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경남산청] 문정공 남명 조식(文貞公 南冥 曺植) 유적지

장안봉(微山) 2012. 12. 16. 21:32

 

 

 

 

 

 

 

 

 

 

 

 

 

 

 

 

 

 

 

 

 

 

 

 

 

 

 

 

 

 대곡성운( 大谷 成運)이 짓고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이 글씨를 쓴 남명 조식 묘비

 징사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문정공남명조선생지묘(徵士贈大匡輔國崇祿대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先生之墓)

文貞公 南冥 曺植 墓碑(국역)

 

[문정공 남명선생 묘갈명]

조(曺)씨는 옛날부터 대성으로 대대로 인물이 났다. 선대에 고려 태조 때 형부원외랑을 지낸 서(瑞)는 덕궁공주(德宮公主)의 아들이다. 그 뒤로 연이어 현달해 중랑장을 지낸 은(殷)에 이르렀으니 공의 고조이다, 이분이 성균 생원 안습(安習)을 낳고 생원은 영(永)을 낳았는데 벼슬하지 않았다. 그 아들 언형(彦亨)이 처음 재예로 과거에 합격해 이조 정랑이 되었다. 지조가 있고 깨끗하여 남들과 영합하지 않았는데 벼슬이 승문원 판교에 이르러 별세했다. 어머니 이씨는 충순위 국(菊)의 따님으로 부녀자의 법도가 있어 남편을 섬김에 덕을 어김이 없었다. 공은 1501년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식(植)이고 자는 건중(楗中)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준수하였다. 어릴 적부터 조용하고 정중함이 어른 같아 또래들과 어울려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랑하여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무릎에 앉히고 시서(詩書)를 가르치니 가르치는 대로 바로 외워 잊지 않았다. 8~9세 때 병을 앓아 자리에 누웠는데 어머니가 근심스런 얼굴빛을 하자 공은 몸을 일으켜  기운을 차리고 조금 나은체 하며 "하늘이 사람을 낼 적에 어찌 그냥 태어나게 했겠습니까 다행히 저는 사내로 태어났으니 하늘은 반드시 부여한 바가 있어 저에게 책임을 지워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이런데 있다면 제가 오늘 갑자기 요절할 것을 근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고 고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서책에 널리 통하였는데 특히 춘추좌씨전과 유종원의 글을 좋아하였다. 그런 까닭에 문장이 준엄하고 기력이 있었다. 풍물을 읊고 일을 기록할 적에 애초 고심하지 않은 듯했으나 문장이 엄정하고 의리가 정밀하여 성대하게 법도가 있었다. 나라에서 대책(對策)으로 선비를 시험하자 응시하여 답안을 제출했는데 시험관이 보고서 깜짝 놀라 1등과 2등으로 뽑은 것이 세번이나 되었다. 이에 고문을 배우는 자들이 다투어 서로 전하며 본보기로 삼았다. 1526년 판교공이 세상을 뜨자 공은 서울에서 상여를 받들고 내려가 고향 산에 안치하고 어머니를 모셔와 봉양하였다.  공은 어느 날 글을 읽다가 허형(許衡)이 말한 이윤(伊尹)의 뜻에 뜻을 두고 안연(顔淵)의 학문을 배운다는 구절을 보고서 절실히 깨달아 분발하며 의지를 가다듬고 육경 사서 및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주희의 글을 강론하고 암송하며 밤낮으로 힘과 정신을 극진히 하였다.  연구하고 사색할때는 학문은 경(敬)을 유지하는 것보다 긴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주일(主一)하게 하는 데 힘을 써서 밝게 깨어 혼매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일 적에는 학문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기 때문에 사욕을 극복하는데 힘을 기울여 마음속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고 하였다. 천리를 함양할 적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며 은미한 곳과 혼자만 아는 깊숙한 곳에서도 성찰하였다. 앎이 이미 정밀했으나 더욱 정밀함을 구했고 실천이 이미 극진했으나 더욱 힘을 기울였다. 자신에게 돌이켜 체험하고 실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고서 궁극의 경지에 반드시 오르길 구했다.

1455년 모친상을 당해 선고의 묘 왼쪽에 장사지냈다. 공은 밝은 지혜와 높은 식견으로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기미를 잘 살폈다. 일찍이 세도가 쇠퇴하고 인심이 변하고 풍속이 야박하고 교화가 무너짐을 보았다. 게다가 현인의 갈 길은 험난하고 사화의 기미는 암암리 드러나고 있었다. 이 때에 난세를 만회하고 인심을 교화하는 데 뜻을 두었지만  도가 때를 만나지 못해 끝내 배운 바를 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고 벼슬을 구하지 않고 포부를 거두어 물러나 산야에 살았다. 지은 집에 이름 붙이기를 정자는 산해정(山海亭) 집은 뇌룡사(雷龍舍)라 하였다. 만년에는 두류산 아래에 터를 잡고 시냇가 구름이 서린 동네로 들어가 작은 집을 짓고서 이름을 산천재(山川齋)라 하였다. 그 속에 깊이 잠겨 자신을 수양하며 보낸 세월이 여러 해이다. 중종 연간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명종 연간 또 유일로 천거되어 두번이나 전생서 주부와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고 다시 단성현감으로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때 올린 상소에 "나랏일이 이미 그릇되고 인심이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그것을 되돌리는 기미는 구구한 정사와 형벌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조지서 사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또 상서원 판관으로 불려들여 명종이 사정전에서 공을 만났다. 임금이 난세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정이 서로 미더우면 지치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학문하는 방법을 묻자 대답하기를 임금의 학문은 통치를하는 근원인지라 그 학문은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을 귀히 여깁니다 라고 하였다. 또 유비가 제갈량에게 삼고초려한 일을 묻자 답하기를 반드시 영웅을 얻어야 한나라 황실 회복하기를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고초려까지 이른 것입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훌륭한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그 다음날 산으로 돌아갔다. 1567년 선조 임금이 즉위한 뒤 교지로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연이어 징소하는 명이 있었으나  또 사양하고 상소하여 구급(救急) 두 자를 올려 몸을 바치는 것을 대신한다고 하면서 당시의 폐단 열 가지를 아뢰었다. 1568년 선조가 또 부르자 다시 봉사(封事)를 올려 정치하는 도는 임금이 선을 밝히고 몸을 성실하게 하는 데 있으니 반드시 경(敬)으로 주를 삼아야 합니다 라고 하였으며 서리들이 간사하게 이익을 탐하는 일을 진달하였다. 얼마 뒤 종친부 전첨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571년 큰 기근이 들어  임금이 곡식을 내리자 글을 올려 감사를 표하며 여러번 건의한 내용이 시행되지 않고 있음을 아뢰었는데 그 말이 매우 절실하고 곧았다.  1572년 병이 심해지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의원이 당도하기 전인 2월 8일 운명하였다. 향년 72세였다. 산천재 뒷산에 묘지를 정하고 4월 6일 장사를 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통달하며 기품이 높고 우뚝하였다. 몸가짐은 단정하고 엄숙하고 곧고 반듯했으며 마음가짐은 강하고 굳세고 정밀하고 영민하였다. 실천은 과감하고 확고했으며 행동은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눈은 두리번거림이 없었고 귀는 귀울여 엿들음이 없었다. 장엄하고 공경한 마음을 늘 가슴속에 간직하고 태만한 얼굴빛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항상 깊숙한 방안에 조용히 거처하며 걸음이 문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어 지붕을 맞대고 사는 옆집 사람도 그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자리에 시동처럼 앉아 있었는데 어깨와 등을 곧게 펴 멀리서 보면 초상이나 조각상처럼 보였다. 책상 앞에서 책을 펴면 마음과 눈을 집중해 묵묵히 보고 깊이 생각하며 입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아 방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하였다. 단정한 용모와 행동거지는 경박하지 않고 단아하여 절로 법도가 있었다.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을 때도 떳떳한 법도를 잃지 않아 매우 볼만했다. 찾아온 손님이나 벗들이 공의 신성한 얼굴빛 준엄한 자세 말이 적으며 간결하고 과묵한 모습을 보고서는 반드시 자세를 가다듬고 무릎을 꿇고서 긴장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망령된 말을 하거나 소란스럽게 웃지 않았다.

집에 있을 적에는 장엄한 태도를 사람을 대하여 집안 안팍이 모두 정숙하였다. 가까이서 시중드는 몸종도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옷깃을 단정히 하지 않고서는 감히 그 앞에 나가지 못했다. 존귀한 부인도 그러했다. 남의 선(선)을 들으면 기쁨이 안색에 드러나 자신이 그것을 가진 듯이 했고 남의 악을 들으면 한번이라도 그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하여 원수처럼 피했다. 벗을 취할 때는 반드시 단정히 하였다. 그가 벗할 만한 사람이면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왕공처럼 존중하여 반드시 예의와 공경을 더하였다. 그러나 그가 벗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벼슬이 아무리 높아도 흙덩이나 나무토막처럼 여겨 그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 때문에 교유가 넓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사귄 사람들은 학행과 문예가 있어 모두 당대 이름난 유학자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밝아 아무도 자신의 속내를 숨길 수 없었다. 청현직 반열에 올라 이름을 떨치던 신진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공이 한번 보고 사름들에게 말하기를 자기 재주를 자부하며 남에게 기세를 부리는 것을 보니 훗날 어진 이와 재능 있는 이를 해치는 일이 반드시 이 사람에게서 일어날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 후 과연 1품의 벼슬자리에 올라 몰래 흉악한 괴수들과 결탁해 법을 농락하고 위세를 부리며 선비들을 죽였다. 또 유생 중에 문예의 재주는 있으나 과거에 그ㅂ제하지 못한 자가 있었다. 그는 몰래 시기하고 질투하며 어진 이를 원수처럼 보았다. 공이 우연히 어떤 모임에서 그를 보고서 물러나와 벗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의 미간을 살펴보니 그 사람됨이 겉으로는 화평한 것 같으나 속에는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있네. 그가 벼슬자리를 얻어 뜻을 펴면 착한 사람들이 위태로워질 것일세 라고 하자 벗들이 모두 명석함에 감복하였다.  공은 천성이 효성과 우애에 돈독하였다. 어버이 곁에 있을 적에는 반드시 부드러운 얼굴빛을 띠며 선으로 봉양을 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으며 부드러운 의복과 맛난 음식도 갖추어 올리지 않음이 없었다. 상을 당했을 적에는 슬퍼하고 사모하고 서럽게 울며 상복을 벗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몸소 빈소를 지켰다.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었는데 고기를 삷고 조리한 것이 적절한지 제기를 씻고 닦음이 깨끗한지 등을 몸소 살폈다. 아래 사람들에게 분부하여 상중에는 사소하고 번잡한 집안일을 와서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공은 아우 환(桓)과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 형제는 사람의 사지처럼 뗄 수 없는 관계라 생각해 한 담장 안에 동거하며 같은 문으로 출입하고 식사를 함께 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가산을 형제 중 가난한 사람에게 갈라 주고 조금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다. 남이 죽거나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애통해 하였으며 달려가서 물이나 불에 짜진 사람을 구하는 것처럼 기력을 다하였고 하찮은 물건을 버리는 것처럼 재물을 선뜻 내 놓았다. 공은 세상을 잊지 못하여 늘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겼다. 매번 밝은 달이 뜬 맑은 하늘을 보면 홀로 안아 슬피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면 눈물을 흘렸는데 곁에 있던 사람들도 알지 못했다. 공은 만년에 학문의 힘이 더욱 극진해지고 조예가 더 정밀하고 심오해졌다. 사람을 가르칠 적에는 각자 재주에 따라 독실하게 하였으며 질문하는 바가 있으면 그를 위해 반드시 문의한 뜻을 분석해 주었는데 그 말이 터럭 끝을 분간하듯 상세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한 뒤에야 그쳤다. 일찍이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학자들은 절실하고 가까운 것을 버려두고 고원한 것만을 추구한다. 학문하는 것은 애초 어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어른을 받들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힘쓰지 않고 갑자기 인성과 천성의 오묘함을 궁구하려 하면 이는 인사(人事) 위에서 천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어서 끝내 마음으로 실득함이 없을 것이다. 이 점을 깊이 경계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옛 성현의 초상을 그려 거처하는 방에 걸어 놓고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사모하였으며 정숙한 자세로 일어나 공경을 표하기를 스승앞에 나아가 얼굴을 마주하고 가르침을 받을 때와 같이 하였다. 

일찍이 학자는 잠을 많이 자서는 안된다. 사색공부눈 밤중에 더욱 전일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늘 쇠방울을 차고 다녔는데 성성자(惺惺子)라 불렀다. 이 방울을 수시로 흔들어 마음을 각성시켰다. 매번 독서하다 긴요한 구절을 만나면 반드시 두세 번 반복해 읽고서 붓을 들어 기록했는데 학기(學記)라고 이름했다. 손수 신명사도(神明舍圖)를 그리고 신명사명(神明舍銘)을 지었다. 또 천도(天道) 천명(天命) 이기(理氣) 성정및 도에 나아가고 덕에 들어가는 것 집의 구조 과거의 등급 등을 도표로 그렸는데 그 유형이 한둘이 아니었다. 또 창과 벽 사이에 경의(경의) 두 자를 큰 글씨로 써 붙여놓고서 학자들에게 보이고 자신도 경각시켰다. 병세가 위독해졌을 적에도 다시 경의를 거론하며 간곡하게 문생을 위해 거듭 훈계했다. 공이 운명할 즈음 부인을 물러가게 하고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하여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잠자리에 든 듯이 하였다. 임금이 제문을 내리고 곡물을 부조했다.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했다. 친구 문생 친척 외척 인척들이 통곡하며 모여 장례를 치르는 날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부인은 남평조씨(南平曺氏)로 충순위 수(琇)의 따님이다.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일남 일녀를 두었다. 아들은 아홉살에 일찍이 요절했고 딸은 만호 김행(金行)에게 시집가서 딸 둘을 낳았다. 큰 사위는 김우옹(金宇顒)으로 현재 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작은 사위는 곽재우(郭再祐)로 한 창 글을 배우고 있다.  후취 부인은 삼남 일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차석(次石) 차마(次磨) 차정(次矴)이고 딸은 맨 뒤에 낳아 아직 어리다. 아! 공이 학문을 독실히 하고 실천을 힘써 도를 닦고 덕에 나가며 지식을 정밀히 하고 견문을 넓게 한 점은 비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예전 현인과 짝할 만하고 후학의 종사가 될 만하다.  혹자는 이를 모르고 논평을 다르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굳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알아주길 바라랴 백세 먼 훗날 아는 자가 알아주길 기다릴 뿐이다. 내가 외람되이 교우의 대열에 끼어 종유한지 가장 오래되었다. 앞뒤로 공의 덕과 행실을 보아왔고 또한 남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모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요 남의 말을 귀로 들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후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부여해 주신 덕 이미 어질고도 곧았네.

거두어 내 몸에 간직하니 혼자서 쓰기에 넉넉하였네.

그 덕 남에게 베풀지 못해 은택이 널리 미치지 못했네.

이것이 시운인가 천명인가 슬프다 백성들 복 없음이여

 

원문은 대곡성운( 大谷 成運)이 짓고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이 글씨를 썼다(원문비는 묘소 옆에 있슴)

국역비  건립추진위원장 덕천서원 원장 이현재(李賢宰)

번   역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소장 최석기(崔錫起)

건   립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이사 12대손 조옥환(曺玉煥)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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