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경북 포항]문원공 회재 이언적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16. 21:42

회재 이언적(1491~1553)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생원 이번(李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계천군 손소(鷄川君 孫昭)의 따님인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초명은 적(迪) 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이언적은 1491년 외가인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외삼촌인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에게 글을 배우고

1514년(중종9년) 문과 별시에 급제 하면서 관직에 나아가다.  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사간이 되었으며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당해  귀향하여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다.

1517년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지방향교 교사)으로 있던 27세의 나이에 외숙인 망제 손숙돈(忘齊 孫叔暾)과 망기당 조한보(忘機堂 曺漢輔)간에 벌어진 무극태극논쟁에 가담하여 양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고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의 견해를

논하였다.

1537년 김안로일당의 몰락후 홍문관 교리,직제학을 거쳐 전주부윤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일강심목 상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1547년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으나 63세로 죽었다.

이언적은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하고 독자적으로  학문을 수립하여 조선의 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므로써 조선의

성리학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主理的成理說은 이황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선구가 된다

그리고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배생활동안 求仁錄, 大學章句補遺, 中庸九經衍義, 奉先雜儀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1610년(광해군2년) 문묘에 배향되었고

경주 옥산서원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文元이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문원공 묘역-앞은 회재 이언적의 묘이고 뒤는 정경부인 함양 박씨의 묘이다

 비석-행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시문원공회재이선생지묘

(行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贈대光輔국숭祿대夫議정府領議정諡문元公晦齋이先생之墓)

 문인석

 

 비석(貞敬夫人朴씨之墓)

 정부인 함양박씨의 묘이다

 문원공 묘역 안내석

 

 달전재사-회재 이언적의 묘소관리와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이다

 촉새라고 하는데 처음 보았다-신기하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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