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우암 송시열이 쓴 문헌서원 편액 |
|
서원은 조선시대 그 지방 선비들이 세운 사립학교이다. 서원은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학생을 교육하기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운 서원은 1542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지금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주세붕은 안향(安珦)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학생을 모아 가르쳐 제사와 교육을 겸한 배움터를 만들었다. 그 후 이황(李滉)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사액과 논밭을 주도록 건의하여 명종이 1550년 백운동서원에 명종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쓴 편액과 서적, 노비를 내려 줌으로써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
|
|
|
▲ 문헌서원과 이색 영당, 장판각, 이색 신도비 등이 어우러진 우리고장 최고의 문화재 |
|
|
|
|
|
▲ 보물 제1215호로 지정되어 있는 목은 이색 영정 |
|
문헌서원은 1584년 한산군수 이성중(전주 이씨)이 영모리에 문효공 이곡과 문정공 이색을 모시는 효정사(孝靖祠)를 세운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효정사는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 이에 1610년에 지금의 한산면 죽산리 고촌마을에 문헌서원을 짓고 1611년에 사액(賜額)을 받게 된다. 배향인물은 이곡, 이색, 이종학, 이자, 이개, 이종덕 순으로 모시게 된다. 그 후 문헌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毁撤)되어 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오다 1968년 고촌마을에서 기산면 영모리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영모리에 세운 문헌서원은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25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
|
▲ 문헌서원의 사당에는 이곡, 이색, 이종학, 이자, 이개, 이종덕 등 여섯분을 배향하고 있다. |
|
고촌 문헌서원은 주로 한산 사람들이 가정과 목은의 사상을 공부하기 위하여 모여 들었을 것이다. 이들을 지도한 사람은 송준길, 권성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의 한산에 많은 사람들이 한학을 공부하고 그 뜻을 따르는 것도 아마 문헌서원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문헌서원이 설립 취지가 가정과 목은을 배우고 익히려고 하였기에 한산문화는 물론이고 서천문화도 가목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 서천사람들의 선비정신은 이곳 문헌서원에서 출발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
|
|
|
▲ 한산면 죽촌리 고촌마을 옛 문헌서원 터에는 ‘문헌서원유허비’라고 쓰여진 비석만이 외롭게 옛 터를 지키고 있다. |
|
영모리 문헌서원의 복원은 자연스럽게 서천문화를 복원한 것이다. 고촌에 터만 남아 있던 서원을 이색의 묘소와 영당이 있는 기산면 영모리 기린산 아래에 복원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모리 문헌서원에는 이색 묘소, 이색의 영정을 모신 영당, 제실, 장판각, 복원된 문헌서원이 있게 되었다.
1968년 복원된 문헌서원은 당시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의 성리학적 학통을 계승하고 전통문화를 선양하고자 재건하였다. 오랜만에 글 읽는 소리가 마을 속으로 흘러 나왔다. 그러나 복원된 문헌서원에서의 글 읽기가 구학문이라 이유로 교육의 기능은 점차 쇠퇴하고 제사기능을 역할을 할 뿐이었다. 교육기능이 사라지자 문헌서원은 낮에만 사람이 오고가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한산이씨 문중에서 조상을 찾는 사람들, 서천문화를 알기 위해 찾는 사람들, 방학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는 학생들로 발길은 이어지고 있지만 문헌서원이 서원으로서의 교육기능을 충실히 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
|
|
|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된 가정목은선생문집판. |
|
이러한 부분을 보완하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 현재 군에서 진행 중인 전통역사마을 조성사업이다. 문헌서원과 그 일원의 소유자인 한산 이씨 문중과 군민들, 관계기관이 합심하여 고민을 거듭한다면 소수서원이나 장성의 필암서원보다 더 활용성 높은 우리고장의 문화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이강선 프리랜서>
*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지금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