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조선 11대왕 중종

장안봉(微山) 2013. 6. 14. 03:53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뒤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파를 기용하여 성리학을 장려하고 개혁정치를 시도했으나, 훈구파·척신파가 반발하자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제거했다. 재위기간중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
중종반정과 즉위
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尹氏)이며, 비(妃)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제1계비(第一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 재위기간 동안의 잇달은 사화(士禍)와 실정(失政)에 반감을 품은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에 의해 연산군이 폐위된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개혁정치의 시도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 때 파괴되었던 여론제도 등 유교정치의 복구와 교학(敎學)의 강화를 최대의 과제로 삼고 개혁정치를 시도했다. 이를 위해 성리학을 장려하고 사화를 입은 사림들을 복권시키는 한편, 홍문관을 강화하고 문신의 월과(月課)·사가독서(賜暇讀書)·춘추과시(春秋課試) 등을 엄격히 시행했다. 1513년(중종 8) 김세필(金世弼)·김안국(金安國) 등으로 하여금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연구시켜 경연(經筵)에서 강의하게 했으며, 1515년에는 사림파의 추앙을 받던 조광조를 6품직으로 등용했다. 조광조는 성리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고 도학(道學)에 근거한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상정치를 행하려고 했다. 중종은 조광조·김안국·이장곤(李長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정착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단행했다. 1517년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받아 전국적으로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을 성리학적 질서로 편성했다. 이듬해에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여 도교적인 의식을 없애는 한편, 도승제도(度僧制度)를 폐지하고 도성 안에 새로이 절을 짓지 못하게 하는 등 불교를 억눌렀다. 또한 정치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여, 과거제를 폐지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두었다. 이 제도로 1519년 김식(金湜)·박훈(朴薰) 등 28명을 뽑았으며, 이후 김정(金淨)·김구(金絿)·기준(奇遵) 등이 등용되었는데, 이들은 조광조 등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었다.
기묘사화와 척신의 대두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반정공신세력을 비롯한 훈구파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1515년 김정 등이 역신의 딸이라 하여 왕비 신씨의 폐출을 관철시켰던 박원종의 처벌을 주장했다가 유배되자, 조광조가 이는 언로(言路)를 막는 행위라고 상소함에 따라 양파의 대립은 표면화되었다. 1518년 현량과가 설치되어 사림파가 대거 언관으로 기용되면서 현량과의 혁파를 주장하는 훈구척신을 탄핵하고, 1519년에는 조광조의 주장으로 반정공신 가운데 76명이 훈적(勳籍)에서 삭제되고 그들의 토지와 노비가 몰수됨에 따라 훈구세력은 사림의 제거를 모색하게 되었다. 심정(沈貞)·남곤(南袞) 등이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탄핵하자 마침 조광조 등 사림파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과 급진적인 개혁에 압박감과 불안을 느끼고 있전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조광조·김정·기준 등을 죽이고, 박훈·김안국 등을 파직 또는 유배시켰다. 사림은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다시 타격을 받은 뒤 중앙정치에서 배제되어 향리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정국은 훈구파 내부의 갈등, 훈구세력과 척신세력의 갈등으로 대립의 양상이 바뀌었다. 1524년에 남곤·심정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던 김안로(金安老)가 1530년 심정이 경빈박씨(敬嬪朴氏)와 내통했다고 하여 심정 일파를 몰아내는 데 성공, 이듬해부터 실권을 장악했다. 김안로는 외척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형제를 제거하고 기반을 튼튼히 했으나, 1537년 문정왕후를 쫓아내려다가 도리어 탄핵을 받고 유배된 뒤 죽음을 당했다. 그 결과 문정왕후와 남매간인 윤원로 형제가 점차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慶元大君:뒤의 명종)으로 왕위를 잇게 하려다가, 세자(世子:뒤의 인종)를 낳다가 죽은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尹任)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두 외척간의 대립은 중종이 죽은 뒤 을사사화로 이어졌다.
남왜북로의 침입과 국방대책
중종대에는 남쪽에서는 왜구, 북쪽에서는 야인(野人)의 침입이 빈번했다. 1510년 삼포(三浦)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쓰시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켜 경상도 해안일대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삼포왜란). 이에 1512년 임신약조(壬辰約條)를 체결, 세견선(歲遣船)·세사미(歲賜米)를 줄이고 제포(薺浦)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의 왕래를 엄격히 제한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가 끊이지 않아 1522년에 추자도, 동래 염장(鹽場)에 왜변이 일어났고, 1525년에는 전라도에 왜구가 침입해왔다. 1544년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왜구가 침입한 것을 계기로 일본 국왕의 사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왜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한편 북쪽 변경지방에서는 6진·4군 지역에 야인들이 침입하여 인마(人馬)·재물을 약탈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순변사(巡邊使)를 파견하여 이들을 회유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쌓는 등 방어선을 마련했다. 1524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야인들을 토벌했으나, 이후에도 야인들의 침입이 자주 있었다. 이같은 남왜북로의 침입에 대비한 제도적 정비도 이루어져 정로위(定虜衛)·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었다.
사회·경제 정책
중종은 즉위초부터 성리학을 장려하고 향약을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윤리를 향촌사회에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려 했다.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된 뒤에도 이러한 정책은 계속 추진되었다. 〈소학〉·〈이륜행실〉·〈속삼강행실〉 등을 간행했으며, 말년에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안향(安珦)을 모시도록 했다. 또한 〈경국대전〉·〈대전속록〉·〈대전후속록〉 등을 간행하여 법제의 확립을 꾀했다. 이같이 간행사업이 활발히 진전된 것은 재위기간 동안의 인쇄술 발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1516년 주자도감(鑄字都監)을 두어 구리활자를 주조하고, 〈사성통해 四聲通解〉·〈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각 방면의 서적들을 편찬·간행했다. 이밖에 1536년 찬집청(撰輯廳)을 설치하여 각종 서적의 번역·편수를 맡기고, 1540년 역대 실록을 베껴 사고에 비치하기도 했다. 경제분야에서는 1522년 악포금단절목(惡布禁斷節目)을 반포하여 악포의 유통을 막고, 1524년 전라도·강원도·평안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했으며, 1530년 상의원(尙衣院)에서 서양의 세면포(細綿布)를 무역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또한 저화(楮貨)·동전의 사용을 장려하고, 관천기목륜(觀天器目輪)·간의혼상(簡儀渾象) 등 농업과 관계된 천문기구를 새로 만들었다. 세 왕비와 빈(嬪)에게서 인종·명종 등 9남 11녀를 두었다. 능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정릉(靖陵)이다.

단경왕후신씨

1487(성종 18)~1557(명종 12).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의 비.
본관은 거창. 좌의정을 지낸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1499년(연산군 5)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과 혼인하여 부부인(府夫人)에 책봉되었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연산군을 내쫓고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추대하면서 왕후에 올랐다. 그러나 반정모의에 반대했던 아버지가 성희안 등에게 살해되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7일 만에 폐위되어 본가로 쫓겨났다. 1515년(중종 10)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죽음을 계기로 김정(金淨)·박상(朴祥) 등이 복위운동을 펼쳤으나 이행(李荇)·권민수(權敏手)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자식은 없고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온릉(溫陵)이다.
장경왕후윤씨
1491(성종 22) 서울~1515(중종 10).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繼妃).
파평윤씨(坡平尹氏).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여필(汝弼)이다. 고모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1506년(중종 1)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해졌으며,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愼守勤)이 반정모의에 반대한 일로 살해된 뒤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가 폐위되자 1507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515년 2월에 세자(世子 : 인종)를 낳은 뒤 산후병으로 죽었다. 휘호(徽號)는 숙신명혜(淑愼明惠)이며, 1547년(명종 2)에 선소의숙(宣昭懿淑)이 더해졌다. 시호는 장경(章敬)이다. 능은 고양에 있는 희릉(禧陵)이다.
문정왕후윤씨
1501(연산군 7)~1565(명종 20).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繼妃)이며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태릉 /중종 계비 문정왕후의 태릉(1565), ...
본관은 파평.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다. 중종비 신씨가 즉위 직후 폐위되고,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세자 호(岵:뒤의 인종)를 낳은 뒤 죽자,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다. 1545년 자신의 소생인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모후(母后)로서 8년간 수렴청정했다. 그동안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소윤)에게 권력을 주어, 인종의 외척인 윤임(尹任:대윤) 일파를 제거한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한편 보우(普雨)를 신임해 1550년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승과와 도첩제(度牒制)를 다시 실시하는 등 불교 부흥을 꾀했다. 1553년부터 명종이 직접 정치에 임했으나, 실제로는 문정왕후가 윤원형과 협력하여 정사에 계속 관여했다. 소생으로 명종·의혜공주(懿惠公主)·효순공주(孝順公主)·경현공주(敬顯公主)·인순공주(仁順公主) 등 1남 4녀를 두었다. 능은 태릉(泰陵)이다.
출처 : 숯두루지 송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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