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오(鄭以吾)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 찬성사 정신중(鄭臣重)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우왕 2) 예문관검열이 된 뒤, 삼사도사, 공조·예조의 정랑, 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고, 1398년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다. 이후 정종 대에서 태종 대에 걸쳐 성균관악정(成均館樂正), 병조의랑(兵曹議郞), 예문관의 직제학, 대사성, 병서습독제조(兵書習讀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1413년에는 『태조실록』 편찬에 대한 노고로 예문관대제학이 되면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1413년에는 『태조실록』 편찬에 대한 노고로 예문관대제학이 되면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문집으로 『교은집(郊隱集)』이 있다. 저서(著書)로 『사서절요(四書節要)』, 『화약고기(火藥庫記)』가 있다.
정분(鄭苯)
본관은 진양. 자는 자유(子), 호는 애일당(愛日堂). 할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이고, 문정공(文定公) 정이오(鄭以吾)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22(세종 4)년부터 1438년까지 사간원헌납, 함길도경차관, 승정원좌·우승지, 충청도감사,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3년에는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 김종서(金宗瑞)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정분이 낙안에 안치된 사건과 관련하여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정분이 마침 영남으로부터 돌아오고 있을 때 용안역(用安驛) 앞에 이르러 경관(京官)이 역마(驛馬)로 달려오는 것을 노상에서 만나 전지(傳旨: 임금의 전서)가 있다고 큰소리로 외치는 말을 들었다. 정분은 말에서 내려 재배(再拜)하고 경관에게 말하기를 "길 복판에서 형을 받는 것은 좋지 못하니 역관(驛館)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 하니 경관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전지를 받으시면 적소(謫所: 귀양살이 하는 곳)로 모시고서 돌아갈 뿐입니다"하였다.
이에 정분은 또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나를 살리는 것이냐?"라 하고 말에 올라 관원과 같이 함께 갔다. 관원은 미리 정분의 낭리(朗吏: 부하 직원)였음을 말하였으나, 정분은 반드시 조정의 일을 물으면 응답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알고 낙안군(樂安郡)[지금의 전라도 光陽]에 이르기까지 십여 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한번도 입을 열어서 묻지 아니하였고 적소에 이르러서는 노고를 치하하고 헤어졌을 뿐이었다.
정분은 적소에서 1년 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단종 2) 사사(賜死)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 문종의 능) 조성 등에 공헌이 있었다.
이듬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정분이 낙안에 안치된 사건과 관련하여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정분이 마침 영남으로부터 돌아오고 있을 때 용안역(用安驛) 앞에 이르러 경관(京官)이 역마(驛馬)로 달려오는 것을 노상에서 만나 전지(傳旨: 임금의 전서)가 있다고 큰소리로 외치는 말을 들었다. 정분은 말에서 내려 재배(再拜)하고 경관에게 말하기를 "길 복판에서 형을 받는 것은 좋지 못하니 역관(驛館)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 하니 경관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전지를 받으시면 적소(謫所: 귀양살이 하는 곳)로 모시고서 돌아갈 뿐입니다"하였다.
이에 정분은 또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나를 살리는 것이냐?"라 하고 말에 올라 관원과 같이 함께 갔다. 관원은 미리 정분의 낭리(朗吏: 부하 직원)였음을 말하였으나, 정분은 반드시 조정의 일을 물으면 응답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알고 낙안군(樂安郡)[지금의 전라도 光陽]에 이르기까지 십여 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한번도 입을 열어서 묻지 아니하였고 적소에 이르러서는 노고를 치하하고 헤어졌을 뿐이었다.
정분은 적소에서 1년 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단종 2) 사사(賜死)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 문종의 능) 조성 등에 공헌이 있었다.
1746년(영조 22) 김종서·황보 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1786년(정조 10)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고, 1791년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식(配食)되었다.
1804년(순조 4)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집 앞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1808년 신창(新昌) 진사 이기선(李基善) 등의 상소로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1804년(순조 4)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집 앞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1808년 신창(新昌) 진사 이기선(李基善) 등의 상소로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정이오(鄭以五)묘소전경
재실전경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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