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경기도 포천]?영의정 문충공 사암 박순(文忠公 思菴 朴淳)?선생 묘-충주박씨

장안봉(微山) 2013. 4. 12. 22:12

영의정 문충공 사암 박순(文忠公 朴淳)

 

1523(중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은산군사(殷山郡事) 소(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사 지흥(智興)이고, 아버지는 우윤(右尹) 우(祐)이며, 어머니는 당악 김씨(棠岳金氏)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牧使) 상(祥)의 조카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4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쳤다. 1561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 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1563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 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했으며, 이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주역≫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더욱 능해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했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