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휘 맹진 판중추공(判中樞公)

장안봉(微山) 2013. 4. 16. 20:36

이맹진

 

  휘 맹진 판중추공(判中樞公) 은 목은의 손자로서 휘 종덕 문양공의 4남 입니다.
  어머님은 문화평리(門下評理) 혜손의 딸, 제학(提學) 인비의 손녀, 찬성(贊成) 욱의 증손녀, 
  현복군 찬성(贊成) 안동(安東) 권렴權廉)의 외손녀인  정경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입니다. 
  공의 자는 계양, 호는 청허재 입니다.
  1374년 목은께서 47세이실때,부친 문양공께서 25세이실때에 태어나셨습니다. 
  휘 맹진 판중추공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럽고 조용하며,  도량이 넓고 소통하다 했는데,
  공부를 하기 시작하자 재예가 특별히 뛰어났고 문필과 행동이 다 함께 구비되었습니다.
  1388년, 공의 나이 겨우 연소한 15세 때에 아버님이신 문양공께서 비명에 돌아가시자 
  슬픔에 못이겨 피눈물을 흘려 울어서 몸이 파리해졌는데 마치 성인과 같았다 합니다.
  4년뒤인 1392년, 공께서 19세되실 때에는 숙부 휘 종학 인재공(둘째집)께서도 
  비참하게 최후를 마쳐 돌아가시니 나라가 망하는 통에 집안이 풍비박산나면서  
  집안 사정이 이 때 얼마나 비통했는가는 쉽게 짐작이 갈 수 있습니다.
  이듬해 1393년(태조2) 5월 22일(혹은 28일), 어머님 정경부인 진주유씨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나십니다.  정경부인 진주유씨의 나이 45세였습니다.
  공은 이렇게해서 15세일때 아버님을 여의고 20세에 어머님마저 잃게 됩니다.
  또 이듬해 1394년 8월 1일, 할머님 안동권씨가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1396년 공께서 23세되실 때 5월 7일, 할아버님인 목은께서 파란만장한 
  그 대생애에 작별을 고하십니다.
  고려말-조선왕조건국 시기는 이렇게 해서 한산이씨 집안에게 풍전등화같은 아슬아슬한 때였습니다.
  목은의 1남 문양공이 비명에 사망하는것을 시작으로 4년후엔 2남 인재공이 또한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맏 며느리-할머님 사망이 잇따랐고 모든 집안 식구들이 온갖 고생과 풍파세월을 
  거치며 손자가족 중 일부는 멀리 피난을 가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목은께서 최후에 또 비명에 사망하시니 집안의 안정과 생존이 급선무로 대두되었습니다.
  집안에 유일하게 남았던 목은의 3남 양경공이 아버님의 유언과 빙장되는 양촌선생의 권유를 
  물리 칠 수 없는 절박한 때였고, 뒷 날 태종이 목은을 복권시키며 그 충절을 현양하게하자 
  양경공이 조선의 벼슬을 받아들여 재상반열에 오르며 새 왕조에 입조하게 됩니다.
  집안을 살리고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했습니다.
  목은의 손자 휘 맹진 판중추공이 비로서 조선조에 들어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가니  
  시직, 위솔, 익찬, 악정등의 관직을 거칩니다.
  [고려조에서는 벼슬이 비서랑(秘書官)이었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포수령으로 임명되어 나가셨는데 상벌을 밝히는 것이 몹시 엄하고 분명하여 
  고질이 되었던 그 지방의 병통을 바로 고쳐 잡으니 그 지방 인사들이 읍지를 만들어 
  그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조정으로 다시 돌아와서 한림, 검상, 성균관 직강, 사헌부 지평을 거쳐 통정품계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진주에 나갔습니다.
  진주는 고울이 크고 인심이 사나왔던 곳이었는데 공께서는 우선 그 풍속을 바로잡고 
  토호들의 교활한 모습을 바로잡는 일에 힘써서 백성들의 괴로와하는 바를 고쳐주고,
  선비들이 학문에 힘쓰도록 권장했습니다.
  이렇게  3년을 지나자 정치가 잘 되고, 백성들이 편안해졌습니다.
  또 공께서는 틈틈히 풍월을 노래하며 시작도 하셔서 천수의 시를 남겼으나 
  애석하게도 병화로 타서 몇 편만이 전한다 합니다.
  조정으로 다시 돌아 오셔서 추밀직 우대언에 임명되었는데 높은 이론으로 임금의 총명을 돕고,
  진현관 제학에 제수되어서는 당대의 경술에 능한 선비들을 뽑아 국학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명나라에서 정당문학 지서연 한성부판사를 제수받고 경창군에 봉해졌습니다.
  이 때에 명(明)나라 예학사 겸(=倪謙)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는데 공은 명령을 받고 
  접반사가 되어 잔치하고 대접하는것이 예수가 법도에 맞게하니 예학사 겸(謙)이 공을 매우 
  공경하였습니다.
  계속하여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1456년, 공의 나이 83세되던 해 6월 2일에 사육신의 난이 터집니다. 
  이 때 6촌형인 사육신 휘 개 백옥헌공과 함께 뜻을 같이 했던 공의 2남 휘 유기 도총진무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며 순절하는데, 박팽년의 아우 박대년과 성삼문의 아우들인 성삼성, 성삼고
  등과 함께 6월 21일에 거열로 능지처참되어 3일동안 저자에 그 머리가 효수됩니다. 
  도총진무공과 사육신공 및 그 아들들은 모두 부친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고 
  [도총진무공의 아들 중 한 명이 살아 남았음. 족보에 휘 은산(銀山)으로 올라가 있으며 
   대가 끊이지 않고 후세까지 이어졌음]아내와 딸들, 그리고 누이들까지도 관비가 되어 
  대신들에게 나누어지게 됩니다. 
  집안의 며느리들은 모두 당대 명문 사대부집안의 따님들로 귀하게 자라며 만년까지 
  복을 누렸는데 하루 아침에 노비가 된것입니다.
  [훗날 도총진무공의 부인과 따님들은 모두 풀려났고 따님들은 나중에 벼슬한 사대부 
  집안으로 출가하여 자손들을 남기며 복을 다 누렸습니다]
  다행히 민심을 고려한 세조의 특명으로 공은 부자연좌죄에서 풀려나 목슴을 건지나 
  아들과 손자가 비참하게 죽고 출가한 딸들과 며느리, 손녀딸들이 노비가 되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한 공은, 결국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7월 2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판중추공은 한산이씨 집안의 파란만장했던 고려말과 조선등극시기에 태어나 성년으로 자라며 
  개인적으로 뼈에 사무치는 많은 시련을 겪었고 학문과 인품을 인정받아 조선조에 등제하여서는  
  함경감사, 이조참판, 한성부윤, 제학, 정당문학, 좌찬성 등등의 두루 내외 요직과 많은 
  문한을 거치며 결국엔 지위가 태보(太保)의 숭정대부 판중추원사(崇政大夫 判中樞院事)에 
  이르렀습니다.
  말년엔 단종복위거사로 인하여 비참한 체험도 하셨지만 공께선 83세라는 긴 향수를 사시며 
  후손들의 터전을 이룩하셨습니다.
  공의 부인은 지군사(知郡事) 충보의 딸, 지평(持平) 식의 손녀,
  문간공(文簡公) 광양(光陽) 이무방(李茂芳) 의 외손녀인 
  정경부인 무송윤씨(貞敬夫人 茂松尹氏)이고  슬하에 4남을 두셨는데,
  2남 휘 유기(裕基) 도총진무공(都摠鎭撫公)은  첫째 형님 휘 맹유 사윤공(司尹公),
  3남 휘 보기(保基) 부정공(副正公)은  둘째 형님 휘 맹균 문혜공(文惠公)께 
  각각 출계(出系)합니다.
  공의 1남 휘 연기(衍基) 판군기감사공(判郡器監事公)은 4남을 두었는데 
  휘 항(沆), 휘 엄(), 휘 서() 사직공(司直公), 휘 량()이며 
  공의 4남 휘 순기(順基)는 휘 도()를 두셨습니다.
  공의 많은 후손들은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지역에 자리를 잡아 
  주류를 이뤘습니다.

 

출처 : 하늘행복
글쓴이 : 하늘감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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