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는 1300년동안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고유의 식품이다.우리 김치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삼국사기.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채소를 즐겨 식용하였고 소금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사실, 젓갈과 장 등의 발효 식품이 만들어진 시기 등을 고려할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김치무리가 제조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김치무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동이전" 고구려조이다. “고구려인은 술빚기, 장 담기, 젓갈 등의 발효 음식을 매우 잘한다"는 기록은 이 시기에 이미 저장 발효 식품이 생활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문왕이 683년에 왕비를 맞이하면서 내린 폐백품목 가운데 간장, 된장, 젓갈무리가 들어 있어 발효 식품이 상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유사"에도 소금에 절인 김치와 젓갈이 나오지만 양념이 가미된 담금 형태의 김치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이 시기에 산출된 채소인 순무, 외, 가지, 박, 부추, 고비, 죽순, 더덕, 도라지, 고비 등으로 소금에만 절인 것이 주된 김치무리였을 것이다. 그밖에 이들 채소를 장에 절인 형태, 초에 절인 형태, 술지게미에 절인 형태, 소금과 곡물 죽에 절인 형태 등이 있었다고 추축된다. 이런 절임법은 오늘날의 장아찌형으로 우리나라는 풍부한 해산물과 양질의 채소, 훌륭한 발효 기술로 장아찌형 김치무리와 생선, 곡물, 채소, 소금으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가자미식해, 북어식해 같은 식해형 김치무리가 존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백제 문화로서 서기 600년경에 창건된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100센티미터 이상 되는 대형 토기들이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승려들이 생활하였던 곳에서 출토되었다. 크고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땅을 파고 묻어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대형 토기는 겨우살이에 대비한 김장독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며 삼국시대 김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 되고 있다.
이외에도 신라시대 성덕왕 19년(720)에 세워져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법주사 경내에 있는 큰 돌로 만든 독은 김칫독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김치무리를 만들어 저장한 것으로 생각하면 김장의 기원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기.
조선 초기의 김치
조선시대에는 초기 문예진흥책과더불어 정엽, 인쇄술, 천문학, 등의 산업이 급격히 발달하였다. 따라서 채소류의 재배도 더욱 풍성해지면서 김치류의 제조도 활발해졌고 인쇄술의 발달에 따른 농서(農書)의 폭넓은 보급 덕분에 채소 재배 기술이 향상되었다. 또 외국에서 여러가지 채소가 유입되어 김치 재료가 다양해졌고 여러형태의 담금법도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조리 방법을 기록한 여러 문헌에는 순무, 무, 오이, 가지, 동아, 산갓, 죽순, 파 등이 김치의 주재료로 쓰이고 있다. 김치는 각 지역 산물에 따라 다르게 변화하였기 때문에 향토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꿩(생치, 生稚)이 김치의 재료로 이용되는 등 채소에 육류가 가미된 형태를 보여 주기도 한다.
김치는 단순 절임의 장아찌형과 싱건지 형태의 김치가 있으며 나박지형, 동치미형 물김치까지 등장하고 있다. 김치의 국물색을 낼 때는 맨드라미나 잇꽃, 연지 등으로 붉은 색을 내기도 하였다. 또 김치에 양념 사용이 많아져 주재료와 부재료의 구분이 뚜렷해진다.
조선 중기 이후의 김치
조선조 중기 이후에는 상업의 발달에 따라 상품 작물의 재배도 활발해졌다. 각종 전래 채소와 과수 재배, 원예 작물과 약초가 널리 보급되었고 이것들이 김치의 주재료, 부재료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전래 식품으로는 호박, 고추, 옥수수, 고구마, 동아, 사과, 수박 등인데 특히 17세기 초에 유입된 고추는 우리 식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다. 고추가 김치 양념의 하나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담백한 맛의 김치무리가 조화미(調和味)로 바뀌게 되었고 주재료와 양념 재료의 종류가 늘어나게 되었다. 고추는 "지봉유설(芝峰類說)"(1613년경)에 그 기록이 보이나 김치에 이용되었다는 문헌기록은 "산림경제(山林經濟)"(1715년)에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면서 젓갈이 다양하게 쓰이게 되었다. 식물성 재료에 동물성 재료를 첨가하여 맛과 영양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으며 김치의 감칠맛을 더욱 향상시켰다.
김치의 주재료도 배추와 무가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특히 김치의 대명사인 통김치는 배추의 품종개량이 이루어져 반결구형, 결구형 배추가 등장하기 시작한 19세기부터 대표적인 김치가 되었다. 김치 담그는 법도 장아찌형, 물김치형, 소박이형, 섞박지형, 식해형 김치 등으로 다양하게 발달하였고 제조방법도 퇴렴하여 김치를 담는 2단계 담금법으로 발전하였다.
대략 고려시대의 절임형 김치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던 단순한 양념이 이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사용한 김치 담그는 법으로 발달하여 보편화되기 시작한다. "음식디미방"(1670년경)은 마늘 김치에 천초가 양념으로 사용되었고 또 육류인 꿩을 오이와 함께 담근 생치 김치가 기록되어 있다.
1766년경에 발간된 "증보산림경제"에 무려 41종의 김치무리가 다양한 형태로 수록되어 있어 대단히 귀중한 문헌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책에는 오늘날 김치의 대명사인 배추김치가 `숭침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 배추김치는 생선과 고기가 곁들여진 것이 특이하다. 또 무의 뿌리와 잎이 한데 붙은 채로 담근 오늘날의 총각김치의 원형이 선보이며 가지, 오이의 세 면에 칼집을 내서 고춧가루와 마늘을 양념으로 하여 소를 채운 소박이형 김치, 배추를 무와 한데 섞어 담근 섞박지, 동치미 등이 문헌상 처음 소개되고 있다.
놀랍게도 배추나 무 등을 익혀서 김치를 담가 치아가 좋지 않은 노인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한 숙(熟)김치도 있다. 그 밖에 채소에 곡물과 생선, 소금으로 숙성시켜 만든 식해형 김치, 새우젓을 사용한 젓갈김치, 초절이김치, 짠지 등 다양한 형태의 김치무리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헌상 고춧가루가 김치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이하며, 김치를 땅속에 묻은 독 속에 꼭꼭 눌러 담아 보관하면서 숙성시킨 발효 김치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 주고 있어 김치의 역사적인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려시기.
고려 초기는 사회 전반에 숭불 풍조가 만연하여 육식을 절제하고 채소요리를 선호하였다. 전시대의 김치 형태에서 순무, 무, 가지, 오이, 부추, 미나리, 고비, 아욱, 박, 고사리, 도라지, 토란, 대산(大蒜),죽순, 형개, 동과(冬瓜,동아), 산갓, 황과, 산추, 파, 생강 등으로 재배 채소의 종류가 더욱 많아지고 나박지형의 김치가 선보인 것이 특징이다.
김치에 있어 절임 형태의 김치무리와 함께 새롭게 개발된 국물 있는 김치무리 곧 동치미류가 등장하여 분화된 형태를 보여준다. 이 시기에도 단순 절임형 김치무리에 마늘 등의 양념과 천초, 피, 귤피(橘皮) 등의 향신료가 가미되는 양념형 김치무리가 등장하게 된다.
"동국이상국집"의 "가포육영(家圃六泳)"에는 “무청을 장 속에 박아 넣어 여름철에 먹고 소금에 절여 겨울철에 대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장아찌와 김치가 분리된 것을 나타낸다. 또한 겨울을 대비한다는 것으로 보아 김장의 풍습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소금에 절인 김치류는 오늘날의 짠 무를 물에 희석하여 먹는 나박지, 동치미 등의 침채류를 생각할 수 있다.
고려 말 이달충(李達衷)이 지은 "산촌잡영(山村雜詠)"이라는 시에는 “여귀풀에 마름을 넣어 소금 절임을 하였다."는 구절이 있어 김치무리 야생초를 이용하여 제철 김치의 맛을 즐겼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또 "목은집(牧隱潗)"에 나오는 이색의 시구에 `침채(沈菜)', `산개염채(山芥鹽菜)', `장과(藏瓜, 된장에 담근 오이장아찌)' 등이 나온다. 여기에서 김치란 우리말의 직접적인 한자 표기인 `沈菜'가 선보이고 있으며 장아찌가 문헌상으로 처음 소개되고 있다. 한편 "고려사"-"예지(禮志)"에 `근저(미나리 김치)', `구저(부추김치)', `청저(나박김치)', `순저(죽순김치)', 등의 김치무리가 있었다. 이러한 제향음식(祭享飮食)과 관련되는 김치류 외에도 더 많은 종류가 있었을 것이다.
고려 사회에서의 김치는 앞서 밝힌 채소류가 주원료로 쓰인 단순 절임형 김치무리가 일반적이었을 것이며 그 밖에 장아찌형, 나박지형 김치와 양념이 가미된 김치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김치의 원료에 있어 배추가 주재료로 된 통배추김치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있다.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쓰여진 숭채(배추)는 약용으로 사용되었고 김치로 이용된 문헌상의 기록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배추김치의 보편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보너스~~~
김치의 어원.
김치를 의미하는 옛말은‘디히'와‘지'인데‘지'는 지금까지도 김치의 다른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상고시대에는 김치를‘저(菹)'라는 한자어로 표기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김치·젓갈무리인‘저해'가 기록되어 있으며 또"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도 ‘저'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지(漬)', `염지(鹽漬)', `지염(漬鹽)', `침채(沈菜)', `침저(沈菹)', `침지(沈漬)', `엄채(掩菜)', `함채(鹹菜)' 등이 김치무리로 표기되었다. `저'란 날채소를 소금에 절여 차가운 데 두고 숙성시킨 김치무리를 말하는 것이다. 19세기 초의 저서인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저에 대한 설명과 함께 많은 종류의 김치가 선보이고 있다.
김치란 말은 `침채'라는 한자어에서 비롯되었다. 이 한자어는 한자의 본고장인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자인 듯 하다. 이 단어는"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라고 하였는데 이 가 에서, `짐치', 다시 `김치'의 여러 단계로 어음변화가 일어나 김치가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보다 더 오랜 고유어로 `디히'가 있다. "두시언해(杜詩諺解)"권3에 원문의 `동저(冬菹)'를 라 번역한 데서 이 귀한 말을 확인할 수 있다. 남도 지역 특히 전라도에서는 지금도 김치를 `지'라고 하며 황해도와 함경도, 서울말에도 `오이지', `짠지' 등의 `지'가 있는데 알고 보면 이 `지'는 `디히'가 변한 것으로 이는 김치의 역사가 자못 오래되었음을 말하며 그 생명력이 긴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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