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제 건양과 오부리를 거쳐 이번 여행의 궁극적인 목표지 무이산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애초에는 그다지 힘들지 않은 일정이 될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상당히 시간에 쫓겼던 것 같았다. 당초 오전에 고정서원과 주자묘를 둘러보고 오부리로 들어가 자양루와 주자항을 보기로 되어 있었지만 일정이 약간 바뀌어 오전 오후의 일정이 바뀌었다. 생각해보니 일정이 바뀐 덕분에 이틀 동안에 탄생지를 거쳐 가장 오래 거처하며 학술을 꽃피웠던 오부리의 자양루를 둘러보고 생의 마지막 7년을 보낸 고정을 차례로 돌아보게 되었다. 때로는 바뀐 일정이 의외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하는데 이번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한다.
하루를 묵었던 구봉대하(大廈: 빌딩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호텔이라는 뜻으로 보면 될 듯)의 아침 모습. 남평에는 5성급 호텔은 없다고 하며 민북대반점에 이어 두 번째로 좋은 곳이라고 한다. 당초 민북대반점에 숙소를 잡았는데 수리중이어서 잠정 폐쇄를 하는 바람에 이곳을 잡았다고 한다.
기차로 남평남역으로 들어와 버스를 이용하여 남평북 인터체인지를 통하여 오부리로 가는 길을 잡았다. 전에는 코스를 거꾸로 돌아 무이산쪽부터 구경을 하고 건구의 박사부를 거쳐 이곳 남평으로 왔었댔는데 당시는 국도를 이용하였다. 이렇게 올라가는 길에 고속도로로 가니 정말 이동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반면에 중국의 전통적인 모습들은 많이 놓치기 되었지만...
이곳에는 가는 곳마다 이렇게 차밭이 보인다. 남쪽 지역이라 덥고 습하여 차를 재배하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이유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우리가 가는 무이산은 세계적으로 무이암차가 유명한 곳이다. 사실 나는 차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암차니 홍차니 하는 것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이곳에 와서 박용구 교수의 설명과 차 공장에 들어가 설명을 듣고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중간에 잠깐 쉰 인터체인지. 도중에 휴게소는 없고 오부리에 가면 이용하기에 적당한 화징실이 없대서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볼일도 보고하였다. 우리로 치면 고속도로 사무실이다.
이번 여행 중에는 남평에서의 첫날만 날씨가 약간 흐렸을 뿐 나머지는 정말 날씨가 정말 좋았다. 우리나라보다 시계를 두 달 앞으로 당기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는 늦여름에 가까운 날씨였다. 다만 밤에는 조금 서늘하였을 뿐. 그나마 조금 무리를 하면 반팔을 입어도 뭐 그다지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고...
오부리로 가는 길의 포도 한 켠에는 이렇게 쌀을 널어 말리는 것이 일상적인 것 같았다. 우리는 그래도 차바퀴에 밟히지 않도록 정말 한쪽 구석에 바닥에는 그물 같은 것을 깔아놓고 너는데... 이곳에서는 그 위로 차도 지나가고 행인도 지나가고. 이렇게 몇 일만 널면 아마 탈곡하는데 드는 비용을 상당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드디어 도착한 자양루. 옆의 나무는 주자가 심은 나무라는데 수령이 역시 약 800년 쯤 된다고 한다. 나무에는 홍두(紅豆)라는 팻말을 써서 붙여놓았다. 주자는 생전에 나무 심기를 아주 좋아하였다고 한다. 이런 나무들이 다 살아서 그런 사실을 실제로 입증하는 듯하다. 우리나라처럼 심자마자 죽어서 새로 심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이곳도 전에 비해서 상당히 깨끗해진 것 같다. 환경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중국인들도 제법 찾는듯 곳곳에 승용차가 서 있었다. 이곳은 원래 유(劉)씨들의 집성촌이었으나 가이드에 따르면 현재는 거주민의 80%가 주(朱)씨라고 한다. 주자가 부친의 유언으로 유씨들에게 의탁하러 온 지 800년 만에 주씨들이 80%나 차지하게 된 것이다.
자양루 입구. 이곳은 주자가 14세 되던 해에 들어와 63세 되던 해까지 살던 곳이다. 집을 지어주고 딸까지 내준 유자우는 덕분에 주자가 묘비명을 지어주었다. 원래 이곳에 있던 묘비명은 무이궁로 옮기고, 이곳에는 모형을 세워놓았다. 어둑하지만 위에는 주자고거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입구에는 우리 눈에 가장 익숙한 초상화와 이학정종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오른쪽에는 德盛仁熟, 왼쪽에는 絶學梯航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덕이 성하고 인이 익었으며, 끊어진 학문을 이었다는 뜻이다.
집안에 들어서면 또 학달성천이라는 글자를 각해놓았다. 그러니까 바로 위 사진의 반대편 쪽이다.
경재라는 현판이 보인다. 맞은편에는 의재라는 방이 있는데 모두 주역에서 따온 것이다. 왼쪽 끝의 不遠復은 원래 주역 복괘의 괘사인데 주자의 스승인 병산 유자휘가 주자를 경계하는 말로 써주어 주자가 이를 평생 삼자부(三字府)로 삼았다고 한다.
2층에는 자녀들이 거처하던 방들이 있다. 주자의 딸 셋은 각각 범염덕의 딸, 황간, 그리고 유씨에게 시집을 갔다. 아들은 셋이 있었는데 둘은 일찍 죽었다고 한다.
자양루는 말하자면 4합원으로 된 집이다. 그리 넓지는 않아서 고대광실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멋진 그림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런 하늘을 보기가 힘든데. 그러나 남방이나 해변 쪽에서는 간혹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렇기는 해도 한국에서 떠날 때 상당 기간 흐리고 좋지 않은 하늘을 보다가 온 터여서 상당히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자양서당이라는 현판 아래에 있는 주자상. 지난번에는 안내하는 사람(해설사)은 따로 없었고 그냥 차 대접만 받은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해설사가 방방이 해설을 해주는 것을 보니 역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액자에는 어제 우계현에서부터 신물이 나도록 보아온 주자의 훈계가 적혀 있다. 독서는 집안을 일으키는 근본이요...
무이산의 무이서원 앞에 있는 주자 상을 그대로 딴 이 모형은 파이버 글라스로 만들어졌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바깥에 팽개쳐져 있는데다가 왼쪽의 들고 있는 팔의 손이 빠져서 어디로 달아나고 없었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단장을 새로 잘 해서 적당한 위치에 잘 배정을 해놓은 것 같다.
이곳은 영천과 주자가 이곳에서 모신 스승 3명 가운데 하나인 병산 유자휘의 서당이 모체가 된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이다. 영천은 바로 길 옆에 있어서 찾고자시고 할 것조차 없었지만 병산서원 터는 결국 찾지를 못하였다.
영천은 주자의 친필이라고 한다. 저번에 왔을 때는 글자의 일부만 채색이 되어 있었는데. 이 물은 주자가 먹던 물이며 지금도 이곳 사람들이 생활용수로 쓴다고 한다. 일행 중 몇 명은 이경혜 선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자가 마시던 물이라며 직접 마시기도 하였다. 이 우물에서 흘러 나오는 물에 주민들이 푸성귀를 씻는 모습도 보였다.
병산 유자휘가 강학하던 병산서당이 모태가 된 병산서원 터는 끝내 못찾았고 우리가 돌아선 곳에서는 이렇게 늙은 농부만이 한가로이 멍석에다가 벼를 펴서 말리고 있었다. 우리네 30~40년 전 시골 모습 그대로여서 정겹기만 하다.
돌아오는 곳에 다시 자양루의 앞마당을 질러 나왔다. 역광이 아니어서 이번에는 아주 선명하게 잘 찍혔다.
돌아나오며 다시찍은 사진은 역시 역광이라 주자고거라는 현판은 잘 보이지 않는다.
바깥쪽에서 본 자양루. 자양루란 현판 글자가 보이게 찍느라 활원이라는 못의 난간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다.
활원. 역시 주자의 <관서유감> 시에서 따온 것이다. 그냥 돌에다가 붉은 글씨로 적당히 휘갈겨 쓰고 새기지도 않았다. 수렴동에도 활원이라 쓴 글씨가 있는데 그곳의 글씨는 흰색의 전서로 되어 있다.
자양루 바로 앞을 흐르는 이 시내는 담계(潭溪)이다. 주자의 <명당실기>에 보면 병산 아래 담계 옆에 자리잡았다고 밝혀놓았다.
흥현서원에 가기 위하여 내린 곳. 전에는 주자항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이곳으로 나왔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들어간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빨래하고 닭잡는 이곳의 활수(活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줄을 서서 나란히 빨래를 하는 모습이 옛날 우리네 빨래터를 생각나게 한다. 마을의 모든 정보가 공유되는 곳. 정보의 교환처 역할을 하던 그 빨래터.
일행이 주자항을 둘러보기 위하여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다. 노인들은 빛만 나면 양지바른 쪽에 자그마한 의자를 갖다 놓고 저렇게 볕을 쪼고 있다. 정말 산업사회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사는 몇 안 되는 옛 여유를 가진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인 것 같다. 우리가 찾아야 할...
허름한 동네지만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할 듯한 이런 글귀들이 곳곳에 붙어 있다. 천지종수라는 말의 뜻은 천지에서 빼어난 것(인재)을 모아놓았다는 말이다. 주자와 호헌, 유자휘 등이 이곳 출신이고 보면 결코 허언만은 아닐 듯 싶다.
이곳은 흥현서원. 붕괴위험 때문에 보수를 위해서 폐쇄해놓는 바람에 내부는 구경을 하지 못하였다. 옛 기억을 떠올리면 안에도 정리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 그냥 쓰레기 더미 같은 것만 있을 뿐이다.
약간 측면에서 본 흥현서원. 규모로 보아 상당히 큰 서원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송유, 유씨가사라고 적혀 있다. 송나라의 선비, 유씨네 사당이라는 뜻이다. 당시 유씨들이 더 많이 살았을 것이니 이런 공간이 있는 것이 마땅할 터이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문 입구의 절구통 같은 돌은 가이드네 집에서 갖다놓은 것이라고 한다.
고색창연한 주자항. 그러나 주자항이라는 표석은 끝내 찾지를 못하였다. 전깃줄이 엉켜 있고 집집마다 빨래를 내다 걸어놓아 모두 사람이 사는 집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인 듯하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겨운 이런 골목은 어떤 방법으로든 보존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묘한 광경이다. 파란 하늘 아래 전깃줄. 목조가옥의 처마끝, 대나무를 걸쳐놓은 시렁이 있고, 시렁 위에는 바구니를 얹어 뭔가를 말리고 있다. 그리고 그 중간쯤 되는 햇볕이 잘 드는 위치에는 빤쓰를 널어 말리고.(지금은 빛이 사라졌지만) 다시 그 밑에는 전깃줄이 애자에 묶여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더이상 볼 수 없는 광경에 넋을 놓고 한동안 바라보았었다.
수레. 지난번에 왔을 때도 벽에 많이 걸쳐 기대어놓은 이 수레가 실제 쓰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이번에는 직접 쓰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바퀴만 걸면 된다. 바퀴의 굴대를 끼우는 곳이 여러 곳이 있다. 무게에 따라 조절하는 가변식이다. 참으로 과학적인 설계이다. 인력을 쓰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 수 있겠지만...
골목의 곳곳에는 이렇게 상당히 유서깊어 보이는 벽화 같은 것이 있다. 용머리를 한 잉어이다. 아마 등용문을 넘어갈 잉어들인 모양이다.
한때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구호가 적힌 골목의 담벼락. 평안한 오부리 건설·양호한 환경 조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감실이 하나 있고 이곳 사람들이 숭배하는 듯한 한 쌍의 인형이 있다. 향을 태우는 대가 그 중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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