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중국)

[스크랩] 주자의 탄생지 남계(南溪)서원-우계현

장안봉(微山) 2013. 4. 12. 00:04

이 날은 주자가 탄생한 우계와 잠시나마 스승인 연평 이동과 도를 강학하였던 남평을 둘러 보는 날이다. 이번 여행의 테마가 주자 유적지 탐방이라고 보았을 때 주자가 탄생한 곳부터 둘러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머나먼 이곳 남평까지 와서 만 하루를 할애하여 주자 탄생지 단 한 곳을 둘러보고 가는 일정을 뺀다면 여정이 훨씬 여유가 있었을 것이었을테지만, 그래도 이곳을 둘러보는 것이 여행 전체의 성격을 놓고 보면 필수 코스라고 할 만했다.

6인실 3층에서 잠을 자다가 깬 시간이 4시 20분 경이었다. 객차의 불이 다 꺼지고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서 기차가 서기를 기다렸더니 바로 우리의 목적지인 무이산역이었다.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내려 1층에 자리가 많이 났다. 짐은 옮기지 않고 중요한 소지품만 챙겨서 1층으로 내려왔다. 마침 누나도 내려와 남평에 도착할 때까지는 계속 1층에서 있었다. 아직 도착지까지는 2시간 반 이상이 남은 시각이었다.

차창 밖으로 희끄무레하게 날이 밝아왔고 이름모를 도시들의 건물들이 휙휙 스쳐지나갔다. 불을 끄기 전에 역무원들이 차창에 끈을 걸고 커튼을 치더니 또 날이 밝을 무렵에는 이렇게 커튼을 걷어서 깨끗하게 정리를 해놓았다. 날이 밝아질수록 목적지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 이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드디어 목적지인 남평남역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내리는 일행은 거의 우리 일행뿐이었다.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4인실에서 잔 일행(?). 출발지인 상해남역에 비해서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우리의 시골역에 내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추억의 옛 여행 같은 느낌이...

우리가 남은 여행 기간 동안 타고 다닐 버스가 도착하였다. 남평남역의 역사는 그대로였지만 약 5년 전까지만 해도 있던 시계 바늘은 어디로 가고 없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것일까? 어쨌든 자주 올 길 없는 이국 만리 남평에의 두번째 도착은 감회가 새로웠고 또 뭔가 미묘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계현에 들어서자 로타리의 주자 동상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곳에서는 가는 곳마다 주자의 상이 있었지만 사당이 아닌 이렇게 큰 거리에 서 있는 동상은 처음이었다. "아, 이제 주자의 탄생지가 가까워지는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평은 물론 다른 어느 곳에서도 더이상 이런 동상은 보지 못했다. 동상의 대에는 탄생지의 비각에 있던 중요한 시문이 돌아가며 적혀 있었다.

밖에서 본 주자 탄생지 남계서원과 붙은 심랑장이 심겨져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때 춤을 추던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이때도 춤을 추고 있었다. 다만 당시 들고 추던 촌스런 리본은 없었고 우리 드라마 대장금의 주제가를 틀어놓고 춤을 춘다는 것이 조금 달랐다면 달랐달까?

이곳은 주자의 탄생지인 남계서원과 바로 붙어 있는 심랑장(沈郞樟)이 있는 곳이다. 사실상 우계현에서는 주자와 관련하여 볼만한 곳이라고는 이곳밖에 없다.

심랑장이다. 심랑은 주자를 말한다. 우계현은 당나라 때는 심계라고 불렀기 때문에 주자의 아명을 심랑(심계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주자가 10살 정도 되던 해에 심었다고 한다. 실제로 나무의 수령을 측정해보니 8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신빙성이 있고 주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그렇게 믿고 싶은 곳이다. 왼쪽의 회랑은 비랑(碑廊)이다. 말하자면 이곳을 성역화할 때 조성한 비석을 늘어놓은 곳이다. 세월이 흘러 고색창연해지기를 바란다고나 할까. 주자의 시나 격언, 주자가 중국 문화에 끼친 공헌 따위를 아주 짧게 요약하여 적은 글[贊] 따위를 나름 유명한 서예가들이 쓴 것을 각한 것이다. 이장우 소장님이 비에 대한 글을 설명해주셨고 나무 박사인 박용구 교수가 심랑이 어떤 나무인가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장(樟)은 녹나무인데, 녹나무는 좀벌레를 방지하는 나프탈렌의 원료가 되며, 이 나무의 잎 한 장만 장롱에 넣어도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심랑장이 있는 곳에서 담밖을 나가지 않아도 남계서원과 통하게 되어 있다. 일행들이 심랑장을 둘러보고 남계서원으로 향하고 있다. 양쪽의 나무 같은 큰 기둥은 심랑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반묘방당(半畝方塘)과 남계(南溪)서원. 원래 주자는 부친인 주송이 우계현위로 있다가 관직을 떠나면서 벗인 의재(義齋) 정안도(鄭安道)의 별서에 우거할 때 태어났다. 나중에 주자가 탄생한 이곳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다 서원을 짓고 또 사당을 지어 주자를 제사지냈다. 반묘방당도 기록에 의하면 중간에 정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청말 민국초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해놓은 것이다.

연못 옆에 반묘방당이라는 비석이 있다. 원래 반묘방당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 두 수의 첫 번째 시 첫 구절 "반 이랑 반듯한 연못에 거울 하나 열려 있네"(半畝方塘一鑑開)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물론 주자가 이 연못에서 이 시를 지은 것은 아닐테고 후인들이 주자의 이 시를 의식하여 연못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일 따름이다.

사당 내의 주자상. 위의 편액 "사문정곡(斯文正鵠)"은 유교의 정통을 수립하고 꿰었다는 뜻이다. 주자를 둘러싸고 있는 네 명은 왼쪽부터 진순, 진덕수, 채원정, 황간인데 이들은 주자의 4대 제자로 불리는 이들이다.

아마 이곳이 원래 주자가 탄생한 곳인 것 같다. 옆의 남계서원은 주자가 탄생한 것을 기려 지은 서원과 사당이다. 이곳에는 달리 또 개산서원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무슨 의미로 그렇게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이곳에도 사당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곳에는 좀 다른 모양으로 진덕수와 채원정 두 사람이 주자를 보필하고 있는 모습이다. 예전에는 이곳을 수복하는 기금을 내면 빨간 종이에 돈을 낸 사람의 이름과 금액을 적어 현판에 붙였는데 지금은 그냥 모금함만 설치하여두고 성의껏 내도록 하고 있다. 일행 중 조인숙 선생이 모금함에 돈을 좀 넣었다.

우계현 박물관. 이날은 노는 날인지 문을 닿아놓았다. 토요일날 노는 박물관은 별로 보지를 못했는데... 어차피 전시물도 크게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조잡한 것 뿐이었지만, 그래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줄 근거가 없다고나 할까?

박물관 안쪽의 공간에서는 이곳의 초등학생들이 서예를 연습하고 있었다. 모두 주자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동심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까 싸인을 받으려고 난리였다. 변변한 종이도 없이 그냥 신문지 등을 가지고 와서 들이민다. 우리가 그냥 걔들 눈에 단순한 외국인이어서 호기심이 발동한 것인지 아니면 한류 열풍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장 많은 싸인을 해준 사람은 홍계한 선생이었다.

아파트 이름이 활수정신촌이다. 주자의 탄생지임을 실감케 하는 이름이다. 이 길의 오른쪽을 따라가면 활수정이라는 조그만 정자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길을 따라 가보지는 못했다.

점심을 먹은 곳. 구태여 번역을 하자면 호시절호텔이다. 전에도 이 근처 어디서 식사를 하였다. 이곳은 우계현청사가 바로 곁에 있고 주자의 부친인 위재 주송이 현위였을 때 치적비가 있다.

위재구치라는 이 치적비는 현청사 바로 곁에 있는데 이번에는 못 보고 다만 지난번에 찍은 사진이 있어서 올려본다.

다시 남평으로 돌아와 구봉산에 올랐다. 지난번여행 때 꼬마전구로 장식하여 멋진 야경을 보여주던 곳이 이번에 오니 이렇게 철거되고 있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10년이 되어야 강산이 변한다는데 5년도 안 되어 이렇게 변한 모습을 목도하게 되니 더욱 묘한 감정이 솟는다.

지난번 여행 때의 아름다웠던 구봉삭교(索橋: 현수교). 가만보니 앞쪽의 공사 중인 건물도 이미 공사가 다 끝나 음악당이 되어 있었다. 이 밑으로 흐르는 민강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수영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구봉삭교 대신 들어선 최신식다리가 구봉삭교보다 약간 오른쪽에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서 있다. 구봉삭교에는 차는 못다니게 되어 있었지만 이곳에는 인도와 차도 등이 모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다리를 이용해보지 못하였다.

구봉산 꼭대기로 오르는 계단. 일행 중에서 이 계단의 수를 헤아려 알려준 사람이 있는데 모두 382개라고 하였다. 계단 아래 위쪽에 해발을 표기한 표석이 있었는데, 아래쪽의 표석에는 해발 135, 위쪽의 표석에는 177m라 적혀 있었으므로 이 계단의 높이는 42m이다. 그러니 계단 하나의 높이가 약 11cm임을 알 수 있다. 오르기에 그다지 무리가 가지 않는 적당한 높이라 하겠다.

꼭대기의 절. 거의 이곳이 종착역인 셈이다. 남평의 송대의 명칭은 연평(延平)이었다. 주자의 스승인 이동(李侗)의 호가 연평이다. 이곳에는 연평 및 예장 나종언과 함께 강도하면서 마셨다는 육덕천이라는 샘도 있었다고 하나 가보지는 못하였다. 주자는 천주 동안현 주부로 임명되었을 때 이곳을 지나면서 이동을 찾아뵙고 배웠는 이곳 구봉산을 아주 좋아하였다고 하여 지어남긴 시도 있을 정도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강가의 저 건물은 망강루(望江樓)인데, 지난번 여행 때 전망이 좋다는 이유로 점심을 먹었던 곳이다. 당시 음식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고 문도 안 연 어둑한 곳에 들어가 식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경치는 그만이다. 내려다 보나 올려다 보나...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은 본존불이 아니라 천수관음보살이다. 내가 불교에 대해서는 무지하여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로써 여행 이튿날, 실질적으로는 첫날 일정인 남평에서의 공식 일정은 끝이 났다. 호텔에 체크인 하기에는 좀 일러서 시간이 좀 남았지만 가서 여장부터 풀고 식사시까지 남는 시간에 잠시 남평을 둘러보았다. 식사 후에도 또 나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기차를 타고 들어와 쉬지 않고 움직인 탓에 모두들 많이 피곤해서 식사 후에는 실제로 다시 나간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출처 : 한국서원이야기
글쓴이 : 박성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