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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석궁(瑤石宮) 과부와 사랑으로 파계한 원효대사(元曉大師)

장안봉(微山) 2012. 12. 2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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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석궁(瑤石宮:지금은 음식점으로)

 

 

요석궁(瑤石宮) 과부와 사랑으로 파계한 원효대사(元曉大師)


신라의 수도(首都)였던 慶州는 지금도 王朝時代의 그 기품(氣品)을 유지(維持)하고 있는 곳이다. 신라 때는 그냥 京(경)이라 했는데 고려 때 동경(東京) 朝鮮 時代에 慶州라 했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분황사 영묘사 같은 큰 사찰을 일으키고 자장(慈藏)의 건의에 황룡사(黃龍寺) 9층탑을 축조(築造)하는 등 불교를 장려 했다. 지귀(志鬼)라는 남성이 女王을 사모하다 죽어 그 혼령(魂靈)이 불로 되어 탑을 돌았다는 설화(說話)가 불탑의 배경이다.

원효(元曉:617-686)신라불교(新羅佛敎)의 활력을 불어 넣었다. 훗날 원효(元曉)를 무쟁국사(無諍國師)라 추봉(追封)하고 비석까지 세웠다. 원효(元曉)의 미타증성가(彌陀證性歌)는 미타신앙의 정수를 보여준다.


미타증성가(彌陀證性歌)-원효


乃往過去久遠世 有一高士號法藏

내왕과거구원세 유일고사호법장


初發無上菩堤心 出俗入道破諸相

초발무상보리심 출속입도파제상


雖知一心無二相 而愍群生沒苦海

수지일심무이상 이민군생몰고해


起六八大超誓願 具修淨行離諸穢

기육팔대초서원 구수정행이제예


아주오래전 어떤 세상에 법장이라는 높은 법사가 있어,

처음으로 더할 나위 없는 보리심 내고

세속 떠나 도를 닦아 모든 차별상을 부수었다.

한 마음에 두 가지 상이 차별 없음을 알면서도

고해에 빠진 군생을 가엾이 여겨,

육팔(사십팔)의 뛰어난 큰 서원을 세워

깨끗한 업을 닦아 모든 재앙 떠났도다.


원효.(元曉 617∼686년).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씨. 원효는 법명, 아명은 서당(誓幢).

648년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새벽을 열어간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誓幢)이라 하였다. 서당은 '첫새벽'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 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원효대사(元曉大師) 요석궁 과부와 사랑으로 파계


무애거사 원효(元曉)가 파계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무렵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성사(聖師)는 어느 날 상례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했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려나.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박으리.”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만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마도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당시에 요석궁(瑤石宮)에는 과부 공주가 있었다.


백제와의 전투에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둘째 딸 요석궁주가 떠올랐던 것이다. 원효는 워낙 박식하고 뛰어난 고승이라 자신이 자주 조언을 구하는 까닭에 인연도 있었고 공주 역시 그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한 번은 공주가 그를 위해 승복과 모란꽃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瑤石宮)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명을 받아 원효를 찾고 있을 때에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汶川橋)를 지나다가 만나게 되었다.

나졸들은 문천교 밑에 숨어 있다가 원효가 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길을 막은후 요석궁(瑤石宮)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원효가 껄껄 웃으며 못 가겠다고 하자 나졸 중의 대표 한 사람 이 자신과 무술을 겨루어 대사가 지면 요석궁(瑤石宮)으로 가고 반대로 이기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 말에 대사는 족히 승낙을 하고 무술을 겨루었는데 출가하기 전 낭도로서 무예가 특출했던 원효와 나졸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요석궁(瑤石宮)으로 꼭 모시고 오라는 지엄한 명을 받은 나졸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원효에게 달려 들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졸들이 덤비는대로 원효대사는 가볍게 들어 문천교 밑으로 떨어뜨리니 다리 밑에는 허위적거리는 나졸들이 점점 늘게 되었다.

마지막 나졸 한 명과 함께 원효가 문천교 밑으로 일부러 빠지니 나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모르고 자연스럽게 요석궁(瑤石宮)으로 모시고 갈 수 있었다.

궁리가 원효를 요석궁(瑤石宮)으로 인도하여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게로 원효는 대궐에서 3일 동안 공주와 함께 지냈다.

승려의 신분으로서는 파계였으나, 인간 원효에게는 정말 속세에서 한 번 뿐인 꿈같은 나날이었다. 3일이 지난 후 아무도 모르게 궁을 빠져 나왔다. 그 후 요석공주에게 태기가 있었고 10달이 지난 후 신라 10현인 중 한 분인 설총(薛聰)을 낳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


위의 기록과 같이 원효는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자루 없는 도끼, 즉 옥문(玉門 : 陰門)을 빌려달라고 하여 하늘을 떠받칠 기둥, 즉 자신의 ‘물건’으로 설총(薛聰)을 잉태하게 했으며,


이렇게 파계한 다음인 문무왕 1년(661)에 후배 의상(義湘)을 데리고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가 대오 해탈했던 것이다.



거리낌이 없는 삶으로, 대중속의 포교


스님은 요석공주(瑤石公主)와 결혼하여 파계하고 자기를 ‘아랫 것 중의 아래’라는 뜻의 복성거사(卜姓居士) 혹은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며 무아행을 폈다. 즉 항간에 나가 표주박에 걸림이 없다는 ‘무애(無碍)’라는 글을 새겨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며, 거지나 창기들을 비롯한 하층민중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염불(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남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교화하였다.


이 때부터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화엄경>의 ‘모든 것에서 거리낌 없는 사람이라야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벗어날 수 있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스님의 오도적 삶을 크게 확대하고 사상의 깊이를 심화시켰으며, 오로지 일심사상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였던 것이다. <자료/ 현대 불교미디어센터>


원효가 파계를 감행했던 요석궁(瑤石宮)은 경주시 교동 59-2번지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자리에 ‘요석궁’이란 이름의 고급 음식점이 들어서 있으니


요석궁(瑤石宮)은 요석공주(瑤石公主)의 궁궐로 요석공주는 원효(一切唯心造)의 아내, 설총의 엄마이다. 현재 요석궁은 조선 말엽 부호였던 최씨가문은 옛 요석궁 자리에 저택을 지었다. 그후 전통한국요리가 알려지게 되어 고종 황제의 아들인 이강 왕자를 비롯하여 일본관리 및 미국대사 등 많은 이들이 요석궁의 음식을 즐기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원효 불기(元曉不羈) 설화


신라 십성(十聖)의 한사람인 원효의 도인으로서 매이지 않는 높은 경지를 보이고 있는 설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실려있다. "삼국유사"는 '행장'ㆍ'당승전'ㆍ'향정' 등을 인용하여 원효의 설화  7개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첫째 어머니가 원효(元曉)를 잉태(孕胎)하여 만삭이 되었을 때 불지촌의 북쪽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산기를 일으켜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자리를 마련하고 해산하였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沙羅樹)' 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나무의 열매가 보통과 달랐으므로 '사라밤' 이라 불렀다.


둘째  옛날 절을 주관한 이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룻저녁에 밤 두 개씩을 끼니로 주었더니, 종은 불만을 품고 관가에 송소하였다. 관가에서 그 밤을 가져다가 살펴보았더니, 한 개가 바리 하나에 가득 찼다. 그것을 보고 관리는 도리어 종 한 사람에게 한 개씩을 주도록 판결을 내렸다. 그 나무가 있는 골짜기를 율곡(栗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셋째  원효의 어머니가 일찍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元曉)를 잉태하였다. 해산할 때가 되자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원효(元曉)는 천성이 남달리 총명하여 스승 없이 학문을 깨쳤다.


넷째 어느 날 원효(元曉)는 미친 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 찍으련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태종무열 왕이 이 노래를 듣고 "대사께서 귀부인을 만나 어진 자식을 낳고 싶어하신다. 나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유익이 없다."라고 말하고 궁리를 보내어 원효를 데려오게 하였다. 궁리가 원효를 찾으니 때마침 문천교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 가운데 떨어져 옷을 적시니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였다. 원효(元曉)가 요석궁에 머물러 묵게 된 뒤 공주는 잉태하여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경서와 역사책을 널리 통달하였다. 그는 신라 십현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다섯째 원효(元曉)는 파계하고 설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복장으로 갈아 입고, 소성거사라 이름하였다. 광대가 춤추며 노는 큰 표주박을 우연히 얻어서 도구로 삼고 이름하여 '무애'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화엄경"의 게구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효는 무애를 가지고 '무애가'를 부르며 천촉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음영 하고 다녔으므로, 가난하고 몽매한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염불 한마디는 다 하게끔 되었으니, 원효(元曉)가 끼친 교화는 참으로 컸다.


여섯째  원효(元曉)는 바다 룡의 권유에 따라 노상(路上)에서 조서(詔書)를 받고 ≪금강삼매경소 金剛三昧經疏≫를 소의 두 뿔 위에 놓고 썼다. 이것을 ‘각승(角乘)’이라고 불렀는데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의 미묘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일곱째  원효(元曉)가 입적하였을 때 아들 설총(薛聰)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을 빚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 설총(薛聰)이 절을 하니 원효상(元曉像)이 문득 돌아보았다. 소상은 그 이후 돌아보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해골물을 마신 원효에 얽힌 이야기다.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는 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 지방인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으로 추측)에서 태어났으며, 세속에서의 성은 설(薛)씨였다, 그는 특별히 한 스승을 정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널리 배움을 구하였고 한다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어머니는  어느 날  꿈에 유성이  뱃속으로  들어와  깜짝  놀라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꾼 뒤에  아기를  잉태하여  친정집으로  가던 중  배가 아파  대나무 아래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바로  원효대사(元曉大師)였다.  원효대사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는 곧잘  " 사람은 왜 죽을까 ?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 " 이런 철학적인 생각을 하며  인생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싶어했다.  어려서부터  스승에게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재주가 남달랐던  원효대사는  29세에 출가해  자기의 집을 「초개사」라는  절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차돈 같은  훌륭한 고승이 되리라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척뻘 되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찾아왔다.  불법을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당나라에  갔다 와야  행세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당나라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는데, 가는 도중 고구려 국경을 넘다가 그곳을 지키는 병졸들에게 잡혀 많은 괴로움을 겪고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타오르는 구도심(求道心)을 잠재울 수 없었던 원효(元曉) 대사는 의상 대사(義湘大師)와 함께 다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나는데 처음과는 달리 바닷길로 가기로 하고 가다가 어느 날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은 날이 저물어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바람과 한기를 피하여 무덤 사이에 잠자리를 구하고 잠을 청하였는데 잠을 자던 원효가 몹시 심한 갈증을 느껴 눈을 떠보니 캄캄한 밤중이었다. 물을 찾아 주위를 살펴보니 어둠 속에 바가지 같은 것이 있어 다가가 보니 물이 고여 있었다. 물맛을 보니 굉장히 달콤하였다. 스님은 단숨에 그 물을 들이키고 안락(安樂)한 기분으로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스님은 간밤에 자신이 마신 바가지를 찾으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무덤 주위에는 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해골만 뒹굴고 있었다. 스님이 바가지라고 여겼던 것은 바로 해골이었으며, 달콤했던 물은 그 해골 안에 고여 썩어 있던 빗물이었다. 스님은 갑자기 뱃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원효(元曉)는 문득 깨달았다. '간밤에 아무 것도 모르고 마실 때에는 그렇게도 물맛이 달콤하고 감미로웠는데, 해골에 고인 썩은 빗물임을 알자 온갖 추한 생각과 함께 구역질이 일어나다니!' 그리하여 원효 대사(元曉大師는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고 그 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龕墳不二

심생칙 종종법생 심멸칙 감분부이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삼계유심 만법유식 심외무법 호용별구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감(龕)과 분(墳)이 다르지 않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識)에 기초한다.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밤사이에 원효(元曉)의 곁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의상(艤湘)은 다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다 아무런 채비를 하지 않고 있는 원효(元曉)에게 물었다.

"아니 스님. 왜 길을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당 나라에 유학길을 떠난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

"그야 물론 도를 구하기 위해서지요."

"이미 도를 구했다면 더 이상 갈 필요가 없지요."


원효 대사는 이 말을 남기고 의상대사와 헤어져. 그 길로 신라로 되돌아와, '초개사(初開寺)'로  돌아왔다고 한다

무덤에서 깨달은 법으로 중생(衆生)들을 위하여 설법(說法)하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스님의 높은 덕은 신라 땅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으며,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인연으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이두(吏讀) 문자를 집대성한 대학자 설총(薛聰)이었다. 대사는 그때부터 머리를 기르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칭하며,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가지고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길로 생사를 벗어나라)'라는 말에서 무애(無碍)를 따다가 무애무(無碍舞)라는 춤을 추고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노래하며 다녔다. 이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전하려는 뜻에서 행한 것이었다. 이렇게 행함으로서 귀족사회(貴族社會)와 상류층(上流層)에서만 신앙(信仰)되던 신라의 불교를 널리 대중화(大衆化)시켜 누구라도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따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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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산(逍遙山)

 

설화-요석공주(瑤石公主)가 머물렀던 소요산(逍遙山)


서울 동두천시 상봉암동(上鳳岩洞)에 있는 소요산(逍遙山해발 570 M)은 예로부터 자연경승이 빼어나 경기도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명산이다. 사계절 풍광이 아름다워 봄철 철쭉, 여름철 녹음(綠陰), 가을철 단풍, 겨울철 설경이 이 산의 자랑이며 달리 소금강(小金剛)으로 불러왔다. 이 산에는 신라시대의 고승 원효대사(高僧 元曉大師)와 요석공주(瑤石公主)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는데 원효(元曉)와 관련이 있는 지명과 사찰이 남아있다. 즉 하백운대(下白雲臺) 아래에는 원효(元曉)가 수도했다는 원효대(元曉臺), 원효굴, 자재암(自在庵)이 있고 瑤石公主와 설총(薛聰)이 머물렀다는 요석궁(瑤石宮)터가 소요산(逍遙山) 입구 북측에 있다. 설총이 태어난 곳은 아버지 원효의 고향인 慶北 慶山市 仁興里(경북 경산시 인흥리)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세곡동(洗谷洞)에서 태어났다고 밝혀지고 있다.


언제 요석공주와 설총이 북쪽 멀리 소요산까지 오게 되었는지 기록은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원효대사가 수도한 자재암(自在庵) 가까이 거처를 정하고 모자가 머물렀고 이들이 머문 집이 요석궁(瑤石宮)터로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원효대사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남편과 사별한 요석공주(太宗武烈王의 둘째 누이)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여자와 관계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하며 그때부터 자신을 소성거사(小性居士)라 부르며 전국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주유하고 설법과 수도를 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일화가 전해온다. 원효는 원래 화랑의 일원으로 백제전투에 참전하였고 요석공주(瑤石公主)의 첫 남편도 백제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전쟁에 대한 혐오감(嫌惡感)을 가졌고 인명살상을 죄악시하여인의 길을 버리고 불문에 귀의하였다. 자재암(自在庵)의 창건시기가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 (서기 645년)인 점으로 보아 김춘추(金春秋)가 왕위등극 이전에 두 사람이 만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요산(逍遙山) 명소에는 백운대(白雲臺 상,중,하), 옥로봉(玉露峰), 관음봉(觀音峰), 의상대(義湘臺), 선녀탕(仙女湯), 원효폭포(元曉瀑布), 대암굴, 金宗굴, 원효굴 등이 있으며 조선조 이태조(李太祖)의 행궁(行宮)터는 산 입구에 있다. 조선시대의 시인 묵객들이 많이 이 산을 찾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금시습(金時習), 서화담(徐花潭), 양사언(楊士彦)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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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산 자재암(自在庵)

 

자재암(自在庵)의 전설

이곳 자재암(自在庵)에는 원효(元曉)가 머물 때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친견(親見)했다는 전설이 있다. 원효가 암자(庵子)에서 혼자 수도할 때 비바람이 부는 어느 날 밤에 낯선 젊은 여자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갈 것을 청했다. 원효는 비내리는 밤이므로 그 여인을 되돌려보낼 수가 없어 하룻밤 묵어가도록 허락했다. 침침한 등불에 비친 그 여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도승인 원효는 공연히 여자를 맞아들였다고 뉘우쳤지만 이미 허락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이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원효는 정진(精進)을 할 수 없었다. 원효는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색심(色心)이 없다면 이 여인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나의 오랜 수도(修道)를 이 여인으로 인하여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없다."고 되뇌면서 비에 젖은 여인을 따뜻한 곳으로 눕히고 손으로 차가운 몸을 주물러 녹여주었다. 원효는 묘한 느낌이 일어나지만 마음속으로 염불(念佛)을 하면서 유혹을 물리쳤다. 얼마 후 몸이 풀린 여인은 자리에 일어나 앉아 원효에게 요염한 눈길을 보내고 접근해왔다. 원효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새벽녘에 원효는 간밤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계곡에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다. 맑은 물에 몸을 담구어 간밤에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유혹을 물리친 불심으로 기쁨에 젖어 있었다. 마침 그때 우연히 앞을 바라보니 아침 햇살에 비친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갑자기 보여 원효는 가까이 오지 말도록 나무랐다. 그때 그 여인은 "제가 스님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님이 저를 색안(色眼)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대꾸하였다. 원효는 이 말을 듣고 난 뒤 눈이 캄캄해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자신을 되돌아보니 광명을 찾은 듯 그의 눈에는 주위 사물이 밝게 보였다. 원효는 "나는 이제 깨달았다." 하면서 물 속에서 나와 옷을 벗은 채로 여인 앞으로 지나갔다. 그때 그 여인은 더 이상 요염한 여자가 아니라 금빛 찬란한 후광(後光)을 띈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되어 폭포 위로 사라졌다. 관음보살이 원효의 불심을 시험하기 위해 잠시 인간으로 현신(現身)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절 이름을 자재암(自在庵)이라고 고쳐 불렀던 이유는 아무거리낌 없이 마음과 뜻을 다스릴 수 있었다는 원효의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自在庵에서 -김순일


無心의 덫에 걸림이 없는

바람의 무시이 하늘 가득 푸르다


신나무는 신나무로 푸르고

돌멩이는 돌멩이로 살 비비며 뒹굴고

암수 훨훨 나는 젊은 할미새

이름 없는 풀들이

이름 없는 꽃잔치를 벌이고 있다


싸리꽃을 능욕하는 벌 떼, 그런데

그들에겐 능욕이라는 육체의 걸림이 없단ㄷ


바위 속에 들어앉아

몸을 닫아걸고

뿌리를 학대하는 걸림이

너무 무겁구나


自在庵

현판을 도끼질해서 불사르고

요석의 자궁을 달아놓는다

쏟아져 고이는 하늘


나는

씨알 없는 미소를 죽이고

산을 내려왔다

꿀레붙은 잠자리를 따라




재암(自在庵) 가는 길 -목필균

-소요산-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낙엽이

한적한 길을 열어놓는다


요석공주 몸을 빌어 설총을 얻은 원효가

이 곳까지 흘러 들어와 수행에 전념했다는

소요산(逍遙山)에서 하루를 소요(逍遙)해본다


요석공주가 아들과 함께

예불을 올렸다는 별궁터는 사라지고

낡은 단청에 전설만 입혀져 있는 자재암에는

원효의 허튼 웃음소리가 아직도 떠돌고 있을까


속리교(俗離橋) 지나 자재암 가는 길에

선녀폭포, 청량폭포의 낙차 큰 목소리가

천년 사찰을 울리던 목탁소리로 내려앉는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경주 불국사

 

출처 :재령이씨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매일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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