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산 순례기] 월출산 - 뾰족한 산봉우리 하늘로 날아가니, 비로소 하늘과 땅이 혼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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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세상이 밝은 이유는, 어두운 곳부터 하늘빛이 고이기 때문이다. 눈 내린 세상이 따뜻한 이유는, 차갑고 낮은 곳에 하늘의 손길이 더 오래 머물기 때문이다. 눈 내린 세상이 평화로운 이유는, 명암의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눈 내린 산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늘을 넓히기 때문이다.
월출산. 영암벌 가운데 홀로 우뚝하니,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산인 듯하다. 영암을 비추는 달은 이 산에서 나온다. 저편 하늘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이 산의 품에서 태어난다.
- ▲ 천황봉 정상 직전의 눈 덮인 암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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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영암벌의 아침을 헤쳐 월출산으로 든다. 영암군 어디에서 봐도 월출산은 돌올하다. 최고봉인 천황봉의 높이는 808.7m에 불과하지만, 평지돌출한 모습을 보노라면 천하에 이보다 높은 산은 없을 듯하다. 더욱이 불꽃처럼 솟구친 기기묘묘한 암릉은 최고조의 상승감을 뿜어낸다.
월출산은 평지에, 홀로, 가파르게 솟구친 산이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멀리 산 밖에서 바라봐도 온전히 제 모습을 다 드러내 보이는 명산은 월출산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 ▲ 천황봉에서 바라본 장군봉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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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은 한껏 깨끗하고 수려하다. 뾰족한 산봉우리가 하늘을 오르는 산세다.” “영암 월출산은 뾰족한 돌이 날아 움직일 듯한 것이 도봉산과 삼각산 같으나 다만 골이 적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월출산을 이렇게 말했다.
- ▲ 천황봉에서 본 영암벌. 눈 덮인 들판 위 토끼 굴 같은 집들이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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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은 골산(骨山)이다. 도봉산, 삼각산뿐만 아니라 설악산이나 금강산에 빗대 말할 만하다. 다만 규모가 그 산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밀도로 보자면 오히려 앞선다. 오밀조밀한 바위탑과 봉우리들이 사통팔달로 펼쳐진 형세는 어느 바위산에도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월출산은 면적이 56.100㎢로 지리산의 10분의 1 조금 더 되는 정도이지만 독특한 암릉미와 생태적 특성으로 국립공원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한국에서 가장 작은 국립공원이다.
천황사 들머리는 부드럽다. 멀리서 본 산세와는 달리 안아 주는 품에 아주 너그럽다. 천왕사지를 지나자마자 좌우는 가파른 바위벽이다. 눈길을 들어 올려도 바위벽과 좁은 하늘만 다가설 뿐이다. 길은 협곡의 주름을 따라 구불거리며 바람폭포를 향한다.
- ▲ 천황봉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능선.
- 눈 덮인 산길은 육덕 풍만하다. 눈은 바위 길의 까탈도 계단의 불편함도 부드럽게 지워버린다. 발바닥이 느끼는 부드러움은 된비알보다 더 가파른 숨길조차 스르르 눈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겨울 산행의 또 다른 매력이다. 체력적 부담의 가중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지극히 주관적인 말이 되겠지만, 육체의 한계는 정신으로 극복할 수 없다. 지극한 마음으로 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몸이 마음을 안아주게 해야 한다. 마음을 ‘절대시’하면, 심신의 조화는 불가능하다.
바람폭포는 꽁꽁 얼어붙었다. 옅은 햇살의 온기를 머금은 물방울이 떨어지며 폭포의 이름값을 대신한다. 바람폭포에서 훌쩍 키를 올린 길은 광암터 능선을 향한다. 비로소 장군봉 능선의 전모가 드러난다. 역광을 받은 천황봉 능선은 완고한 표정으로 우뚝하다. 동쪽 기슭으로 흘러내리는 육형제바위 줄기는 해바라기하는 아이들처럼 정겹다. 바위의 정수리에 혹은 옆구리에 뿌리내린 소나무의 여린 숨결이 계곡으로 흘러내린다. 계곡은 깊고 그윽하다. 달을 잉태하고, 때맞추어 세상에 내보내는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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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은 월출산의 지난날을 소상히 전한다. “(영암)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때는 월나악(月奈岳)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했다. 속설에 본국의 외화개산(外華蓋山)이라 칭하기도 한다.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하며, 또 조계산(曹溪山)이라고도 한다.”
월출산은 ‘달이 나오는 산’이었다. ‘달을 낳는 산’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영암벌을 굽어 비추는 낮달로 떴다.
- ▲ 텅 빈 정상, 월출산의 정수리, 천황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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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이 월출산이고 월출산이 영암이다. 고을 이름도 이 산에서 비롯됐다. <동국여지승람>은 그 내력을 이렇게 전한다.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동석이)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백 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했다.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영암군 향토지>에 전하는 이야기에는 좀 더 살이 붙어 있다. 구정봉 아래의 세 돌 때문에 큰 인물이 나는데, 이를 시기한 중국 사람들이 바위를 떨어뜨렸다. 그 중 하나가 스스로 옛 자리에 올라갔다. 이런 까닭으로 신령스러운 바위, 즉 영암이라 하고 고을 이름으로 삼았다는 얘기가 전한다는 것이다. 영암 앞바다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일본으로 전하는 국제 항구의 구실을 한 데서 비롯된 전설로 보인다.
- ▲ 월출산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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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으로는 월출산 전체가 신령스런 바위다. 이중환은 ‘골이 적다’고 다소 인색한 평을 했지만 아마도 그 말은 너른 반석 위로 유장하게 계류가 흐르는 그런 골짜기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닐까 싶다. 사실 월출산 계곡 가운데 물이 풍부한 곳은 금릉경포대계곡밖에 없다. 가파른 바위산의 좁은 계곡에서 사철 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골짜기는 많다. 암릉이 햇살처럼 사방으로 두루 퍼져 있는데 어찌 골짜기가 적을 수 있겠는가. 짧고 가파르지만 그 속 깊음은 여럿 자식 둔 어머니 마음 같다. 산 위에서 사방을 보면 그 마음이 저절로 느껴진다. 북에서 동으로 대동제, 사자저수지, 학송제, 월남저수지, 성전저수지, 송월제, 월평제, 율치제, 금생제, 학용제, 도갑저수지, 성양저수지 같은 크고 작은 저수지가 거의 모든 골짜기 끝에서 물을 담고 있다. 이 물이 영암 사람들의 목숨 줄을 적시는 것이다. 물론 영산강 물줄기가 영암군의 복동 외곽을 에두르긴 하지만 고을의 중심인 영암읍은 월출산의 북쪽에 바투 기대어 있다. 비록 산 속은 사람이 붙어살기 힘들지만 산그늘은 한없이 따뜻한 산이 월출산이다.
- ▲ 영암읍을 병풍처럼 두른 북동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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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은 멀리서 보아도 좋은 산이고, 들어가 보아도 아름다운 산이고, 기대어 살아도 편안한 산이다. 영암이 월출산이고 월출산이 영암이다. 산과 사람이 혈육처럼 어우러져서 더욱 아름다운 산이 월출산이다.
조선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는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흐림과 맑음 추위와 더위가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 하늘이 영험한 자라로 하여금 세 개의 섬을 짊어지고, 지상으로 황홀하게 옮겨 놓게 했구나” 하고 월출산을 노래했다. 윤선도는 <산중신곡>에서 “월출산이 높더니마는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도다./ 두어라 해 퍼진 뒤면 안개 아니 걷으랴” 하고, 월출산을 제대로 보지 못한 심회로 오히려 아름다움을 한껏 추켜올렸다. 김시습도 “호남에서 으뜸가는 그림 같은 산”이라 했다.
- ▲ 학산면의 들판에서 바라본 월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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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암터에서 천황봉을 오르는 능선길은 단순 명쾌하다. 가파르긴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풍광을 감상하노라니 그리 힘들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통천문을 지나 마지막 된비알을 오르자 홀연히 모든 산봉우리가 하늘로 날아간 듯, 텅 빈 하늘과 텅 빈 땅이 서로에 스며드는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정상 표지석이 유일한 산봉우리처럼 보이는 텅 빈 산봉우리에서 나는 아름다움의 절정을 본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이런 감동은 오랜만이다. 비로소 나는 ‘천황’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모름지기 세상의 으뜸이라면 저렇게 스스로를 감추고 물러서서 자기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을 빛나게 해야 하는 법이거늘.
천황봉 정상은 봉우리가 아니다. 족히 수백 명은 둘러앉을 만큼 넓고 민둥하다. 위로 하늘과 햇살만 가득하다. 영암벌 어디서고 제 모습을 다 보여 주는 것 같은 월출산이 실로 감추어둔 최고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니, 바로 이곳, 텅 빈 정상이다. 하늘과 땅이 혼연해 모든 것이 지워진 아름다움. 그리하여 지상의 모든 것들을 빛나게 하는 아름다움. 나는 오늘, 김시습의 천재로도 보지 못한 최고의 그림을 보았다. 눈 내린 천황봉은 그대로 하늘이다.
/ 글·사진 윤제학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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