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봉(參奉) 2인.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신전(神殿)은 엄숙하고 깊은데, 새벽 햇빛 밝게 오르네. 요지(瑤池)에 채장(綵仗)이 벌여 있고, 비단 문턱에 향연(香煙)이 둘렀구나. 궁관(宮官)이 창합(?闔 궁궐의 정문) 여니, 푸른 무늬 놓은 문이 깊고도 그윽하네. 소신(小臣)이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리며, 목목(穆穆)하신 천표(天表 제왕의 의(儀))를 우러르니, 용안(龍顔) 일각(日角) 준상(俊爽)함이 천하에 드물도다. 어찌 뜻하였으랴, 중동(重瞳)의 빛, 신묘한 화필(?筆) 끝에서 나왔을 줄이야. 삼가고 두려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옵고, 흥건히 땀만 흘러 도포 함빡 적시었네. 아, 나의 출생(出生) 너무나 늦었으니, 정호(鼎湖)의 궁검(弓劍)이 아득하여라. 크도다, 제세안민(濟世安民)하신 공적 하늘과 같이 넓으셨고, 고려 이미 운(運) 다하여 병란(兵亂)이 연이었네. 비 바람에 시달리며 노고함이 몇 해런고, 남으로 출정하고 북에서 토벌하셨네. 밝은 전략 하늘과 꾀하시니, 신병(神兵)은 이로 인해 적을 빨리 소탕(掃蕩)했네. 드디어 삼한(三韓)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음에서 벗어나서 태평세계 맞게 했네. 육룡(六龍)이 갑자기 하늘로 날아 올라가니, 태양의 수레 황도(黃道)에 올랐도다. 화산(華山)의 남쪽에 수도(首都)를 정하시니, 이 서울 주(周) 나라의 풍(?)ㆍ호(鎬)와 비등하구나. 태평(太平) 제도를 넓혀 베푸니, 문물(文物)은 지극히 아름답고 빛나도다. 전조(前朝)의 규모를 누(陋)하게 보니, 자손에게 규모를 끼침이 어찌 초초(草草)할까 보냐. 크게 나타내는 신성(神聖)한 자손 있어, 대업(大業)을 이어받아 다함이 없을지고. 남기신 화상(?像)은 옛 도읍을 진압(鎭壓)하고, 황령(皇靈)은 저 하늘 높이 계시리.” 하였다. 객관(客館) 서거정(徐居正)의 동헌기(東軒記)에, “신라가 계림(鷄林)에 도읍하였더니,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자, 나라가 없어지고 경주(慶州)로 되었다. 얼마 뒤에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하였으며, 성종(成宗)은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유수를 폐지하고 경주 방어사(慶州防禦使)로 강등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서 유수를 다시 두었으며, 중간에 변고(變故)를 겪어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하였다. 고종(高宗)은 다시 유수로 하였고, 충렬왕(忠烈王)은 계림부(鷄林府)로 고쳐 일컬었다. 아조(我朝)의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 15년에 다시 경주부로 하고,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 때에 태조강헌대왕의 화상을 집경전에 모시었다. 경주부는 경상(慶尙) 전도에서 제일 크다. 토지는 비옥하고 평평하고, 백성은 부유하며 많다. 인심은 순박하여 옛날 신라 때에 유풍(遺風)이 있다. 여기저기에 경승지(景勝地)와 옛 현인(賢人)들의 유적(遺跡)이 있어 전대 인물들의 풍류를 넉넉히 상상할 수 있다. 거정(居正)이 젊었을 때에 영남(嶺南)을 유람하여 여러 이름난 곳을 거쳐 경주에 이르니, 번화함과 아름다움이 실로 동남(東南)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었다. 다만 객관이 누추하고 좁아서 비록 의풍루(倚風樓) 한 채가 있었으나, 올라가 조망(眺望)하며 답답한 심회를 시원히 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것이 이 고을의 큰 결점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경주로 된 것이 고려 때부터 이미 5백 년이 된다. 이 고을에 원으로 온 이가 어진 이는 몇 사람이며, 유능한 이는 몇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찌 한 사람도 퇴락(頹落)한 객관을 수리한 사람이 없어 이 지경이 되게 했단 말인가.’ 하였다. 임오년 겨울에 내가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경주에 오니, 나의 벗 자헌대부(資憲大夫) 김담(金淡)이 부윤(府尹)이었으며, 승의랑(承議郞) 신중린(辛仲?)이 통판(通判)이었다. 감사(監司) 복천(福川) 권개(權愷)공이 의풍루 위에서 나를 위하여 주연을 열었다. 내가 전에 생각했던 것을 이야기하였더니 부윤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가 내 마음을 먼저 알고 있네. 이미 통판과 의논하여 장차 객관을 중수(重修)하기로 하고, 재목을 축적하고 기와를 구우면서 시일을 기다리고 있을 뿐일세.’ 하였다. 감사가 듣고 또한 칭찬하였다. 거정이 말하기를, ‘경주 객관이 새로 되는 것에 운수가 있는 게로군. 어진 부윤이 있고 어진 통판이 있고 또 어진 감사가 있어 뜻이 같고 의논이 합치하였으니 일은 기일을 지정하여 할 수 있게 되었군.’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부윤은 이조판서가 되어 소환되고, 계미년 여름에 봉원(蓬原) 정흥손(鄭興孫)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다. 신통판(辛通判)이 일의 유래를 자세히 사뢰고, 객관의 옛터에다 규모를 더 크게 경영하여 지으려고 하니, 고을의 대족(大族)인 지금 영의정 고령부원군(領議政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공과 대사성(大司成) 김영유(金永濡)공이 그 일을 가상히 여겨 대목[梓人] 서휴(徐休)를 보내어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먼저 대청(大廳) 5칸을 세우니 앞 뒤에 툇마루가 있고, 크고 시원하고 널찍하다. 동편과 서편에 헌(軒)이 있으니, 각각 상방(上房)과 곁방[挾室]이 있어 서늘하고 따뜻함이 알맞게 되어 있다. 단청을 하니 무늬와 광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보는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갑신년 겨울에 신통판이 감찰(監察)이 되어 돌아가니, 양석견(楊石堅)공이 와서 수선하여 낭무(廊?)를 날개처럼 붙이고 담을 둘러쌓아 공사가 완성되었다. 병술년 봄 정월에 정부윤이 임기가 차서 소환되고, 화성(和城) 최선복(崔善復)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으며, 2월에는 양통판(楊通判)이 체직되고 정란손(鄭蘭孫)이 이어 통판이 되었다. 아직 마치지 못한 공사는 두 후(侯)가 조치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루는 신공(辛公)이 나에게 말하기를, ‘경주의 동헌(東軒)이 새롭게 되었는데, 의풍루가 또 불타 버려서 선유(先儒) 가정(稼亭) 이선생(李先生)의 기(記)도 따라 없어졌으니, 경주의 지나간 문적[牒]을 증거할 것이 없네. 일의 시말(始末)을 알기로는 그대 만한 이가 없으니, 부디 기(記)를 써주게.’ 하였다. 거정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날 경주의 부족한 점이라고 여기던 것을 몇 분의 힘으로 한 번에 크게 새로 중수하였으니 어찌 기뻐하며 쓰지 않겠는가. 더구나 《춘추(春秋)》에도 공사를 일으킨 것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그것은 민사(民事)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인 것이네.’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요즘 수령(守令)이 된 자는 거의 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많은 사람을 동원하며, 시기는 적당치 못한데 공사를 지나치게 벌려서, 누각(樓閣) 하나를 세우고 청사(廳舍) 하나를 영조(營造)하는 데에도 정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해침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김부윤과 신통판이 앞에서 일을 처음 시작하여서는 목재 하나와 돌 한 개도 비용을 백성에게 부담시키지 않았으며, 뒤를 이은 정부윤과 양통판은 급히 서두르지도 않고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면서 부리기를 때맞추어 하였으니, 이 몇 분의 경우에는 춘추(春秋)의 예(例)를 보더라도 포장(褒?)하고 기록할 만한 것이다. 거정은 직책이 예원(藝苑)에 참여하여 있으니 글을 잘 못한다고 하여 사양할 수 없기에, 우선 일의 대개를 써서 돌려 보낸다. 최(崔)ㆍ정(鄭) 두 후(侯)의 명성에 관한 것은 계속하여 쓸 사람이 또한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였다. 영청(營廳) 경주부가 예전에는 관찰사(觀察使)의 본영(本營)이었으므로 감영(監營)의 청사가 있다.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신전(神殿)은 엄숙하고 깊은데, 새벽 햇빛 밝게 오르네. 요지(瑤池)에 채장(綵仗)이 벌여 있고, 비단 문턱에 향연(香煙)이 둘렀구나. 궁관(宮官)이 창합(?闔 궁궐의 정문) 여니, 푸른 무늬 놓은 문이 깊고도 그윽하네. 소신(小臣)이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리며, 목목(穆穆)하신 천표(天表 제왕의 의(儀))를 우러르니, 용안(龍顔) 일각(日角) 준상(俊爽)함이 천하에 드물도다. 어찌 뜻하였으랴, 중동(重瞳)의 빛, 신묘한 화필(?筆) 끝에서 나왔을 줄이야. 삼가고 두려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옵고, 흥건히 땀만 흘러 도포 함빡 적시었네. 아, 나의 출생(出生) 너무나 늦었으니, 정호(鼎湖)의 궁검(弓劍)이 아득하여라. 크도다, 제세안민(濟世安民)하신 공적 하늘과 같이 넓으셨고, 고려 이미 운(運) 다하여 병란(兵亂)이 연이었네. 비 바람에 시달리며 노고함이 몇 해런고, 남으로 출정하고 북에서 토벌하셨네. 밝은 전략 하늘과 꾀하시니, 신병(神兵)은 이로 인해 적을 빨리 소탕(掃蕩)했네. 드디어 삼한(三韓)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음에서 벗어나서 태평세계 맞게 했네. 육룡(六龍)이 갑자기 하늘로 날아 올라가니, 태양의 수레 황도(黃道)에 올랐도다. 화산(華山)의 남쪽에 수도(首都)를 정하시니, 이 서울 주(周) 나라의 풍(?)ㆍ호(鎬)와 비등하구나. 태평(太平) 제도를 넓혀 베푸니, 문물(文物)은 지극히 아름답고 빛나도다. 전조(前朝)의 규모를 누(陋)하게 보니, 자손에게 규모를 끼침이 어찌 초초(草草)할까 보냐. 크게 나타내는 신성(神聖)한 자손 있어, 대업(大業)을 이어받아 다함이 없을지고. 남기신 화상(?像)은 옛 도읍을 진압(鎭壓)하고, 황령(皇靈)은 저 하늘 높이 계시리.” 하였다. 객관(客館) 서거정(徐居正)의 동헌기(東軒記)에, “신라가 계림(鷄林)에 도읍하였더니,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자, 나라가 없어지고 경주(慶州)로 되었다. 얼마 뒤에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하였으며, 성종(成宗)은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유수를 폐지하고 경주 방어사(慶州防禦使)로 강등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서 유수를 다시 두었으며, 중간에 변고(變故)를 겪어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하였다. 고종(高宗)은 다시 유수로 하였고, 충렬왕(忠烈王)은 계림부(鷄林府)로 고쳐 일컬었다. 아조(我朝)의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 15년에 다시 경주부로 하고,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 때에 태조강헌대왕의 화상을 집경전에 모시었다. 경주부는 경상(慶尙) 전도에서 제일 크다. 토지는 비옥하고 평평하고, 백성은 부유하며 많다. 인심은 순박하여 옛날 신라 때에 유풍(遺風)이 있다. 여기저기에 경승지(景勝地)와 옛 현인(賢人)들의 유적(遺跡)이 있어 전대 인물들의 풍류를 넉넉히 상상할 수 있다. 거정(居正)이 젊었을 때에 영남(嶺南)을 유람하여 여러 이름난 곳을 거쳐 경주에 이르니, 번화함과 아름다움이 실로 동남(東南)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었다. 다만 객관이 누추하고 좁아서 비록 의풍루(倚風樓) 한 채가 있었으나, 올라가 조망(眺望)하며 답답한 심회를 시원히 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것이 이 고을의 큰 결점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경주로 된 것이 고려 때부터 이미 5백 년이 된다. 이 고을에 원으로 온 이가 어진 이는 몇 사람이며, 유능한 이는 몇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찌 한 사람도 퇴락(頹落)한 객관을 수리한 사람이 없어 이 지경이 되게 했단 말인가.’ 하였다. 임오년 겨울에 내가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경주에 오니, 나의 벗 자헌대부(資憲大夫) 김담(金淡)이 부윤(府尹)이었으며, 승의랑(承議郞) 신중린(辛仲?)이 통판(通判)이었다. 감사(監司) 복천(福川) 권개(權愷)공이 의풍루 위에서 나를 위하여 주연을 열었다. 내가 전에 생각했던 것을 이야기하였더니 부윤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가 내 마음을 먼저 알고 있네. 이미 통판과 의논하여 장차 객관을 중수(重修)하기로 하고, 재목을 축적하고 기와를 구우면서 시일을 기다리고 있을 뿐일세.’ 하였다. 감사가 듣고 또한 칭찬하였다. 거정이 말하기를, ‘경주 객관이 새로 되는 것에 운수가 있는 게로군. 어진 부윤이 있고 어진 통판이 있고 또 어진 감사가 있어 뜻이 같고 의논이 합치하였으니 일은 기일을 지정하여 할 수 있게 되었군.’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부윤은 이조판서가 되어 소환되고, 계미년 여름에 봉원(蓬原) 정흥손(鄭興孫)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다. 신통판(辛通判)이 일의 유래를 자세히 사뢰고, 객관의 옛터에다 규모를 더 크게 경영하여 지으려고 하니, 고을의 대족(大族)인 지금 영의정 고령부원군(領議政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공과 대사성(大司成) 김영유(金永濡)공이 그 일을 가상히 여겨 대목[梓人] 서휴(徐休)를 보내어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먼저 대청(大廳) 5칸을 세우니 앞 뒤에 툇마루가 있고, 크고 시원하고 널찍하다. 동편과 서편에 헌(軒)이 있으니, 각각 상방(上房)과 곁방[挾室]이 있어 서늘하고 따뜻함이 알맞게 되어 있다. 단청을 하니 무늬와 광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보는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갑신년 겨울에 신통판이 감찰(監察)이 되어 돌아가니, 양석견(楊石堅)공이 와서 수선하여 낭무(廊?)를 날개처럼 붙이고 담을 둘러쌓아 공사가 완성되었다. 병술년 봄 정월에 정부윤이 임기가 차서 소환되고, 화성(和城) 최선복(崔善復)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으며, 2월에는 양통판(楊通判)이 체직되고 정란손(鄭蘭孫)이 이어 통판이 되었다. 아직 마치지 못한 공사는 두 후(侯)가 조치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루는 신공(辛公)이 나에게 말하기를, ‘경주의 동헌(東軒)이 새롭게 되었는데, 의풍루가 또 불타 버려서 선유(先儒) 가정(稼亭) 이선생(李先生)의 기(記)도 따라 없어졌으니, 경주의 지나간 문적[牒]을 증거할 것이 없네. 일의 시말(始末)을 알기로는 그대 만한 이가 없으니, 부디 기(記)를 써주게.’ 하였다. 거정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날 경주의 부족한 점이라고 여기던 것을 몇 분의 힘으로 한 번에 크게 새로 중수하였으니 어찌 기뻐하며 쓰지 않겠는가. 더구나 《춘추(春秋)》에도 공사를 일으킨 것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그것은 민사(民事)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인 것이네.’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요즘 수령(守令)이 된 자는 거의 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많은 사람을 동원하며, 시기는 적당치 못한데 공사를 지나치게 벌려서, 누각(樓閣) 하나를 세우고 청사(廳舍) 하나를 영조(營造)하는 데에도 정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해침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김부윤과 신통판이 앞에서 일을 처음 시작하여서는 목재 하나와 돌 한 개도 비용을 백성에게 부담시키지 않았으며, 뒤를 이은 정부윤과 양통판은 급히 서두르지도 않고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면서 부리기를 때맞추어 하였으니, 이 몇 분의 경우에는 춘추(春秋)의 예(例)를 보더라도 포장(褒?)하고 기록할 만한 것이다. 거정은 직책이 예원(藝苑)에 참여하여 있으니 글을 잘 못한다고 하여 사양할 수 없기에, 우선 일의 대개를 써서 돌려 보낸다. 최(崔)ㆍ정(鄭) 두 후(侯)의 명성에 관한 것은 계속하여 쓸 사람이 또한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였다. 영청(營廳) 경주부가 예전에는 관찰사(觀察使)의 본영(本營)이었으므로 감영(監營)의 청사가 있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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