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奇皇后
중국 원(元)나라의 황제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 ?~?)는 고려(高麗)의 여인이었다. 13세기 몽골의 초원에서 일어나 14세기 동아시아를 거점으로 중동(中東)을 지나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아우르는 거대 영토를 가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제국(大帝國)이었던 원(元)나라의 황후가 고려 출신의 여인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게다가 이 '기황후(奇皇后)'는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에 그치지 않고, 황후가 된 이후 37년간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원나라와 고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몽골제국
칭기스칸(성길사한. 成吉思汗)이 몽고 부족을 통합하고 나선 정복전쟁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를 닥치는대로 공격하고 들어가 끝도 없이 영토를 확장하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파죽지세로 일어나 그 누구도 당할 자 없었던 몽골제국의 7차례나 되는 침입에도 고려(高麗)는 30여년 간 꿋꿋이 항거하엿지만, 결국 대제국 건설의 강렬한 야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려(고려)는 장기간에 걸친 항거(抗拒) 덕분에 몽골제국이 정복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완전히 복속되지 않고, 자체적인 국호(國號)와 정권을 인정받는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제국이었던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100여 년 동안 고려는 원나라로부터 수많은 내정간섭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고려의 왕자들은 인질(人質)로 원나라에 가야만 했고, 왕(王)은 원나라 조정에서 마음대로 갈아치웠으며, 혼인통교(婚姻通交)를 앞세워 원나라 공주(公主)가 고려의 왕비(王妃)가 되어 들어와 고려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생겼다. 한반도의 북쪽 땅은 원나라의 직접 통치구역이 되었고, 원나라의 정복전쟁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수많은 물자와 군사가 약탈에 가깝게 동원되어야만 하였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 '의 아버지이며,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의 8대조인 이곡(李穀)은 1335년(충숙왕 4)에 공녀(貢女) 폐지에 관한 상소를 원나라에 올렸다. ... 공녀로 뽑혀 떠나는 날이면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지거나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메어 죽는 사람이 있사옵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눈물을 흘려 실명(失明)하는 자가 있고, 대들보에 목을 메기도 합니다.이러한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황제는 고려 여인의 공녀를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실은 고려 여인의 수난은 계속되다가 1356년 공민왕의 반원(反元) 정책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 이곡(李穀)은'목은 이색(牧隱 李穡) '의 아버지 한산이씨)
그 중에서도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貢女)라는 매우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공녀(貢女)란 말 그대로 여자를 공물(貢物)로 바치는 것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80년 동안 정사(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50여 회에 이르고,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원나라의 '공녀'요구 이유는 유목민족 출신인 원나라 왕실에 여자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는 왕실에서 필요한 여자 외에도, 원나라 귀족, 고관이 요구하는 여자도 공급해주어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군인(軍人) 집단 등의 혼인을 위해 많은 수의 여자를 필요로 하기도 했다.
공녀 , 역사의 기록들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피살된, '저고여 피살사건' 이후, 몽골은 이를 구실로 고려에 침입하여, 항복조건으로 고려의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500명씩을 바치라고 하였다. 몽골은 국호를 원(元)이라 고치고, 계속해서 고려에 공녀(貢女)를 요구하였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 이유는 복속정책(服屬정책) 또는 원나라와 고려의 친근정책(親近政策) 때문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원나라 왕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1274년,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貢女) 140명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이 일을 위하여 ' 결혼도감(結婚都監) ' 또는 '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 '을 설치하여 징발한 여자 140명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고려 백성들은 이 공녀 징발에 불응(不應)하였다. 입장이 곤란해진 조정에서는 공녀를 보내는 집에 후한 보상(補償)을 주는 등 백방으로 권유해보았으나 불응하므로, 역적(逆賊)의 처(妻)나 파계(破戒)한 승려의 딸 등으로 무리한 요구를 메워나갔다. 원나라로 갔던 '처녀진공사(處女進貢使)'의 왕래 횟수가 '고려사'에 50회 이상 기록되어 있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계속되었으며, 1275년부터 1355년까지 약 80년간에 원나라 왕실에 바친여자의 수는 150명이 넘었다. 공녀에 따른 폐단으로 충렬왕은 나라 안의 혼인을 금(禁)하기도 하였다. 또 1287년 좋은 집안의 처녀들은 먼저 관(官)에 보고한 뒤에야 시집을 보내도록 명령을 냈다. 그 뒤에도 가끔 이런 혼인금령(婚姻禁令)을 내려 처녀를 확보하였다.이들의 대부분은 궁녀(宮女)가 되었거나, 제왕후비(帝王后妃)의 심부름꾼으로 배치되었다. 궁녀들 중에는 황제의 사랑을 받아 황후(황후)의 자리를 차지한 경우도 있었는데, 기자오(奇子敖)의 딸 '기황후(奇皇后)'가 그 예이다. '기씨녀'는 원나라 궁중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이었으나, 순제(順帝)의 눈에 들어 황후(皇后)가 된 인물이다. 이후 고려에서 끌려온 공녀들의 처지는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고려의 공녀들은 원나라 고관의 첩(妾)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기황후의 영향으로 고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귀족,고관으로서의 명문가(名門家)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고려의 여자들이 원나라 왕실과 귀족사회로 진출하자 고려의 풍속이 전해져 의복과 신발, 음식 등 고려의 여러가지 풍습이 원나라 조정을 중심으로 유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 조정의 빈번한 공녀 징발로 민간에서는 조혼(早婚)하는 풍속이 생겼는데, 그것은 공녀를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의 처녀(處女) 중에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공녀의 폐습(弊習)은 공민왕(恭愍王)의 반원(反元)정책으로 원나라에 대한 공녀는 끝났지만, 원나라를 대신하여 중국과 만주를 차지한 명(明)나라에서도 공녀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를 멸(滅)하고 새로 건국한 조선(朝宣)에서도 명나라에 공녀를 바쳐야 했다. 명나라는 계속 많은 공녀를 요구하였지만, 명나라 태조(太曺)의 경우 한비(韓碑)는 조선 여자인데,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았고, 또 석비(碩妃)도 조선 여자로서 영락제(영락제)를 낳았다. 그후부터는 공녀를 보내기도 하고 중단하기도 하였으며, 1521년 하등극사(賀登極使)로 홍숙(洪淑)을 보낼 때 공녀(貢女)의 철폐(撤廢)를 요구하여 명나라의 하락을 받음으로써 공녀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고려양 高麗樣
공녀(貢女)의 대부분이 원나라 황실의 궁녀가 되거나 고관(高官)들의 시중을 맡아보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고려의 생활양식이 널리 연경사회(燕京社會)에 퍼져 '고려풍(高麗風)'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의복제도와 음식이 원나라 황실과 고관 내에 퍼져 고려양(高麗樣)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기게 되었고, 고려만두, 고려떡, 고려아청(高麗雅靑) 등이 즐김을 받게 되었다.
기황후 奇皇后
공녀는 고려 전체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어린 딸을 공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일찌감치 결혼시키는 일이 많아져 조혼(早婚)의 풍습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공녀는 하층민에서만 차출하는 것이 아니라, 원나라 왕실의 요구에 상응하는 정도의 신분을 가진 여자도 필요했기 때문에 귀족(貴族)의 여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에서 간 공녀들은 대개 원나라 궁궐의 궁녀나 고관 귀족들이 처첩(妻妾)이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거리의 기생(妓生)으로 팔려가 이국땅에서 슬픈 생애를 살아야만 하기도 했다. 공녀는 그만큼 고려 여인들의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치욕이었기에 개중에는 공녀로 뽑히면 갖 않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황후(奇皇后)도 이런 고려 공녀의 한명이었다.
기황후 奇皇后
위 기황후의 사진은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황후의 초상화이다. 기황후의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는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다. 아버지 '기자오'는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기윤숙(奇允肅)의 증손으로 음보(음보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에 나감)로 관직을 할 정도이었으니 그렇게 한미(寒微)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황후는 이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다섯명에 언니가 두 명 있었다.
기황후는 공녀로 뽑혀 1333년 고려 출신 환관(宦官)이었던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원나라 왕실의 궁녀(宮女)가 되었다. 당시 원나라 왕실에는 고려 출신 환관(宦官)들이 많았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고족이 다수의 한족(漢族)을 다스리는 나라였기에, 한족(漢族)들이 중앙정부로 진출해 힘을 얻는 것을 극도로 막고 있었다.
하지만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자층(識字층)이 필요하였다. 유목민 출신으로 교양을 쌓을 틈이 없던 원나라 지배층들은 이러한 요구를 고려(高麗)에서 바친, 글을 아는 환관(宦官)들을 통해서 해결하였다. 고용보(高龍普)도 고려에서 원나라로 간 환관이었다.
고용보 高龍普
고용보(高龍普. ? ~ 1362)의 본관은 전주, 일명 용봉(龍鳳), 용복(龍卜)이며 원나라 이름은 '투만디르(투만질아. 透滿迭兒)이다. 원나라에 들어가 내시(內侍)로서 황제의 총애를 받아 자정원사(資政院使)가 되었다.
그는 기자오(奇子敖)의 딸을 순제(順帝)의 제2황후로 승격시키고 측근으로서 권세를 잡고, 본국인 고려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충혜왕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삼중대광완산군(三重大匡完山君)에 봉하였다. 1342년, 기황후의 어머니 이씨(李氏)를 맞으러 고려에 다녀갔으며, 이듬해 10월 순제(순제)의 명으로 충혜왕에게 술과 의복을 가지고 왔다가, 다음달 원나라 사신과 함께 충혜왕(忠慧王)을 잡아 원나라에 보내고 순제(順帝)의 명으로 임시로 국사를 정리하였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공신(功臣)의 호를 받았으나 계속하여 원나라를 믿고 횡포를 부렸다. 결국, 어사대(어사대)의 탄핵으로 금강산으로 추방되었으나, 곧 소환되어 영록대부가 되었다. 뒤에 자정원에서 밀려나 고려로 돌아온 뒤에는 기철(奇轍 ..기황후의 오빠) 일파와 결탁하여 횡포를 부리다가 1352년 조일신의 난(趙日新의 亂)에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였다. 그 뒹 승려가 되어 해인사(海印寺)에 있던 중 1362년 2월,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당시 원나라의 세력을 빙자하여 횡포를 부리던 무리들 중에서 으뜸이었으며, 사재(私財)를 들여 비구승 중향(中向)으로 하여금 전주(全州)의 보광사(普光寺)를 중창(重創)시키기도 하였다.
경천사지 십층석탑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석탑은 높이 13.5m의 크기로 고려 후기 충목왕 때 조성되었으며, 기존의 신라계 석탑과는 그 양식을 달리하는 특수형 석탑이다. 경천사(敬天寺) 십층석탑은 원래 경기도 개풍군 부소산 경천사지(敬天寺지)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본의 궁내대신이 불법 반출하였었었. 그 후 반환되어 경복궁에 방치되어 있다가 지금은 용산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실내에 전시되고 있다.
이 석탑의 양식은 별도로 기술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석탑의 옥신(屋身) 이맛돌에는 조탑명(造塔銘)이 새겨져 있어 건립연대와 조성 배경에 관하여 알 수 있어 주목되고 있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고려 충목왕 4년인 1348년에 건립된 것으로 ' 지정 8년 무자 3월(至正八年戊子三月日)에 대시주(大施主) 강융(姜融)과 원사(元使) 고용봉(高龍鳳), 대화주(大化主) 성공(省空), 시주(施主) 법산인(法山人), 육이(六怡) 등이 원나라의 황제와 고려왕실의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천기가 순조롭고 국태민안하며 불법(佛法)이 더욱 빛나고 법륜이 항상 움직이어 수복(壽福)을 얻고 다같이 불도를 이루기를 기원한다 ' 는 것이다.
당시 중국은 원(元)나라의 순제(順帝)가 집정하던 시기이었는데, 순제(順帝)의 부인이 바로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딸인 기황후이었다. 중국의 정세가 이렇게 되자 고려에서는 '기씨' 일족과 이에 부응하는 친원세력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개경에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경천사(敬天寺)에 원나라의 번영과 고려 왕실의 천수만세를 기원하는 대리석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여기사 대시주(大施主)로 명기된 '원사 고용봉(元使 高龍鳳)'은 기황후를 순제에게 소개하여 황후가 되도록 힘썼던 고려 출신 환관(宦官) '고용보(高龍普)'의 다른 이름이다.
궁녀, 기황후
고용보는 조국, 고려에서 온 기황후를 차(茶)를 따르는 궁녀 자리에 앉히고 황제인 순제(順帝)의 눈에 띄게 하였다. 당시 원나라 황제인 순제(順帝)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왕실 정쟁(政爭)의 틈바구니에서 고려의 대청도(大靑島)에 1년간 귀양을 간 경험이 있었다. 고려에서 살았던 경험 탓이었을까? 순제는 곧이어 기황후를 총애하였다.
황제의 총애는 황후(皇后)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기황후는 당시 순제(순제)의 제1황후이던 '타나시리'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다. '타나시리'는 기황후에게 수시로 채찍질을 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순제의 제1황후 '타나시리'는 순제와 정적(政敵) 관계이던 집안의 딸로 순제와의 사이도 무척 좋지 않았다.
순제 順帝
인천에서 배를 타고 4시간을 가야하는 대청도(大靑島). 고려시대 당시에 원(元)나라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던 '대청도' 곳곳에는 원나라와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다. 그가운데 '내동초등학교' 자리는 옛날 궁궐터이었다고한다. 현재 학교의 계단도 원래 궁궐 앞에 있던 계단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몇년 전만 해도 궁궐지 주변에는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원(元)나라의 유배지이었던 대청도(大靑島)에 궁궐까지 짓고 마을 이름을 '장안'이라 불렀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 원나라 명종(明宗)의 태자 '토곤테무르'가 11세의 나이로 대청도에 유배왔다 .. 고려사 36권.충혜왕 원년 '으로 되어 있다.
이곳 대청도(大靑島)에서 1년 여를 머물렀던 '토곤테무르'는 원나라로 돌아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그가 바로 원나라 순제(順帝)이다. 그런데 황제의 자리에 오른 순제(順帝)는 또 한번 고려(高麗)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바로 차(茶) 따르는 궁녀 '기씨'와의 만남이었다. 기록에 의하면순제(順帝)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차(茶) 따르는 궁녀 '기씨'를 매우 총애하였다고 한다.
제2황후가 되다
한낮 차(차) 따르는 궁녀가 이렇게 황제의 사랑을 받자 당시 제1황후이었던 '타나시리'는 '기씨'를 매우 질투하였다. 여러차례 기씨를 채찍으로 때릴 정도이었다. 야사(野史)의 기록에 의하면 채찍으로 때릴 뿐만 아니라 인두로 몸을 지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제1황후 '타나시리'는 순제의 아버지를 죽인 문종의 측근 신하 '당채시'의 딸로 순제는 '타나시리'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기황후가 궁녀로서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은지 2년 되던 1335년, 황후 '타나시리'의 형제들이 순제(順帝)에 반대하는 모반(謀叛)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황후 '타나시리'도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벌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순제(順帝)는 총애해 마지 않는 기황후를 황후 자리에 올려놓으려 하였지만, 실권자이던 바얀(백안. 伯顔)이 몽고족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황후 자리는 몽고 웅기라트 부족 출신의 '바얀 후투크'에게 돌아 갔다. '바얀 후투크'는 매우 어진 성격으로 황후가 되고 나서도 거의 앞에 나서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한 번 황후의 꿈이 좌절되었던 기황후는 이후 1338년 아들 '아이시리다라'를 낳고 이듬해'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失閣)하자 마침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이민족인 '기씨'가 어떻게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에 관련된 전설을 간직한 탑(塔) 하나가 제주도(濟州島)에 남아 있다. 원당사(元堂寺) 5층석탑, 이 탑은 아들 낳기를 원하는 기황후의 요청을 들어 원나라 순제(順帝)가 세워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337년 궁녀 '기씨'는 실제로 아들을 낳았다. 이제 상황은 궁녀 기씨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즈음 원나라 황실을 장악하고 있던 고려의 환관(宦官)들도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고려 환관(宦官)들의 한문 수준은 매우 뛰어났고, 문자는 물론 역사를 알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고려인을 환관(宦官)으로 삼았고 고려의 환관들은 궁중 내부에서 계책을 수립하며 지배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나라의 역사서인 '원사(元史)' 환관전(宦官傳)에는 단 두 명의 환관이 입전되어 있다. 그 중 한명인 박불화(朴不花), 고려 출신으로 기황후의 측근이 되는 그는 기황후와 같은 고향 출신이다. 이런 고려인 환관들을 비롯하여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던 입성론(立省論), 즉 고려(高麗)를 없애고 원나라의 직속 성(省)으로 만들자는 논의를 막기 위하여 고려 조정까지 기황후의 '황후책봉(皇后冊封)'에 발빠르게 움직이었다.
원나라의 실권자로 부상하다
기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實權)을 장악하였다. 어차피 제1황후는 허수아비 황후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황후(皇后) 직속기관인 휘정원(徽政院)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하여 환관(宦官) 고용보(高龍普)를 자정운사(資政院使)에 앉히고, 왕실의 재정(財政)을 장악하였다. 막대한 왕실 재정(財政)을 틀어쥐게 된 기황후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1353년에는 황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皇太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위 사진). 그는 후에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그리고 기황후는 같은 고향 출신인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 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아 군사권(軍事權)도 장악하였다.
고려 여인인 기황후가 원나라의 황후(皇后)가 되어서 고려에 좋은 점도 있었다. 충렬왕 때 시작되어 80년 동안 지속되어온 공녀(貢女) 징발이 금(禁)해진 것도 이 시기였고, 고려가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후 계속 제기되었던 입성론(立省論), 즉 고려의 자주성(自主性)을 인정하지 않고 원나라의 한 개의 성(省)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
고려양 高麗樣
기황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원나라에서는 고려(高麗)의 풍속(風俗)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한다. 고려의 복식과 음식들이 원나라 고위층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명문가(名門家)에 속하면 고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위의 사진과 같이 복식(服飾) 측면에서도 고려가 원나라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원나라 시절 벽화(壁畵)에서 나타나는 몽골의 전통적인 복식을 보면 아래 위가 하나로 붙은 양식이다. 그런데 원나라 후기가 되면 이런 전통적인 몽골복식에 변화가 나타난다.
당시 벽화와 무덤 속 흙인형들은 아래 위가 나뉘어진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있다. 특히 윗저고리의 선(線)이 길게 허리선까지 내려와 있다. 몽골의 전통복식이 아닌 이러한 옷차림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 고유의 치마 저고리를 입은 수많은 고려 사람들이 원나라로 가서 황실 속, 또는 사대부가 속의 구성원이 되면서 그 복식은 당연히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이것을 고려양(高麗樣)이라 하였던 것이다
고려양(高麗樣)에 대한 기록은 원나라의 기록 곳곳에서 볼 수있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 궁중에서 제일 유행하는 거슨 고려식 옷이라네. 장방형 목 선과 짧은 허리, 반소매. 궁중여인들이 모두 다투어 구경하려 하네. 이는 고려 여인이 황제 앞에서 이 옷을 입기 때문이라네 .. 장옥의 궁중사.
고려양(高麗樣)은 비단 복식(服飾)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의 음악(音樂)을 비롯해서 생활풍속,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퍼져갔다. 초원(草原)에서 생활하는 몽골의 한 전통적인 가정에서는 밀가루에 설탕을 넣고 기름으로 튀겨낸다는 뮈시카를 만들어 먹고 있다. 전통음식인 버브의 한 종류이다. 중간에 칼집을 내고 꼬아내는 과정이 우리의 전통적인 한과인 매작과를 만드는 것과 닮았다. 밀가루를 이용하여 만드는 우리의 전통적인 한과 매작과는 중간에 칼집을 낸 뒤 칼집을 낸 부분을 뒤로 꼬아서 만든다.
기황후, 고려의 가족들
한편, 기황후가 원나라의 정치를 쥐락펴락하게 되자, 고려에 남아 있는 그녀의 가족들도 덩달아 득세(得勢)하기 시작했다. 원나라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기자오(奇子敖)를 영안왕(榮安王)으로 봉하고, 어머니를 왕대부인(王大婦人)으로 하였으며, 그의 조상 3대를 왕(王)의 호(號)로 추존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오빠 기철(箕轍)을 원나라의 참지정사, 기원(箕轅)을 한림학사로 임명하자, 고려에서도 이들은 덕성부원군, 덕양군으로 봉(封)할 수 밖에 없었다. '기씨' 집안이 고려를 너머서 원나로부터 힘을 얻게 되자 고려 조정은 '기씨'집안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기씨' 집안의 아들들이 원나라의 힘을 고려에 유익(有益)하게 활용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는 데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기황후도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을 지나치게 하였다.
'기씨' 집안의 악행(惡行)은 결국 공민왕(恭愍王) 즉위 후 원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이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때도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때 이미 원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고려가 원나라 군사를 잘 방어하여 실패로 그쳤다.
원나라의 몰락
원나라는 순제(順帝) 때 문치주의(文治主義) 정치를 펼치면서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순제(順帝)는 그가 즉위하기 전에 있었던 왕위 다툼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에서 기황후가 정권을 잡은 후 시작된 황위(皇位)를 둔 정쟁(政爭)이 원나라의 힘을 점차 약회시키게 되었다. 원나라는 소수(少數)의 몽고족이 다수(多數)의 한족(漢族)을 통치하는 체제이었기 때문에 작은 혼란도 국가의 존망(存亡)을 좌지우지할 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이 많은 나라이었다. 아래 사진은 순제(順帝)의 초상화이다.
기황후는 남편 순제(順帝)에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장성한 자신의아들에게 황위(皇位)를 물려 줄 것을 종용하였다. 순제는이를 거부하였고, 그 와중에 황태자 반대파와 지지파 사이에 내전(內戰)이 일어났다. 반(反) 황태자파의 지도자인 '볼루드 테무르 1세'가 1364년 수도를 점령하였을 때, 기황후는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다. 이 내전(內戰)은 결국 황태자 지지파인 '코케 테무르'가 1365년 수도를 회복하면서 수습되었다.
제1황후 그리고 명나라의 등장
기황후는 1365년 제1황후이었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 제2황후라는 딱지를 떼고 원나라의 제1항후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녀의 영광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원나라 중앙정부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그동안 몽고족의 지배에 반감(反感)을 품었던 한족(漢族)들이 홍건적(紅巾賊)이 되어 일어나면서 원나라는 수습할 수 없는 혼란(混亂)으로 치닫게 되었다.
1368년 마치내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명(明)나라 군대가 원나라 수도를 점령하자, 원나라 황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기황후도 이때 남편 순제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을 떠나면서 기황후는 구원병(救援兵)을 보내주지 않는 고려(高麗)를 원망하였다고 한다.
원나라 왕실은 '응창부'로 수도를 옮겻다가 '카라코룸'까지 피난하였다. 피난의 와중에 순제(順帝)는 죽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이어 북원(北元)의 소종(昭宗)이 되었다. 수도를 떠나 응창부까지 가는 동안의 기황후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난, 우리나라 경기도 연천(漣川)에 기황후의 능(陵)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조선시대 기록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전하고 있다. 능(陵)이 있었다고 전하는 지역에 고려시대 양식의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을 능(陵)을 둘러싼 담장의 기와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황후는 응천부에서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여생(餘生)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동아시아와 유럽을 호령했던 대제국 원(元)나라의 황후이었던 고려 여인 기황후는 오랫동안 원나라 망국(亡國)의 한 원인으로 평가되면서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황후라는 존재가 14세기 말 고려와 원나라 역사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황후총 皇后塚
기황후가 경기도 연천(漣川)에 영면(永眠)하고 있다 ? 경가도 연천군 연천읍 재궁동(齋宮洞)에 자리잡고 있는 황후총(皇后塚)이라 불리는 기황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영조(英祖)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연쳔현조(漣川縣條)의 기록에 의하면 ' 연천현 동북쪽 15리에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묘(描)와 석인(석人), 석양(石讓), 석물(石物) 등이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은 밭을 갈고 소를 기르는 곳이 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899년 간행된 '연천현읍지(漣川縣邑지)'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좀 더 구체적이다. ' 황후총은 동쪽 20리 재궁동(齋宮洞)에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길 원(元) 순제(順帝) 기황후가 고국에 돌아가 묻히기를 원해서 이곳에 장사지냈다 '고 되어 있다. 우선 재궁동(齋宮洞)이라는 지명이 그렇고, 기황후의 유언도 구체적이다. 재궁(齋宮)이란 능(陵)이나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이니, 재궁동은 재궁(齋宮)이 있는 동네라는 말이다.
연천문화원은 1995년 지표(地表) 조사를 하였는데, 황후총 주변에서 나뒹구는 석물(石物) 2기를 수습하여 문화언 뜰 앞에 세워놓았다. 게다가 토기(土技)나 청자편도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석물 2ㅣ기 중 하나는 목이 잘려있어 형태를 알 수없으나 다행하게도 1기는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석물(石物)의 모양이나 크기가 이색적이다. 구부리고 앉은 모양은 마치 12지신상의 하나인 원숭이와도 같고, 얼굴 표현이나 크기만으로 보자면 동자상(童子像)이 완연하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형태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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