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공 이호성(靖武公 李好誠)
1397(태조 6)∼1467(세조 13).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성주(星州). 궁마(弓馬)에 뛰어났고, 병법에도 능통했다 한다. 1427년(세종 9) 무과에 급제, 사복시직장(司僕寺直長)ㆍ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1449년 거제현령으로서 읍(邑)을 옮기고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국방을 튼튼히 한 공으로 이듬 해 문종이 즉위하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공조참의ㆍ경주부윤 등을 거쳐 1453년(단종 1) 경상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457년(세조 3) 경상우도병마절도사ㆍ경상좌도병마절제사를 거치면서, 왜인의 변란 대비책으로 연변제읍(沿邊諸邑)의 제색군인(諸色軍人)을 동ㆍ서 양계(東西兩界)처럼 각기 본 읍에 소속해 수비하게 하고, 영진군(營鎭軍)은 내지(內地) 군사로 소속시켜 불의의 일에 임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야인(野人)의 침입도 대비하기 위해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대성(大城)을 쌓아 후환을 미리 제거하자고 건의하였다.
1459년 첨지중추원사 겸 경상좌도도절제사를 역임, 이듬 해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연로한 아버지의 봉양을 위해 사직을 요청하자, 세조가 가상히 여겨 경상우도처치사에 임명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며 기사(騎射)에 능하고 또한 이치(吏治)에 수완이 있었다 한다. 일찍이 최윤덕(崔潤德)의 북정(北征) 때 편비(褊裨)로 이름을 떨쳐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다. 그리고 20년 동안이나 북방을 수비해 산천의 형세를 환히 알아 공수(攻守)에 실수가 없었다 한다. 시호는 정무(靖武)이다.
묘역 전경
제일 윗쪽이 조부 이회 묘, 그 아래에 아버지 이영선 묘, 정무공 이호성 묘소로 이루어져 있다
정무공 이호성 묘
정무공의 아버지 이영선 묘
정무공의 조부 이회 묘
[김천 문화원 참조자료]
이호성은 성산이씨 김천 입향조인 이회의 손자이자 현령을 역임한 이영선(李寧善)의 아들이며 태종때 이조판서를 역임한 평절공(平節公) 한옹(韓雍)의 외손으로 1397년(태조6년) 양천동 하로(現양천3동)에서 태어나 1427년(세종9년) 무과에 급제한 이래 세종과 문종, 단종대에 사복시직장(司僕侍直長), 군기시부정(軍器侍副正)을 거쳐 거제현령,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공조참의, 경주부윤 등 문무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공(公)은 1433년 평안도절제사 최윤덕(崔潤德)장군의 휘하 부장(副將)으로 야인족 정벌에 종군한 이래 20년을 북방수비에 참여하며 백전불패의 신화를 남겨 “비장군(飛將軍)”이란 별호를 얻었고 개선연회에서 세종이 친필로 “무용청개(武勇淸介)”라는 휘호를 어필로 하사하기도 했다.
궁술(弓術)과 마술(馬術)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장군은 말을 달리다가 낮게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만나면 “대장부가 고개를 숙일 수 없다” 하며 말에서 뛰어올랐다 다시 말등에 앉는 신기한 재주로 명성을 날렸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左翼源從功臣)으로 책록되어 경상좌,우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절제사, 병조판서 겸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아버지가 병석에 들자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세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향리에서 가까운 경상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에 임명하였다.
지례현의 향반 여이명(呂以鳴)은 금릉지(金陵誌)에서 “하로에는 삼판서와 육좌랑이 일시에 배출되었는데 곧 노촌 이약동과 동대최선문, 판서 이호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적었다.
또 당대의 문장가 서거정(徐居正)은 공을 찬양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爲州推第一 고을 살이 함에는 제일로 추앙받고
制敵妙如神 적을 막는 묘책은 신과 같았네
文武在兼備 문무의 재능을 함께 갖추었고
公廉德有隣 공정하고 청렴한 덕은 이웃에 미치었네
憂分南去 나라걱정 없애고 남으로 가서
歡奉北堂新 기쁘게 봉양하니 북당이 새롭네
忠孝如君少 그대와 같은 충효 어디 흔하랴
榮光己聳民 그 영광 이미 뭇 사람 위에 솟았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중추부지사 이호성 졸기(卒記)에는 공의 죽음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데 “벼슬을 살면서 직분을 지키고 추호의 어긋남이 없었으며 재물을 멀리하고 두터운 의복을 입지 않았다. 병이 위독하자 부인이 소리내어 울자 크게 나무라며 내쳤다.”라고 적었다.
1467년(세조13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공에게 정무(靖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들 이거인(李居仁)도 무과에 급제해 여러 고을의 목사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다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해 관직을 버리고 고향 하로로 낙향했으며 증손인 이삼성(李三省)도 장원급제후 찰방과 지평, 현령을 역임하다 향리로 낙향해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등 의기있는 명문가의 가풍을 이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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