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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북 김천]?문장공 매계 조위(文莊公 梅溪 曺偉) 선생 묘역

장안봉(微山) 2012. 12. 16. 19:50

문장공 매계 조위(文莊公 梅溪 曺偉)

 

1454(단종 2)∼1503(연산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경수(敬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深)이고, 아버지는 울진현령 계문(繼門)이다. 어머니는 유문(柳汶)의 딸이다.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족숙 석문(錫文)이 불러 가숙에 머물러 독서하도록 하였다.

1472년(성종 3)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하고, 147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ㆍ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다. 성종 때 실시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에 첫 번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그 뒤 홍문관의 정자ㆍ저작ㆍ박사ㆍ수찬, 사헌부지평ㆍ시강원문학ㆍ홍문관교리ㆍ응교 등을 차례로 거친 뒤,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함양군수가 되었다.

이어 의정부검상ㆍ사헌부장령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도승지에 이르고, 호조참판ㆍ충청도관찰사ㆍ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순천으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죽었다.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양군수 때는 조부(租賦)를 균등하게 하기 위해 『함양지도지(咸陽地圖志)』를 만든 것으로 전하는데, 이는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일선지도지(一善地圖志)』를 만든 것과 같은 일이다. 또, 유향소(留鄕所)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향사례(鄕射禮)ㆍ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행하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박식하고 문장이 위려(偉麗)하여 문하에 많은 문사가 배출되었다. 유배 중에도 저술을 계속, 『매계총화』를 정리하다가 죽었다. 작품으로 「조계문묘비(曺繼門墓碑)」가 있고, 저서로 『매계집』이 있다. 금산의 경렴사(景濂祠)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문장공 매계 조위선생 묘역 전경-제일 앞쪽이 매계공의 6대손 조세호(曺世虎)묘이고 그뒤가 배위 평산신씨묘, 매계선생묘, 선친 조계문(曺繼門) 묘이다,

 배위 평산신씨 묘, 매계선생 묘, 선친 조계문 묘소이다

 아버지 조계문 묘(우)와 어머니 문화류씨 묘(좌) 전경

 울진현령 조계문 묘소 전경- 사위가 점필제 김종직이다

 

 

 

 

 

 어머니 문화류씨(柳汶의 따님) 묘소 전경

 

 

 

 

 문장공 매계 조위선생 묘소 전경

 

 

 

 

 

 묘갈명은 대제학 홍귀달이 撰 하였다

 

 

 배위 평산신씨(현감 申允範의 따님)묘소 전경

 

 

   

 묘소에서 바라본 재실 전경

 재실 마암재

 

 

 

 

야수암(也須巖)

1503년 매계선생이 돌아가신 후 1504년(연산군10년) 갑자사화때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를 입었다.
매계는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4년)가 일어나기 전에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갔다가 돌아오던중 요동땅에서 유자광등이 일으킨 사화(史禍)에 대한 국내소식을 듣고 신변을 염려하여 함께 수행한 동생인 효강공(孝康公) 적암(適庵) 조신(曺伸)이 추원결(鄒元潔)이라는 유명한 점술가에게 점(占)을 쳤더니 아무 말없이 "千層浪裡飜身出, 也須岩下宿三宵(천층랑리번신출, 야수암하숙삼소)" 라는 글귀만 써주었는데 앞구절은 "깊은 물결속에서 몸을 뛰쳐 나온다"하는 뜻으로 화를 면할수도 있을 것 같으나 "모름지기 바위아래서 3일을 자리라" 하는 뒷구절의 뜻을 몰랐으나 뒷날 매계(梅溪) 조위(曺偉) 선생이 병으로 죽은 그 이듬해에 부관참시를 당해 시신을 무덤 밖에 3일동안 흐트려 놓은 일이 있은 뒤에서야 그 점괘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재실에서 바라본 묘소 전경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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