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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독립운동가 유석 조병옥 박사 일가

장안봉(微山) 2012. 12. 22. 10:16

 

 

독립운동가 유석 조병옥 박사 일가

 

독립운동가 유석(維石) 조병옥 박사는 광복 전에는 독립운동에, 광복 후에는 반공·반탁(신탁통치)에 삶을 바친 '애국 충정'의 인물이다.

1894년생인 조 박사는 조선시대 개국공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조인옥(충정공)의 후손인 한양조씨 충정공파 24세손이다.

한양조씨는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인옥과 태종 때 찬성사를 지낸 조온 등 조선의 개국공신을 2명이나 배출한 명문가다. 도학정치의 선구자인 조광조, 청록파 시인 조지훈 등이 한양조씨다.

 

 

 

 

그의 가계에는 여전히 정치인이 많다. 국회 부의장을 지낸 고(故)조윤형 전 의원과 '미스터 쓴조리'로 유명한 국회 최다선 조순형 의원 등이 그의 아들이다.

조 박사의 아버지 조인원 선생과 동생 조병호 역시 일제시대 독립운동으로 한 인물로, 유관순 열사로 널리 알려진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조인원 선생은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유관순을 설득하는 등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결국 심장부근에 일본군의 총을 맞아 관통상을 입고 4년형을 받고 공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조병호 역시 3년형을 받았다.

조병옥 박사는 후에 자서전 '나의 회고록'에서 부친에 대해 "만약 내 아버지가 나 정도의 학문이 있었다면 위대한 정치가가 됐을 것"이라며 "유관순 영화에 나오는 조 속장이라는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라고 기술했다.

조 박사는 충남 공주군 영명소학교와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상경, 배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친 조인원 선생에게 남다른 교육열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 박사는 자서전에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미국사상에 대한 동경 때문에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며 "부친이 미국여비로 3000원을 마련해줬는데, 이는 우리집 재산인 땅 120두락(마지기) 중 절반을 판 돈"이라고 밝혔다.

조병옥 박사는 귀국 후 연희전문에서 5년 동안 교편을 잡고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비밀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창립위원으로 참가, 재정부장·총무부장 등을 지내며 활발히 활동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됐고, 이후 도산 안창호가 지도하는 흥사단에서 활동하다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32년에는 조만식과 함께 경영난에 시달리는 조선일보 인수운동에 참여했고, 1937년 수양동지회 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했다.

조 박사는 자서전에서 "내가 감옥살이를 하는 것쯤은 이미 각오한 것이니 별로 고통스러울 것도 없지만 죄 없는 처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가슴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며 "아내는 바느질 품삯까지 하며 빈궁한 살림살이를 해나갔다"고 말했다.

1940년 이후 조병옥 박사의 삶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그의 가족은 한 여관의 방 한 칸을 빌려 살았는데 부인은 여관에서 일했고, 7가족이 한 방안에서 전부 잘 수 없어 그와 장남 준형은 여관 마루바닥이나 남의 집 사랑방에서 자야 했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그에게 쌀 배급을 중지했다. 아이들은 창씨개명을 안 했다는 이유로 수차례 학교에서 쫓겨났고, 영양실조로 픽픽 쓰러지기 일쑤였다.

조병옥 박사의 아들인 윤형과 순형은 1986년 쓴 '아버님을 기리면서'라는 글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어린시절 여관집 구석방에 웅크리고 있을 때 아버지는 가끔 홀연히 나타났다"며 "어떤 경우에도 꾸중 한 번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연하다"라고 기술했다.

이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구박과 놀림을 받는 우리들의 곤욕을 아랑곳하지 않았다"며 "대범하고 호방한 아버지가 우리에게는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가장으로만 비춰졌다"고 밝혔다.

조병옥 박사는 1945년 광복 직후부터는 강력한 반공·반탁 활동에 나섰다.

미 군정하에서 미군정청 경무국장을 맡아 좌파 척결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이후 일제 강점기의 경찰 실무진을 채용,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친일'문제에 대해 끊임없는 고민을 한 인물이다. "친일(親日)은 두가지로 구분돼야 한다. 직업적인 친일과 가족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연명책은 구별해 다뤄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조 박사는 그의 선대 조상인 조선의 개국공신 조인옥이 그랬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김규식을 옹립하려는 미 군정 사령장관의 의견에 반대하며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장면 장기영 모윤숙 김활란 김우평 등과 한국대표단으로 유엔총회에 참석했다.

그는 1949년 2월10일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했고 1950년 7월 내무부 장관에 임명됐지만 1954년부터는 이승만 정권과 결별, 이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비판하며 반독재투쟁에 나섰다.

그는 1954년 5월 3대 민의원으로 당선됐고, 1955년에는 민주당을 창당, 최고위원이 됐다. 1956년 3월 대선 직전 신익희가 급사한 후 당 대표를 맡아 같은 해 8월 윤보선 등과 함께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는 연좌시위를 벌였다.

1958년 4대 민의원으로 당선된 후 신익희 유진산 김도연 윤보선 김영삼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리더격으로 활동했지만 신·구파간 갈등이 유혈극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조병옥은 대통령 후보 경쟁포기를 선언했다.

그는 1959년말 민주당의 4대 대선후보로 선출돼 후보등록을 마쳤지만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미국으로 향했고, 1960년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한 지 2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승정원 좌승지를 지낸 노병선의 딸 노정면과 결혼, 고(故)조윤형 전 의원과 조순형 의원 등 5남매를 뒀다.

민주당 대표를 지낸 조 박사와 아들 순형, 민주한국당 대표를 지낸 윤형은 '3부자 야당 총수'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들 부자의 선수를 모두 합치면 무려 '15선'으로, 이들은 3, 4, 5, 6, 7, 8, 11, 12, 13, 14, 15, 16, 17, 18대에 걸쳐 국회의원을 지냈다.

1932년 충남 천안 출생인 조윤형 전 의원은 서울고를 졸업한 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중퇴하고 조지타운대 외교관학교를 수료했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19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됐다. 이후 6, 7, 8, 13,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 국회 부의장까지 오르며 6선 의원을 지냈다. 1996년 2월 별세했다.

1935년 천안 출생인 조순형 의원은 서울고와 서울대법대를 졸업하고 1981년 정치규제에 묶인 형을 대신해 출마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1, 12, 14, 15, 16, 17, 18대 총선에서 당선, 현재 국회 최다선인 7선 의원이다. 강직함과 소신으로 뭉친 선비형으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해 직언을 해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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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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