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집서(四佳集序)
서(序) 임원준
사가집 서(四佳集序)
문장(文章)이 천하(天下)에 있어 비록 고금 시대(古今時代)에 따라서 다름이 있기는 하나, 그 고하 성쇠(高下盛衰)는 세도(世道)의 승강(升降)과 정치(政治)의 융체(隆替)에 따라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글 중에는 시(詩)보다 어려운 것이 없으니, 시는 글 중의 정(精)한 것이다. 대저 아송(雅頌)이 강등되어 국풍(國風)이 되고, 그것이 변하여 차례로 소사(騷詞), 한위(漢魏), 육조(六朝), 수당(隋唐), 송원(宋元)의 여러 체(體)가 되어서, 작자(作者)가 쏟아져 나옴에 따라 사람마다 율격(律格)을 달리하였으니, 여기에서 세도를 관찰할 수 있고 정치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동방(東方)은 세상에 문헌(文獻)의 나라로 일컬어진 국가로서 문장 잘하는 선비가 대대로 끊이지 않았거니와, 고구려(高句麗)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신라(新羅)의 최치원(崔致遠)과 전조(前朝)의 시중(侍中) 김부식(金富軾), 상국(相國) 이규보(李奎報)는 그중에도 더욱 두드러진 이들이다. 전조 말엽에 이르러서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이공(李公)이 고문(古文)의 학(學)을 제창(提倡)하자,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父子)가 여기에 따라서 창화(唱和)하였거니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엄중(嚴重)함과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정련(精鍊)됨과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호탕(豪宕)함은 모두 명가 대수(名家大手)였는데, 양촌(陽村 권근(權近)) 권 선생(權先生) 또한 그중의 한 분이다. 양촌은 사도(斯道)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고 성리(性理)를 깊이 연구하여 오경(五經)의 은미한 의리를 발명해서 후학(後學)들의 문호(門戶)를 활짝 열어 주었으니, 그 사문(斯文)에 대하여 공이 크다 하겠다. 어찌 유독 시(詩)만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이는 실로 5백 년 동안 교육한 영재(英材)를 하늘이 우리 조종조(祖宗朝)에 끼쳐 준 것이다.
우리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世宗))에 이르러서는 태평(太平)한 운수를 만나서 문명(文明)의 교화를 천명함으로 인하여 예악 전장(禮樂典章)이 이에 빛나고, 인재 문물(人材文物)이 이에 찬란해졌으니, 저 하동(河東) 정 문성공(鄭文成公 정인지(鄭麟趾)), 고양(高陽) 신 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申叔舟)), 영성(寧城) 최 문정(崔文靖 최항(崔恒)), 괴애(乖崖) 김 문평(金文平 김수온(金守溫)) 같은 이들은 모두 뛰어난 영재(英材)들로서 국가의 전성기를 울리었다.
사가(四佳) 서 선생(徐先生)은 실로 양촌의 외손자로 연원(淵源)과 가법(家法)에서 얻은 것이 많아서 이상의 제공(諸公)과 한시대에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영성(寧城)을 이어 문형(文衡)을 관장한 지도 지금 20여 년이나 되었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이미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어 이따금 그 가편 경련(佳篇警聯)들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감에 미쳐서는 한림원의 뭇 선비들 또한 선생을 덮을 이가 없었다.
선생은 고인(古人)의 오묘한 경지에 끝까지 다달아서 그 이치에 깊이 계합(契合)했기 때문에 아무리 갑작스레 생각을 붙여 붓 가는 대로 죽죽 써 내려가도 매양 법도에 적중하여 글자마다 구절마다 모두 주옥(珠玉)을 이루었으니, 선생은 참으로 시에 대하여 삼매경(三昧境)에 이르렀다 하겠다. 그리고 규모(規模)의 방대함 같은 것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에 근원하였고, 보취(步趣)의 민첩함 같은 것은 한유(韓愈)와 백거이(白居易)에 드나들었으되, 그 청신 호매(淸新豪邁)함과 아려 화평(雅麗和平)함은 제가(諸家)를 한데 합쳐서 일대가(一大家)를 이루었으니, 선생은 참으로 시에 집대성(集大成)한 이라 하겠다.
이 때문에 조정의 관원들이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그 시를 얻은 이는 모두가 이를 소중히 간직해서 보배로 삼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상국(上國)에 사신(使臣)으로 가는 이, 제로(諸路)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가는 이, 부신(符信)을 나눠 받고 지방을 안찰(按察)하러 나가는 이를 비롯하여 유인(幽人), 일사(逸士), 산승(山僧), 야객(野客)에 이르기까지 시권(詩卷)을 싸들고 시를 구하러 오는 이가 밤낮으로 모여들었으나, 선생은 좌우로 수응 수답(酬應酬答)하는 가운데 붓놀림이 마치 물 흐르듯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평범한 문사(文士)가 발돋음하여 따를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윽이 살펴보건대, 그 응제(應制), 의고(擬古), 제영(題詠), 증송(贈送), 애만(哀輓) 등 시의 저작과 송(頌), 부(賦)와 오칠언(五七言)의 고풍(古風), 근체(近體), 가행(歌行), 절구(絶句) 등 1만여 수로 시집(詩集)을 만든 것이 50여 권이고, 서(序), 기(記), 설(說), 발(跋), 비명(碑銘), 묘지(墓誌) 등 수백 편으로 문집(文集)을 만든 것이 20여 권인데, 시와 문이 모두 굉심 광활(宏深廣闊)하고 왕양 호한(汪洋浩汗)하여 마치 물이 땅 위를 흘러감에 있어 빙빙 돌아 흘러서는 호해(湖海)가 되고, 콸콸 흘러서는 강하(江河)가 되고, 굽이굽이 꺾여 흘러서는 계간(溪澗)이 되고, 깊이 고여서는 지소(池沼)가 되어 그 크고 작음에 따라서 제각기 가득 찬 것과 같다. 그러니 진실로 오경(五經)을 근본으로 삼고 제자(諸子)를 참고하며 백대(百代)를 꿰뚫고 육합(六合)을 총괄하여 사물(事物)의 근원에 밝아서 성정(性情)의 바름으로 발로된 것이 아니라면, 그 저술(著述)한 것이 어찌 이처럼 풍부하고 화려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 박통(博通)한 학식과 명달(明達)한 재능으로 한림원(翰林院)을 거쳐 대간(臺諫)의 장관(長官)을 역임하고, 제조(諸曹)의 판서(判書)를 다섯 번 지내고, 상부(相府)를 네 번 들어간 동안 40여 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 종정(鐘鼎)에 새겨지고 죽백(竹帛)에 기록될 사항들이 모두 시에 총괄되었다. 시로 말하면 풍풍(??)하고 굉굉(??)한 성음(聲音)이 조화를 잘 이루어 한결같이 아송(雅頌)의 성음을 추급했는지라, 그 후대(後代)를 초월하여 융고(隆古)를 회복한 것이 실로 여기에 있으니, 어찌 문장의 저작을 다만 고금 시세(古今時世)에 따라서 다름이 있다고 하겠는가.
지난 병신년(1476, 성종 7)에 호부랑(戶部郞) 기순(祁順)이 우리나라에 사신(使臣)으로 왔을 적에 선생이 실로 관접(館接)의 명을 받들었는데, 길에서 송영(送迎)하던 즈음과 언덕이랑 진펄을 달리던 때를 당하여, 그는 사물을 보고 회포를 일으킬 때마다 이것을 가영(歌詠)으로 드러내어, 선생과 더불어 서로 갈음하여 시를 주고받으면서 기이하고 웅건함을 겨루어 선생을 압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전후좌우에서 무궁한 소재를 얻어 내어 자유자재로 구사한 결과, 강운(强韻)을 화답함에 있어 아무리 수백 번에 이르러도 내놓을수록 기이하기만 했으니, 어찌 일찍이 그에게 꿀린 적이 있었으랴. 이 때문에 기 호부(祁戶部)가 마침내 속으로 흠모하여, 돌아가서는 심지어 “이와 같은 기재(奇才)는 천하를 통틀어서 찾더라도 많이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까지 했었다. 기 호부는 천하에 뛰어난 선비인데, 그가 이와 같이 탄복하여 중국(中國)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동방(東方)의 문헌(文獻)과 인재(人才)의 성대함을 더욱 믿게 하였으니, 선생은 참으로 이른바 국가의 광영(光榮)인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문집에 서문을 쓰면서 전대(前代)로부터 우리 동방의 먼 옛날 시사(詩士)들까지 죽 열거하여 차례대로 서술하고 금세(今世)까지 빠뜨리지 않은 까닭은, 진실로 문장이 천하에 있어 고금 시세의 다름이 없어서 시파(詩派)의 전(傳)함이 실로 선생에게 있기 때문이니, 이 또한 마치 한자(韓子 한유(韓愈))가 도통(道統)의 전(傳)함을 논하면서 탕(湯),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를 서술하여 요순(堯舜)에 연접(連接)시킨 뜻과 같다고 하겠다. 여기에 대해 선생 또한 내 말을 아첨하는 말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부처님 머리 위에 똥을 싸 붙이면서도 나 역시 남의 비난받는 것을 피하지 않고 마침내 이렇게 써서 사가집 서로 삼는 바이다.
홍치(弘治) 원년(元年)인 무신년(1488, 성종 19) 정월 인일(人日)에 순성명량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서하군(西河君) 임원준 자심(任元濬子深)은 서하다.
[주D-001]종정(鐘鼎)에 …… 기록될 : 종정은 종과 가마솥으로, 옛날 국가에 큰 공훈(功勳)을 세운 사람에 대해서는 이 종과 가마솥에 그 공훈을 새겨서 후세에 전했던 것을 말하고, 죽백(竹帛)은 옛날 종이가 없던 때에 죽간(竹簡)과 백견(白絹)에 글을 기록했던 데서, 즉 사서(史書)를 가리킨다.
[주D-002]언덕이랑 …… 때 : 《시경(詩經)》 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에, “반짝반짝 빛나는 꽃들이여, 저 언덕이랑 진펄에 피었네. 부지런히 달리는 사나이는, 행여 못 미칠까 염려하도다. 내가 탄 말은 망아지인데, 여섯 가닥 고삐가 매끈하도다. 이리저리 채찍질하여 달려서, 두루 찾아서 자문을 하도다.〔皇皇者華 于彼原? ??征夫 每懷靡及 我馬維駒 六?如濡 載馳載驅 周爰咨諏〕” 한 데서 온 말로, 이 시는 사명(使命)을 받고 떠난 신하가 행여라도 임금의 뜻에 미치지 못할까 매양 염려하는 뜻을 노래한 것인데, 전(轉)하여 여기서는 사명(使命)을 수행하는 일을 의미한다.
[주D-003]국가의 광영(光榮) : 《시경》 소아 남산유대(南山有臺)에, “즐거울사 군자님은, 국가의 광영이로다.〔樂只君子邦家之光〕”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부처님……붙이면서도 : 남의 훌륭한 저서(著書)에 변변찮은 서문(序文)이나 평어(評語)를 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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