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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년(영조24) 아버지 이태화(李泰和)가 위독해지자 몇 달 동안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간호하다가 마침내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을 벗어나지 않았다.
학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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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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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李栽) |
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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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서원(高山書院) |
학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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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학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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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 김익한(金瀷漢), 권정택(權正宅), 김낙행(金樂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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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부터 후학을 가르치다 |
| 고향의 문중 부로들이 자제의 교육을 위하여 대산서당을 지었는데 거기서 학문에 잠심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가난하여 나물밥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으나 오롯이 학문·육영에 힘써서 혹 달 밝은 밤에 혼자 못 가에 앉아 명상을 즐기고 혹 심신이 피곤하면 정관대에 거닐면서 성령(性靈)을 도야하였다. 당시 이상정은 30세가 못되었으나 그 명성이 널리 퍼져 원근에서 배움을 청하기 위하여 찾아드는 선비가 날로 늘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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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정밀하게 하는 것을 주로 삼다 |
| 평소 새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먼저 가묘에 참배하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았다. 독서는 안 읽은 책이 없지만 공맹정주(孔孟程朱)의 글을 주로 하였고, 혹은 밤 새워 사색하고 혹은 여러 날을 침잠하여 반드시 깨우친 뒤에야 그쳤으며 마음에 체득한 바는 반드시 몸으로 행하였다. 남의 허물은 못들은 체 했고 남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반드시 칭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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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문인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이상정이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다시 서재의 문을 열자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대산은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 그 자질에 따라 함양했으며 심술(心術)을 밝혀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당시 영남의 선비로 언행이 겸손하고 공경스러우며 눈매가 단정한 이는 묻지 않아도 대산 문인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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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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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저작 |
「이기휘편(理氣彙編)」 「사칠설(四七說)」 「제양록(制養錄)」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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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명 |
| 『대산선생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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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
교지(敎旨)- 문과병과홍패, 통정대부예조참의, 시호추증 시권(試券)- 이상정 2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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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기자설(理主氣資說) |
이상정의 이기설은 주리설(主理說)을 확립한 것이다. 그는 이는 무력한 정지체가 아니요 스스로 능히 발하여 운용(運用)할 수 있는 활물(活物)이라고 하여 이(理)의 운동성을 인정하였다. 즉 이는 비록 기를 타고 동정(動靜)하나 그 반휘운용(發揮運用)하는 묘가 있어 하지 않음으로서 행하니 진실로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주재하지 않더라도 주재하는 바가 있으니 아주 주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상정에 있어서 기는 이(理)가 동정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資]이 되는 것으로 그의 주장은 理의 능동성을 부정한 율곡의 주기설(主氣說)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갖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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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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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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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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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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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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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화(李泰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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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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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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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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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수(관리자 : 이방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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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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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8호, 2001년 11월 1일 지정, 3동 | |
건축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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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종택의 종가는 넓은 마당을 앞에 두고 뒤쪽에 안채를 배치하였으며, 안채 우측에 방형의 담을 둘러 사당 공간을 따로 마련하여 종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안채는 정면 5칸,·측면 5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실의 구성은 정면 2칸,·측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을 들이고, 그 앞에 부엌을 두었다. 대청 우측에는 세로 3칸에 3개의 방이 연이어져 있는데 위쪽의 방을 ‘태실(胎室)’이라 부르며 중사랑방으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2칸은 제례시에 사용하는 방(빈소)이라 하였다.
안채의 전면 중앙에는 중문칸을 두어 출입을 하게 하였는데 문간 상부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실용성을 고려하였다. 중문칸의 우측에는 2칸 사랑방을 두었고, 좌측에는 2통칸의 광을 들였다.
사당 공간은 내삼문과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바닥은 시멘트로 마감하였다. 내부에는 5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사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다.
대산종가는 이전에 존재하였던 종택을 본보기로 삼은 것으로 보이며, 1930년대에 건립한 근세 한옥으로는 드물게 전통양식에 따라 건립한 주택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다. |
건축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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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종택의 대문은 현대식 철문으로 남서향으로 마련되어 있다. 철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기다랗고 넓은 바깥마당이다. 바닥에는 부분적으로 자잘한 돌조각이 깔려 있다. 본채는 서향하고 서 있으며, 口자 형상이다. 본채의 남동쪽 구석, 사당이 한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수운종택과 같은 배치이다.
口자 형태의 서쪽 면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중안에 중문을 두고, 남쪽으로는 사랑이고, 북쪽으로는 부속 공간이 자리 잡았다. |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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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수재(晩修齋) |
사랑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다. 앞으로는 난간마루를 둘렀고, 옆, 남쪽 방향의 측면으로는 쪽마루를 두었다. 정면 쪽 처마 밑, 서쪽 방향의 처마 밑에 중문 쪽으로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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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고태실구지(先祖考胎室舊址) |
만수재의 반대쪽, 중문과 먼 쪽으로 달려있다. 본래의 태실은 이 사랑채의 방이 아니라 그 반대쪽, 口자 건물의 동남쪽에 있는 안채의 방이지만, 사람들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현판을 앞으로 내 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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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범(家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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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 남부권 > 소호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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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산이씨와 달성서씨의 동성마을 |
소호리는 일직면사무소가 있는 5번 국도와 중앙선 운산역 사이에 있는 운산리의 좌측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말 소시랑(蘇侍郞)이 살았고 앞에 호수가 있어 소호리라 하였다 하며, 보물 제475호인 소호헌(蘇湖軒)이 이 마을에 있는 것도 마을 이름과 관련이 있다. 한산이씨(韓山李氏)와 달성서씨(達城徐氏)의 동성마을로 북쪽으로 향한 음지마을과 남쪽으로 향한 양지마을이 있다.
대산종택(大山宗宅)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종택이며 뒤쪽에 대산의 불천위 사당도 있다. 대산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외손이자 밀암 이재의 제자로 퇴계학을 가일층(加一層) 현양(顯揚)시킨 학자이다. 그의 학문은 아우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과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를 통하여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種錫)으로 계승되었다.
수은종택(睡隱宗宅)은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의 종택이며, 수은는 목은(牧隱) 이색의 10대손으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외손자다. 병자호란 때는 안동의 의병장이 되어 남한산성으로 출발했으나 이미 강화한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고 한다. 수은은 안동 입향조이기 때문에 수은종택을 한산이씨 안동종택이라고도 한다. 이 종택 사랑채에 관가당(觀稼堂)이란 당호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수은의 증손자이자 대산의 아들인 이태화(李泰和)의 호이다. 종택 뒤에는 수은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수옥정(漱玉亭)은 수은이 후학들을 강학하던 곳에 그의 유덕을 추모하여 1953년에 지은 정자다.
안동소호헌(安東蘇湖軒)은 임청각 이명의 다섯째 아들 이고의 분가 주택으로 건립한 것을 무남독녀 사위인 함재(涵齋) 서해(徐嶰)에게 물려준 집이다. 이 건물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직접 세우지 않고 평방(平枋) 모양으로 귀틀을 짜 돌리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점과 기와에 새겨진 쌍비용문(雙飛龍紋)은 특히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약봉태실(藥峯胎室)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약봉 서성(徐渻)이 태어난 곳이다. 약봉은 율곡의 문인으로 대구 귀암서원에 부친과 함께 제향되어 있다.
깟방우는 망호리 동쪽에 있는데 큰 바위가 있다고 부르는 이름이며 손암이라고도 한다. 안망실(安望室)은 인근 마을에 비해 고지대로서 앞 전망이 좋아 평안히 바라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네미·성남은 약 400년 전 진주(晋州) 목사(牧使)를 지낸 성남(星南) 장문보(張文輔)가 정착하여 거주하였으며 성남정(星南亭)이란 정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지고 있다. |
문중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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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산이씨 세거지 |
일직의 들은 한산이씨의 세거지이다. 수은종택은 안동 일원의 한산이씨 대종가이다. 그 뒤로는 대산종택이 울타리를 잇대어 붙어 쳐져 있다. 대산종택의 바깥마당과 수은종택의 뒤 울타리는 서로 겹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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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못을 메우고 터를 잡다 |
대산종가 터는 원래 연못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 망호는 소호라고도 불리어진다. 건너편 마을 속에 있는 소호헌(蘇湖軒)의 소호는 마을의 이름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소호의 소는 소씨의 소이다.
지금 이 마을에는 소씨가 살지 않는다지만, 전에는 소씨가 많이 살았다. 소씨의 호수를 뜻하는 말이 소호일 것이다. 이 종가의 연못에는 소씨가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집이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관가당 이태화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현몽을 하였다. 소씨가 상량도 안 되는 집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사서 집을 지으면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관가당은 그 터를 사 가지고 연못을 메우고 집을 지었다. 그것이 지금의 대산종가이다. 대산 이상정이 태어난 집이고, 대산의 큰 집인 셈이다. 나중에 대산이 귀하게 되자 큰 집은 앞으로 옮기고 본집을 대산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집 뒤에 작은 집을 지어 대산이 머물며 부모를 봉양하게 하였다는 것이나, 대산이 만년에 산골짝 속에 3칸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과 서로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자료를 조금 더 상고해볼 일이다. |
관련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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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범(家範) |
이 책은 한산이씨 대산종가에서 소장하던 『가범(家範)』이다. 이 책은 가정의 규범들을 항목별로 자세히 기록해 놓은 필사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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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산선생문집(大山先生文集) |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시문집이다. 이 책은 서(序), 발(跋), 부록(附錄) 등이 없어서 간행 연대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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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산선생익장(大山先生謚狀) |
이 글은 한산이씨 대산종가에 소장되었던 「대산선생익장(大山先生謚狀)」이다. 대산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학문 업적과 영향력을 설명하여, 이상정의 시호를 청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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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 |
| 한산이씨(韓山李氏) 중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의 족보이다. 판중추공파는 이색(李穡)의 장남 이종덕(李種德)의 4남인 이맹진(李孟畛)을 파조(派祖)로 하는 파이다. |
관련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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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시교지(賜諡敎旨) |
| 1557년(명종 12) 3월 22일 이미 죽은 숭정대부 지중추부사 이현보(李賢甫, 1467~1555)에게 효절공(孝節公)이란 시호를 내려주는 교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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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지(科紙) |
| 이 문서는 한산이씨 대산종가에 소장되었던 이상정의 대과 시험답안지[科紙]이다. 이상정이 25세 때인 1735년(영조 11)에 증광 문과 병과 28등으로 급제하였을 때 쓴 것이다. |
관련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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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산선생문집(大山先生文集) |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시문집이다. 이상정의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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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휘편(理氣彙編) |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이기(理氣)에 대한 어휘(語彙)를 모아 해설한 책으로, 1책의 목판본이다. 이 책은 1925년 6세손 이성구(李性求)와 이진구(李眞求)가 편집,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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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산선생실기(大山先生實紀) |
|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실기(實紀)이다. 1845년 외증손 유치명(柳致明)이 『대산실기』10권을 정리하였고, 이후 초간(初刊)한 내용을 보충하여 1925년 후손 이성구(李性求) 등이 중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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