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본질적으로 비정(非情)하다. 그 핵심적인 까닭은 그것이 재력(財力)과 함께 가장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가치(價値)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소유한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강력하고 오랫동안 유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만, 그것을 빼앗겼거나 노리는 사람은 그런 목적을 이루는데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가장 첨예하고 거친 충돌과 투쟁이 전개되는 국면은 권력의 공백기(空白期)이다. 그때 권력을 노리는 개인과 집단은 날 것 그대로의 욕망과 수단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조선의 제6대 국왕인 단종(端宗. 1441 ~1457. 재위 기간 1452 ~1455)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국왕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첨예한 권력 투쟁은 대부분 건국 초기에 빈발한다. 조선이 개창(開創)된 지 꼭 60년만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국왕은 권력의 공백(空白)이 빚어낸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단종의 일생
1441년 ... 世宗 23년에 출생. 生母는 생산 후 3일만에 죽는다. 1450년 ... 9살의 나이에 世子로 책봉된다. 1452년 ... 文宗이 죽자 12세에 조선의 6대 王으로 즉위한다. 13세의 정순왕후와 결혼. 1455년 ... 6월11일, 수양대군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上王)이 된다. 1455년 ... 10월24일, 사약을 받고 죽는다. 17세.. 시체는 강물에 버려진다. 1516년 ... 中宗 11년,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를 찾으라고 지시. 우선 봉분만 만든다. 1521년 ...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죽는다. 1541년 ... 중종 36년, 노산군(魯山君)의 묘를 찾는다. 몰래 암장(暗葬)되어 있었다. 1580년 ... 宣祖 13년, 노산군의 묘에 상석, 장명등(長命燈) 등을 세운다. 1698년 ... 숙종 24년, 노산군(魯山君)에서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그리고 단종(端宗)으로 추존 된다. 묘(墓)에서 장릉(莊陵)이 되었다. 1733년 ... 英祖 9년, 정자각(丁字閣)과 신도비(神道碑)를 세운다. 1791년 ... 正祖 15년, 우물을 파고 영천비(靈泉碑)를 내린다. 제단도 마련한다.
단종(端宗)은 1441년(세종 23년) 7월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휘는 홍위(弘暐)이다. 객관적 조건으로만 보면, 앙위 계승자로서 단종의 조건은 완벽하였다. 부왕(父王)인 문종(文宗)도 적장자(嫡長子)이었고, 자신도 적장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가장 비참한 운명의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단종이 밟은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1448년(세종 30) 4월 3일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었고 (그의 나이 7세), 2년 뒤에 아버지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즉시 왕세자가 되었다 (1450년 7월 20일). 운명의 변화는 문종이 즉위 2년만에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하자 단종은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왕통은 이었지만, 이때의 상황은 권력의 공백기로 급변할 수 있는 정황을 대부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국왕은 너무 어렸고,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중심으로 한 숙부(叔父)들은 인생에서 가장 정력적인 시점에 와 있었다. 이때 수양대군은 35세, 안평대군은 34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뛰어난 능력과 커다란 야심(野心)을 갖고 있었다. 신하들은 대부분 세종 대의 인물들이었다. 삼정승(三政丞)은 세종의 고명(誥命)을 받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남지(南智)이었고, 그 아래 실무진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으로 대부분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四) 출신이었다.
장릉 莊陵
이 곳 장릉(莊陵)은 다른 왕릉에 비하여 많이 다르다. 우선 왕릉은 한양 百里 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이었지만 , 장릉은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이다, 그리고 낮은 구릉에 모셔진 다른 왕릉에 비하여 아주 높은 곳에 모셔져 있으며, 대부분의 왕릉이 봉분,장자각, 참도, 홍살문이 一直線 上에 배치되었지만, 이 곳 장릉의 경우 신좌을향(辛坐乙向 .. 南西에서 北東向으로)으로 모셔졌고, 정자각(丁字閣)은 북쪽을 향하여 있어 정자각에서 陵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할 수 밖에 없다.
장릉 (莊陵) ... 보물 제 1536호
계유정난의 발발과 폐위
단종의운명을 사실상 결정지은 사건인 계유정난(癸酉政亂)은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났다.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반만이었다. 그것은 태종(太宗)이 일으킨 제1차, 2차 왕자의 난(王子의 亂)과 함께 조선 전기의 가장 대표적인 권력 투쟁이었다.
계유정난의 과정과 결과는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수양대군(首陽大君)과 한명회(韓明澮) 등은 황보인, 김종서 등 주요 대신들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격적으로 거사했고, 그들을 대부분 숙청하였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수양대군은 실권을 장악하였다. 영의정부사 (領議政府事) 영집현전 경연 예문춘추관 서운관사 ( 領集賢殿 經筵 禮文春秋館 書雲觀事) 겸 판이병조사(兼 判吏兵曺事) 중외병마도통사 (中外兵馬都統使) ..라는 유례없이 길고 어마어마한 관직은 그러한 권력의 크기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계유정난의 가장 중요한 숙청 대상이었던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즉시 강화(江華)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1453년 10월 18일이었다. 1455년 6월 또 다른 위험 인물인 금성대군(錦城大君)도 유배되었다. 이로써 위협이 될만한 이눌은 거의 모두 제거되었다.
수양대군이 갖지 못한 유일하지만 결정적인 권위는 왕(王)이었다. 1455년 윤6월 11일 결국 수양대군은 단종의 선위(禪位 .. 왕이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를 받아들여 국왕으로 등극함으로써 그동안 갖지 못했던 명목상의 권위까지 모두 인수하였다. 정변(政變)의 성공부터 최종적 완성까지 1년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거린 이런 과정은 500여년 뒤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두 번의 군사쿠데타와 집권 과정의 어떤역사적 선례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로써 단종은 자신보다 24세나 많은 숙부의 상왕(上王)이되어 수강궁(壽康宮 .. 창경궁의 전신)으로 물러났다.
보물 제1536호 .. 端宗으로 추존(追尊)되고 후일 임금에게 보고하던 자료인 듯..
영월 지도 (寧越 地圖)
장릉 (莊陵)
관풍헌(觀風軒)
1457년 10월 24일. 단종은 이 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청령포 (淸冷浦)
단종의 유배지(流配地)..陸地孤島
자규루 (子規樓)
단종은 이 곳에서 자규사(子規詞)를 남겼다.
창절서원 (彰節書院)
사육신(死六臣), 엄흥도(嚴興道)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 (祠堂)
낙화암 (落花巖)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를 모시던 시녀(侍녀)와 노비(奴婢)들이 몸을 던져 순절(殉節)하였다.
그들을 기리기 위한 민충사(愍忠祠)가 중앙에 그려져 있다.
단종비각(端宗碑閣)
낙촌비각 (駱村碑閣)
낙촌비각(駱村碑閣) ...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駱村 朴忠元)이 노산묘(魯山墓)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碑로, 1974년 그 후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비문(碑文)의 요지는 ..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서 종친, 구신(舊臣) 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賜死)당하시니 엄흥도(嚴興道)는 충성으로써 단종의 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嚴戶將)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 길이 없어 풍설 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부임하면 원인모르게 죽기를 7인에 이르렀다.
中宗 36년에 박충원(朴忠元)이 군수로 부임한 즉 군리(郡吏)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운명이라고 하며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 사람에게 끌려 가 본즉 숲 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 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임금을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번째 서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 처형을 면하였다.
깨어보니 꿈 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 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 초에 죽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정령송 (精靈松)
단종비(端宗妃)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남양주의 사릉(思陵)에 묻혀있다. 죽은 영혼이나마 만나 함께 있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각 해당 자치단체의 이견으로 합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사릉(思陵)에 있는 작은 소나무 한 그루를 이 곳 장릉에 옮겨 심어, 두 사람의 영혼을 이어 주었다. 1999년에...
단종의 죽음에 대한 실록(實錄) 기록
"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을 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 ...... 世祖 3년 10월21일, 실록의 기록이다.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 간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기록한 실록이었으니까 더 이상 어떤 말을 하여야했을까? 이 것이 정사(正史)인 실록의 한계이다.
1698년 숙종 代에 이르러 노산군(魯山君)에서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복권되었고, 다시 단종(端綜)으로 추존되면서 노산군묘가 장릉(莊陵)으로 된다. 당시 숙종실록의 기록에....
"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天地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단종대왕이 영월에 피하여 계실 적에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마침내 입시하였을 때 단종대왕께서 관복을 갖추시고 마루로 나오시어, 온 이유를 下問하셨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하였었다.
그가 봉명신(奉命臣 .. 왕의 명령을 받고 온 신하)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그 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貢生 ..관청의 심부름꾼) 하나가 차마 하지 못 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 즉시 아홉구명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 문종의 비로 1441년 단종을 출생하고 3일 뒤에 23살의 나이로 죽었다. 문종이 즉위하면서 1450년에 현덕와후로 추숭(追崇)되고, 능호는 소릉(昭陵)이라고 명명되었다.
한편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몰아내고 즉위한 수양대군(世祖)는 세자들 두었는데 이름은 장(暲)이었다. 그는 월산대군(月山大君 .. 成宗의 형)과 成宗을 낳고 20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현덕왕후의 꿈에 관한 다음의 기록이 있다.
세조가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매우 분노하여 "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 두어라 "고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동궁세자(東宮世子)인 동궁(東宮)이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 왔다. 그 때문에 소릉(昭陵)을 파헤치는 변고가 있었다....
世祖의 命으로 실제 파헤쳐졌으며,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는데 경기도 안산에 있다.
현덕왕후는 후일 중종의 지시로 문종의 현릉(顯陵)에 합장되었다.
조선중기의 문신 이자(李자. 1480 ~1533)의 음애일기(陰崖日記)
" 1457년 가을에 世祖가 궁궐에서 낮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린 괴이한 일이 생기니, 곧 소릉(昭陵)을 파헤치라고 명하였다. 사신이 석실(石室)을 부수고 棺을 끌어내려 하였지만 무거워 들어 낼 도리가 없었다. 군민(軍民)이 놀라고 괴이쩍어 하더니, 글을 적어 제를 지내고 나서야 관이 나왔다.사나흘을 노천(露天)에 방치해 두었다가 곧 명을 따라 평민의 예로 장사지내고서 물가에 옮겨 묻었다. 능을 파헤치기 며칠 전 밤 중에, 부인의 울음소리가 능 안에서 나오는데, 내집을 부수려 하니 나는 장차 어디 가서 의탁할꼬..이었다. 그 소리가 마을 백성들의 마음을 아프게 흔들었다 "
모든 기록으로 보아 단종이 사약을 받아 죽고, 世祖의 世子가 죽던 날의 사이에 현덕왕후는 世祖의 꿈에 나타났고, 실제 소릉(昭陵)을 파헤치라고 세조는 지시하였던 것이다.소릉(昭陵)은 후일 추존된 이름이고 현덕왕후는 문종의 세자빈으로 책봉은 되었지만, 가례(嘉禮)는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단종을 낳고 갑자기 죽었으므로 왕비의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후일 추존되었던 것이다.
단종, 죽음의 기록 1 .... 世祖實錄
"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을 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
단종, 죽음의 기록 2 .... 병자록(丙子錄)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금부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어픋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니와서 온 까닭을 물으니, 금부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魯山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 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 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이었다. 통인(通引)이 미처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 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 할 수 없었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단종, 죽음의 기록 3 ... 아성잡설(아성잡설)
魯山이 害를 입자, 命하여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 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하는데, 갸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더 있었다. 아전(衙前)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 아전(衙前)이 집에 老母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棺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는데, 얼마 안되어 소릉(昭陵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가 파헤쳐지는 변이 있어 다시 파서 물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다. 아전은 차마 파지 못하고 파는 척하고 도로 묻었다.
단종, 죽음의 기록 4 ... 영남야어(嶺南野語)
魯山이 항상 객사(客舍 ..관풍헌)에 있으므로, 촌 백성들로써 고을에 가는 자가 누(樓)아래에 와서 뵈었는데, 害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官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만나니 노산이 백마를 타고 동곡(東谷)으로 달려 올라가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알현하며 "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물었더니, 魯山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 태백산으로 놀러간다 "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官에 들어가니 벌써 害를 당하였다.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옥거리(獄街)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棺)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衙前)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郡) 북쪽 5리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 한다. 이 때 엄흥도의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니 엄흥도가 말하기를 " 내가 옳은 일을 하고 害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爲善被禍 吾所甘心 "고 하였다
단종, 죽음의 기록 5 ... 송와집기 (松窩雜記)
魯山이 영월에서 죽으매, 棺과 염습을 갖추지 못하고 거적으로 초빈을 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슬피 울고 스스로 말하기를 " 이름을 통하고 구휼을 받은 정분이 있다 " 하며 며칠을 묵다가 하루 저녁에 시체를 지고 도망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 산골에서 불 태웠다 "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 江에 던졌다 " 하여, 지금의 무덤은 빈 탕이요 가묘(假墓)라 하니, 두 말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점필재 (점畢齋 .. 金宗直)의 글로 본다면 江에 던져졌다는 말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漣)의 무리로써, 간신들의 지휘를 받은 자가 아닌가. 영원히 恨이 그치랴. 魂이 지금도 떠돌아 다닐 것이니 참으로 슬프도다....
단종, 죽음의 기록 6 .. 음애일기(陰崖日記)
실록에서 말하기를 " 魯山이 영월에서 금성군의 실패를 듣고 自盡하였다 "하였는데, 이 것은 당시의 여우나 쥐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 후일에 실록을 편수한 자들이 모두 당시에 세조를 종용(慫慂)한 者들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애통하게 여겨 제물을 베풀어 제사지내고 길흉,화복에 이르면 모두 묘소에 나가서 제사를 지냈다. 부녀자가 오히려 전하기를 " 정인지 같은 간적(奸敵) 놈들에게 핍박받아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제 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 고 하였다. 슬프다. 옛부터 忠臣,義士가 大家世族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당시에 임금을 팔고 이익을 꾀하던 무리들은 반드시 자기 임금을 혹심한 禍亂에 몰아 넣고야 마음에 쾌감을 느꼈으니, 이런 자들을 어찌 엄흥도에 비하여 보면 어떠한가.
촌부녀자들이나 동네 아이들은 君臣의 義理도 알지 못하고, 직접 凶한 변고를 보지 못하였건만, 지금까지 분하게 여기어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새어 나오고 전하니, 사람의 본성이란 속이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단종, 죽음의 기록 7 ... 해동야언(海東野言)
당시에 朝臣들이 노산을 처형하여 그에게 향한 백성의 마음을 단념시키자고 청하였는데... 史官이 기록하기를 " 노산이 금성대군의 실패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라고 하였다
단종, 죽음의 기록 8 ... 죽창한화 (竹窓閑話)
영의정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魯山을 제거하자고 청하였으므로, 그 罪를 논한다면 정인지가 으뜸이고, 신숙주가 그 다음이다.
영천 (靈泉)
정조 때, 사욱신 박팽년(박팽년)의 후손인 영월부사 박기정(박기정)이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端宗祭)를 올리는 한식 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평소에는 물이 조금만 차 있다가 한식이 다가오면 물이 우물에 가득 찬다고 한다.
장판옥 (藏版屋)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 268명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이다. 그 구성은 충신위(忠臣位) 32명, 조사위(朝士位) 198명,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28명, 여인위(女人位) 6명 등 268명이다.
수복방 (守僕房)
묘지기들이 제사를 준비하거나 처소로 사용하던 곳
엄흥도 정려각 (嚴興道 旌閭閣)
世祖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강물에 던져 진 端宗의 시신을 처음 수습한 영월호장(寧越戶長) 엄흥도(嚴興道)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26년(영조 2)에 세운 정려각(旌閭閣)이다.
엄흥도는 1833년(순조 33)에 공조판서(工曺判書 ..지금의 차관급)으로 추증되었고, 1876년 (고종 13)에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 졌다.
엄흥도 (嚴興道)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청령포)에 유배되었을 때, 엄흥도는 이 고을의 오장(戶長)이었었다. 밤낮으로 단종의 거소인 청령포를 바라보며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 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에서 슬프고 애끓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 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단종은 울음을 멈추고 "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 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 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옛 일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이 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 "하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 후 엄흥도는 매일 밤 비비람을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 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단종은 청령포 어소(御所)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觀風軒)으로 침소를 옮기게 되었다. 객사 동쪽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구시(子規詩)를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죽으니, 그 시신은 동강물에 내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東江絶壁 ..후일 낙화암)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히였으니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엄흥도 호장(戶長)은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世祖의 지시를 두려워 한 군수가 거절하자, 엄흥도는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 곳에서 대기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인양하여 아들 3명과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운구하여 영울군 서북쪽 등을지산(冬乙知山)의 先山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말리는 아들들에게 엄흥도는 위선피화 오소감심 (爲善被禍 吾所甘心) ..즉 나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노라..하며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
단종역사관 ...조선시대의 상복(喪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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