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와 설총 이야기
원효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압량면 불지촌에서 출생하였고, 신문왕 6년인 686에 지금의 경주 남산 혈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원효의 속성은 설씨이며, 어릴 때 이름은 서당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원효(元曉)는 그의 불명(佛名)으로 새벽의 밝고 환한 빛을 의미합니다. 원효대사의 생애는 실로 밤의 어둠 속에서 나타난 새벽별의 그것과도 같았습니다. 원효가 태어나던 당시는 삼국통일이 성취되기 직전의 불안하고 긴장된 정치적 격동기였고, 불교가 고구려에서 수입된 지 약 100년도 못 되는 신라불교의 초창기였습니다.
서당랑은 젊은 시절에는 화랑의 신분으로, 전쟁에 나아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서당랑의 나이 29세 되던 해 출가하여 지금의 경주 황룡사에서 스님으로서의 수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수행자의 길을 가던 원효대사가 655년에 요석공주를 만나게 되고, 5년 동안의 세월 속에서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설총(薛聰)을 낳았습니다.
원효대사는 파계를 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덕망이 높은 스님으로 다가 설 수가 있었습니다. 파계한 이후, 원효대사는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하면서 광대들이 들고 춤추는 큰 박을 본 따서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저작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애가를 부르고, 무애 춤을 추며 민중들을 교화하였습니다.
설총은 원효대사에 대해 지극하고 각별한 효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설총 을 가리켜 말하기를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송했습니다. 낙엽이 떨어진 어느 가을 날, 설총은 원효대사가 머무는 산사를 찾아가니 원효대사가 마당을 쓸고 있었습니다. 설총은 얼른 뛰어가 비를 받아들고 산사의 앞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깨끗이 쓸고 난 뒤에 설총이 “원효대사님 마당 다 쓸었습니다.” 라고 말을 하자 원효가 문을 열고 마당을 쓱 내다보니 정말 낙엽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깨끗하게 쓸어진 마당을 보고, 원효는 마당에 나와 한쪽 구석에 쓸어 모아둔 낙엽을 주워와 마당에 뿌리고는 설총에게 말하기를 "총아! 가을마당은 이렇게 낙엽이 떨어져 있어야 제격인 것이다." 이 말을 하고서는 원효대사가 뒤돌아서 가버리자, 설총은 원효대사의 선문답 같은 이 말 한마디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열반에 드시자 설총은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리웠고 열반에 드신 것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원효대사를 화장하고 난 후, 남은 재와 진흙을 이겨 아버지의 모습을 빗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오래 주석하고 계셨던 분황사의 법당 한쪽에 그 진흙상을 모셔 두고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설총은 분황사 법당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리는데. 인사를 드리는 아들을 보기위해 원효대사의 진흙상이 머리가 옆으로 돌려져 있었습니다. 분명히 정면을 바라보도록 조성되었는데, 원효대사의 진흙상이 머리를 돌리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인 것입니다. 그 후부터 원효대사의 진흙상은 계속 설총이 절을 하던 법당의 중간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목을 돌린 원효대사의 진흙상은 고려 중기까지 분황사의 성보로 모셔져 있었으나, 고려 때 몽고군의 침입으로 분황사와 함께 불타버렸습니다. | |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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