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高孟英)이고 조부는 형조좌랑을 역임한 고운(高雲)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 이순(而順), 호 제봉(霽峰) ·태헌(苔軒), 시호 충렬(忠烈)이다.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었으며, 1552년(명종 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공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전적(典籍)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3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성을 점령하였고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관군 5만 명이 겨우 수천의 왜군에게 어이없게 패배하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潭陽)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고경명은 6월 1일에 담양을 출발하여 북상하였다. 6월 13일에 전주에 도착해 큰아들 고인후(高因厚)에게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군을 막도록 하고, 22일에는 여산(礪山)으로 옮겼다. 27일 은진(恩津)에 도달해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점차 호남에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연산(連山)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금산(錦山)에 도착해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 그의 공적을 기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의 포충사(表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제봉집(霽峰集)》, 저서에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이 있다.
고경명장군 신도비(멀리 뒷쪽에 묘소가 있다)
고경명장군 묘역 전경
(중앙의 쌍분이 고경명장군 묘소이고 좌측의 쌍분은 아들 고용후의 무덤이며, 우측의 봉분은 증 정부인 철성이씨의 묘소이다)
고경명장군 묘소 전경
고용후 [ 高用厚 ]
1577(선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 형조좌랑 운(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맹영(孟英)이고, 아버지는 의병장 경명(敬命)이며,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병조좌랑ㆍ병조정랑을 거쳐 1616년(광해군 8) 남원부사가 되었으며, 1624년(인조 2) 고성군수를 역임하였다.
1631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판결사(判決事)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청사집』ㆍ『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고용후 묘소 전경
재실 제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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