)·과안(果案)·화안(花案) 등 탁자류의 명칭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조함(詔函)·책함(冊函)·표함(表函:군주에게 올리는 서장)·과함(果函:과일을 담는 함)과 함께 사상(纚箱: 치포관을 담는 상자)·즐상(櫛箱: 빗을 담는 상자)·관상(冠箱: 머리에 쓸것을 담는 상자)등 함과 상자류가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 《고려사》귄 제 121 열전 제 36 주인원(朱印遠)에는 황마포 2롱(黃麻布 二籠)이라는기록도 있다. 또 《고려사》권 27 원종 13년(1272)0 3월 갑진일에 설치한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의 존재는 고려때 나전칠기의 성행을 말해 준다. 이 전함조성도감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함(經函)들이 일본을 위시하여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에 있다.

조선 시대에는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으로 유교가 생활 곳곳에 영향을 주었다. 의례를 중시하였으며 남녀의 처소를 엄격히 구분하여 여성용(안방) 가구와 남성용(사랑방) 가구를 구분하였고, 그밖에 제례용 가구를 위시하여 부엌용·고방(庫房)용 등 가구의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문화를 계승하여 가구도 고려 시대의 경우처럼 함, 상자, 탁자, 의자 등이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대(竹) 또는 나무로 만든 농(籠)이 여행용 또는 이동용 가방처럼 쓰였다는 사실을 성종 21년 3월 4일 병진, 명종 2년 3월 9일 경신, 중종 37년 1월 2일 계미, 영조 31년 2월 20일 갑자 등 여러 곳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또 세종 및 문종·중종실록 등에 협사(篋笥)에 책, 의복, 부채 등을 보관하다는 기록이 있어 대로 엮은 협사와 농의 다양한 용도를 짐작하게 한다.

우리 나라의 생활 양식을 일컬어 ????온돌방의 평좌생활????양식이라 하며 의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 4월 3일 병신에 예조에서 성균관의 당상관과 낭관의 앉는 차례에 관해, 통정대부는 의자에, 대사성으로부터 주부에 이르기까지는 승상(繩床)에 앉도록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세종 14년 4월 22일 경술에는 대신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는 제도에 관해 과거로부터 궤 대신 의자가 사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5. 사랑과 안방가구

조선 중기에는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고, 기거용으로 널리 쓰이던 평상은 점차 상류층 전유물이 되었다. 중기 이후부터 중국으로부터 불어온 문방(文房)취미에 관한 풍조는 선비·사대부 계층에서 유행하여 사랑방을 문방으로 꾸미어 남성 내객을 맞이하는 접객 장소이자 학문을 토론하며 예술을 논하는 공간이 되었다. 따라서 문방에는 의류나 침구류를 보관하는 옷장류는 비치하지 않았으며, 학문과 예술을 위한 치장을 하여 사방 탁자와 같은 문방 가구가 고안되었다. 문방에는 서안·경상·문갑·책장·사방 탁자·연상·크고 작은 궤·함과, 상투를 트는데 필요한 작은 경대 등을 두어 외모를 단정히 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서실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사랑방 옆에 딸린 침방에는 병풍과 작은 서안·의걸이장을 두었다.

한편 여성의 거처인 안방은 가족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주부의 공간으로 자리 잡아 의복과 침구를 보관하는 각종 장과 농·반다지와 같은 궤, 귀중품을 넣어 두는 함, 기타 경대를 위시하여 바느질 도구 등을 비치하였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가구가 농과 장으로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장농 또는 농장으로 이 두가지를 통칭하여 부르고 있다.

농은 고려시대로 부터 사용되어 온 명칭으로 조선시대 후기에도 여행 또는 이동용으로 쓰였지만, 형태가 개량되어 안방 세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양 측널에 딸린 들쇠가 그대로 달려 있어 이동에 사용하였던 흔적을 남겨 주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쓰여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농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 내용은 “ 농은 원래 죽기를 의미하는 것인데 목조·고리버들을 써서 사용하는 것도 역시 농이라 이름하니 이는 이름을 빌려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조는 옷칠을 하고 또 황동으로 장식을 한다. 고리버들로 만든 것은 안과 밖을 도배하고 황칠을 하고 철로 장식을 하는데 모두 여닫을 수 있고 자물쇠를 사용한다. 포백(布帛)·의금(衣衾) 등을 간수하는 데 사용한다. … 중국에서 무역해 들여오는 피농(皮籠)은 주칠을 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생긴 형태와 제법이 우리 나라의 목롱(木籠)과 같으나 습기를 막는데 약간 더 효과적이다. 농의 뚜껑이 위에 있고 둘 또는 셋이 시렁 위에 겹쳐 있으면 여닫는데 불편하다. 만주인이 근래에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전면에 두짝으로 된 작은 문을 해달아 여닫는데 불편이 없게 하였다.” 고하여 현존하는 목조 농의 상한연대가 조선 후기임을 시사하고 있다.

장이란 단어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우리 말이며 한자로 표기되는 欌도 역시 우리나라식 한자이다. 장(欌)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조선왕조실록》 성종 18년(1487년) 12월 22일(정해)조의 ????내부에서 만들어 사자암에 보관한 은장(銀欌)을 도난당했다????는 기사이며 나무로 만든 장에 관한 기록은 실록 《광해군(光海君 卷 一百五十三)》의 광해군 12년(1620년) 6월 13일 기해일에 영건도감에서 재목부족을 고하는 “경덕궁(慶德宮) 공사가 끝났으나 더 건축할 곳이 생겼고 장(欌)·궤(櫃)·제상(祭床)·향탁(香卓) 등의 집기에 응당 들어갈 수효도 또한 2백 3백 개에 이릅니다.”라는 기록이다.

그 다음의 기록은 1682년에 편찬한 《역어류해(譯語類解)》의 “ 竪櫃 -장” 이다. 한자어 수궤 즉 중국에서의 수궤를 우리나라에서 장이라고 함은 《역어류해》 외에도 1830년대에 편찬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있다. 중국의 경우 높은 궤를 북쪽지방에서는 수궤라하며 남쪽지방에서는 주(廚)라 한다. 북쪽의 중국문화를 많이 접촉한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북방에서처럼 수궤라 하며 해로를 통하여 중국 남방과 교역을 한 일본에서는 장을 주자(廚子)라 하며 문화의 전파경로를 짐작케 한다. 위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장은 궤가 발전하여 생긴 형태임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도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수궤는 명나라때인 16~17세기에 비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에서도 2~3 층으로 된 장은 임진왜란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보여진다. 반상의 신분계급과 빈부의 차이가 심하였던 조선시대에 장은 양반과 부유층 전유물이었으며 따라서 매우 귀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의 우리 나라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옥규제로 인해 집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집안에서 사용하는 장의 크기도 대체로 그 규모가 작았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경제적인 부흥으로 가옥의 크기가 커지면서 가옥의 크기에 맞추어 가구도 크기도 커졌다. 수요가 많아지면서 수요에 맞춰 많은 기성품 장이 양산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의 장은 그 전의 가구에 비해 쇠목 동자주 등 기둥이 굵어지고 알갱이에 사용한 화장재는 얇아졌다.

장과 농 등의 가구는 서울과 개성을 중심한 지역에서 발달하였고 서북 및 동북지방에는 장 농이 없으며 궤류를 사용하였다. 궤는 장이나 농에 앞선 가구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가구 양식이다.


1) 궤·반다지

나무로 된 장방형의 큰 상자로서 천판을 절개하여 문판으로 삼은 것을 궤라 부르며 앞면의 반을 절개하여 문판을 삼은 것은 반다지라 한다.

궤와 반다지는 피륙, 의복, 건어물, 그릇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을 수장하였던 가구로서 수요가 많아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궤, 반다지류가 생산되었다.


2) 장

의류를 보관하는 가구로서 안방[內室]가구를 대표한다. 단층장(머릿장)·이층장·삼층장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드물게는 사층·오층으로된 장도 있다. 크기에 따라 버선을 보관하는 소형장은 아기장이라고도 부른다 형태에 따라 원앙(鴛鴦)장, 나비장 등의 명칭으로도 부르며 산지명(産地名)에 의해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천판이 옆으로 돌출된 장이 비교적 연대가 높다.


3) 농

장과 더불어 내실용 가구를 대표하며 2층으로 되어 있다. 이층장과는 외견상 형태가 같지만 장은 상하가 분리되지 않으며 농은 분리되므로 구별된다.

농은 대부분 재료에 의해 먹감나무농·자개농 등으로 부르며 특별히 형태의 특징에 의해 위에 놓인 농의 천판이 옆으로 돌출된 것을 개판농이라 부르는데 이 개판 농의 연대는 조선 말기이다.


4)함

함은 뚜껑에 경첩을 달아 여닫도록 만든 상자이다. 주로 귀중품을 보관하였으므로 자물쇠로 잠그도록 되어 있다. 뚜껑에 부착된 긴 뻗침대(落目또는 길채라고 함)가 뚜껑을 열었을 때 지면에 닿아 뚜껑을 받칠 수 있도록 낙목이 몸체의 높이와 같은 것이 잘 만들어진 것이다.


5) 평상(平牀)

평상은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그 양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평상은 높은 다리에 바닥은 판재이며 3면은 난간으로 된 단평상(單平牀)을 주로 사용한다. 우리 나라의 평상은 낮은 다리, 낮은 난간에 바닥은 목제의 띠살 또는 대쪽을 대었으며 두개를 맞붙여 사용하도록 된 짝평상이 특징이다. 여름에는 띠살 사이로 통풍이 되어 시원하며 겨울이면 온돌의 온기가 띠살사이로 올라와 따뜻하다. 평상 위에 여름에는 등자리를, 겨울에는 보료나 담요를 깔았다. 이 평상은 두쪽으로 나뉘어져 이동하기에 편하며 겨울에는 방에, 여름에는 누마루에 두었으며, 때에 따라 밖에서도 사용하였다.


6) 서안(書案) 과 경상(經床)

서안과 평상은 앉아서 사용하는 낮은 책상으로 서안은 상판이 반듯한 것이며 경상은 상판의 양끝이 위로 들렸으며 다리는 곡선에 조각장식을 한 형태이다. 경상은 불교의 도입과 함께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으로 보이며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전을 올려놓고 독경을 할 때 사용되던 것으로 후에 민간에서도 사용되었다.


7) 문갑(文匣)

각종 문방용품과 문서 등을 총괄하여 보관하기 위한 가구이다. 문갑은 평좌생활에 알맞은 책상높이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으며 벽면을 따라 길게 한쌍을 놓고 사용한다. 문방에 필요한 소품들을 넣기 위한 작은 서랍과 선반으로 이루어진 것과 서랍과 선반을 네짝의 두껍다지 문으로 감춘 형태도 있다. 천판 위에는 필통·연적·수석·난분 등을 늘어놓는 진열대의 구실도 한다. 궁중에서는 중국의 캉문갑 중 비교적 높은 형태의 문갑과 유사한 것을 쌍으로 사용했으나 일반 민가에서는 높이가 높은 것은 단문갑인 경우가 많다.


8) 사방탁자·장탁자

서책이나 완상품을 진설하도록 3~4층의 층널을 만들며 하단 또는 중앙에 장을 설치하기도 한 형태이다. 사방탁자는 1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서가에서 발전하여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의 한 학자는 사방탁자의 시렁 위에는 서권(書卷), 화축(畵軸), 화병(花甁), 취우(翠羽), 호(壺), 향로, 다완(茶椀)등 문방기구를 늘어놓는 문방의 총 책임자로서 서실의 사치스런 완상물이라 극찬하였다. 이와 같은 사방탁자의 양식은 중국의 장탁자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층널과 기둥으로만 이루어진 쾌적한 비례의 사방탁자는 한국에만 있는 일품이다.


9) 각게수리·약장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하여 여닫이 문안에 여러개의 설합이 설치된 일종의 금고이다. 각게수리 양식은 중국의 백안주(百眼廚)라는 가구에서 영향 받았고 명칭은 일본의 かけすずり 에서 온 것이다. 부유한 가정의 안방과 사랑방에서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해 쓰였으며 또한 약장으로도 사용되었다.

 

 

6. 부엌과 사당용

부엌 용품으로는 소반과 곡물을 담았던 뒤주, 그릇을 보관하던 찬장, 찬탁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장유유서·남녀유별 등 유교의 영향으로 같은 상에서 겸상을 하는 예가 극히 드물며 대부분 외상을 받았다. 독상이므로 소반의 크기가 작은 것이 특징이며 각 가정마다 여러 구의 소반을 비치하였다. 특히 벼슬을 하거나 학문이 뛰어난 사대부의 집에는 항상 식객이 끊이지를 않으므로 수십 구의 소반이 비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수요로 소반은 각 지역마다 제작되어 지방적 특색이 강하였다. 대표적인 소반은 나주반(羅州盤), 통영반(統營盤), 해주반(海州盤)이다. 나주반은 전으로 판의 아구를 물리는 방법으로 제작되어 소방의 반면이 휘거나 뒤틀리지 않아 4인 겸상 등의 큰상으로도 제작되었다. 통영반은 문목(文木)으로 만들어 황칠을 하거나 재개를 박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해주반은 판각에 조각을하여 만든 화려한 소반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한옥에 있어서 부엌은 반 지하층에 있어 부엌에서 안방 또는 사랑방 등으로 음식상을 안전하게 나르기 위해 소반에는 그릇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전이 있다.

뒤주는 쌀이나 잡곡을 담아두는 궤의 일종이다.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제작되었으나 밤섬 뒤주가 가장 유명하다.

찬장은 주로 식기를 담아 두는 장으로서 예전에 여름에는 자기를, 겨울에는 유기를 사용하였으므로 무거운 식기를 보관하기 위해 기둥과 쇠목은 두껍고 튼튼 하게 제작된 특징이 있다.

사당에는 제상과 교의(交椅), 향상(香床)을 위시하여 고인의 유품을 보관하기 위한 궤를 비치하였다. 사당이 없는 가정에서는 대청에 시렁을 매어 제구를 두었으며 대청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구 중 진설탁자는 제사음식을 잠시 얹어 두는 대로서 2~3층으로 되어 있으며 각층의 높이가 동일한 것이 특징이다. 제상과 교의는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입식생활을 하였음을 나타내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7. 전통가구 양식의 변화

개화기에는 서양 문물이 유입되어 점차 양복을 착용하면서 장과 장문의 크기가 큰 의걸이장이 유행하였다. 특히 화류를 얇게 켜서 화장재로 사용하고 자개로 무늬를 박고, 영국으로부터 수입한 거울을 부착한 의걸이장이 상류 계층에 유행하였다. 또 신흥 귀족층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수입한 화류 의자 �트가 사랑의 마루에 놓여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삼각 탁자도 이때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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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가구시장의 디자인 경향은 참으로 다양하다.
이미 세계시장의 주류가 되어버린 미니멀리즘, 이를 뒷받침하는 젠 스타일, 모방의 근원이 된 유럽풍 모던 스타일…….
현대적으로 변화된 우리의 생활양식과 주거환경은 이처럼 많은 서구적인 구조와 디자인의 제품들을 원하고 있고 이들이 우리의 방과 거실을 차지하고 있다. 국내 업계도 이러한 소비자들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유행한다는 스타일은 거의 도입하여 제품화하고 있다.

물론 한국이 산업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모든 주거환경이 서구 선진국의 그것을 따라가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어쨌든 현실은 서양의 스타일이 점령하고 있으며 우리의 멋과 전통은 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내 시장의 상황과는 달리 해외 시장은 오리엔탈리즘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실제 디자인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사조를 지배했던 합리주의는 현대에 와서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했다. 급속한 산업화와 대량생산, 대량 소비체제에 따른 획일성은 그들의 한계를 실감하게 한 것이다. 또한 디자인의 근본 가치가 상업주의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졌던 것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는 동양의 사조가 전 세계에 활발히 퍼져나가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전통가구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각별한 이해를 바탕으로 간결하고 절제된 선과 면이 만들어 내는 구조의 아름다움은 선조들의 미의식과 생활철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미는 기교에 넘치며 화려하고 복잡한 서구적인 것과는 달리 자연을 추구하며 깊은 내면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 중에서 목가구는 자연의 나뭇결을 그대로 이용하여 화려한 조각이나 장식을 대신함으로써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자연에 가깝고, 또 그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한민족이 갖고 있는, 자연을 사랑하고 소박하면서도 깊이있는 성격이 잘 반영되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더욱이 가구는 일상 생활에 있어 늘 가까이 대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목가구가 이러한 특성을 갖게 된 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민족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 못지 않게 자연환경과 주택구조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생활공간에 따른 특성, 오랫동안 한민족의 의식을 지배해 온 유교사상, 특히 남녀유별의 관념에 의하여 남성과 여성의 생활 공간이 각각 나뉘어져 있었고, 남성들은 주로 사랑에서, 여성들은 안방에서 생활의 대부분을 영위하였으므로 사랑방과 안방의 가구들이 그 용도와 취향에 따라 뚜렷한 개성을 갖게 되었다.
사랑방 가구 사랑방은 남성의 생활 공간으로, 깊은 사색에 잠기거나 글을 읽고 그림과 시를 즐기며 후학을 기르는 학문의 온상인 동시에 손님을 맞아 인생과 정치를 논하는 사교의 장소였다. 이러한 사랑방의 내부 공간은 화려하고 복잡한 것보다 소박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필연적이어서 이에 적합하도록 크지 않은 공간에 단순한 구조, 쾌적한 선을 지닌 목가구가 제작되었다. 더욱이 조선시대에는 유교로 말미암아 명나라로부터 문방생활에 대한 영향을 크게 받아 문갑, 향꽂이 등 문방용기가 급격히 발전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중국의 것이 입자생활로 인하여 높고 크며 또 권위와 기교로 이루어진데 반해, 조선시대에는 평좌생활에 따라 행동 반경이 좁고 낮으므로 자연히 단순하고 소박한 소품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사랑방 가구들을 살펴보면, 아랫목의 다닭문이나 병풍에는 자연경관이나 남성의 기백 또는 인생의 좌우명을 나타낸 산수화. 사군자. 시 등을 그려 넣어 그 방의 주된 분위기를 나타내었다. 실내의 중심인 아랫목에는 글을 읽거나 쓰는 용도 외에 내객과 마주 앉은 주인의 위치를 지켜 주는 그 측면에 문방사우인 벼루, 먹, 종이, 붓을 넣는 것이 놓여졌다. 또 그의 옆에는 낮고 넓은 4각의 목판형 재판이 있어 재떨이. 담뱃대 등을 한데 모아 정리하여 편리하게 하고 또 단정하게 보이도록 했다. 벽면에 붙여 배치하는 가구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지 않도록 세로폭을 얕게 설계, 제작하였다.
그 중 책을 얹어 놓는 것은 가느다란 골재와 층널로 구성되어 실내 공간에 부담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쾌적한 면 분할과 비례는 한국 목가구의 미를 대표하고 있다 하겠다. 대표적인 사랑방 가구로는 책을 넣어 두는 책장이 있다. 원래 대가에서는 서고가 따로 있어 책을 보관하고 있으나 가까이 두고 항상 읽혀지는 책들을 위해 실내에 자그마한 반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책장은 책의 무게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굵은 골재와 견고한 짜임이 중요시되었다. 문갑은 중요 기물이나 문방용품을 보관하는 가구로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의 아래 공간이나 측면벽에 놓여졌다. 이는 낮게 제작되어 벽면에 시원한 여백을 주므로 생활 공간을 너르게 보이도록 하여 효과적이었다.

사랑방 문갑 중에는 많은 공간으로 구성된 공간문갑이 있어 생활 공간과의 조화에 세심한 배려를 보이고 있다. 고비는 벽에 걸어 놓고 방세간의 하나로 벽을 장식하는 기능이 매우 강했다. 특히 낮은 가구의 배치로 생기는 벽면의 활용에 유용했으며, 문갑 등과 잘 조화되고 그 방 주인의 취향이나 안목에 맞게 마련되었다. 이밖에 사랑방 가구로는 향, 좌경, 등과 등과 여가를 즐기는 바둑판, 거문고 등이었다. 가구의 재료로는 광택이 없고 시각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는, 부드럽고 소박한 질감의 오동나무와 소나무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느티나무와 먹감나무 등 무늬결이 좋은 나무를 이용하여 자연미를 살렸거나, 은행나무에 십장생, 용문, 시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장식성이 강조되고 귀족적인 품위를 나타낸 것도 있다. 안방가구 여성들이 거처하는 안방은 사회적 규율에 얽매이고 또 외부와 단절된 속에서도 자신의 생활을 찾고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으며, 자녀를 기르고 가정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므로 항상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가구가 제작되어졌다. 따라서 안방의 가구는 사랑방 가구의 정선된 선과 검소한 분위기와는 달리 색이 곱고 밝고 따뜻하며 화사한 것이 특징이다.

안방에 사용되는 가구로는 몸단장을 위한 좌경, 빗접, 주연경과 의복을 관리하는 반짇고리, 화로 등이 있었으며,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은 계절에 따른 많은 의복과 솜, 천, 버선 등을 보관하기 위하여 이층장, 삼층장과 용장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외에 솜장, 버선장, 의걸이장, 머릿장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장과 단은 안방의 주된 가구로 장은 각 층이 분리되지는 않으나 앞면이 1, 2, 3층으로 구획된 것이며, 많은 힘을 유지하기 위해 굵은 기둥과 두꺼운 판재로 양측 널을 구성하고 있다. 반면에 단은 각 층이 분리되어 기둥보다는 얇은 판재로 짜여져 있다.

원래 단은 뚜껑이 있는 고리짝을 쌓아 놓을 때 아래층의 것이 사용에 불편하므로 각 층의 앞쪽에 여닫이문을 달아 발전시킨 형태이다. 장을 용도에 따라 분류하면 머리맡에 놓고 귀중품이나 일상 용품을 간편하게 보관, 사용하게 만든 자그마한 머릿장, 의복을 포개어 보관하는 일반 버선이나 간단한 의류를 넣는 버선장, 솜장, 이불장, 옷을 구기지 않도록 햇대에 걸쳐 보관하는 의걸이장, 2·3층은 일반 버선이나 간단한 의류 같으나 1층이 둘로 나뉘고 이 나란한 두 개의 문이 원앙새 같다 하여 이름지어진 원앙삼층장, 장의 상부에 설치한 것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장 중에는 특별히 화초장이라 하여 출가하는 딸을 위해 제작하여 집안의 가풍을 유지시키고 개인의 취향까지 고려한 것도 있다. 재질에 따라 분류하면 느티나무, 먹감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등 아름다운 목리를 이용하여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것, 그리고 은행나무, 가래나무, 피나무에 화조문, 십장생문을 조각한 것, 대나무를 삿자리형식으로 엮거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모자이크한 죽, 비단헝겊을 바른 비단, 나무 표면에 종이를 바른 후 고운 색으로 산수, 화조, 문자를 그리거나 헝겁에 수를 놓아 판재에 끼워 붙인 영롱하고 화사한 자개를 시문하고 옻칠을 한 자개장, 투명 유리판에 화조를 그려 넣은 화초장, 십장생문을 조각한 것, 대나무를 삿자리형식으로 엮거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모자이크한 죽장, 비단헝겊을 바른 비단장, 나무 표면에 종이를 바른 후 고운 색으로 산수, 화조를 그리거나 오려 붙인 장, 헝겊에 수를 놓아 판재에 끼워 붙인 수장, 영롱하고 화사한 자개를 시문하고 옻칠을 한 장, 적, 황, 녹, 백, 흑 등의 짙은 석분으로 그림을 그린 화각장, 투명 유리판에 화조를 그려 넣은 화초장 등이 있다.

안방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가구를 놓아 여성의 취향을 살리고 외부 세계를 느껴 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들 가구에 주로 사용된 문은 자연경관, 화조, 삼강오륜도, 십장생, 길문, 부귀다남, 자손번창, 다산, 장수 등을 기원하는 내용들이다. 안방의 가구를 살펴보면 아랫목의 다락 미닫이문이나 병풍에는 색이 밝은 화조도를 그리거나 수놓아 화사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머리맡에는 낮고 자그마한 머릿장을 놓아 열쇠, 문서, 귀중품들을 안전하고 손쉽게 보관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옆의 마당으로 통하는 미닫이문 아래나 측면 면에는 낮고 긴 문갑을 배치하여 벽면에 시원한 여백을 구성하고 있다. 아랫목을 중심으로 반짇고리, 화로화, 몸단장을 위한 좌경, 빗접, 걸이경 등이 놓이거나 결렸다.

좌경과 빗접은 앉은 자세에 알맞도록 설계되었는데 지나친 몸단장을 삼가며 또 외형적으로 나타남을 꺼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접어 둘 수 있게 하였다. 걸이경은 기둥에 걸고 놓고 전신을 비추는 거울로써 조선조 후기부터 사용되었다. 그 밖의 안방 가구로는 불을 밝히는 등가, 촛대, 좌등 등이 있다. 주방가구 한국의 주방은 온돌양식으로 인해 부엌 바닥이 지표보다 낮고,식당이 부엌과 연결되지 않아 음식상을 마당과 대청을 거쳐 실내로 운반해야 했으므로 이에 따른 인간공학적인 설계와 적절한 재질이 요구되었다. 주방가구로는 소반, 찬장, 뒤주 등과 기타 소품이 있는데, 소반은 남녀유별. 장유유서 등의 풍습에 따라 독상이 주로 사용되었고 그릇들이 무거운 사기나 놋으로 되어 있기에 소반은 가벼운 재질이 필수적이었고 들기에도 편하도록 작은 크기가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넓은 판재를 구할 수 있고 얇아도 터지거나 휘지 않는 피나무, 호두나무, 가래나무, 은행나무 등이 이용되었다. 이 중 은행나무는 음식 냄새에도 좀이나 벌레가 쏠지 않으며, 탄력이 있어 깊은 흠이 생기지 않아 좋은 재질로 취급되어졌다. 찬장은 식기류를 얹어 놓는 주방가구이다. 그릇의 대부분이 많은 양을 쌓아 두고 사용하므로 그 힘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굵은 기둥과 두꺼운 판재, 그리고 이 점을 고려한 짜임과 이음새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굵고 투박한 재료가 반대로 시각적으로 시원함과 신뢰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골재로만 연결되는 것은 너무 단조로운 감을 줄 수 있어 다른 종류의 가구보다 신중한 설계화 제작이 요구되었는데 그 쾌적한 공간의 비례는 한국 목공술의 으뜸이었다. 재질로는 두꺼운 소나무 통판을 사용하거나, 얇은 판재의 경우 대청의 널처럼 판재를 끼워 넣은 은촉짜임 형식을 하고 있다.

또한 다리 부분의 족대 역시 바닥의 습기를 고려하여 높고 굵게 설계되었다. 찬장은 그릇을 넣거나 음식을 담아 보관하는 주방 가구이다. 찬장 또한 찬탁과 같이 그릇의 무게를 고려하여 튼튼한 짜임새가 요구되므로 굵은 소나무 골재에 목리가 좋은 느티나무, 참죽나무를 이용하였고 견고한 무쇠장식을 달았다. 찬장은 2, 3층이 대부분으로 전면이 같이 판재로 구성된 것과 천이나 종이로 발려져 통풍을 고려한 것이 있으며, 크기 또한 7자가 넘는 것에서 3자가 되지 않는 소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형 찬장은 부엌이나 대청에 놓여져 음식이나 곡물, 잡다한 그릇 등을 손쉽게 보관하는 역할을 했다. 반면 소형은 인간공학적인 면을 고려하여 부뚜막 위나 찬마루에 놓여졌다. 이밖에 쌀이나 곡물을 보관하는 뒤주가 있다. 뒤주는 곡물이 습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통풍이 잘 되고 쥐와 해충으로부터 보호되며 충분한 힘을 받을 수 있도록 굵은 소나무 골재에 두꺼운 느티나무나 소나무 판재로 높게 구성되어 있다. 뒤주에는 많은 양을 넣을 수 있는 대형에서부터 팥, 깨를 넣는 소형에 이르기까지 각종 형태가 있다.

또한 대형 뒤주 중에는 2층으로 분할하여 아래층은 그 여닫이문 안에 잡곡을 자루에 넣어 두거나 그릇이나 기타 소품들을 보관하는 동시에 위층의 곡물을 해충으로부터 더욱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한 이층뒤주도 있다. 칠과 금속장식 가구 표면의 칠은 생칠, 주칠, 흑칠, 그리고 일반 기름칠이 있다. 이는 가구의 표면에 흠이 생기거나 때가 묻는 것을 막고 방수가 되게 하여 수명을 연장시키고 동시에 화사한 빛을 발해 미장효과를 가져오기 위함이다. 색은 황토분, 석간, 치자 등을 물에 묽게 타서 바르는데, 이때 좀더 진한 색을 얻기 위해 먹물이나 고운 검은흙을 섞어 바르기도 했다. 이를 마르기 전에 걸레로 원하는 색만큼 닦아내고 그 위에 잣, 호두, 콩, 오동 등의 식물성 기름을 바른 후 곱게 헝겊으로 문질러 자연 그대로의 질감을 살리는데, 식물성 기름은 나무의 표면에 엷은 막을 형성하여 트는 것을 막아 기물을 보호하고 은은한 광택으로 아름다움을 더해주어 널리 애용되었다. 소반과 고급 가구에는 생칠을 하였으며, 궁중용과 내간용 가구에는 주칠 또는 흑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투명한 칠은 일반 가구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한국 목가구는 자연 목리를 살리는 데 주력하였다. 금속장식으로는 무쇠, 주석, 백동 장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무쇠장식은 힘을 많이 받는 반닫이 등에서 크고 두껍게 사용되었고, 검소한 질감으로 인해 사랑방의 가구에 널리 이용되었다. 주석장식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구리, 주석, 백동을 합금하여 만든다. 이는 배합 비율에 따라 성질과 색깔이 달라지게 되는데 비교적 연질이어서 자유로이 오려낼 수 있다.

색감이 밝고 화사하여 여성용 가구에 애용되었으며, 단순한 형태로 제작하여 사랑방 가구에도 이용하였다. 백동장식은 20세기 초부터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희고 깨끗하여 단정한 멋을 내는 장식이다. 나무질보다 금속장식에 치우치던 20세기 초의 가구와 함께 성행되던 것으로 다양한 형태가 발달되었다 이러한 금속장식들은 문을 여닫는 경첩, 들어 옮기거나 당기는 들쇠, 짜임새와 이음새를 견고히 해 주는 거멀장식, 모서리를 튼튼하게 하는 귀장식, 자물쇠 앞바탕, 고리 등의 형태로 널리 사용되어졌다.

금속장식은 대체로 초기에는 필수적이고 기능적인 역할을 강조하여 단순하고 검소하게 제작되었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점차 복잡해지고 도식적으로 흐르고 있다. 자료제공 : 한국 고가구 박물관 한국의 전통가구 시장을 살펴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과거의 전통과 기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기법이나 재료, 문양, 패턴 등을 전통을 바탕으로 시대적 요구에 맞게 디자인한 부류이다.
현재는 이 두 가지 양식이 공존하고 있는데 소비자들의 취향은 대체로 재료나 형태를 현실에 맞게 적용한 후자의 경우를 선호한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전통가구 디자이너 이진욱 씨는 “소비자들이 변화된 전통가구를 많이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 외형적인 디자인의 세련미와 함께 가격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라고 강조한다.
물론 소비자들이 원하는 경향은 새로운 스타일과 구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이어가는 쪽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거나 변화를 모르는 부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바람직한 것은 두 방향에서 균형 있게 발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전통가구업계 종사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고전가구 공동전시판매(주)는 전통을 철저히 계승하는 것은 아니지만 디자인면에서 최대한 전통 그대로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업체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20여년 전부터 친목회를 만들어 운영해 오던 57개 전통가구 생산 공장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전통의 미를 살리면서 실용성이 조화된 전통가구 브랜드 ‘맥(脈)’을 개발하여 활발한 판매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동안의 전통가구 생산공장은 유통업자들에게 이끌리면서도 이에 따른 유통마진으로 판매가 부진했던 실정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 회사는 공동전시장을 마련하여 유통마진의 부담을 줄여 가격 경쟁력 면에서 상당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57개 업체의 공동판매라는 장점을 이용하여 600여점에 달하는 아이템을 구비하고 있다. 각기 업체에서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품목들을 달리하고 있어 제품력에서도 뛰어나나고 송태현 대표는 밝혔다. 우리 전통가구는 재료나 기법 등이 섬세하여 우수한 구조와 장식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고유의 의식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전해 왔다. 이처럼 우수한 한국의 전통가구를 실제 사용함에 있어서는 현대에 이르러 변화된 생활과는 많은 기능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좌식생활과 사랑방 가구, 안방가구를 구분하던 내외사상으로 각기 독특한 구조와 기능성을 보였었다. 이를 그대로 현대생활에 옮겨놓을 경우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능성만을 가지고 비교해볼 경우 다기능과 많은 수납공간을 제공하는 현대가구에 비해서는 많은 부분이 부족하다. 또한 디자인의 경우에도 외형의 다양함과 화려한 색상, 다양한 질감 등을 가진 가구에 비해 일률적인 색채와 장식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현대감각이 떨어진다.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전통가구가 현대가구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며 단순한 기능과 형태의 전통가구는 요즘에 이르러 가구의 기능성보다는 장식적인 효과만을 제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업계 내에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한국의 미를 살려내면서 현대적인 생활환경에 적응하는 업체들이 적지 않다. 사임당가구, 사대부가구, 선화당가구 등의 업체는 이미 브랜드 이미지를 확고히 한 상태로 국내적으로는 한식가구 수요계층으로부터 폭넓은 시장을 확보하고 있으며 세계시장 진출에도 적극적이다. 업체들 중 좌장 격인 사임당가구는 전통의 얼이 담긴 한식가구를 안방의 좌식생활과 거실, 주방 등의 입식생활에 적합하도록 개발하여 국내·외에서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사임당가구의 가장 큰 특징은 예부터 전해오는 아이템의 특징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재창조하는 과정에 있다. 이 바탕에는 현대가구에서 말하는 디자이너 즉, 장인들의 힘이 매우 크다고 한다. 한편 사임당가구는 지난 6월 1일부터 10월말까지 독일 하노버의 세계 엑스포에 초대되어 한국 전통가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온 바 있다. 이 전시회를 통하여 보다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 전통가구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신선한 초목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선화당가구는 100여개의 다양한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는 점을 경쟁력으로 삼고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시장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는 이 회사는 자체 브랜드에 의한 판매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20년 이상 공예가구를 제작해온 장인출신의 제작진을 갖춰 탄탄한 기술력이 돋보인다.

또한 전국 대리점과 판매점들을 통해 소비자들의 기호와 요구를 직접 수용하여 보다 실용적이면서도 전통의 미를 살린 선화당가구만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35년 동안 전통 목상감 가구만을 고집하며 장인정신을 발휘해온 사대부가구는 정교한 상감 기법과 짜맞춤 공법으로 품격이 높은 가구만을 생산하는 업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전통의 미를 재현한 제품에서 거실장, 장식장 등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제품까지 다양한 아이템을 구비하면서도 제품 하나 하나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수공예로 제작되어 고급화 되어있으면서도 실제생활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한 것도 특징이다. 한편 모던가구의 자리에서 전통적인 감성을 접목시킨 까사미아와 같은 업체도 주목할 만하다.

82년 원목 소품가구와 가정용 액세서리 등의 생산을 시작으로 첫 발을 디딘 까사미아는 그 동안 미국, 유럽 등의 스타일을 차별화 시켜 한국에 소개함으로써 좋은 반응을 얻었다. 80-90년대 무분별한 카피가 이루어지던 시절 국내의 가구시장은 디자인의 정체성을 잃기 시작했다. 우리 문화와 디자인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시작된 연구로 97년부터 ‘살림(salim)’에 대한 연구·개발을 시작하였고 시행착오를 거쳐 현재 각광받고 있는 살림제품들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살림’의 목표는 한국적인 미의식과 전통적 가치세계로부터 느껴지는 모티브로 전통 디자인을 표방하여 기능적인 주거문화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마루, 가람, 하늘, 참 시리즈 등 전통적인 감성이 물씬 배어있는 실용적인 제품들로 독특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통성에 원형을 두고 현대적인 느낌을 더하고자 한 연구의 본래 의도와는 조금 달리 결과물에 있어서는 형태적인 근거에 기초를 둔 디자인의 연구가 한국적 감성연구에 앞서게 되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한 한국의 미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과 연구는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국내 가구시장이 유럽풍 모던가구 일색이며 이제 한국 가구업계는 디자인의 한계에 이르렀다고 많은 사람들은 지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의 미를 사랑하고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계승 발전시키려는 많은 이들이 있다.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러한 사람들과 업체들이 많다는 것은 우선 바람직한 일이다. 일체의 변형도 가하지 않은 순수한 전통의 계승도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며 현실과 시대에 맞는 적절한 변화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이 현대에 이르러 빛을 보고 확고한 위상을 정립하게 위해서 해결 되어야할 많은 문제들이 있다.

첫 번째로 지적되는 것은 디자이너의 절대적인 부족이다. 현실적으로 국내에는 디자인을 교육하는 많은 학교와 기관들이 있지만 전문화된 전통가구 디자이너를 육성하는 곳이 매우 부족한 상태이다. 물론 전통가구에 대하여 공부한 디자이너들이 있지만 이들은 공예가구 분야에만 종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전가구 업체에서는 오래 전부터 기술을 전수 받아온 몇몇 장인들만이 외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 더욱 아쉬운 것은 이들의 기술조차도 제대로 전수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몇몇 브랜드화 된 업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통가구를 표방하는 대부분이 영세화를 면치 못하고 있다. 열악한 국내 가구시장의 유통구조에서 이 업체들이 살아남기는 매우 힘든 것이다. 자체적으로는 소규모의 여러 업체들이 연합하여 다양한 판매 활로를 개척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될 수 있으며, 자신들만의 특화된 기술력과 제품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자본력과 판매망을 점유하고 있는 대형 기업들의 투자와 관심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외형적인 면에서는 전통가구의 근본적인 정신과 이미지를 잃지 않는 전제 하에 디자인과 컬러의 다양화, 현대 생활방식과 감각에 맞는 독특한 아이템의 개발이 발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고유의 문화와 생활방식의 보전과 계승은 이미 상업화된 가구산업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 업계 종사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가구업계 내에서 풀어야 할 숙제는 현대화된 생활구조에 적응하고 소비자들의 기호를 파악하는 것이다. 아울러 변질되어진 대다수 소비자들의 취향에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업체의 관계자들은 가구업계에도 경제의 상승, 하강과 같은 흐름이 있다고 설명한다.
시기에 따라서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발전·퇴보하는 제품군들이 커다란 궤적을 가지고 돌아간다는 것이 이들의 견해이다. 물론 얼마 전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체리컬러 계열의 제품들처럼 고전가구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복고의 바람이 어느 정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전통가구를 표방하는 여러 업체들이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조금씩 변화, 발전해 간다면 세계 가구시장에서 한국의 우수한 문화를 표현한 제품들이 확고한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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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AVID의 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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